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가리켜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말한다. 일면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용어는 이승만 정치의 일부분을 지적하는데 불과하다. 해방정국 3년 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거의 모든 색깔의 정파들이 각축을 벌이고 미국이라는 외세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던 극도의 혼란기였다. 게다가 단순한 권력싸움이 아니라 건국 이라고 하는 엄청난 과제까지 감당해야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얘기한다면 이승만은 그같은 정치싸움에서 승리를 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까지 세웠고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이런 인물에게 과연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스트라는 평가가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보다 훨씬 큰 의미에서 그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이승만이 어떻게 해서 독립운동, 정치투쟁, 건국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지를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승만은 한 인물이 하나만 갖기에도 힘든 면모들을 한꺼번에 다 갖추고 있었던 인물이다. 우선 학문적 측면이다. 그는 비록 과거에서 낙방을 하기는 했지만 30세까지는 동양의 교양을 두루 익혔다.
한시-서예 높은수준
그가 남긴 한시집 체역집에는 그의 동양적 정신세계가 얼마나 깊었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국문학자 이병주 동국대 명예교수는 "1959년 노산 이은상 선생께서 역간한 우남시선을 읽은 적이 있는데 당시 생각으로 아무리 한자를 공부한 우남이지만 한갓 어른 대접을 위한 첨삭이 아닌가 의아했었다. 그러나 그의 하야를 둘러싼 거국적인 데모로 전국이 소용돌이 치던 1960년 여름, 경무대 비서 황규멱씨 댁 사랑에서 우연히 우남의 누렇게 퇴색된 구본 체역집을 보면서 그 소재를 다룬 다양성에 갈무린 높깊은 격률과 운법, 그리고 대우의 짜임과 그 함축과 상징이 기교를 떠난 솜씨이며 어느 시인에 못지 않은 시어와 결구 등이 자못 윗길이어서 깜짝 놀란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또 서울 종로의 보신각이나 경북 영주 부석사 편액에서 보듯 그의 서예는 이미 일정 수준을 넘었다. 이와 관련해 이 교수는 "우남의 서법은 자유분방한 즉흥의 필법인데 특히 지필을 가리지 않고 자재로 붓을 휘둘러 쓰되 좌우를 돌보지 않는 자긍이 두드러져 가히 일인자에 상응한다"고 평했다.
동시에 이승만은 30세부터 35세 사이에 미국의 명문대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를 따내며 서양학문 중에서도 가장 서양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지금도 우리가 미국 최고 명문대 하면 곧바로 하버드를 연상하게 된 것이 사실은 이승만이 하버드대를 졸업했다는 것이 일제하에서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준데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한표욱 전 주영대사는 "내가 어릴 적에 선친께서 우리나라에도 이승만이란 독립 운동가가 미국에서 제일 좋다는 하버드대를 졸업했으니 너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씀하셔서 나도 꼭 하버드대를 가야지 라고 자극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고 말했다.
조선 5백년의 전통문화가 허물어지고 서구화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온 한국의 20 세기에서 과연 동양과 서양의 학문 및 교양을 최고 수준에서 동시에 체화한 인물이 우리나라에 있었던가.
전통주의자와 서구주의자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해온 것이 우리의 20세기 지성사였다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동서양 학문의 겸비라는 이승만의 정신세계는 거의 유일한 경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이 제대로 인식돼야 이승만이 비록 서양인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복을 입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한국화 시킨 것, 손수 하와이에 교회를 세울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천절을 제정하고 단기를 사용하고 동시에 왜색에 물들었던 불교를 원래의 전통으로 복귀시키는 과감한 조치를 취한 것 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고집지나쳐 독선도
두번째는 인성적 측면이다. 그는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부친이 집안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외아들로 자랐다. 이 과정에서 그는 뭐든지 혼자해야 한다는 강한 자립심을 키웠다. 그것이 때로는 의지가 강한 모습으로, 때로는 고집스럽고 독선적인 모습으로 표출됐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에게는 학문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에 허황되거나 비합리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그가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초지일관 미국정부에 대해 1882년에 체결한 조미수호조약의 준수를 촉구하고 20년 넘게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한 것, 하지와의 갈등을 불사하면서 반공-반소의 일관된 입장을 고수한 것, 철저한 반일자세를 고수한 것 등은 그의 인성적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그의 독선적 권위주의, 말년의 독재등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는 운동가, 선동가로서의 이승만이다. 청년시절 이미 만민공동회때 명연사로 이름을 떨친 바 있는 그는 분명 탁월한 선동가의 측면을 갖고 있다. 강진화씨가 펴낸 "대한민국건국 10년지"를 보면 그의 선동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그가 자신의 조직인 독촉과 김구의 조직을 통합한 다음 총재 수락 연설을 하는 부분이다.
" 항간에서는 김구와 이승만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등 쓸데없는 말이 떠돌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일은 절대 없으니 걱정말고 여러분들만 한 덩어리가 되면 독립은 꼭 됩니다. 여러분들이 독립을 속히 해보겠다고 신탁을 반대하고 이 국민회를 만들어서 얼마전부터 나에게 그 총재로 취임해 달라하니 고마우나 나는 명의만의 총재는 수락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저기서 그렇지 않습니다 , 절대 총재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러한 지방대표들에게 다짐하듯 물었다. "여러분이 내 지휘를 받아서 <죽자!>하면 다같이 한 구덩이에 들어가서 같이 죽을 각오가 있습니까? 그의 말에 장내에서는 예 하는 대답이 박수 소리와 함께 울려 나왔다. 그런 각오가 있는 사람은 어디 손을 들어 보시오. 청중들은 일제히 손을 들었다. 한 손을 드는 것을 보니 한 절반 쯤 각오가 드는 모양이야. 이 말에 일동은 웃으며 다시 양손을 들었다. 옳지. 전심전력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겠다는 말이지." 장내에서는 다시 박수가 터져나왔다. 흥분한 대표들 중에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사람들도 있었다. "
그는 독립운동의 과정에서는 선동가의 측면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건국이 된 이후 그는 철저하게 현실 정치인으로 돌아섰다. 이승만은 4.19에 의해 국민의 힘으로 권좌에서 밀려날 때까지 사실상 그에 대적할만한 정치적 라이벌이 생기지 못할 만큼 권력을 관리했다. 흔히 그를 마키아벨리스트라고 하는 지적은 바로 이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우리나라에 최초의 근대적 정치를 도입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해방정국 정치지도자들은 사실상 전통적인 지도자상인 명분론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굳이 예외가 있다면 박헌영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은 소련의 지령에 따랐다는 치명적 약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외교가로서 이승만의 능력에 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국제정치학 박사라는 기본적 학식 이외에 젊은 시절부터 미국의 정부, 의회, 언론을 상대로 한 직접적 접촉의 경험에서 생겨난 노하우는 지금도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특출났다. 그리고 미국과 근거리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현실에서 미국을 잘 아는 이승만은 다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정치적 자원을 가진 셈이다.
마키아벨리스트
혼란한 정국이란 다름 아닌 상황의 불확실성을 말한다. 상황의 불확실성은 수많은 결단을 요구하며 정치지도자의 결단 하나하나가 국가의 진로를 결정한다. 거기에 이념대립까지 겹치면 어지간한 지식이나 용기를 갖고서는 사실 상황의 개요 조차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승만이란 인물은 사실상 혼자의 능력과 힘으로 이 난국을 헤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승만의 결정과 결단이 전부 옳았던 것은 아니다. 과오도 많고 실책도 많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위에서 말한 다양한 자질이 없었다면 과연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고 대통령이 되는 것이 가능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른 지도자가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을 경우 어떤 형태의 나라가 되었을까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런 질문들이 결여된 채 당위론에 빠져 해방정국을 분석 할 경우 실질적인 접근은 전혀 하지 못한 채 하나마나한 정치평론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