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일본 도쿄(동경)에서 맥아더의 전용기를 타고 1945년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임정요인이 아닌 개인자격이었다.
맥아더 전용기 이용
9월8일 미군은 남한에 진주해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적 통치기구는 미군정 뿐 임을 선포하고 기존의 모든 정치세력들의 대표성을 부인했다. 예를 들어 대표성을 부인당한 주요세력은 해외의 중경 임정과 국내의 조선인민공화국이었다. 이승만이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게 된 것도 미국의 그같은 점령정책 때문이었다.
반면 미군정 출범과 동시에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정치단체는 한국민주당이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으로 대변되는 우익 독립운동세력과는 구분되는 또 다른 우파인 한민당은 지주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한 인물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독자적인 세력화는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마땅한 국민적 지도자도 없었다. 김영명 교수(한림대 정치학)는 한국현대정치사 (을유문화사 간)에서 한민당의 당시 입지와 관련해 "임정과 미군정을 배경으로 좌파세력을 저지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한민당이란 언제 창당되었으며 어떤 성격의 정당이었나. 한국민주당은 원래 한국국민당과 조선민족당이 합당한 것이다.
한민당 발기 대회는 미군의 서울진주가 알려진 1945년 9월4일 협성 실업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송진우나 김성수는 한민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송진우는 임정 봉대론을 내세우며 정당 시기상조론이라는 조심스런 입장을 개진하고 있었고, 김성수는 "이제 광복이 되었으니 동아일보나 시급히 복간하고 보성전문을 대학으로 승격시켜 교육자로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 명분이 어떠하건 두 사람 모두 해방정국에서 주도권 장악을 위해 나설만한 입장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오히려 이 두 사람은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9월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회를 발족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이 준비회에는 한민당 인사들도 대거 참여해 장차 한민당과 송진우-김성수 세력이 연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준비회 면면을 보면 위원장 권동진, 부위원장 김성수, 허헌, 이인 등 이며 위원에는 송진우, 윤보선, 조병옥, 홍명희, 김약수, 백관수, 김도연, 김병로 등이 뽑혔다. 이렇게 해서 미군의 서울 진주 하루전인 9월7일 연합국 환영 국민대회 준비회를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개최했다.
미군은 서울 진주와 함께 미 군정청 이외의 그 어떤 정부도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 성명은 인공을 내세운 좌익이나 임정세력에게는 치명적이었으나 어차피 어느 주도세력에 기생할 수밖에 없었던 한민당으로서는 호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9월16일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공식 출범을 알렸다(여기서도 이승만은 김구, 이시영, 서재필 등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7인의 영수로 추대됐지만 귀국 후 그 추대를 수락하지 않았다).
한민당의 이같은 움직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김학준 단국대 이사장은 이를 "진용을 갖춘 한민당은 곧바로 미군정청에 접근해갔다"고 지적한다. 또 심지연 교수(경남대 정치학)는 한민당에 관한 방대한 연구서 한국민주당연구Ⅱ (창작과 비평사 간)에서 "정치활동에는 관심을 표명하지 않던 일부 우익 인사들과 일제 시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거나 떳떳지 못한 과거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미군 상륙을 계기로 정계 일선에 나선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한민당은 9월22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미군정청에 대해 명망과 식견을 갖춘 한국인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줄 것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결의사항을 채택하고 미군정청도 한국인 동조자의 필요성을 느껴 10월5일 11명으로 된 고문회의를 구성했다. 고문회의 멤버중 평양에 있는 조만식과 참가를 거부한 여운형을 제외한 나머지 9명이 모두 한민당 소속이었고 김성수는 이 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미군정 좌익 견제
이처럼 미군정청이 한민당, 흥사단 세력등 자신들을 적극 지지하며 따라 주는 한국인 집단을 확보한 다음 자연스럽게 취한 다음 행보는 좌익에 대한 견제였다. 서울 진주 이후에 원론적으로 미군정 이외에 다른 정부는 있을 수 없다는 발표만 해오던 미군정은 10월10일 아놀드 미군정 장관 담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인공을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군정과 한민당은 더욱 유착되고 인공은 미군정과 한민당 양측과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0월16일 이승만 환국 당시 정국 전개는 이같은 양상이었다. 17일 오전10시 조선총독부가 있던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이승만이 참석해 환국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게 된다. 신문들은 호외를 돌렸고 라디오는 그날 오후 7시30분 첫 방송이 나간 이후 1주일 동안 계속 반복됐다.
노 정객의 환국성명은 사실 특별하다 할 내용은 없었다.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혼자만 살려고 하지 말고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완전 독립을 찾자고 호소했다. 그의 성명 내용의 일부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 그러나 여러분 4천년의 우리 역사가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불민한 탓이었다. 그 중에도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 많았다. 그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여러분은 젊기 때문에 그 책임이 적다. 4천년의 역사가 이제 우리들의 손으로 다시 꽃피워야 하는 것이다. 그 좋은 기회가 우리 앞에 있다 . "
그러나 이 짧은 인용 속에는 자주독립 , 싸움 , 나이든 세대의 책임 등 향후 그가 보여줄 정치 행위들의 상당수를 설명해 줄 수 있는 키워드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성명 발표가 끝난 후 기자회견이 열렸다. 중경에 있는 임시정권이 국제적 승인 혹은 신임을 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승만은 승인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와 미주에 있는 만 여명의 우리 동포들은 그동안 국세까지 바쳐왔다. 대한민국의 주석 김구씨는 여러 동지들과 생명을 바치고 우리 독립을 위하여 영웅적 투쟁을 하여왔다. 모두들 믿고 추대하여도 넉넉한 우리의 참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 대답 속에는 임정의 대표자로서 김구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미주 동포 를 중국과 함께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또 이승만은 38선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우리나라가 이렇게 분할 점령된 전말에 대해서는 중경에 있는 우리 동포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의도적으로 가볍게 넘기는 듯한 대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귀국한지 하루도 안된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대답이었는지도 모른다. 해방 직후 2개월간 전개된 국내의 정치상황과 관련해 인민의 의사에 의한 참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자는 여론과 운동이 진전되고 있는데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는 "나에게는 아무런 정견도 없다. 다만 국내의 여러분과 합동하여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 일을 할 수 있는 우리 국가를 하루 빨리 세워야겠다는 것 밖에 없다"고 답했다.
국내에 특정한 정치적 지반은 없이 항일 노투사라는 명망과 미국의 외형상의 지원 정도가 유일한 정치적 자산이었던 이승만으로서는 우선 정국을 관망할 필요가 있었고 특정 정파에 귀속되는 것 또한 자신에게 별로 도움될 것이 없었다.
좌우파 찾아와 요청
국내에 특정한 정치적 지반이 없다 는 사실은 국내의 여러 정파들이 탐을 내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이승만이 귀국했다는 사실을 접한 송진우, 장덕수, 조병옥, 김병로, 허정, 김도연, 서상일 등 한민당 간부들이 17일 정오 경 조선호텔로 찾아가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청했으나 이승만은 확답을 하지 않았다.
오후 2시경에는 여운형, 허헌, 이강국, 최용달 등 이승만을 인공 주석으로 추대했던 좌파 인사들이 이승만을 찾아와 8 15 이후의 국내 상황과 인공 수립 과정을 보고하면서 관련 자료들을 제출했고 정식으로 주석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서도 완곡하게 거부했다. 이승만의 환국이 공식화된 그날부터 국내의 모든 정당과 단체들은 그를 민족의 영웅 , 최고의 지도자 등으로 칭송하는 성명서-담화-전단등을 발표했고 신문마다 그의 담화내용을 다룬 기사들로 가득했다. 인공 중앙위원회가 이승만 환영위원회를 조직하고 발표한 환영성명은 당시 이승만환국을 보는 국내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 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3천만 민중의 경앙대망의 적이었던 만큼 전국은 환호에 넘치고 있다. 우리 해방운동에 있어서 박사의 위공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서의 추대는 조선인민의 총의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해방조선은 독립조선으로서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으로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