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후반기 국내에서 이승만은 하지의 미군정 및 김구, 김규식 등 다른 정파의 견제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기는 했지만 한국문제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단계 단계 이승만이 제시했던 구상대로 전개돼 갔다. 당연히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는 차츰 넓어졌다.


1947년 9월17일 미국의 마셜 국무장관은 한국문제를 정식으로 UN에 상정했다. 제안내용의 골자는 미-소 점령지구에 조속히 총선거를 실시하되 이를 감시할 UN위원회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미리부터 이승만이 일관되게 밝힌 것이었고, 방미외교의 목적도 사실은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UN위원회의 구성이 갖는 정치적 합의가 워낙 복합적이고 컸기 때문에 그것을 김구나 김규식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반면, 이승만은 그에 대한 주도면밀한 대처를 통해 국내정치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확보하는 계기도 제공했다.


이승만이 한국문제의 UN상정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그가 10월7일자로 미국에서 로비활동을 펼치고 있던 측근 임병직과 임영신에게 보낸 우리 앞에 가로놓인 주요 장애물 중 가장 큰 것이 걷혔다는 전보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국민들 뜨겁게 환영



이어 11월14일 미국이 사실상 주도한 UN에서 한국문제는 43대 0이라는 절대적 지지를 받아 가결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1948년 3월31일까지 한국의 선거를 감독할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과 독립정부가 수립된 후 7월1일까지 미-소 양국군대를 철수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호세택을 사무국장으로 하는 9개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위원단(UNTCOK)이 1948년 1월8일 한국에 도착했다. UN위원단의 주된 과제는 사실상 군정을 해체하고 한국인에 의한 독립정부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환영열기는 뜨거웠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들은 이런 정세변화가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계산하며 복합적인 반응들을 나타냈다. 이승만은 당연히 절대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호세택 사무국장이 자신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는 점까지 내세우며 환영성명을 발표했다.


한민당의 김성수도 "이번에는 우리 독립문제가 꼭 해결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남북을 통한 총선거가 되면 물론 좋고 만일 소련이 거부하여 북에서는 선거가 시행되지 못하게 되면 남에서 만이라도 선거를 행하여 정부를 수립하여야 하겠습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반면 김구는 "UN위원단의 내한은 환영하지만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과는 같은 길을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성명이었다.


그런 차에 1월22일 소련 주UN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우리는 이 점을 대단히 중시할 필요가 있다. 흔히 일부학자들은 19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남북분단의 기점처럼 과대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48년초까지도 확고한 남한단정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남북 총선거를 통해 통일된 정부를 세우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남한만이라도 우선 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UN한국위원단이 내한했을 때 발표한 성명을 통해서도 말미에 "특히 남북을 통한 총선거 실시를 위하여 노력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히려 실질적인 남북분단의 정확한 기점을 잡는다면 소련에 의한 UN한국위원단의 입북거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미-소의 이해관계라는 국제적 원인이 남북분단의 최대원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하여튼 그로미코의 위원단 입북 거부 발표는 바로 남북한 총선거가 불가능한 것임을 공식 확인해준 것이며 자연스럽게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나서게 하는 분명한 명분을 제공해준 셈이 된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또 한가지 고비가 도사리고 있었다.


입북이 거부된 마당에 남북 총선거 실시를 명분으로 파견된 UN위원단의 존재이유가 상실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된 것이다. 그래서 2월4일 UN위원단 의장으로 선출된 인도대표 메논은 14일 5월말경 남한에서만 일단 총선거를 실시하되 북한측에 대해서는 인구비례에 따라 의석을 공석으로 남겨두고 국회의원수는 남북 통틀어 2백명으로 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보고서를 UN에 제출했고 18일 UN소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의했다.


이런 가운데 단정노선에 반대한 김구와 김규식이 손을 잡았다. 이승만과 협조와 갈등을 반복하면서 그런대로 비슷한 노선을 걸어왔던 김구와 좌우합작노선을 견지하며 이승만과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던 김규식이 남북협상론이라는 점에서 의견이 합치한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단독정부가 수립될 경우 이승만이 주도권을 장악할 것이 너무도 분명한 상황에서 나름의 탈출구를 모색하던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나온 타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의석 비워둬



그런데 묘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을 지속적으로 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무렵 한 기자회견에서 김구가 "우리(이승만과 김구)는 방법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가지요, 이승만 박사에 대한 나의 충성은 변함이 없소. 남산의 소나무가 색을 변해도 나 김구는 그렇지 않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를 전해들은 이승만은 일언지하에 "남산의 소나무가 다 죽었다더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김구에 대한 이승만의 안타까움이 극에 달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선 김구와 김규식은 3월12일 공동성명을 통해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파들도 방향을 잡지 못한채 총선 참가와 불참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이승만의 심정은 초조해졌다. 선거를 할 경우 당선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민족진영의 거두인 김구, 김규식 두 사람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모양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한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2주 정도 김구, 김규식의 총선 불참 천명에 대해 침묵하고 있던 이승만은 마침내 3월24일 두 사람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 두 분이 총선거를 반대하는 주의는 실로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분들이 제출한 여러가지 이유라는 것은 분석하여 말하자면 하나도 사리에 맞지 않는 언론이다. 이것을 우리가 논박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하간 이 두 분들이 총선거를 반대하므로 심리상에 많은 장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불행으로 여긴다. 국권을 하루빨리 세워서 우리가 우리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야 사람도 살고 나라도 살게 될 것은 필부가 다 각오하고 기어코 총선거를 진행해서 이 기회를 잃지 말고 정부를 수립하자는 결심이며 세계 공론이다. 또 동일하게 귀순하는 터이니 몇 사람이나 몇 단체가 반대한다고 중지될 수도 없는 것이요 설혹 이런 장해가 있다 할지라도 대중이 이에 동요되어 40년 동안 잃었던 국권을 찾는 것을 중지할 리가 만무하니 정당이나 인도자의 세력으로도 대중의 투표를 막지 못할 것이오. 또 우리 민중은 우매한 민족이 아니므로 각각 판단력이 있어 파동을 받지 않을 것이다. 좌익파괴분자 외에는 기권할 사람이 몇이 안될 줄 믿는다. 


상당히 격앙된 어조의 이 성명은 이승만이 두 김에 대해 얼마나 큰 실망감을 느끼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성명이 발표되기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승만은 1947년 12월2일 일어난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의 암살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조사를 받는등 궁지에 몰렸던 김구를 옹호하는 성명까지 발표한 적이 있었지만 총선 참가 문제로 두 사람 사이는 서로 너무나 멀어진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김규식과도 멀어졌다.


4월경 김규식은 한 모임에서 이승만을 염두에 두고 "총선거만 하면 국권도 찾고 정부도 수립되고 민생문제도 해결된다고 운운하는 자들이 있으나 "로 시작하는 감정적 어조의 연설을 통해 이승만의 남한총선거론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심지어 그는 "총선거가 끝나면 미국은 한국에 판무관을 보내어 내정간섭을 할 것"이라고 선동했다.



감정대립 극에 달해



이에 맞서 이승만은 4월6일자 성명에서 "총선거를 반대하는 분자들이 간혹 말하기를 미국이 한국독립정부를 수립한다 하나 실상은 고등판무관을 두어서 전일 비율빈(필리핀)과 같이 만들 것이라 한다 하니 지금도 총선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총선거로 한인들이 국회를 세워가지고 국권을 회복해서 강토를 찾으려는 것인데 남이 어떻게 하려고 한다는 것을 주장을 삼으면 주객의 위치를 전도함일 뿐더러 국회에 들어가는 한인들이 다 노예성질 가진 사람만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회를 세운 후에는 우리와 전쟁하려는 나라 이외에는 누구나 우리 국권회복에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김규식을 정면 반박했다. 한달도 안되는 사이에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존칭에서 비어에 가까운 어투로 바뀌어 버렸다.


해방직전 이승만이 우리 삼총사라고 불렀을만큼 가까웠던 이승만, 김구, 김규식 세 사람의 관계는 혼미한 정국을 헤쳐나오는 과정에서 불과 3년도 안돼 이처럼 대립적인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