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2월10일 한민당이 중심이 되고 대한국민당의 일부(신익희)와 대동청년단(지청천)이 참가하는 형태로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이하 민국당)이 창당됐다. 민국당 창당의 결정적 배경은 반이승만 합동전선의 형성이었다. 정치학계의 원로 김운태 전서울대교수는 한국현대정치사 2 (성문각간)에서 민국당의 태동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한민당의 이러한 움직임(즉 민국당 창당)은 자파의 세력확장을 위한 목적 이외에도 3년 간의 미군정하에서 여당적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원망을 샀다는 사실과 동시에 대 이승만투쟁을 본격화함으로써 정권을 획득하려는 기도가 크게 작용한 것 같았으며 그 첫 시도가 개헌운동이었다. "
개헌운동이란 다름 아닌 내각제로의 개헌운동이었다. 한민당의 후신 민국당이 추진한 이 내각제 개헌기도는 심도있는 분석을 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학계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이승만으로 부터 권력을 되찾기 위한 민국당의 이같은 움직임을 분석하기에 앞서 먼저 해방후 정국 전체의 흐름을 개괄해볼 필요가 있다. 김운태교수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당시의 정국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야, 12부 중 7부 장악
"해방후 한국을 지배하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여운형의) 건국동맹도 아니고 (김구의) 한국독립당도 아닌 한국민주당이었으니 이것은 국내혁명세력도 아니고 해외혁명세력도 아닌 바로 일제시 이래의 국내 토착세력이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이승만과 김구로 대표되는) 해외 혁명세력을 업고 국내 혁명세력을 타도하였으며 다음에는 이대통령을 업고 임정을 타도하였다. 그리고는 최종으로 완전고립된 이대통령 마저 제거하려던 단계에서 이대통령의 비상한 투쟁으로 초기 한민당세력이 둘로 분열하여 하나는 자유당이 되었고 하나는 민국당으로 되었다. "
여기서 이대통령의 비상한 투쟁이란 다름 아닌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기도 좌절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최종으로 완전 고립된 이대통령이 어떻게 민국당의 힘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당시 이승만의 고립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각료들의 면면을 보면 쉽게 확인된다. 건국의 아버지로서 초당주의 내지는 무당주의를 표방해온 이승만은 한민당에 대해서는 철저히 견제했으나 국회와의 관계, 인재부족 등으로 인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인물을 쓸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원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민국당은 1949년 봄이 되면서 내무부(김효석), 재무부(김도연), 상공부(윤보선), 교통부(허정), 체신부(장기영) 등 12부중 7개 부처를 장악했다. 심지어 대통령 비서실의 실권까지 장악해 사실상 남한 최대의 권력그룹으로 부상했다. 이 무렵의 상황을 김운태 교수는 "민국당은 자당 본위의 정책주장이 실패할 시에는 그 실책의 주인을 정부 수반에 돌렸으며 반이대통령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표현했다. 이 때부터 야당을 비롯해 미국의 일부 언론들은 이승만을 독재자 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내각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은 1950년 1월27일이었다. 제안자는 민국당의 서상일. 그는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장을 맡았던 인물로 내각책임제 헌법초안을 대통령제로 바꾸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따라서 서상일로서는 자신의 실책을 만회한다는 차원에서 민국당 70명과 무소속 일부의 서명을 받아 79명의 이름으로 내각제 개헌안 제출의 총대를 멘 셈이었다. 개헌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내무장관 전격해임
(1)대통령의 국무에 관한 모든 행위는 국무원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모든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가 있어야 하고 그 책임은 국무원이 진다. (2)국무원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조직된 합의체로서 대통령의 권한에 속하는 국책을 의결한다. (3)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국무원의 행위에 대하여는 연대적으로 국회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각자의 행위에 관하여는 개별적으로 국회에 대한 책임을 진다. (4)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써 선출하되 신국회가 폐회되었을 때에는 다시 선출하고 그 선정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며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에 따라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임면한다. (6)천재지변 기타 불가항력의 이유로 국회의원 총선거가 불가능할 때는 차기국회가 개회할 때까지 그 임기는 연장되나 1년을 초과하지 못한다.
아마도 이승만은 이를 보면서 상해임정 시절 자신을 대통령직에서 내쫓으려고 했던 국무총리 이동휘가 떠올랐을지 모른다. 그 때와 상황이 여러가지 면에서 비슷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대통령의 허세화였다. 이승만은 상해임정 시절 허세 대통령을 거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6)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현재의 민국당 세력을 유지하겠다는 속셈이 드러나 있는 것이었다.
당시 국회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여당 격인 대한국민당이 71석을 유지하고 있었고 민국당은 70석을 차지한 제1야당이었다. 대한국민당은 적극적으로 개헌 반대운동을 전개해 국토가 양단된 지금 개헌을 추진하는 것은 시기상조 임을 역설했고 민국당은 책임정치, 의회정치를 위해 내각제를 해야한다는 논리로 맞서 정국은 일대혼란에 빠졌다. 이승만은 국회표결을 앞두고 민국당의 외곽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일민구락부를 이끌고 있던 김효석 내무부장관을 전격 해임하며 민국당에 압박을 가했다.
결국 국회 심의과정에서 국회 사상 최초의 난투극이 벌어지는 등 격렬한 분위기 속에서 3월14일 표결이 진행돼 출석의원 1백79명중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로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기도는 과반수 미달로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반대가 33표 밖에 안됐다는 것은 당시 국회가 이승만에 의해 장악돼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개헌안 부결 이후 국회의 세력은 다시 재편성돼 민국당이 무소속을 끌어들여 79석으로 제1당이 됐고 대한국민당은 71석으로 제2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당시 이승만과 국회의 역학관계를 보여주는 또 한가지 사례는 국무총리 임명이었다. 이승만은 독자적 세력을 키워가던 이범석을 해임하고 후임에 당초 북한지역을 대표한다는 명분으로 총리에 임명한 바 있던 이윤영을 다시 지명했으나 국회에 의해 인준을 거부당했다. 오히려 국회는 1백4명의 서명으로 조병옥을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민국당을 대표하는 조병옥 대신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는 신성모를 서리로 임명해 민국당이 주도하는 국회에 맞섰다.
부산파동 전초전
그렇다면 민국당에 의한 내각제 개헌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선 그 이전에 일어난 일과 민국당에 의한 내각제 개헌 시도와의 관계이다. 그것은 권력구조 확정 과정에서 거의 굳어졌던 내각책임제를 이승만의 협박성 설득에 의해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무총리 및 각료선임 과정에서 사실상 내각을 장악할 것으로 기대했던 한민당이 이승만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 당하자 반이승만노선을 내걸고 민국당으로 세를 불려 이승만에게 일대반격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학계에서도 일부 다루어지고 있다. 김운태 교수는 "동개헌안이 통과되면 민국당측에서는 김성수, 서상일 및 신익희 등 거물인사에서 국무총리에 입각하고 기타 몇석을 타당에 줌으로써 연립형성을 취하여 중요직을 차지함으로써 민국당 기호파 독점무대를 형성하려고 생각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50년 내각제 개헌시도가 그 후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학계에서는 분석을 유보하거나 회피한 감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것이 더욱 중요하다. 첫째 그것은 자신은 초당 혹은 무당의 입장에서 국방과 외교 문제에 전념하려던 이승만이 생각을 바꿔 자유당을 창당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는 이승만이 상해임정에서 박용만, 안창호, 이동휘 계열 등과 정쟁을 겪은 후 사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하와이에 자신의 사조직 동지회를 만들게 되는 것과도 유사하다.
둘째 전쟁중이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내걸고 다시 한번 국회가 제출한 내각제 개헌안을 정면돌파하는 소위 부산정치파동 의 전초전이 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52년 부산정치파동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50년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기도와의 연관성 속에서 52년 파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결과 마치 부산정치파동이 오직 이승만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양 부각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안은 단순히 대통령제냐 내각책임제냐라는 권력구조에 대한 논쟁을 떠나 국민들이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심판을 했던가 하는 점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 예를 들어 5월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국당은 24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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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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