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9월 어느날 워싱턴 DC 코네티컷가의 한 카페테리아.  펜실베이니아주 바크넬 대학 수사학 교수로 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연방정부 식량관리계획처 책임자로 동원돼 일하고 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자신이 평소 알고 지내던 에드워드 장킨 목사의 소개로 이승만이라는 한국인 노인을 소개받았다. 장킨은 부모가 선교사로 일했던 한국출신으로 이승만을 돕고 있었다.


올리버도 이승만의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전 해에 나온 "일본내막기"가 주변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소개가 끝나자 마자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4천년 한국역사에 관해 설명하면서 한국은 금속활자와 나침반도 유럽보다 먼저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독자적 문자 한글을 갖고 있는 문화민족이며 러일전쟁 뒤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다는 것도 상세히 이야기했다. 특히 현재 일본이 한국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통치하고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했다.



"억제된 위엄 매력"



이를 다 듣고난 올리버가 "왜 그런 이야기를 책으로 내지 않습니까. 그런 사정을 미국사람들이 안다면 도와줄텐데요"라고 묻자 이승만은 "나는 작가가 아닙니다.  그 일을 당신이 해주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렇게 해서 올리버는 적극적인 친한파 인사가 돼 줄곧 이승만을 돕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이 미국내 친구들을 만들어가는 노하우를 엿볼 수 있다.  치밀한 준비와 인물선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근해 자기사람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승만 개인이 가진 사람을 끄는 매력이 큰 무기가 됐다.


당시 이승만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을 올리버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잘 선택되고 흠잡을 수 없는 단어들을 구사하며 그는 힘들이지 않고 똑똑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그 낱말들도 그의 온몸에서 풍기는 표현에는 비할 수 없었다. 그의 용모는 표정이 풍부하고 눈은 빛났으며 입과 눈 가장자리의 선은 훌륭한 유머와 열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내가 받은 가장 큰 인상은 억제된 위엄이었다. "


그후 올리버는 또 이승만의 미국인 친구였던 스태거스 변호사, 윌리엄스 기자, 아이다호주 포카텔로시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프레스톤 M 굿펠로우 대령 등을 알게 된다.


올리버는 한국에 관해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은 1943년 3월7일 워싱턴 포스트지에 실린 기사 "일본의 숙적 한국"이었다. 동시에 정한경과 합작으로 '아시아 및 아메리카'지 3월호에 "돌보지 않은 맹방 한국" , 월드 어페어스 지 6월호에 "미국이 잊은 나라 한국" 등의 논문을 잇달아 기고했고, 급기야 1944년 9월 퍼블릭 어페어스 출판사에서 "잊혀진 나라 한국"이라는 책을 냈다.


이같은 올리버의 사례는 이승만이 미국인 친구들을 어떻게 사귀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어떻게 이용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들은 한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데도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이승만의 미국인 친구들.  이들의 직업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이승만이 어떤 차원에서 그들을 사귀고 우정을 나누었는지를 알 수 있다.  스태거스 변호사, 윌리엄스 기자, 굿펠로우 신문사 사장 겸 군 정보통, 그리고 뒤늦게 가세한 올리버 수사학 교수 등.  하나 같이 여론을 중시하는 미국사회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론 주도층 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이들을 매개로 해서 언론과 의회의 지지를 얻어내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국무부의 정책에 압력을 가했다.  그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이승만을 위해 일하는 로비스트임과 동시에 홍보 담당자들이었던 것이다.



미 국무부에 압력



이야기를 대미 외교로 돌려보자. 당시 이승만이 벌인 외교의 초점은 임정을 승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임정 승인은 곧 한국 독립군에 대한 원조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같은 요구는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는 시점까지도 줄기차게 반복됐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 이유는 한결 같았다. "이승만 당신이 한국민을 대변한다는 증거를 미국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고 미국은 여전히 한국보다는 적국 일본을 전략적으로 더 중시하고 있었다.  재미 한인사회의 분열은 말 그대로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재미유학생으로 이승만과 가까웠던 한표욱 전 주영대사는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펄 벅 여사가 동양 젊은이들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한 친구와 함께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펄 벅 여사에게 국무부에서는 한국인들이 분열돼 있어서 지원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라고 말했더니 펄 벅 여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유태민족의 경우 내부집단이 몇개나 되는줄 아는가 라고 반문하더군요.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최소한 2백개가 넘는 그룹이 있다. 재미 한인사회가 분열됐다고 하는데 그래 봤자 서너개 단체 밖에 더 되느냐며 애당초 국무부에서 한국을 지원할 의사가 없는 것이지 분열 운운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


당시 이승만의 국무부 접촉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한가지 사례를 보자. 1942년 1월2일 이승만은 미국인 친구들과 함께 코델 헐 국무장관의 특별 보좌관이던 앨저 히스와 극동문제 담당국장 스탠리 혼베크를 만나러 갔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나치스 점령 하의 유럽으로 부터 도망나온 여러 망명정부들처럼 한국의 임시정부도 승인해주고 원조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히스 보좌관은 "당신이 한국민 전체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곤란하다"고 답했다.


이에 이승만은 그렇다면 "종전 후 미국 관리들이 실시할 선거에서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조건으로 대한민국을 승인해달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히스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망설이자 이승만은 "소련은 부동항을 얻기 위해 반세기 이상 한국의 항구들을 노려왔다. 한국 독립을 미국이 미리 승인함으로써 이러한 움직임에 선수를 치지 않으면 일본 패망후 소련이 반드시 끼여들어 한국을 강점하게 될 것이다"며 임정 승인을 재차 촉구했다.  그러나 히스는 "미국의 중요 전시 맹방 중의 하나인 소련을 공격하는 것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고 받아쳤다.  결국 이승만과 그의 친구들은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때 이승만은 히스가 국무부 내 대표적인 친소련 인사라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대패한 것을 기점으로 전세는 역전돼 일본은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마음은 바빠졌다. 특별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국무부를 상대로 한 교섭은 꾸준히 계속됐다.  12월7일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을 훈련시켜 일본을 격멸시키는데 미국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는 그후 미국 전략정보국(oss)에 한국인 청년들이 참가하게 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대통령 되는데 큰 힘



이승만은 한국에 동정적인 의원들을 통해서도 국무부에 대한 압박을 계속했다.  그러나 국무부 관리들은 이승만을 그저 귀찮고 고집스런 노인네 정도로 간주했다.  그리고 국무부 고위관리들은 직접적 실익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한국의 임정을 승인하거나 원조를 했다가는 동경에 있는 미국 외교관들의 안전한 귀국이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소련에 대한 유연한 입장을 정책기조로 했던 국무부가 이승만에 대해 강경했던 반면 국방부는 그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실제적 성과도 있었다. 1943년 3월30일 이승만은 스팀슨 국방장관에게 하와이에 살고 있는 한국인 동포들과 일본인들을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서한을 보냈고 4월6일 스팀슨으로부터 한국인을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후 한국인은 카메라 소지도 허용되었다. 비록 보잘 것 없긴 하지만 이승만 외교가 미국에서 거둔 최초의 성과였던 셈이다. 


일본내막기 출간이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미군부의 호감을 사게 되고 그 결과 형성된 미국방부와의 친밀한 관계는 단순히 백악관과 국무부를 중심으로 한 외교활동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뿐 아니라 그후 이승만이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는데도 큰 힘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