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1912년 옥중에서 같이 고생한 박용만 등의 초청으로 하와이를 방문해 그들의 추대로 호놀룰루에 있는 한국인 학교 교장에 취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대립하게 돼 1916년 독자적으로 학교를 설립했다.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흔히 지적해 온 하와이에서의 분열 행태들 중의 하나다. 교민사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왔으면서도 교민들과 대립해 독선적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런 구절은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글에는 어디에나 실려 있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오직 이승만에게만 잘못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승만이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갖게 된 갈등구조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 다룬 바 있다. 그는 1913년 감리교가 운영하는 한국인 학교장에 취임했고 1년후 윌리엄 프라이가 와드맨의 후임으로 하와이 지구 감독으로 오면서 갈등을 빚게 된 것이다. 갈등의 내용은 프라이가 인종혼합 교육을 내세운데 반해 "나라를 잃은 한국인들은 민족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에 혼합교육을 할 수 없다"며 이승만이 맞선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점은 이승만의 리더십 스타일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이승만은 그 후에도 자신의 원칙이 옳다고 생각되면 어떤 타협도 하지 않는 행동방식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한인사회는 감리교측을 지지하는 측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측으로 양분되는 사태가 생겼다. 갈등의 원인 제공자가 이승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내세운 주장의 내용을 검토하지 않고 갈등 자체에만 초점을 맞춰 그를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객관성을 잃은 태도다. 갈등의 핵심에는 인종혼합교육이냐 민족교육이냐 의 문제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후 이승만이 학교를 설립한 후 실시한 민족주의적 교육내용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타협않는 리더십
오히려 우리가 하와이에서의 분열문제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이승만과 박용만의 대립이다. 이같은 대립은 어떤 의미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양측이 내놓는 자료가 입장이나 시각면에서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들은 한편으로는 이승만 재임시에 나온 관변자료나 전기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김원용씨의 재미한인 50년사 등과 같은 비판적 문헌들이다. 애당초 서로 다른 관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동일한 사안을 보는 시각도 너무나 판이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가면서 양측의 자료들을 비교-분석하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이승만에 대한 실체적인 인식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를 들어 김원용씨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승만은 문필을 가지고는 민주주의를 구가하면서 뒤에서는 실정이나 여론을 무시하고 입으로 도덕이나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 행동면에서는 폭력단의 보스로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동포들을 억눌렀다. 또 그는 민족의 단결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파벌을 조장하는 선봉노릇을 하고 있다. " 이승만을 비판하는 계열의 전형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입장의 경우 "이승만이 이런 수준이라면 일개 모리배에 불과한데 과연 그런 인물이 어떻게 해서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일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제대로 답할 수 없다. 그것은 과장된 비난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대통령 재임시 나온 자료들도 비판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미화-과장된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박용만의 대립은 독립투쟁 방법론을 둘러싼 대단히 근본적인 대립이다. 이승만이 자금을 유용했느니 독선적이었느니, 하는 다소 인신공격적이고 저급한 수준의 논란이 아니라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원론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이승만의 외교노선과 박용만의 무장투쟁 노선이 안창호의 교육에 의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장 바람직했을 것이다. 어느 하나 독립을 이루는데 있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 셋은 서로를 불신하고 상대방의 노선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세가지 노선 대립
이승만은 박용만의 노선에 대해 "현실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사탕밭에서 교민들이 힘들여 번 돈을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허비하고 있다"고 보았고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대해서는 "결국은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용만은 다른 노선들을 강하게 비판하지는 않았고 다만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투쟁에 의한 것임을 고집했다. 그가 이승만을 초청해 학교운영을 맡기려 했다는 것도 그가 다른 방법의 효용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다.
안창호는 두 노선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박용만에 대해서는 "무식한 동포들은 돈도 바치고 시간도 허비하여 속는 이가 많은데 아무리 무식하여 판단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전쟁이 어떤 것임을 알고 오늘에 그런 문제를 제출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대해서도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승인을 요구하여 교섭한다 하는데 가만히 앉았다가 글 몇줄로서 독립을 찾겠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짓"이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들 세 노선은 독립운동에 있어 3대 필수요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승만이 재임하는 동안 무장투쟁노선이나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이 은연중에 배척당한 것이나, 최근 학계의 분위기처럼 맹목적으로 무장투쟁노선만을 유일한 독립운동으로 보고 이승만과 안창호의 노선을 배척하는 것 모두 역사에 대한 일면적인 인식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이들 세 노선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지도자가 당시에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역사는 엄연한 현실이다.
1913년 박용만이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할 때까지만 해도 둘 사이는 의형제처럼 좋았다. 그러나 1914년 박용만이 자신의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해 무력투쟁노선을 구체화하고 이승만은 이에 반대해 학교설립을 추진하게 되면서 둘 사이는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한다.
둘 사이가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은 1915년이다. 1914년 말에 완공된 국민회관 건축비의 유용이 문제가 된 것이다. 국민회 일부 간부들이 건축비의 일부를 유용한 것이다.
이에 국민회관 건립을 곱지 않게 보았던 이승만이 공개적인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다. 그는 성명서를 통해 "쓰라는 것은 쓰지 않고 쓰지 말라는 것을 쓴 것이 많았고 자금사용처가 불분명한데도 이를 타협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국민회 집행부를 공박했다. 당시 회장은 박용만계의 김종학이었다. 이승만은 집행부를 공격하는 한편, 국민회에 보낼 돈을 자신에게 달라고 교포들에게 요청했다. 이때까지 이승만은 국민회에 직접 간여하고 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조직보다는 자신의 명망을 활용하는 이승만의 정치스타일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국민회는 집행부를 지지하는 측과 비판하는 측으로 양분됐다. 이에 김종학 회장은 5월1일 특별대의원회를 소집했다. 여러 날에 걸친 공방끝에 76개 지방회중 31개 지방회 대의원만이 참석한 가운데 김종학을 파면하고 이승만계의 정인수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대의원회는 끝났다. 그리고 정인수는 5월14일 공금횡령혐의로 김종학을 고소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3개월간의 재판 끝에 무죄판결을 받고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김종학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자살을 기도했는데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그때 김종학이 쓴 유서는 김원용의 재미한인 50년사에 그대로 인용돼 있다. 그 일부를 보자.
국민회 완전장악
"내가 일찍이 나라를 망치던 역적을 보았고 또 다시 우리 사회를 망치는 이승만을 보면서도 속수무책하므로 분함을 참지 못하여 세상을 버린다. " 당시 두 계열 간의 분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과 박용만은 더이상 화합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노선을 추구한다.
이승만의 리더십 유형과 관련해 이 불행한 사건은 많은 시사를 해주는 것 같다. 그는 아래로 부터의 정치를 몸에 익힐 기회가 없었다. 조직생활에도 가담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자신의 학식을 바탕으로 갈 길을 정하여 나머지는 그에 필요하게 조직하고 동원하는 것이 이승만 특유의 리더십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여론을 중시하기 보다는 자신의 통찰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것도 그의 이런 리더십 유형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유형은 통상 원만한 타협보다는 자신의 노선을 집요하게 관철시키는 스타일이므로 지지자들에게는 열띤 성원을 받지만 반대자나 정적들에게는 격렬한 비판을 받는다.
이승만은 전형적으로 이런 유형의 지도자에 속했다. 하여튼 이때부터 이승만은 국민회를 장악하고 자신이 구상했던 것 중 하나인 민족교육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