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명 교수(한림대 정치학)는 저서 한국현대정치사 (을유문화사간)에서 "1945년 연말과 이듬해 1월 초는 해방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구가 정국을 주도했던 짧은 시기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반탁운동 때문이었다.



반탁성명 즉각 발표



1945년12월28일 미-영-소 3국 외상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 워싱턴발 AP통신을 통해 국내에 전해지자 이승만은 즉각 그날 저녁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신탁통치에 대하여 미국무성 극동사무국장 빈센트씨가 누차 사한과 공식선언으로 표시한 바 있으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과가 될 줄 예측하고 이미 준비한 방책이 있어 그 방책대로 집행할 결심이니 모든 동포는 5개년 단축시기라는 감언에 견유치 말고 일시에 일어나서 예정한 대로 준행하기를 바라며 따라서 우리 전국이 결심을 표명할 시는 영 미 중 각국은 절대로 동정할 줄로 믿는다. 


이승만은 이미 귀국한지 4일만인 10월20일 빈센트가 발표한 한국신탁통치론에 대하여 "경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며 "이 제안이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있어서 한가지 중대한 과오가 될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반탁투쟁 초창기의 주도권은 김구에게 있었다. 김구를 비롯한 중경 임정세력은 반탁투쟁을 중경 임정 추대운동으로 연결시키려 했다. 이와 관련해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한국사)는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탁투쟁은 1945년 12월 말이건 1947년 초이건 간에 어느 경우도 다름아닌 우익의 정부수립 방안이었던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이었다는 점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지적이다.


그렇다면 이 무렵 이승만은 어떤 활동을 보였는가. 그가 1946년 2월23일 미국의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나는 이제 침실밖으로 나올 수 있을 만큼 원기를 회복하였음을 알릴 수 있어 기쁩니다. 나는 두 달 반 이상을 침실에 갇혀 있었고 그동안은 편지를 쓰지 못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역산을 해보면 대략 12월 초부터 이승만은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이승만은 이 기간 동안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대외활동을 보인 것이 없다. 다만 같은 편지에 "겨우 최근에 와서 우리는 조직을 끝내는데 성공하였고"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독촉 지방조직을 비롯한 자신의 조직을 강화하는데 몰두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승만이 반탁투쟁 초창기부터 김구와 행동을 함께 했던 것처럼 설명해 온 그동안의 학설들은 일단 피상적 접근에 머무른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반탁에는 두 사람이 입장을 같이 하면서도 전개 방식이나 미군정과의 관계 설정 등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세력은 반탁을 중경임정 추대운동으로 연결시키려 했다. 그 배경에는 이승만에 대한 김구의 견제의식도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 김구에 경고



중경임시정부측은 28일 탁치안이 발표되자 즉각 긴급 국무위원회를 열고 주요 정당 사회단체 언론기관 등의 대표자들을 초청해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를 설치했다. 다음날 시내에는 반탁을 주장하는 각종 삐라들이 난무하고 각종 신문들은 반탁 관련 기사들로 가득찼다.


그리고 29일 우익의 신탁배격 대표자대회에서는 국민운동의 지침으로 첫째 연합국에 임시정부 즉시 승인 요구, 둘째 신탁통치 절대 배격, 셋째 전국 군정청 총사직 및 일체 정당 즉시 해체등을 제시하면서 신탁통치 배격운동에 협력치 않는 자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한다 고 발표했다. 서중석 교수는 여기서 임정승인이 제1차 항목으로 강조돼 있고 공산당, 인민당 등을 겨냥한 일체 정당 즉시 해체 부분을 들어 임정세력이 정권탈취 를 기도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이런 조짐은 있었다. 반탁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31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가 주관하고 수 만명의 인파가 모인 반탁시위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우리의 정부로서 세계에 선포하는 동시에 세계 각국은 우리 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함을 요구한다"고 재차 발표했다.


그리고 중경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는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당시 거의 유일한 무장조직이었던 경찰 기구의 접수 시도는 미군정에 쿠데타 처럼 비쳤다. 이어 1946년 1월1일 하지가 김구에게 강력경고를 하고 김구는 그날 저녁 방송을 통해 파업 중지를 요청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1차 반탁운동은 한풀 꺾이고 만다.


그런데 30일 새벽 6시경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가 원서동 자택에서 반탁을 지지하는 열혈청년 한현우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최근까지 학계의 연구성과를 감안한다면 송진우가 찬탁입장은 아니었다. 물론 미군정 하에서 사실상 여당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 한민당이지만 반탁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그로서는 임정세력의 정권인수 기도를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것 으로 보았을 개연성이 높다. 이 점은 뒤에 설명하겠지만 이승만이 당시 취했던 입장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왜 임정봉대론까지 내세웠던 송진우가 임정세력과 갈등을 빚게 됐을까. 12월 중순 국일관에서는 술자리를 겸한 임정요인 환영회가 한민당 사람들에 의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말하자 장덕수가 반발하며 "그렇다면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받아쳤다. 이에 신익희가 "어디 설산(장덕수의 호)뿐인가"라고 맞받았다.


이를 보고 있던 송진우는 "여보 해공(신익희의 호), 표현이 좀 안됐는지 모르지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시정부를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거요"라고 말하면서 "중국에서 궁할 때 뭣을 해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어"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 일화는 한민당과 임정 사이에 친일파 문제를 둘러싸고 어느 정도까지 감정대립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암살되기 전날 밤에도 우익 관련 인사들의 회의에 참석해 송진우는 반탁에는 찬성하지만 미군정과의 대립을 야기하는 임정 즉각 승인론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가장 먼저 반탁성명을 발표한 이승만은 그후 정세를 관망하다가 임정세력이 반탁을 임정 즉각 승인으로 몰아가려하자 견제의 필요성을 느껴 31일 돈암장 정례 기자회견을 통해 "금번 시위운동하는 것은 오직 독립완성에 있을 뿐이니 신탁이나 다른 통치라는 명목으로 국권에 손해되는 것은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는 것이다"고 반탁의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우리 국민이) 미국정부에 대하여 결코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니 이는 우리가 군력을 두려워하거나 또 친미주의를 위함이 아니다. 다만 미국 군정부가 우리를 해방한 은인이요 군정부 당국은 절대 독립을 찬성하는 고로 신탁 문제 발생 이후 자기 정부에 대하여 반박과 공격의 공문을 보낸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독립의 친우를 모르고 원수로 대우하면 이는 도리어 독립을 저해하는 것이다"라며 반탁이 반미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는 사실상 김구에 대한 견제에 다름 아니다.



좌익세력 찬탁 선회



그후 소련의 사주를 받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은 1946년 1월2일 느닷없이 찬탁으로 입장을 바꿔 국민들의 지지를 대거 상실하는 자충수를 뒀다.


1월을 지나며 반탁운동이 한풀 꺾이자 각 정파들은 다시 파워게임에 들어갔다. 2월1일 중경임정 법통을 계승하여 의회기능을 자임한 비상국민회의가 박헌영을 비롯한 극좌파들이 배제된 가운데 1백67명의 대표가 참석한 상태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과도정권 수립에 있어 최고정무위원을 설치하되 인원 선정은 이승만과 김구에게 일임키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미군정은 남조선 민주의원이라는 기구를 창설한다. 이렇게 해서 우파인사들이 중심이 된 민주의원이 2월14일 발족되고 25일 이승만은 의장에 선임됐으며 부의장에는 김규식, 총리에는 김구가 선임되었다.


중경 임정세력의 법통을 계승하는 최고정무위원이 무력화되고 남조선 민주의원이 한국인들의 중대한 권력기관이 됨으로써 이승만은 반탁운동과정에서 김구에게 상실했던 정국 주도권을 되찾는 계기를 확보하게 된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