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26일 경교장(현재의 강북 삼성의료원 자리) 2층에서 4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노혁명가이자 애국심의 화신인 김구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총알이 지나간 웃입술-목아래-흉부-우측하복부 등에서는 선혈이 쏟아졌다. 적십자병원에서 달려온 의사의 응급조치도 소용없이 저격 10분 만에 숨을 거뒀다. 이때 김구의 나이 73세. 암살범은 현장에서 체포된 현역 포병소위 안두희였다.



"내가 죽였소" 태연



당시 김구의 암살소식이 각종 호외 등을 통해 알려지자, 경교장에는 시민들이 몰려들었으며, 유학자 김창숙은 "누가 우리 백범을 죽였느냐"며 오열했다고 한다. 김구의 장례는 7월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김구 암살은 철저하게 준비된 암살이었다. 사건 당일 안두희가 김구에게 면담을 신청했고, 허락이 떨어져 경교장 2층 거실에서 김구를 만난 그는 김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즉각 경호원이 뛰어 올라가면서 "방금 2층에서 총소리가 났어. 누구야!"라며 총을 겨누자, 안두희는 손에 권총을 쥔 채로 "선생은 내가 죽였소!"라며 태연하게 말했다.


김구는 이승만과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상해임정 초대 경무국장을 맡은 이래 주석에 까지 올라 사실상 거의 혼자 힘으로 임시정부의 명맥을 지켰으면서도 1945년 11월 환국해 이승만과 한민당 연합세력에 의해 정치투쟁에서 밀려 5.10 선거를 단독선거라 해서 거부하고 칩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마키아벨리즘에 입각한 철저한 현실의 정치인이었다면, 김구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전형적인 지사형 정치인이었다. 독립운동 시절에 보여준 혁혁한 투쟁성과, 격렬한 반탁운동, 통일을 위한 북한행 등 그의 행적은 비록 비현실적이었다는 비판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올바른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다른 어느 정치인도 갖지 못한 장점이었다.


이승만과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해방정국을 이끌다가 단독정부 수립과 함께 갈라선 김구의 죽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현대사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우선 그의 암살 배후에 관한 오랜 논란이다. 아직도 암살범 안두희는 살아있지만 (옮긴이 주: 글이 작성된 1995년 7월 현재) 명확하게 그 배후를 밝히지 않고 있다. 안두희가 살아있는 한 김구 암살 사건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이승만이 김구 암살에 직접 관계했다는 물증은 없고, 많은 사람들에게 심증만 있는 상태이다. 어쩌면 다른 테러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게 될 공산이 크다.


이승만에게 정황적으로 심증을 두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1949년이라는 시점에서 김구는 이승만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학계 일각에서는 정적 제거 차원에서 이승만이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당시 김구의 정치적 처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김구가 이승만에 맞설 만큼 정치적 입지가 강했다고 본다면 정적 제거론은 일단 설득력이 있는 근거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김구는 1948년 4월19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다녀온 뒤 정치적 입지가 극도로 축소됐으며, 단정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힘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이승만이 위험을 감수하며 별다른 정치적 실익도 없는 암살을 감행했겠느냐는 견해도 가능하다. 이 문제 또한 학계의 논란에 맡기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이승만이 당시 김구 암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승만은 암살사건 이틀 후인 6월28일 올리버에게 보내는 서신에 극비라고 표시하고 당시 정세를 상세하게 적고 있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김구씨의 암살 사건이었소. 그가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남한의 각 도를 망라하여 지난 날의 임시정부 지지를 맹세하는 단체들을 조직하는 한편, 명년 6월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 지지자들을 당선시키려고 준비를 서두르는 가운데, 반정부선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려져 있었던 사실이오. 국민들 간에는 그의 비애국적인 성명이나 활동을 비난하는 강한 감정이 번져 있었소. 그러나 그의 암살소식이 전해지자 전국민은 충격을 받았소.


그를 암살한 사람이 비밀회담을 가지기 위해 그를 자주 방문했던, 그가 신임하는 육군장교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세상은 모두 잠잠해졌소. 그는 또한 한국독립당내에서 전략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도 알려졌소.



영구미제 가능성



내게 알려진 바로는 이 육군장교가 김구씨를 방문하여 그는 자기 비서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그와 비밀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오. 그때 마침 세 발의 총탄이 발사되고 그를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였소. 이렇게 되자 사람들이 방으로 뛰어들어 그 자객을 붙잡아 혼수상태로 병원에 끌려갈 정도로 두들겨팼소. 지금쯤은 회복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며, 충분히 건강이 회복되는대로 그의 동기와 또 배후자가 있다면 그 사실도 모두 밝혀내게 될 것이요.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므로 이런 일들은 어느 하나라도 인용하지 말아주시오. 조사가 완료된 뒤에는 그들이 이 가장 불행한 사건에 대한 전면보고를 발표하게 될 것이오. "


이 글은 엄밀한 분석을 요한다. 먼저 가장 가까운 측근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과연 여기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일단은 극비 라는 단서를 붙인 것과 글의 내용을 감안할 때 거의 사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차후에 김구 암살로 인해 문제가 될까봐 일부러 작위적인 편지를 보냈다고 생각하기에는 내용도 그렇거니와 올리버와의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납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편지의 내용이다.


앞부분, 특히 김구의 정치노선을 비판하는 부분을 보면 김구 암살의 배후로 이승만을 지목하게 되는 심증을 더욱 굳혀준다. 다분히 해명성-변명성 논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반부의 경우를 보면, 또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 들기도 한다. 결국 이 문건은 유감스럽게도 이승만에게 김구 암살의 사주혐의는 있으나 물증은 없다는 일반의 인식을 바꾸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한 가지 이승만에게 심증이 가는 이유는 안두희에 대한 이승만의 미온적 조치이다. 안두희는 그 후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6 25때 특사 조치로 석방됐고, 그 후에는 복권돼 육군중령으로 승진돼 국방부에 근무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아무리 전란의 와중이고 김구가 이승만의 정적이었다고는 하지만 민족의 대표적인 지도자를 암살한 사람을 석방시키고 심지어 현역군인으로 다시 채용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테러 시각서 접근을



그렇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이승만에게 전적인 책임을 돌리는 현재의 풍토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의 하나 이승만이 김구암살을 사주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그에게 가해진 암살 관련 비판은 한 인물의 인격을 불확실한 심증 만을 근거로 매도해 버린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승만이 김구 암살을 사주했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문제제기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그 당시 정치테러에 희생된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의 배후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중으로 물어야 한다. 지금처럼 이승만의 김구 암살 관련 부분만 강조할 경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치 이승만이 암살한 것처럼 잘못 알려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정말로 이승만이 이들 세 사람 중 어느 한 명의 암살과 관련이 있었다면, 그동안 이승만에 대한 맹목적 비판 분위기를 감안할 때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시 4건의 테러 사건들에 대해 동일한 비중으로 배후를 물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와 같은 접근 방식의 결론은 이승만은 나쁘다 는 다분히 의도가 담긴 것에 머물 뿐이다. 그러나 동일한 비중으로 배후를 물을 때 정치테러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교훈으로 얻을 수 있다.


과연 네 지도자의 암살사건을 통해 이승만은 나쁘다는 결론을(그것도 확증은 없는 상황에서) 얻고마는 것과, 정치테러는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는 결론을 얻는 것중에 어느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접근방식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새삼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그동안 학계는 일방적으로 전자의 길을 걸어왔다는 점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