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보글]


1. 고려가 황제국?

http://www.ilbe.com/1308166143                                                         +1.    마녀사냥 하는 일베? 일베인이라면 필독 

2. 천자국 축제 팔관회                                                                                 http://www.ilbe.com/1328291407

http://www.ilbe.com/1309007959" target="_blank">http://www.ilbe.com/1309007959                                                         +2.    국까 전격해부, 옳바른 역사관에 대하여 

3. 조공, 책봉 관계에 대한 고찰                                                          http://www.ilbe.com/1350802315

http://www.ilbe.com/1090250150

                                                                                                               *3.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자주의식과 고려

------------------------------------------------------------------                                  http://www.ilbe.com/1365228469

                                                                                                              *4.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고려의 국제위상 

4-1. 여진정벌. 눈부신 태평성대 그리고 먹구름                                                http://www.ilbe.com/1403218229" target="_blank">http://www.ilbe.com/1403218229

http://www.ilbe.com/1311302652

4-2. 여진정벌. 고려 대반격 여진을 정벌하다 (완결)

http://www.ilbe.com/131630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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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난신 이자겸.황실인척으로 권력을 움켜쥐다

http://www.ilbe.com/1316447005

5-2. 난신 이자겸. 이자겸 난 -불타는 황궁-

http://www.ilbe.com/1321872168

5-3. 난신 이자겸.이자겸 천하의몰락과 새로운 바람

http://www.ilbe.com/1323381546









전편 

http://www.ilbe.com/1403218229" target="_blank">http://www.ilbe.com/1403218229  (고려의 국제위상)



사실 교과서나 역사서적을 읽어 보아도 그시대상이 잘 와닿지는 않는다. 


그만큼 역사라면 21세기 우리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그저 옛날의 이야기라는 고정관념이 박혀있기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은 좀더 생활적인 부분인 관료와 여인들의 삶을 통해 


고려를 조금더 깊이 당대의 시각으로 이해해보고자한다.


-오늘 인용되는 기사들의 출처 역시 

국사 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의 번역문을 기본으로함













-백상루- 


(관서팔경 가운데에서도 첫번째로 꼽히힌다)


백상루.jpg                  









⑦ 시대를 앞선 국제화 - 교육 강국 고려 -  





예나 지금이나 한국사회에서 나라의 사무를 맡아보는 공무원이 된다는건 쉬운일이 아니다. 



' 아무리 힘들다 한들 얼마나 힘들겠어. ' 고시합격이 얼마나 어려운데. ' 

라고 생각 할수있겠으나..



과연 그럴까



고려의 관료가 되는길은 크게 두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음서와 과거]이다.


  


음서는 가문의 배경으로 관리가 되는 제도였고 


과거는 시험을 보고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


후주(後周)의 쌍기에 의해 광종때 도입되었다.




후주의 쌍기? 후주는 송나라의 전신이며


쌍기는 후주에서 무승군 절도순관 장사랑 시대리평사 라는 벼슬을 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왜 후주 사람이 고려의 과거제도를 건의 했을까?


 

그건바로 


쌍기가 고려의 관료였기 때문이었다.

+쌍기의 과거제 건의는 광종대의 곧 호족숙청과 황권강화정책으로 직결되었으니 그는 광종정권의 핵심인사였으며 멘토였던것이다

훗날 거란의 1차침입을 막고 강동6주를 설치했던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이라 일컫는 장위공(章威公)서희가 지공거 (시험관) 쌍기에 의해 이때 뽑혔다.






『고려사』 에 보면 



쌍기를 비롯 귀화한 중국인이 고려의 관료가된 사람들은 모두 40여 명에 이르렀는데


 

고려는 자력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와 발해 유민들을 더불어 


발해의 일부였던 여러 부족국들과 탐라국 등을 아우르는 통일제국(統一帝國) 이었던 만큼 


 

화합과 통합을 내세우며 여러 지방의 호족들과 신라 출신들을 우대하는가 하면


외국인을 포용하는데 있어서도 관대했으니 


 

그중 발해출신 유충정(劉忠正)을 비롯해 재상이된사람도 여럿이었으며 


중국인, 여진인 , 후에는 심지어 거란인 까지 넓은폭으로 수용하였다.  

+이들중 행적이 뚜렷해 -열전- 에 수록된 외국인은 재상을 포함해 10여명에 이른다재상이란 종2품이상의 최고위층을 말함.



 



글로벌 시대라하는 현재 21세기에도 


크고 강한나라의 외국인이 한국의 고급관료가 되는경우가 없었는데



하물며 중세에 중국 사람이 고려의 재상이 되었다는것에 생소하게 생각할수 있을테지만


위에서 보듯 고려시대에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원의 신생왕조들은 북방민족의 견제를 위해 고려와의 우호적 관계가 필요했고, 


고려역시 국가의 기틀을 잡고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중국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었다.

 








-불화속 고려의 고관


불화고관.jpg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국입장에서는 동방의 소국에 불과한 고려에 





이리도 많은 외국인들이 와서 정착하여 살았고 


굳이 벼슬길에까지 오르려했던 것일까 



국적 까지 바꿔가며 고려인으로 살고자 한이유가 무엇일까 하는것이다.





확실한것은 고려가 중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후진국이었다면 


중국인들이 고려에 와서 과거시험까지 볼 이유는 없었을것이다.





그이유는 다음 기록을 보면 알수있다.

 


◎ 『고려사』 권110 -이제현 열전-

 

충선왕이 “우리나라(고려)의 문물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이제현이 말하기를


“광종 이후 문교(文敎)를 닦아 서울에 국학(國學·국자감), 지방에 향교와 학당을 세워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문물이 중국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는 원간섭기때 날카로운 비평가로 유명한 이제현(李齊賢)이 충선왕과 나눈 대화중 일부이다.}

 

 


이제현 열전에서 보듯


고려의 문교와 문물은 광종대 과거제와 중앙집권화 등을 통해 크게 번성하고 자리잡혔으며 


그런 이유로 중국인들을 극진히 우대하여 받아들였음을 알수있다.


(1000년 사직의 신라를 뒤이어 건국된 고려였다. 기본적으로 고려의 문화가 열화되어 있던것은 아니지만 

광종은 중앙권력을 공고히 다지는 동시에 고려의 문화가 한 걸음 더 높은수준으로 도약하기를 희망한것이다)

 

 







- 광종 -


(호족연합체 고려를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시킨 군주로 평가됨)


광종.JPG                      


 ㄱㅈ.JPG




절대군주의 카리스마로 유명한 고려제국의 네번째 군주 광종은 



노비 안검법과 과거제등을 통하여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고 


황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화를 이루었으며 



개경을 황제의 수도라는 의미의 황도(皇都) , 서경을 서도(西都)로 개칭하고 


독자연호를 사용하는등 고려가 황제국임을 만천하에 알려 자주성을 드높였다.



또한 그는 여러 성을쌓아 고려의 동,서북 방면 영역을 확장하는 한편 신하들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황위를 이을 적통이 아니면 태자 칭호를 금하게 하여 질서를 확립하였는데 



이러한 개혁의 중심에는 귀화 중국인 쌍기등이 크게 조력하였고 


더 나아가 광종은 고려의 문화와 풍속을 향상시키려는 일환으로 중국인들을 적극 수용하였던 것이다. 





비록 후에 중국과의 원만한 교류를 위해 건원(建元-독자연호- 은 폐지하지만

 

그 결과 이때부터 고려의 문물 수준은 눈에 띄게 발전하였으니 


이는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재빠르게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눈부신 발전을 꾀했던 현명함이라 할 것이다. 

+연호가 제국의 정체성과 자주성에 절대적 의미를 갖지 않았던것으로 보아 

진덕왕 이후 신라가 당과 교류하며 연호를 폐지했던 흐름의 일환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고려초기인 광종조에는 


중국인을 무차별적으로 우대하여 받아들인 경향이있어 


기존 세력의 신료들 사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크게 나왔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 고려의 문화역시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자 


중국인이라도 고려의 관료가 되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고려의  황금기라 여겨지는 문종 때의 이야기를 보자.










- 고려 최고의 황금시대를 구가한 문종의 오른팔 해동공자 최충


최충.jpg       


 

◎ 『고려사』 문종 12년 (1058) 무술년


하물며 우리나라에는 문물(文物)?예악(禮樂)이 행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므로,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 『고려사』 문종 35년(1081) 신유년


임오일. 예빈성(禮賓省)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송나라 사람 양진(楊震)이 상선(商船)을 따라왔는데, 자신은 과거 응시생으로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붙지 않았다고 하니 

그 자의 말에 따라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하십시오.”


 
- ▷ 송나라 사람 양진이 과거에 계속 떨어지지 조정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 청원한것.

기본적으로 중국인이기에 과거시험에 있어 말과 글이 일치되어 유리했음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고려의 관료가 되기를 포기한다.



 



이처럼 


고려의 문물은 초기 광종대에 과거를 도입하여 번성해갔으며 그런 이유로 외국인들을 우대하였지만 



시간이흘러 문종대에는 


오히려 시험에 떨어진 중국인을 돌려보내고 중국과 교류를 끊어버려도 아쉽지 않을만큼 고려의 학문 수준은 절정에 이르렀다.






송 사신 서긍이 쓴『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거리에는 글읽는 소리가 가득하다' 라던지 

 

'고려인은 글을 읽지못하는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등의 기록들을 볼때 

 

 

당시 고려 사회는 기본적으로 학구열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화주의에 입각하여 우월의식을 가지고 고려를 바라봤던 서긍의 시각에서


곳곳에 고려문화의 우수함을 역설하는 평가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송나라가 역대 중국왕조 중에 군사적으로 약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중국역사상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로 꼽는왕조 역시 송이다.


 


하지만 그런 송나라와 비교하더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 문화수준을 갖춘 나라가 해동의 고려였다.


 


예나 지금이나, 유학은 문화적 수준이 높은 나라에 가서 하기 마련이다.


고려사 기록에 외국인 관리가 많은것은 그만큼 고려의 교육적, 학문적 수준이 높았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라 볼수있는 것이다.







고려는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임하면서도 

 

"중화" 의 울타리 안에서 자주성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성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외교관계를 주도해 나가던 나라였던 것이다.











⑧ 중세사회 공무원의 생활상   






- 과거제의 발달


과거.jpg               

        



고려의 관료가 된다는 것이 그리도 힘든일이었을까? 




초기 과거시험은 그절차가 단순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예비시험과 최종시험으로 나뉘어 복잡하고 어렵게 되었다. 




현종 15년에는 항공(鄕貢)의 숫자를 주현크기별로 제한하였는데 


이들은 반드시 계수관이 주관하는 계수관시를 거친 후  다시 개경 황도의 국자감에서 재시험을 치러 합격한 다음에야 


본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으며

+항공이란 과거(科擧)에서 지방(地方)의 제 1차 시험(試驗)에 합격(合格)한 사람을 말함




덕종 즉위년인 1031년에는 모든 응시자들이 본시험에 앞서 


예비시험격인 국자감시(國子監試) 를 치르도록 했다




예비시험인 국자감시에는 


중앙의 일반 국학생과 12도생(十二徒生) 가운데서 선발된 공사(貢士) 및 


계수관시를 거친 향공 등이 응시할 수 있었으며 일단 이 시험에 합격하면 본시험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사학12도란 사학의 원조격이라 할수있는 최충의 9재를 바탕으로 당대의 대학자들이 설립한 사립교육기관이다.




이어 본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서는 각 과목을 초 중 종장으로 나누어 3차례에 걸쳐 시험했고


이3장을 모두 합격해야 급제가 되었다. 이를 삼장연권법이라한다.





고려의 관료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니 


송나라 사람인 양진이 중국인이면서도 과거에 연거푸 떨어져 고국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던 이유가 납득이 간다.


이렇게 고려의 관료층은 걸러지고 걸러진 엘리트중에 초엘리트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 


(물론 글만 잘읽는다고 해서 나라가 흥하는건 아니지만..)





이런 높은 수준의 과거시험을 합격한 이들은 관료가 될수있었는데



관직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 합격했다고해서 모두 관료가 될수는 없었다.


하여 많은 이들이 관직 대신 동정직이라는 명예직을 받았고 보수는 있었지만


실제 관료와는 그 대우의 차이가 극명했다.



동정직에 있던 사람들은 관직에 나아가기를 고대했지만


과거 합격자가 실제 벼슬을 얻기까지 2~30년의 세월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으니


 

천재 문인 이었던 이규보도 23세에 급제한후 18년만에 비로소 관료가 될 수 있었다.

 

 





-아집도대련 


(관료들이 정원에 모여 시를 짓거나 그림을 감상하는 모습)


아집도대련.JPG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선발된 고려의 관료들은 



문,무 양반으로 구분되었으며 정1품부터 종9품까지


그인원은 문반 532명, 무반 3867명으로 모두 4399명이었다.

 


관료가된 이들은 먼저 관복을 장만했는데 


관복은 등급에 따라 자주색, 붉은색, 진홍색, 녹색의 4단계로 구분했고, 모자와 허리띠도 등급에따라 달랐다. 



6품 이상의 관료들인 참상(參上)은 임금과 함께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조회에 참여 할수 있었으며 


이들중 2품 이상의 관료들이 위에서 봤던 재상(宰相)이다.





이글을 소개하면서 중세의 공무원이라 한것은 


고려관료들의 삶을 봤을때 오늘날 공무원들과 비슷한점이 많기 때문이었다. 



먼저 이들은 근무의 성적을 평가 받았고 이것을 고과(考課)라 하였는데


성적의 기준은 근무실태와 상급자와의 관계 등으로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음으로 고려시대의 출퇴근 시간과 근무형태를 보자.



관료들은 보통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였는데 해가 긴 여름에는 7시에 출근하였고 


정기휴일은 오늘날의 일요일과 비슷한 개념으로 매달 1일,8일,15일,23일에는 근무하지 않았다.




오늘날 공휴일에 해당하는 날로는 고려 최고의 축제인 팔관회 , 연등회를 비롯하여 


설, 입춘, 한식 등 54일 이상이나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부모의 장례나 병간호를 위해 개인휴가도 쓸수있었다.


전체 휴일수는 정기휴일을 포함하여 100일을 넘지 못하도록 했는데, 

 

빡빡하고 빠듯할것만 같은 중세시대에 이정도면 꽤나 여유로운 근무환경이라 할수있지 않을까? 

+ 팔관회관련 참조 (http://www.ilbe.com/1309007959" target="_blank">http://www.ilbe.com/1309007959)



 



다음은 무엇보다 중요한 돈 문제다. 이들은 어떤식으로 보수를 받았나 



관료들의 보수로는 땅과 현물을 받았고 땅을 받는것을 전시과라 하는데 



전시과는 엄밀히 말하자면 토지를 받는게 아니라  


그 토지에서 나오는 수확량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것이었다.

 


여기서는 땔감을 얻는 시저도 개간하여 경작지로 이용이 가능했으니


예상치 않은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다.

+ 황제로부터 공후백 봉작을 받았던 종친, 또는 제왕(諸王)은 영지인 식읍을 받았는데, 고려의 5봉작에 대해서는 전글들에서 설명했다. 

중원의 왕조와 마찬가지로 친왕의 영지에는 실봉과 허봉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허봉이였으니 이는 명예적,상징적 의미가 컸다고 봐야 할것이다.

하지만 최씨일가를 비롯한 유력한 제후 일부는 실제적인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현물로는 녹봉이라 하여 쌀, 보리 등의 곡물이 지급되었고 


경우에 따라 베나 비단 등을 받기도 하였는데 


녹봉을 받을 수 있는 국가 공인 증서를 녹패 라고 한다.



 



바늘구멍 같은 등용문을 뚫고 어렵게 어렵게 관료가 된 이들의 생활이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일상을 보냈던거같다. 

 



그렇다면 은퇴한 관료들은 어떤 생활을 보냈을까?

 

요즘에는 택시라도 해서 생활을 유지하는게 일반적이던데.. 




     

                  

    

고려시대 은퇴한 원로들의 모임을 기로회(耆老會) 라한다.  




-연정 계회도  


연정계회도.JPG                     




이 기로회는 최충헌 집권당시 해동기로회에 관한 기록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모임은 최충헌 집권당시의 재상들이 주축이었다.



아래의「최상서명악부송기로회유환」은 당시 최고 집권자였던 최충헌이 


악부에 명하여 악사들로 하여금 기로회를 찾아 즐거움을 주었을 때 이에 화답하여 이인로가 지은 것으로 

 


비록 무신 집권기로 한참 정국이 어지러운 시대 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한 관료들의 여유로움과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옅볼수 있다. 

 


-이인로 <최상서명악부송기로회유환>


백발들 모여 즐기며 담소하는 자리에 


오직 바람과 달만이 금잔을 권하였네.


수레와 말 탄 손들 총총히 흩어질까 봐


일부러 피리랑 노래랑 얻어 왔네.


만취해서 넘어지니 비로소 하늘이 넒은 줄 알고


비틀거리며 돌아갈 제 옥산이 다투어 무너지네.


밤 깊어 초옥에서 자다가 깨니


바로 요대의 새벽 꿈결로 돌아간 것 같구나.



-▷ 이들은 모여서 시와 술, 거문고 바둑 등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보고 '지상의 신선' 이라 불렀다고 하며 이후 해동기로회는 원간섭기를 지나 기로회의 모범이 되었다. 

 


 



이처럼 고려의 관료들은 은퇴후에 사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서로 즐기며 세월을 보냈는데 

 

혼란한 세상속에 뛰어난 학식을 바탕으로 악바리정신으로 살아남기위한 노력과 세상에대한 



여유를 모두 갖추었던 이들의 생활이 진정한 선비의 삶이란 이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들게한다.  











여기까지 고려시대 관료들의 삶을 봤는데,  하늘에 별을 따는것만큼이나 어려운 등용문, 


관료들의 생활상이 오늘날과 별다를게 없지않나싶다. 


역시 사람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인가 싶기도하고.. 




하지만 외국인 이라도 능력을 우선시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시스템은 


현재의 대한민국이 천년전 고려로부터 한수 배워야할 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 김종훈 미래부 장관 사퇴 했을때 , 지금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르는...)


 











3줄요약.



고려의 학문적 성장과



귀화 외국인들의 관료진출  그리고



중세 공무원들의 생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