이승만과 임병직이 탄 배는 상해 항구에 들어섰다. 그러나 밀입국자인 이들의 상륙이 문제였다. 특히 당시 상해의 행정권과 사법권은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후 한국인에 대해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다.
3층 옥상에 태극기
영국 관헌에 의해 상륙 허가 수속이 진행되는 동안 두 사람은 선실에 숨어있어야 했다. 수속이 끝난 후 갑판에 올라간 두 사람은 배에 실은 재목을 하역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틈에 끼여 어깨에 재목을 하나씩 메고 겨우 상륙할 수 있었다. 항구에는 임시정부에서 사람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영국 조계 안에 있던 맹연관이라는 중급 여관에 들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이틀을 묵은 다음 안내원을 따라 프랑스 조계에 있던 임시정부 청사로 갔다. 프랑스는 일본과 정치-군사적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당시 상황을 임병직은 이렇게 회고했다. "임시정부 청사는 상상보다 제법 호화로웠으며 3층 건물의 옥상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대통령 이승만씨를 맞이한 임시정부는 활기를 띠었다. "
그러나 즉각 공적인 행사가 있은 것은 아니다. 이승만은 저간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임정 요인들과 개별 접촉을 하며 상황파악을 하는데 2~3주일을 보낸다.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해 처음 가진 공식 모임은 한해가 저물어가던 12월28일 상해교민단이 베푼 환영회다. 여기에는 많은 임정관계자들이 참석해 대통령으로서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책을 내놓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입장에서 딱히 내놓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내가 이 곳에 온 것은 금전이나 대정략을 갖고 온 것이 아니라 재미동포가 이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께 감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와서 본 즉 내외 각처 동포들의 학살당함과 사는 모양의 비참함이 자못 참담합니다"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많은 이들은 이승만의 이같은 원론적인 얘기에 크게 실망했다. 뭔가를 기대했는데 별로 내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월1일 임시정부는 신년축하식을 가졌다. 그리고 5일 이승만이 상해에 온 후 첫 국무회의가 열렸다. 회의 첫날부터 이동휘는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미 마무리된 이 문제를 이동휘가 새삼 제기한 것은 사회주의 계열을 대표한 그가 임정의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승만은 위임통치는 3.1운동 이전의 일이고 독립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맞섰다.
이니셔티브 장악을 위한 이동휘의 행동은 제2차 국무회의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이승만에게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 때 행정의 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했다.
이동녕 총리사직
그러나 이승만은 대미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동휘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이동휘는 1월14일 국무총리를 사직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월26일에는 김규식 학무총장, 노백린 군무총장, 안창호 노동국총판 등이 잇따라 사표를 던졌다.
이승만은 이동녕 내무총장을 총리대리로 임명하고 2월4일 이동휘를 면직처리했다. 이에 여론은 악화되었다. 물론 문제를 일으킨 이동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것을 원만하게 처리하지 못한 이승만에 대해서도 비판적 의견이 늘어간 것이다.
임정은 파탄을 향해 달려갔다. 애당초 워낙 배경이 다른 단체나 집단들이 모인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지지세력도 없이 미국에서 건너온 이승만이 사태를 평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2월28일 이승만의 요구로 의정원 제8회 본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이승만은 교서를 발표하고 정부의 행정쇄신과 경비절약, 예산제도의 확립, 외교강화등 당면과제에 관해 언급하고 민의란 일정한 절차를 밟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파나 개인에 따라 좌우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양한 파벌들이 수시로 각자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공적 의견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의정원 개원은 외교노선과 무장노선의 대립을 한층 격화시켰다. 여기에는 러시아와의 관계도 포함돼 있었다. 주로 러시아 일대에 근거지를 둔 이승만 반대파는 한중노(한-중-러) 3국과 협력해 독립전쟁을 치를 것을 주장하고 상해에는 외교기관만 두고 군사관계 기관은 노령이나 만주로 옮길 것을 내세웠다.
그동안 외교노선도 성과 면에서는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이승만으로서는 이들을 제압하거나 설득할 만한 특별한 명분이 없었다. 상해임정은 계속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사분오열돼 갔다.
4월20일 박용만, 신채호 등 무장투쟁파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하고 위임통치 청원문제로 이승만을 규탄한 끝에 상해임정도 부인키로 했다. 그리고 27일 상해의정원을 해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새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표회 소집을 제안했다. 상해에서는 국민대표회 소집에 찬동해 김규식이 학무총장직을 사퇴했고 교통총장 남형우도 사퇴했다.
이는 급기야 상해임정을 지킬 것인가 해체할 것인가 하는 정쟁으로 극단화됐다. 소위 임정 옹호파와 개조파의 대립이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임정 옹호파에는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노백린 등이 남았다.
안창호는 5월11일 노동국총판직을 사퇴하고 임정에서 손을 뗐다.
한편 임정 개조를 주장한 세력은 23년 1월3일 상해에서 국내외 61개단체가 참석해 국민대표회를 열지만 좌익과 우익, 좌익내 고려공산당과 전러공산당 등이 갈등을 빚다가 안창호계는 탈퇴하고 급진파만으로 조선공화국을 선포한다. (이 과정은 여러 모로 해방정국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앞으로 보다 많은 체계적 연구가 요구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
이승만은 더 이상 상해에 있을 필요를 못느낀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내분만 일삼는 그곳에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어봤자 독립운동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마침 미국 국무장관 찰스 에반스 휴즈가 태평양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열강들을 워싱턴에 모아 군축회의를 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승만은 이 회의를 한국의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기회로 삼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한다. 이 회의는 21년 11월12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중국, 포르투갈, 일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을 독립시켜 동북아시아의 완충국가로 역할을 맡길 경우 극동의 항구적 평화는 보장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열강들을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이승만이 국제회의에 참석해 한국문제를 호소하는 방식을 보면 단순히 한국의 불운한 처지를 호소하는 감성적 차원이 아니라 열강들도 납득할만한 그럴 듯한 이론적 근거를 갖고서 접근한다는 것이 큰 특징이었다. 여기에는 국제법 전문가로서의 식견과 그 특유의 전략적 사고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전략적 사고 특색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와도 이승만을 구별시키는 가장 큰 특징은 이승만이 언제나 일정한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국의 독립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러시아의 남진견제를 위해 중국, 한국, 일본, 미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논리는 그가 청년시절부터 가져온 국제관계에 대한 근본인식이었다.
다만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뒤부터 이런 구도가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는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러시아, 일본, 중국 어느 한 나라도 극동에서 일방적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서로 견제를 함으로써 지속적 평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논리는 특히 미국을 상대로 한 논리였다. 이 점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으면 이승만의 외교노선을 제대로 평가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승만은 5월20일 컬럼비아호에 올라 상해를 출발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우선 마닐라로 향했다. 5개월간의 상해체험은 그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독립운동에도 현실적인 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이었다. 마닐라에 도착한 이승만은 10일 동안 체류하며 필리핀의 정치-사회상태를 살피고 "독립은 될수록 빨리 쟁취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고 임병직은 회고했다.
여기서 다시 그는 미국 기선 그래니트 스테이트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가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6월29일이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