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부침 거듭


1945년 10월16일 환국해서 12월 반탁운동이 본격화되기 까지의 기간 동안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부침을 거듭했다. 그같은 부침은 이승만이 가진 정치적 강점과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때문이기도 하다.


환국 직후 좌우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이승만은 이같은 열기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 결성으로 이어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덮어놓고 뭉치자고 한 이승만 자신의 정치노선을 독촉으로 구체화시킨 것이다. 독촉은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단점을 극소화시킨 절묘한 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환국 당시 국내에 독자적 조직이나 세력이 없던 그에게 독촉은 그같은 정치적 자원을 마련해준 중대한 계기였다는 점에서 앞으로 학계의 보다 엄밀한 연구를 요하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환국 7일만인 23일 자신이 묵고 있던 조선호텔로 전국의 65개 정당 단체 대표 약 2백여명을 모이도록 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지금까지는 소리가 너무 많은 탓으로 세계에서 조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소리를 하나로 하여 세계에 표명하자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로 만듭시다 타국 사람이 조선을 알려고 하면 곧 가서 물어 볼만한 책임있는 기관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연설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학병동맹에서는 "자주독립이나 대동단결은 조선민족 전체가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달성되지 않는 원인은 어디 있습니까. 민족반역자와 매국노적 행위를 하는 놈들 때문입니다"라며 민족반역자의 처단문제를 들고 나왔다. 곧이어 조선공산당에서도 대동단결의 선결조건은 임정을 계승할 것인지 인공을 강화할 것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며 임정에 비중을 둔 이승만의 입장에 반기를 들었다. 반면 한민당은 친일파 처단 및 임정계승 문제와 관련해 좌익과 전혀 다른 의견을 개진했다.


이날 모임은 격론 끝에 일단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정당통일운동협의체를 발족시켰고 국민당 대표로 참석한 안재홍의 제안으로 이승만은 독촉의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리고 24일 이승만은 송진우가 장덕수에게 부탁해 마련한 돈암동의 청기와집 돈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1차회의 날짜를 잡지 못한 채 좌우정당들 간의 논쟁이 계속됐다. 그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좌익을 대표하는 박헌영의 설득여부였다. 여운형의 건준을 제압하고 인공 선포로 기세를 올리던 박헌영은 이승만의 등장과 함께 일단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으로 인해 점차 우익의 목소리가 높아져가는 것을 어떤 식으로건 견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숙제도 안고 있었다.


박헌영은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에서는 아직도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세력이 남아있다. 친일파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친일파를 근절시킨 다음 옥석을 완전하게 가려놓고 순전한 애국자 진보적 민주주의의 요소만을 한데 뭉쳐 통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이승만의 무조건 통합론에 맞서 조건부 통합론을 내세웠다. 미국 시절부터 이미 철저한 반소-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이지만 통합에 대한 국민적 여망 때문에 일단은 박헌영 설득에 나선다. 흔히 극우 로 분류되는 이승만이 극좌 박헌영에 대해 이처럼 비교적 유화적 태도를 보인 근본 이유는 좌파이념에 대한 공감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분위기가 상당히 좌파적이었던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으로서는 독촉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도 박헌영의 참가를 끌어내야만 했다.


10월31일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장장 4시간 동안 돈암장에서 이승만은 박헌영과 단독회담을 가졌다. 이승만은 독촉 의 존재를 삼천만의 총의를 모은 통일된 기관으로서 시인하여 주는 동시에 여기에 힘을 합쳐줄 수 없겠느냐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선숙청-후통합을 주장하며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승만은 이에 "성스러운 건국사업에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지 않느냐"며 재차 설득을 했으나 완전한 의견일치는 보지 못했다. 돈암장 회담은 그러나 논쟁의 불씨를 남겨둔 채 외형상의 의견일치를 본 것으로 발표됐다.



김구 만나 우의 확인



우여곡절 끝에 11월2일 오후 2시 천도교 대강당에서 독촉 1차회의가 열렸다. 정당 단체별로 2명씩 수백명의 대표들과 이 회의를 참관하려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강당을 가득 채웠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남북분단의 책임이 미-소 등 강대국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는 특히 10월20일 미국무성 극동국장 빈센트가 발표한 조선은 자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므로 공동신탁제를 실시하겠다는 내용이 23일 국내신문에 보도된 것과 관련해 "조선통치에 대하여 공동신탁제가 제안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참으로 경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경의와 신실한 우존의 정신으로서 이 제안이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있어서 한가지 중대한 과오가 될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도 박헌영은 분단의 책임을 강대국으로 돌리는 것은 조선을 해방시켜준 나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소련을 두둔하고 다시 친일파 숙청을 요구했다.


공산당에 대한 유화적 제스처는 이승만이 12월19일 방송을 통해 명확한 반공노선을 표명하기까지 계속된다. 그만큼 이승만이 독촉의 명분 확보를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오히려 우파진영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우익지 대동신문은 12월8일자에서 "(좌파와 연합을 시도했던) 그 결과가 이 박사의 한참을 나가던 인기 고무풍선이 순식간에 급강하, 저공비행을 하게 된 것이다"라며 이승만의 좌파회유 노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이미 11월16일 독촉에서 공식탈퇴를 선언하고 이승만과 공식결별했다. 이처럼 좌익과의 연합이 지지부진함을 면치 못하고 있던 11월23일 오후 4시5분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요인 5명과 함께 일진 15명이 미 군정이 보내준 C47 수송기로 김포공항에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개인자격이라는 단서를 달고 귀국했다. 그날 저녁 이승만은 김구가 거처로 정한 죽첨장(뒤에 경교장으로 개칭)으로 찾아가 회포를 풀었고 다음날 아침 자신을 찾아온 김구를 군정청으로 데리고 가 하지장군에게 소개시켰다.


우리 현대사의 영원한 숙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 현재 한사람은 악의 상징처럼, 또 한사람은 선의 상징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은 현실정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설득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맹점을 갖고 있다. 


형(이승만) 아우(김구) 하던 두 사람은 개인적 우의를 확인했지만 곧바로 신경전에 들어간다. 김구는 24일 하지와 만난 후 군정청 회의실에서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말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니까"라고 답했다. 한마디로 무시하겠다는 의사인 것이다. 임정을 대표하는 김구로서는 당연한 대답이기도 했다.


김구는 25일에도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 오후 2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환담했으며 12월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봉영회에도 함께 참석해 우익진영의 쌍두마차임을 분명히 했다. 12월2일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장 홍진을 비롯한 22인의 임정요인 2진이 서울에 도착해 3일 오전 경교장에서 전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첫 국무회의 가 열렸다. 이 자리에 이승만도 주미외교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미대사 격이다.



임정세력 위축돼



이날 국무회의는 미군정 이외의 그 어떤 정부도 인정치 않겠다는 미군정의 방침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3일 오후 임정간부들은 군정청으로 하지 사령관과 아놀드 군정장관을 방문하고 임정의 지위에 대한 보장여부를 타진했으나 국제적 승인없이 합법적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부정적 답변만을 들었을 뿐이다. 귀국 후 한동안 기세를 올리던 임정세력은 이로 인해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인공측은 어차피 미 군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기는 인공이나, 임정이나 마찬가지인 마당에 임정이 특권을 내세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며 임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임정에서 공식적으로 주미대사의 자격 밖에 없는 이승만으로서는 미군정 당국의 임정 불승인이 오히려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독촉 결성의 의미도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임정과 불가근 불가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이승만이 새롭게 대표성을 인정받으려는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현실적인 분석이 될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