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계에는 김구, 김규식이 추진한 남북협상노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걸어갔어야 할 노선이었다는 듯이.
따라서 이승만이 선택하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오지 말았어야 할 길 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하려면 김구나 김규식이 추진했던 남북협상이 미군정이나 이승만 세력에 의해 어떤 식으로건 방해를 받거나 중단되었을 때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오히려 두 김의 남북협상노선은 북한까지 갔다왔고 분명한 실패로 판명까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남북협상노선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여건은 말할 것도 없고 논리적으로도 성립되기 힘든 주장 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김구,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추진한 것은 최소한 1948년 2월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2월14일 두 김은 UN한국위원단 중국대표인 유어만씨의 초청으로 이승만과 회동한다. 이 자리에서 김규식은 남북요인회담 추진의사를 밝히고 이승만에게 "형님은 찬성도 반대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찬성도 반대도 모두 부작용이 일어나라고 봅니다"라고 부탁했다.
남북협상 회의적
이에 대해 이승만은 "남북요인회담에 대해서는 이때까지 내가 찬성치 않던 바이나 이 문제가 총선거에 지장이 있거나 시일을 지연시키는 폐단이 없다면 방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건부 묵인의사였던 셈이다. 물론 이때 이승만이 반대했다면 남북요인회담 내지 남북협상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이승만으로서는 시도도 해보지 않고 분단에 앞장 섰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명시적인 반대를 할 수는 없었다.
미군정의 입장도 이승만과 비슷했다. 남북협상이 본격화되던 4월1일 윌리엄 딘 군정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협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냉소적인 것이다. 만주와 북조선에 있는 조선인들이 그들이 천국이라고 하는 북조선을 버리고 매일 수천명씩 남하하고 있다.
만일 남조선으로부터 하루에 몇천명씩이라도 북조선으로 가준다면 남조선에 있는 여러분의 식량배급도 증가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반대로 주린 사람은 무슨 까닭인지 그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북조선을 버리고 남조선으로 오고 있다"고 남북협상에 대한 회의적 입장을 밝혔다. 다만 "개인이나 단체를 물론하고 북조선에 가는데 대하여서는 하등의 간섭도 하지 아니하겠다"고 덧붙였다.
또 4월2일 이승만은 "남북회담문제는 세계에서 소정책을 아는 사람은 다 시간 연장으로 공산화하자는 계획에 불과한 것으로 간파하고 있는데 한국지도자 중에서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회담을 지금 주장한다면 대세에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이런 가운데 4월3일 제주도에서는 남로당계열이 총선거 반대를 구실로 폭동을 일으켜 경찰과 주민 등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비극적 사태가 일어났다. 물론 육지의 사람들은 그 실상을 정확히 알 길이 없었고 각 정파들은 각자의 노선을 추구하며 대립을 계속했다.
이승만은 이미 3월29일 동대문 중구에 입후보했고 김구는 4월19일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이승만의 총선거 노선과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노선이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시점이었다.
김구보다 조금 늦게 북한으로 갔던 김규식은 5월5일 김구와 함께 서울로 돌아와 방북성과를 과장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려 했으나 총선거라는 국민적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특히 두 김의 방북이 북한정권의 정통성 확립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은 두 사람에게 정치적으로 결정적 타격을 안기며 재기불능의 상태로 몰아갔다.
이제 이승만의 독무대였다. 여기에서 이미 이승만 독재는 이승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싹트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투표율 95.5%
정치지도자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감안할 때 김구와 김규식이 무력화된 한국정치 상황에서 이승만의 독주는 견제가 불가능할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5월10일 역사적인 제헌국회 선거가 열렸다. 선거인 등록 86%에 95.5%의 투표율을 보인 선거에서 1백98명의 의원이 선출됐다.
동대문 갑구에 출마한 이승만도 압도적 지지를 받아 당선됐고, 31일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1백98명이 참석한 가운데 1백88표를 얻어 초대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부의장에는 신익희, 김동원이 뽑혔다. 건국을 향한 본격적인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사실 좌파들은 배제되고 우파의 김구, 김규식마저 총선불참을 선언한 상황에서 만일 투표율이 낮았다면 정부수립의 과정은 순조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걸림돌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5.10 총선거를 감시한 UN한국위원단이 선거결과와 관련해 공보 59호라는 발표를 통해 "대표들 중에는 금번 선거의 결과가 조선문제의 해결에 공헌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대표도 있으며 그들이 설사 이런 의심을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남조선에 있어서의 선거를 전국적인 것으로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이 용어를 약간 주저하기는 하나 금번 선거를 결정적으로 우익적인 선거 라고 부르고자 한다"고 총선거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는 사실상 총선 결과의 효력을 유보할 수도 있다는 시사였다. 선거결과에 만족스러워 하던 이승만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자신이 우려했던 바가 가장 믿었던 UN위원단으로부터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교섭과 한민당의 규탄성명, UN위원단 규탄시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 설득과 압력을 통해 UN위원단은 마침내 6월25일 공정한 분위기 조성차원에서 서울이 아닌 상해에서 투표결과 전 한국민의 약 3분의 2가 거주하고 있는 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한국지역내 유권자의 자유의사는 정당하게 표현됐다고 사실상 5.10선거의 효력을 인정했다.
5월31일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개식사를 통해 앞으로 세울 나라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피력하게 된다. 여기에는 흥미있는 구절이 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 날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여 민국연호는 기미년에 기산할 것이요 . "
상해임정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상해임정이 그 법통을 이어받은 한성정부의 법통을 잇겠다는 이 말은 김구=상해(그리고 중경)임시정부의 대변자로 인식되고 있던 상황에서 그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이 집정관 총재로 선출된 바 있는 한성정부를 내세워 김구를 견제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한 시도일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국회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6월3일 국회는 헌법제정작업에 착수했다. 3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기초위원(위원장 서상일)이 선출됐고 여기서는 법조계의 전문가 10인으로 구성된 전문위원을 선임했다. 3일 오후에 열린 기초위원회에서는 두가지 초안이 준비돼 있었다.
하나는 소위 유진오 안으로 유진오가 기초한 것이고, 또 하나는 유진오의 안을 토대로 과도정부 법전편찬위원회에서 수정 작성한 권승렬 안이었다. 그러나 둘 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와의 조화 를 내세우며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었다.
내각책임제는 유진오의 학문적 소신임과 동시에 장차 들어설 정부에서 여당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한 한민당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처음부터 대통령제를 선호했다. 라이벌들이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대통령이 될 것이 분명했다는 이유와 함께 원래 그는 미국을 정치의 사표로 삼았기 때문에 대통령제에 대한 그의 지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각책임제로 헌법안이 거의 확정될 즈음인 6월21일 이승만은 신익희를 대동하고 기초위원회 회의장으로 가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한민당, 내각제 포기
"우리가 국권을 찾기 위해 40년 동안이나 싸워온 것은 백성에게 권리를 주자는 것이며 정당에 권리를 주어서는 정당끼리 싸우느라 나라 경영은 하기 어렵다. 만일 이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헌법으로 통과된다면 나는 그러한 헌법 아래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운동이나 하겠다. "
결국 한민당 지도부는 그날 저녁 계동 김성수집에서 회합을 갖고, 이승만이 저렇게 반대하는 한 내각책임제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는 대신 국회의 권능을 강화한 절충식 대통령제로 하기로 합의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설사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한민당의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되고 한민당 인사들이 다수 각료에 포진한다면 사실상 내각책임제 나 다를 바 없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미리 얘기하자면 한민당의 이런 계산은 초대내각 구성과정에서 이승만에게 철저히 무시되고 만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