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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역사 정보글 ]]
○ 고려가 황제국 ? / http://www.ilbe.com/1308166143" target="_blank">http://www.ilbe.com/1308166143
○ 천자국의 축제 팔관회 / http://www.ilbe.com/1309007959
○ 조공, 책봉 관계에 대한 고찰 / http://www.ilbe.com/1090250150
○ 동아시아 제국의 역학관계와 왕호의 이해 [태왕(대왕) / 황제 / 선우 ] / http://www.ilbe.com/2038206359" target="_blank">http://www.ilbe.com/2038206359
○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자주의식과 고려 / http://www.ilbe.com/1365228469
○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고려의 국제위상 / http://www.ilbe.com/1403218229
○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고려사회의 공무원 / http://www.ilbe.com/1569450039
○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불교의 나라 고려 / http://www.ilbe.com/1961705354
○ 기록으로 보는 충격적인 고려사 <<보충 겸 최종 정리>> / http://www.ilbe.com/2041269185" target="_blank">http://www.ilbe.com/2041269185
[ 흥미진진 고려시대 주요사건 ]
○ 여진정벌. 눈부신 태평성대 그리고 먹구름 / http://www.ilbe.com/1311302652
○ 여진정벌. 고려의 대반격 여진을 정벌하다 (완결) / http://www.ilbe.com/1316308155
○ 난신 이자겸. 황실인척으로 권력을 움켜쥐다 / http://www.ilbe.com/1316447005
○ 난신 이자겸. 이자겸의 난 -불타는 황궁- / http://www.ilbe.com/1321872168
○ 난신 이자겸. 이자겸 천하의몰락과 새로운 바람 (완결) / http://www.ilbe.com/1323381546
+ 마녀사냥 하는 일베? 일베인이라면 필독 / http://www.ilbe.com/1328291407
+ 국까 전격해부, 옳바른 역사관에 대하여 / http://www.ilbe.com/135080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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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글에 이어 (http://www.ilbe.com/2041269185" target="_blank">http://www.ilbe.com/2041269185 -최종 정리 (전))
지금까지 고려사 관련하여 썼던 글 들을 정리하며 설명이 부족했던부분 또는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할 흥미롭고 아리송한 상식들을 직접 찾아본 자료 토대로 써보고자 한다.
말하자면 엑기스 라고 할 수도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주목해서 읽어보자.
6. 거란 정벌을 계획 했던 고려 태조 왕건.
-『자치통감』권 285 후진기(後晋紀)
고려의 왕건王建은 군사를 일으켜 이웃 나라들을 멸하여, 국력이 자못 강대하였다.
이때 왕건이 호승 말라襪囉를 통하여 고조高祖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임금이 거란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조정과 함께 그들을 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고조는 회보하지 않았다
대거란 정책에 있어 국초부터 강경책을 고수했던 고려는 그로 인해 발생한 3번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막아 냈고
우리역사의 자랑스러운 부분으로 기억되고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모르고 있다.
사실 이 전쟁은 고려 태조 왕건의 정벌전으로 시작 될 뻔하였다는 것을.
<고려 태조 왕건 (우측 앉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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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나라 고조(高祖)가 석자되는 칼을 들어 천하를 통일했던 것처럼 무공을 떨치셨으며,
은나라 탕왕(湯王)이 9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폭군을 정벌했던 것처럼 분연히 흥기하셨으니,
그 고결함을 아무도 따라올 수 없고 그 위대함은 이름 붙일 수조차 없나이다.”
- 고종이 태조에게 올린 책문 中..
고구려를 계승을 천명했던 고려의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후신 이었던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분개했다.
마침내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군을 토벌하고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통일 대업을 마친 태조는 거란정벌을 결심.
중원의 신흥국 후진과의 연합을 도모하여 거란을 정벌코자 했다.
<오대십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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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쇠망하여 오대십국 시대가 한참 전개되던 시기였는데, 그 중에서도 후량 후당을 이어 후진의 시대 였으며
후진의 건국 시기는 936년으로 고려의 후삼국 통일 시점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하지만 진 고조 석경당은 고려 태조의 그릇에 비기지 못하였다.
<후진 고조 석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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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에서 보듯 석경당은 연합하여 거란을 정벌하자는 고려 태조의 제의를 거절하는데, 여기에는 그럴법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후진은 거란의 힘을 빌어 일어난 나라였으니 거란에게 군사원조를 받아 후당을 멸망시키고 황제가 된 고조(석경당)는
거란에게 연운16주를 할양했으며,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거란 태종 야율덕광을 부황제 (父皇帝), 즉 아버지 황제라 칭하고 떠받들었던 것이다.
요(거란) 태종은 고려에 화친제의를 하며 낙타를 보냈던 인물로 그의 치세 당시 거란은 고려와 같이 얼마되지 않은 신흥제국으로 그 강세가 대단 하였다.
부족을 통합하여 발해를 멸망 시키고 서방 원정을 마친 거란에게 대륙의 열국들은 그다지 위협적인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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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성상(聖上)께서 백성들의 부모 노릇을 하시다가 오늘 저희 신하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등은 애통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할 뿐입니다' 하니
태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뜬 구름과 같은 인생이란 예부터 그러한 것이다' 하고 잠시후 죽었다...
- 고려사 태조 26년 (943) 계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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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얼마 후,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고려 태조는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고려에는 2대 혜종이,
후진에는 석경당의 뒤를 이어 석중귀(출제)가 즉위하였다. 출제는 고조와는 달리 거란에 대한 사대를 철회하고 강경한 태도로 일관헀다.
이번에는 후진쪽에서 고려와의 연합을 도모코자 사람을 보냈지만 동국통감에 따르면 고려의 군사력이 형편없었기에 연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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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려에 내부하였다 ..
- 자치통감 진(晉) 천복(天福)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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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고려의 국력은 막강했다.
이미 후삼국 통일전쟁인 일리천 전투 당시 10만여명의 보기병을 동원한 예가 있는 고려였다.
사분오열된 중국대륙의 제국(諸國)들 입장에서 고려의 군사력이란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 하지만 태조 사후 고려는 양규, 박술희, 왕식렴 세력의 삼파전의 소용돌이 속에 정국이 불안정 하였고
그러한 상황에서 거란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고려정부는 일부러 흐트러진 군대를 보여주었을 확률이 높다.
=◈ 태조의 거란 정벌계획의 의의
결국 고려와의 연합없이 단독으로 거란과 전쟁을 벌인 후진은 얼마 되지 않아 거란에 의해 개봉이 함락당하고
출제를 마지막 황제로 하여 2대 황제 10년 사직으로 역사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은밀하게 추진 되었던 이 거창한 계획은 끝내 실현 되지 못하는데
여말의 문인이자 비평가로 유명한 이제현은 이 기록 자체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통감(通鑑)》에 실린 말에 의하면, 우리 태조(太祖)가 호승(胡僧)인 말라(襪羅)를 통하여 진 고제(晉高帝)에게 말하기를,
“발해(渤海)는 우리와 통혼(通婚)한 사이인데, 그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니, 그대 나라와 합세하여 거란을 토벌하자.”
하였으나 고조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제(少帝 고조의 아들)가 거란과 원수가 되므로 말라는 다시 거란의 토벌을 말하였다...
... 곧 병기를 거두고 백성을 편히 쉬게 하며 문교(文敎)를 닦으니, 발해의 장군 신덕례(申德禮)ㆍ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ㆍ공부경(工部卿) 대덕예(大德譽)
등 수천 수만 명이 서로 앞을 다투어 귀화하였는데, 그 발해와 혼인하였다는 말 따위는 국사(國史)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조는 심원한 지략으로 공명을 힘쓰지 않았는데, 오계(五季)의 말엽에 중원이 온통 혼란에 빠져,
함께 손잡고 일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왜 몰랐을 것이며, 석랑(石郞)과 제파(帝?)와의 친교 관계에 이간할 수 없다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또 어찌 사신 한 사람도 보내지 않고 타국의 중[僧]을 바다를 건너 보내어 초창기의 미비한 진(晉)과 모의해서
발해를 위해 한창 강성한 거란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아주려 하였겠는가?
또 곽인우가 왔을 때 과연 우리 군사의 허실과 강약을 다 엿볼 수 있었겠는가? 진(晉)의 군신(君臣)이 전에는 말라의 말에 혹하였다가
뒤에는 인우의 말을 믿고, 곧 우리 태조를 과장한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역옹패설 전집1
물론 실제로 태조가 거란을 치려 했는지의 판단은 각자에게 맞겨야 할 텐데, 본인은 통감의 기록을 신뢰하는 쪽에 속한다.
이제현의 말 처럼 고려 태조 왕건은 뛰어난 군 통솔력과 더불어 유연하고 노련한 정치력과 처세술을 갖춘 군주였고
그런 그가 당시 동아시아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위 기록을 신뢰 한다는 것이다.
그가 정말 발해를 위한 마음으로 거란정벌을 계획 했는지는 확언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고려가 국초부터 넓은 지역의 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 하였고, 그러한 영향력을 제국(帝國)의 기반으로 했던 나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에 속했었던 말갈(여진)에 대한 지배력이 많은 부분 거란에게로 넘어 갔고
이는 즉 북진을 국시로 했던 고려와 정면 충돌 할수 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 했다.
다시 말해 태조의 계획은 고려의 번국(蕃國)들의 이탈을 막기위해 예종대에 실시되었던
여진 대정벌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텐데 이는 해동천하의 패권을 굳건히 하려는 최소한의 조치였던 것이다.
대게 여러 제국의 개국군주들을 보면 뛰어난 군사능력은 기본이요,
더불어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모험심 또한 두루 갖추는 법이다.
왕건이라고 그 넓은 발해 지역을 통째로 내어주고 싶었을까.
더군다나 삼한을 통일하고 북방을 호령 하고자 했던 그가 말이다.
태조가 보여준 대거란 강경책 (거란이 바친 낙타를 굶겨 죽이고 그 사신30여명을 귀양 보낸 만부교 사건 등.) 은
태조로서 그의 모험심과 강단, 그리고 의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통감기록의 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왕건이 극단적 정벌전 까지계획 했던 것은 형식적인 의리 따위에 의한 것이 아닌
그 나름의 현실적인 돌파구가 아니었을까
우리 태조께서는 즉위한 후, 김부(金傅)가 아직 복속해 오지 않고 견훤이 아직도 항복해오기 전이었는데도
자주 서도(西都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의 국경지역을 순시하셨다.
그 뜻도 또한 고구려 동명왕의 옛 땅을 내 집에 대대로 전해온 보배로 생각하고서 반드시 석권하여
차지하려 한 것이니, 결코 닭이나 오리같이 하찮은 것을 얻는데 만족한 것이 아니었다.
/ 고려사 태조 논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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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려의 임금이 직접적으로 황제(皇帝)라 불린 자료는 존재 하지 않는다?
-『동국이상국집』 - 황자(皇子)와 공주(公主)의 봉책연례(封冊宴禮)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 폐하는 덕이 백왕 중에서 뛰어나고
공이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보다 높으십니다...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가서 특히 책봉하는 명을 주라.”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연반(筵伴)한 영공들께서도 은하(銀河)처럼 맑고 체악(棣萼)처럼 빛나옵니다...
위의 기록은 고려 무신집권기 문인으로 유명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내용이다.
-문순공 이규보
이규보는 수태보 문하시랑 평장사. 태자태보로 치사 하였는데 그가 비록 최씨정권 아래에 승승장구 하였으나 당대의 문장가로서
민중의 입장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진실되게 반영하고 고려인으로서의 자주성과 자부심을 고무했다는 평가 또한 받고있다.
이 외에 고려시대 금석문에서도 고려의 임금을 황제로 칭한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고려의 역사는 사실 고려실록이 소실 되어 그 실체를 온전히 알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금석문등 1차사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으니 다음 참조 링크를 확인하자.
참조 : http://www.ilbe.com/1308166143" target="_blank">http://www.ilbe.com/1308166143 (고려와 황제국 체제)
심지어 고려사에는 고려가 내부적으로만이 아니라 일본으로 부터,
즉 외국으로 부터도 황제로 불렸음을 증명 하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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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금나라 사신은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동쪽 일본국[日域] 사절은 보물을 바치며 황제라 부르나이다.
- 고려사 의종 24년(1170) 경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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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종대라면 고려는 이미 극성기를 지나 제종족의 이탈로 천자국의 질서가 무너져가던 시기이다.
하지만 일본은 고려임금을 여전히 황제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전성하던 시절에는
일본을 비롯한 고려 천하의 제번들로부터 임금이 황제라 불리었음을 확증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 이에 대한 반론으로 조선 역시 황제로 불려졌던 예가 있었다고 할수 있겠으나 실제 황제국의 제도로 운영이 되었던 나라가
외국으로 부터 그렇게 불린것과 그렇지 않은 나라가 일시적으로 극존칭을 받은 것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황제' 는 중국식 왕호로 , 독자 왕호가 아닌 황제를 사용 했다는 것이 그다지 자랑스러운 부분은 아니다.
참조: http://www.ilbe.com/2038206359" target="_blank">http://www.ilbe.com/2038206359 (동아시아 질서 속 왕호의 의미)
신 등이 논의한 결과 '옛날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및 태황(泰皇)이 있었다. 그 중에서 태황이 가장 귀한 이름이다.' 라고 했습니다.
... 왕이 듣고 대답했다. "태황(泰皇)에서 태(泰) 자를 빼고 그냥 황(皇)이라 칭하고 다시 옛날의 호칭인 제(帝_ 자를 취하여 나를 부를 때는 황제(皇帝)라 하라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 고려의 임금도 황제보다는 천자天子, 성황聖皇, 신성제왕神聖帝王, 대왕大王, 엄공嚴公등으로 더 많이 불리었다. (직접 부를때는 성상聖上폐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황제로 불리기도 하였는가 라고 묻는 다면 그에 대한 답은 yes다.
사실 호칭 자체가 "황제" 인가 아닌가는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고려가 자주성을 가지고 제후국이 아닌 제국의 체제로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 하지만 제국의 통치자를 뜻하는 "emperor" 역시 황제로 번역되고, 우리에겐 그게 익숙하니 고려의 임금은 그냥 황제로 지칭하겠다.
개인적으로는 고려시대 자료에서 신성함과 거룩함,
천자의 존칭의 의미인 성(聖)이라는 문자를 강조하였음을 보아
그중 "성황聖皇" 이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 아 심원(深遠)하신 우리 성황 / 於穆聖皇
진실로 문무를 겸하셨네 / 允文允虎 ...
... 우리 성황의 시대에 / 我聖皇之代
무엇인들 제 처소를 얻지 못하리 / 何物不得所 ...
/ 동국이상국집 제 19권 中..
=◈ 고려의 황제국 체제에 대한 개인적 견해.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려를 외왕내제 (외국에는 왕, 국내에서는 황제)의 나라로 알고있다.
하지만 이는 온전한 제국의 개념에 반해 현대 학자들이 만들어 낸 개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고려를 기준으로 외국은 수많은 나라가 있으며 요,송등 특정 나라에 제한 하지 않는다.
그 수많은 외국들중 적어도 고려의 천하범위에 속하던 외국들에 대해서는 고려의 임금이 황제로 군림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지 않을까?
덧붙여 고려의 실리외교노선에 대해 반쪽짜리 황제국이다 라고 폄하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원적 천하론에 의해 운영되었던 고려가
독자 천하의 범위가 아닌 구별되는 천하에 대해 굳이 무리해서 천자국임을 주장해야 했는가? 라는 의문을 던질 뿐이다.
물론 묘청, 정지상등을 비롯 고려 중심론적 천하관을 가진 세력이 적지않게 존재하긴 했지만말이다.
어쩄든 "황제" 라는 단어 자체가 쓰였는가 쓰이지 않았는가를 따지는것 자체가 어찌보면 참 유치한 내용인데..
그래도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고 본인 글 내용중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이기에 마무리 정리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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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천자(天子)와 제왕(諸王)
-『고려사 열전』 종실 서문』
고려는 종실 사람으로서 친존(親尊)한 이를 책봉하여 공(公)이라 하였고, 그 버금 가까운 이를 후(侯), 비교적 촌수가 먼 이를 백(伯),
어린이를 사도(司徒)·사공(司空)3)이라 했으며, 이들을 총칭하여 제왕(諸王)이라 하였다.
-『고려사』 문종 7년, 계사년(癸巳年), 1053년
경자일에 대동강에 가서 배를 타고 제왕(諸王)·재추(宰樞)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흥복사(興福寺)로 행차하여,
마침내 대동강에 이르러 배에 올라 상장군(上將軍) 이상의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제왕諸王. 고려사에는 종실 사람을 공·후·백에 책봉하여 총칭한 이들 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사전적 개념은 "여러 왕"이다.
공·후·백 이란 고대 중국인 주나라에서 천자가 제후들에게 주던 작위로 고려가 이를 제도로 받아들여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정도 설명으로는 그들의 역할과 존재를 이해하기 어렵다.
고려사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 들 제왕은 누구이고 어떤 존재 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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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재상의 물망이 아닌데도 삼공(三公)의 자리에 앉게 되니, 팔정(八政)을 닦고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함을 무슨 덕으로 하리까
... 마음은 얇은 얼음을 밟듯 조심하여 더욱 제후의 효(孝)를 다할 것이며, 몸은 울타리가 되어 힘껏 천자의 집을 바르게 하겠습니다.
신은 못내[無任] 운운.
- 동국이상국전집 제29권 / 종실 면이 수사도 광릉후에 제수됨을 사은하는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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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임금이 천자였다면 당연히 그 아래에는 천자의 덕을 입는 제후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존재들이 바로 고려의 제왕諸王 이었다.
이들 공 후 백 제왕은 모두 영공令公 으로 불렸으며 종친은 전하殿下,비종친의 경우 저하邸下 또는 각하閣下로 불리었는데
일반적으로 종친은 [공][후][백] 으로, 비종친은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을 전부 봉하였다.
하지만 비종친의 제후 역시 일반적으로 oo공/oo후/oo백으로 불렸는데 다음과 같다.
[진강공(최충헌)], [낙랑후(김부식)], [영평백 (윤관)] ...
그렇다면 종친과 비종친인 제후는 어떻게 구별했나
여기에는 미묘한 차이를 두어 구별 할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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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경원군개국공(慶源郡開國公)으로
봉하고 식읍(食邑) 3천 호를 더해주었다
- 고려사 열전 / 이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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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록은 이자연을 봉작한 것으로 정식 봉작명은 경원군 개국공으로 줄여서 [군공] 이었다.
이 처럼 종친의 제후는 oo공, oo후로 봉했던 반면 종친이 아닌 제후는 oo군개국공(군공), oo현개국후(현후) 등으로 봉하여
구별 할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서열은 당연히 [공][후]가 [군공][현후] 보다 상위에 있다.
비종친도 제후諸侯로서 제왕諸王의 반열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위와 영향력은 형식적인 면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으며
그 공훈에 따라 좌우되었음을 다음 기록으로 알수있다.
(국공의 경우 종친인 왕기, 외척인 이자겸 모두 봉작 사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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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朕)이 보건대, 종실(宗室)이나 제후(諸侯)의 아들들은 비록 옷을 못이길 정도로 어려도, 으레 사공(司空)을 제배(除拜)한 지 오래이다.
이에 의해 말한다면, 신하로서 큰 공을 세워 제후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사세가 종실과 비등하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사공(司空)되는 것을 참용(參用)함이 매우 의리에 합당하니...
- 동국이상국집 / 최구(崔球)가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을 사양한 데 대한 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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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의 수사공이란 황제의 정치고문 역할을 하는 삼공삼사중 하나로 정1품의 명예직이다. (실직으로는 종1품 문하시중이 최고직)
원칙적으로 [공][후][백]의 작위는 아들에게 세습되지 않고 아들은 최고 관직인 사공으로 임명됐는데
종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사공의 관직을 내렸던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경계는 뚜렷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종친/비종친 제후들은 작위명과 경칭으로 구별 되었고
통틀어 영공令公으로 불렸으며 큰 차별은 없었다.
하지만 제왕諸王은 황자皇子와 천자天子의 부마駙馬 또는 친족인 만큼
그에 더욱 걸맞는 품위와 격식을 갖추었다.
<고려 천자의 의복 황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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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12년(1058) 4월. 예사(禮司)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어복(御服) 가운데 의례를 갖출 때에는 마땅히 홍색과 황색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 나머지 색도 입을 수 있는지 예전의 문헌을 널리 살펴보고 보고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이제 살펴 보건대... 당사(唐史)』62)에서는, ‘천자는 적황색을 입는다’ 라고 기록하면서
사서(士庶)들에게는 삼황색(三黃色)63)의 사용을 금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개원례(開元禮)』64)에서는, ‘
황제가 원구(園丘)에서 풍년 비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강사포(絳紗袍)65)를 입는다’고 적었으며...
기록들이 이러하니 ... 지금 입으시는 홍색과 황색 이외에는 따로 쓸 만한 색이 없습니다.”
위와 같이 임금은 천자를 상징하는 황색의 황룡포(자황포)를 입었다.
그렇다면
제왕諸王들은 어떤 의복을 입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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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4년에는 공(公)으로 승진 책봉하고 다음과 같은 책문을 내렸다.
...너는 하늘이 낸 천품으로 날 때부터 그것을 알았다... 이처럼 너의 덕이 성대하니 짐의 마음은 참으로 기쁘도다...
마땅히 윤음(綸音)3)을 내어 책봉의 명령을 주고 예물을 갖추어 군은(君恩)을 펴야 할 터이며,
봉토를 나누어 오등(五等)의 높은 작위에 임명하고 곤룡포와 면류관을 내려 구장(九章)의 제도에 맞추어야 할 터이니라.
- 고려사 열전 / 대방공 왕보 / (숙종(肅宗)의 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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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왕諸王들이 곤룡포와 구장을 받았다는 것은 사뭇 놀라운 기록이다.
곤룡포와 면류관 그리고 구장복은 임금의 상징이다. 조선조에서는 국왕이 제례때 구장복을 입었다. (천자는 십이장복)
물론 요,송 등의 나라에서 고려에 구장복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독자적 천하의 제후로 왕의 의복을 갖추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이들은 의복 뿐 아니라 그에 대한 경칭에 있어서도 "전하殿下"로 제후국의 국왕에 대한 경칭과 동일 하였다.
“진킴태자[眞金太子]는 중서령(中書令)이며,영녕공(永寧公)은 고려의 상서령(尙書令)이기에
품계가 황태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자칭하고 있습니다.” 라며 고발하자,
황제[쿠빌라이 칸]가 크게 노하여 왕준이 거느리던 병사와 말을 빼앗아버렸다.
// 고려사 열전 中..
=◈ 간단하게 정리하면 제왕(諸王)이란 천자국 체제로 운영된 고려의 제후인 왕이다.
이들은 천자로 부터 넓은 봉토를 하사 받았으며 식읍의 호수는 중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이들이 국정에 대하여 엄청난 권한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정계 진출은 대부분 제한 되었고, 명예직을 받을 뿐이었으며 이는 중국 대부분의 왕조 또한 비슷한 체제였다.
하지만 그들의 지위가 갖는 상징성은 무시 할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 되며
고려의 제후왕으로서의 권위와 자부심도 상당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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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삼류였다?
-『원사』외이열전 [고려]
...추밀원(樞密院)의 신하들이 고려(高麗)의 정벌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다. 지난날 마형(馬亨)[註153]이 말하기를, ...
“이제 [그들이] 비록 들어와 조회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렵다. 군사를 잘 무장하여 길을 빌리되
일본(日本)에 쳐들어 간다고 명분을 내세우고는 기회를 틈타 그 나라를 습격하여 군(郡)· 현(縣)으로 정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위로는 나라의 위세가 깍이고 아래로는 군사들만 잃게 됩니다...
...추밀원(樞密院) 경력(經歷) 마희기(馬希驥)[註155]도 역시 말하기를,
“오늘날의 고려(高麗)는 곧 옛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 세나라를 병합하여 통일된 나라입니다.
대체로 번진(藩鎭)이란 권력이 양분되면 제압하기 쉽고 제후(諸侯)란 강성하면 신하로 두기 어렵습니다.
저들 주(州)와 성(城)의 군사와 백성의 많고 적음을 조사하여 이간시켜서 양분되게 하고,...
한때 60만 강병을 운용헀던 고려였지만, 대몽항쟁 당시의 고려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 든 상태었다.
군벌귀족의 연합체적 성격과 중앙정부의 통제로 운영되었던 고려의 정상적인 군사 시스템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다.
최정예병은 최씨 정권의 사병인 도방의 보병과 마별초의 기병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으며
중앙군 또한 그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전력이 획일화 되어 버렸던 것이다.
<몽골의 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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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몽골군은 당대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그들의 군사 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사』에 따르면 세계 최강이라는 몽골 조정 내에는 고려를 이기지 못할 것에 염려하여
정면 공격보다는 속임수와 습격, 그리고 이간계를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여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때는 1269년.
대부분의 정복사업은 끝마쳤으며 이미 몽골의 주적 이었던 금나라가 망한지도 30여년이 흐른 후였다.
고려에 삼류 수준의 군대를 투입 할 이유가 없었다.
고려에 쳐들어온 몽골군이 삼류 였다면 고려군의 수준 역시 삼류 였을것이다.
하지만 고려인들의 정신력은 결코 삼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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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가 귀주를 포위하고 있을 때 그들 장수 가운데 나이가 일흔에 가까운 사람이 있었는데,
성 아래까지 와서 성과 병장기들을 돌아보고, “내가 성인이 되어 종군하면서 천하의 성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두루 보았지만
이처럼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성 안에 있는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모두 장군이나 재상이 될 것이다.”
라고 감탄한 일이 있었다.뒤에 박서는 과연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임명되었다.
- 고려사 열전 / 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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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상황이 고려가 개국한지 300여년 이래 가장 쇠약했을때에 가장 강성한 적을 만났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기록의 몽골 장수는 그런 고려군을 보고 이렇듯 끈질긴 군대를 본적이 없다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박서의 고려군은 삼류의 군대를 만나 그토록 분전 했던 걸까?
<처인성 전투와 김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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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처인성에서는 고려군이 농민들과 함께 성을 지켰으며 끝내 승장 김윤후가 몽골군 원수 살리타를 죽여
그 군대를 철수 시켰다. 당시 몽골군을 삼류로 깎아내려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셨던 대몽항쟁의 선조들을 폄훼 하고자 한다면,
진실로 삼류 였던 천민,농민을 모아 항전. 승려 출신으로 적장을 죽여 승리했던 고려인의 저력 또한 대단하다 해야 할 것이다.
천하제일의 몽골군이 삼류인데 고려의 천민,농민이 군사적 능력에서 일류전사 였을리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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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이 스스로 권황제(權皇帝)라 일컬으면서 전려(氈廬)에 앉았는데,
수놓은 비단으로 장식하였고 부인(婦人)을 좌우에 벌여 세웠습니다. 이에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능히 수비할 수 있으면 수비하고,
항복하려면 항복할 것이며, 싸우려면 싸울 것이로되, 마땅히 속히 결정하도록 하라.’ 하고, 또 ‘너의 관직이 무엇이냐?’고 물으므로,
분대관(分臺官)이라고 대답하였더니, ‘너는 소관(小官)이다. 대관(大官)인 사람이 속히 와서 항복하라' 하였습니다 ...
-『고려사』고종 18년 , 신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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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리타. 적어도 그의 지위는 삼류가 아니었다.
고려사에서는 살례탑(살리타)이 자칭 권황제라 일컬었다고 말한다.
권 황제란 황제의 권한을 대리 받았다는 의미인데 과연 권황제 살리타이의 군사가 삼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권황제가 의심 스럽다면 우리는 몽골의 5차침입 당시 총 지휘관이었던 예구와 타차르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몽골 제국의 황제는 칭키스 칸의 손자 몽케 칸이었는데 ,
-몽케 칸
몽골제국 4대 황제 헌종. 몽케 칸
바그다드로 진격하여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를 멸망 시켰으며 남송 원정중 병사한다.
쿠빌라이 칸의 형이다.
그는 고려에 조서를 전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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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황제가 조서를 전했는데...
짐은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게 하려 하는데,
너희들이 명령에 거역하므로 짐의 숙부인 예구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에 나서게 한 것이다.
정성껏 명령을 받아들인다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이나 명령을 거역한다면 짐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몽고의 예구대왕[也窟大王]이 아토(阿土) 등 16명을 보내 왔다...
-고려사 고종 40년(1253) 계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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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구의 부친은 칭기스 칸의 동생인 주치 카사르.
살리타가 권황제였다면 예구는 황제(몽케)의 숙부로 예구대왕也窟大王 으로 불렸다.
또한 그와 함께 고려에 왔던 타차르는 사준사구중 한명인 보로클의 아들.
보로클 역시 칭기스 칸과 같이 자랐으며 칸의 어머니 호엘룬으로 부터 형제의 대우를 받았던 인물이다.
사준사구(四駿四狗). 네 마리의 충성스런 준마와 충견이라는 뜻인데, 칭기즈 칸을 도와 몽골 제국을 건국한 8인의 건국공신을 지칭한다.
※ 사준에는 보로클을 외에 티라운, 보르츄, 무카리가 있으며
사구에는 수부타이, 제베, 쿠빌라이, 제르메가 있음
거란,여진과의 전쟁에서도 고려가 맞서 싸웠던 것은 삼류 따위의 군대가 아니라 황제의 친정군 혹은
그에 버금가는 최정예군들이었다. (야율융서[요 성종], 소배압[요 빈왕], 완안 오아속[금 강종], 완안 아골타 [금 태조]) 등.
몽골군 또한 그 지휘관들을 통해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제[몽케 칸]의 숙부가 이끌던 군대를 과연 삼류였다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온 천하에서 신복(臣服)치 않는 건 오직 그대 나라[고려]와 송(宋) 뿐이다.
송(宋)나라가 믿는 것은 장강(長江)이었으나 장강(長江)의 험(險)함을 잃자
의지할 것은 사천(四川)과 양광(兩廣)이었소.
// 원사 외이열전 [고려]
{원 세조 쿠빌라이의 칙서 中}..
=◈ 고려가 상대한 몽골군이 삼류였다는 주장들이 많길래 여기저기 찾아 보았는데, 결론은 추측에 불과하다.
물론 몽골의 1차침입 당시에는 금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고려에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딱히 금이 고려에 비해 월등히 강력해서가 아니라 금과 몽골간의 지독한 원한관계 때문)
하지만 그 후에도 몽골은 무려 총 7번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고, 끝내 고려의 태자가 입조하자
쿠빌라이는 당태종도 꿇리지 못한 나라의 태자가 와서 항복하니 하늘의 뜻이라며 감격을 표했다.
권황제 살리타는 고려에서 전사했고 몽골의 황족은 총사령관으로 고려를 쳐들어왔다.
과연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이 삼류였다 주장 할수 있을지, 그 판단은 각자에게 맡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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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사, 원사, 송사, 동국이상국집, 익재집, 동국통감
● 네이버 지식백과 , wiki
● 국민대 박종기 교수 칼럼, 서울대 노명호 교수 논문
● 각종 고려사 관련 서적
-개경의 생활사,
-고려의 황도 개경,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꾸다,
-고려사 열정과 자존의500년
-고려시대사의 길잡이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려 북진을 꿈꾸다
-고려 500년을 호령한 황제의 나라
-새로쓴 500년 고려사
-고려왕조실록 등
3줄요약.
1. 기록으로 보는
2.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3. 완전 끝.
다음글은 아마 전에 썼던 이자겸편 이어서 묘청 김부식에 대해 쓸 거같은데
요즘 좀 바빠서 언제 올라올지 장담은 못하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