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이승만의 통치방법과 내용을 개관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흔히 혁명가-운동가들은 기존질서를 파괴하는데는 능하지만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데서는 아무래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세계역사에서 각종 혁명이 즉각 반혁명에 의해 부정을 당하게 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 것도 따지고 보면 파괴에는 성공했지만 건설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상반된 평가 맞서



그렇다면 이승만은 운동가에서 행정가로의 변신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현재 상반된 견해들이 맞서 있다. 우선 부정적 의견을 보면, 당시 우리가 못살았던 것은 이승만의 비전 결여와 정책 부재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이승만이 국가 건설의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고, 50년대의 가난은 거기서 비롯됐다는 의견이다. 반면 올리버를 비롯한 측근인사들은 이승만이 행정가로서도 탁월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를 정확히 수치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치-경제-외교 등 여러 면에서 이승만 개인의 국가건설을 위한 노력은 분명 긍정적인 데 가깝다.


먼저 정치적인 면에서 살펴보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국회와의 관계이다. 한민당-민국당 등의 끊임없는 내각제 개헌공세를 막아낸 것은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해줄 수 있다. 우선 내각제 개헌문제를 단순히 대통령제=독재, 내각제=민주주의라는 도식으로 몰아세운 한민당-민국당 등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그 배후에는 지주세력의 입지강화라는 요인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건국후 2년도 안돼 발발한 6.25를 감안할 때 내각제를 좌절시킨 이승만의 정치적 결단은 더욱 그 의미를 더한다.


국회와의 관계라는 면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안은 미군철수의 문제이다. 주한외국군의 철수문제는 미-소 공동위원회때부터 정치권의 중요한 이슈였으며,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9월부터 김구에 의해 강력하게 요구됐다. 이에 따라 이승만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은 물론이고, 국회내 소장파의원 40여명은 1948년 10월13일 외국군 철수안에 동의하고, 1949년 들어 본격적으로 미군 철수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했다. 미국무부도 당초 계획대로 5월20일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미군철수를 발표하고, 6월29일에 철수를 완료하게 된다.


그러나 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 이승만은 줄곧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북한의 군사력이 50만명을 넘어선데다, 우리의 경우 국방경비대를 개편해 2-3개 여단 수준의 병력 밖에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방어가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국민들을 동원해 미군 철수 반대시위를 조직하는 한편, 미국에 대해 무기제공을 강력히 요청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미국은 이승만의 무기제공 요청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고, 미군은 철수하고 말았다.


경제분야와 관련해서 1948년 8월에서 1950년 6월25일까지 이루어진 사안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48년 12월10일 체결한 마셜계획에 따른 한-미경제원조협정(ECA)이다. 그러나 국가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른 정책들도 워낙 바탕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성공-실패를 운운하기는 곤란하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이 가장 곤란을 심하게 겪은 분야는 오히려 행정분야였던 것 같다. 건국의 필요성 때문에 친일경력 인사들까지 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재 빈곤현상은 심각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내 인물난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 한가지를 올리버 박사는 전해준다.


"내가 도착한 지 얼마 안되는 3월 하순경 나는 한국의 백악관이라 할 수 있는 경무대 그의 사무실에 앉아 이대통령과 환담을 나누던 중, 그는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올리버 박사, 당신은 우리 정부가 아주 엉망인 것을 아실거요. 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동의하였다. 그러자 그는 계속해 말하기를 두통거리는 장관들이 아무도 자기부처를 꾸려나가는 방법을 모르고 있소. 이 사람들이 조직이나 행정을 이해하지 못하오. 이 사람들은 돈을 너무 많이 쓰고, 너무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며, 책임과 권한을 위임하는 방법을 이해 못하고 있소. 예산은 점점 균형을 잃어가고, 정부전체가 혼란에 빠져있소. 이 일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겠소. 



"내겐 야심 있었네"



한참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서 가장 고약한 것은 임병직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이오. 그는 규모가 큰 부처를 관리-감독하는 방법을 도무지 모르오. 이 문제를 터놓고 의논하기 위해 내가 그를 불렀으니 조금 후에 들어설 거요. 


내가 자리를 비키려고 벌떡 일어서자, 그는 내가 자리에 다시 앉도록 몸짓하였다. 아니오. 그대로 계시오 라며 내가 그와 얘기할 동안 그대로 있기 바라오 라고 하였다. 마침 그때 그의 비서가 문을 열고 임장관께서 도착하였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 두 옛 친구들 사이에 불쾌한 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이 두 사람 누구에게나 깊은 사랑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근심은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 곧 증명되었다.


이 대통령은 벌떡 일어서서 문을 향해 총총히 걸어가서 두 손을 내밀며 임대령을 껴안고 자기 옆 사무실 소파가 있는 자리로 그를 끌었다. 벤, 내각의 각 부처가 엉망이네. 장관들이 도대체 운영방법을 모르고 있고 정부가 몽땅 지리멸렬이란 말야 라고 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라고 벤이 동의하며 그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자기직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린들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하였다. 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 해 동안 자네를 친아들처럼 생각하여 왔네. 내가 자네를 외무장관으로 데려왔을 때 나는 하나의 큰 야심이 있었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네가 조지 워싱턴 내각의 해밀턴이나 제퍼슨같이 하나의 위대한 장관으로 한국역사에 전해지는 것일세. 나를 좀 도와주게 벤. 이렇게 말은 이어졌다. 임대령은 깊이 감동되어 무슨 일이든 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로버트 올리버 지음 박일영 옮김 건국의 비화 )


상당히 긴 이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이승만이 부하를 다스린 방식, 당시 정부각료들에 대한 솔직한 인식, 스스로의 역할을 조지 워싱턴에 비견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이 인용문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물난이다. 30년 가까이 이승만을 측근에서 그림자처럼 보필한 임병직에 대해서도 이처럼 실망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승만 자신이 행정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상을 갖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친미반일과 반공



이 시기 이승만의 외교에 관한 한은 별로 이견이 없는 것같다. 비록 미군철수반대라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외교를 전개했다. 개략적으로 볼 때 1948년 10월5일 조병옥 대통령 특사를 미국에 파견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대한군사경제원조 요청, 1949년 1월8일 대마도 반환요구, 3월23일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의 태평양 동맹안에 지지표명, 5월20일 대일배상요구 관철 주장, 8월6일 이승만 초청으로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 방한, 2월14일 맥아더 초청으로 방일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이승만의 외교이다. 그 골격은 간단하다. 미국의 지원 확보, 일본과의 거리두기,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한 한국-중화민국-필리핀을 엮는 태평양동맹 결성 등이다. 그러나 미국은 국방과 경제 양면에서 대한지원에 소극적이었으며, 일본과의 거리두기도 미국의 일본 위주의 대아시아정책과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빚어야 했다.


분명한 것은 이승만의 외교구상이 뒤에 가서 대부분 올바른 것이었음이 판명됐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줄곧 미국에 대해 전쟁 위험을 들어 무기원조를 요청했고, 미국은 이승만의 전횡 가능성을 이유로 무기지원을 거부했다. 이런 점들은 최근 미국의 외교문서 공개에 따라 소상하게 밝혀지고 있다. 심지어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월1일 앞으로 5년간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담화까지 발표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