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올린 일베갔던 글들 몇개 사진이 꼬여서 모링한테 수정좀 부탁했더니 전부다 삭제해버렸다 ㅡ ㅡ...
건의함에 올렸더니 복구는 못해준다고 죄송하다 하더라..
정보글 써본게이들은 알겠지만 ,
글쓴거 많은애들이 읽어줘서일베 간것들이 작성글보기에 차곡차곡 쌓일때 그 뿌듯함이 뭔지 알거다.
고생해서 글쓸때는 여러사람이 읽어줄때 젤 보람있잖아
근데 글하나당 적어도 3~5 시간을 투자한 글들을 삭제해 버리면.. 글쓸 의욕이 나겠니들
내가 일베레벨먹자고 이짓하는것도 아니고..
일베간글 다시 올리는건 저런상황때문이니 정보글 많은사람들 읽게하자는 좋은생각으로 양해좀 바란다.
날라간 글들 전부 재업하고 내용보충해서 일베 보낸뒤에 다음편(묘청편) 쓸 생각이다.
쩝
내용보강해서 다시 올린다, 읽었던 사람도 다시한번봐바 ~ 더다듬었고 내용도 추가되었으니.
좀길어도 꼼꼼히 읽어봐들 아리송 했던것들이 많이 풀릴거야 .
[역사정보글]
1.고려와 중국의 조공,책봉 관계의 고찰
- http://www.ilbe.com/109025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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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무슨 황제국이야 황제 흉내만낸 외왕내제에 불과해 학교에서 글케배웠어'
라고 답 내려놓고 발끈하는 애들은
'광주는 무조건 민주화 운동이야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어 !' 라고 큰소리치는 좌좀들과 다를바가없다.'
대부분 "본문"에 충분히 이해가 갈정도로 써놨으니 꼼꼼히 읽어보고 그래도 납득이 안가는거있으면 기록과 팩트로 매너좀 지켜가며 논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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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고려" 하면 뭐가 떠올라? 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음.. 코리아? 고려청자...?! 태조왕건!!
코리아는 알면서 고려라는 나라가 세계속에서 어떻게 그들과 소통하며 이름을 알렸는지
고려청자는 알면서 문화와 사회의 꽃을 피웠던 고려의 황금기를 맞기까지의 그배경에는 어떠한 과정을 겪었는지
태조왕건은 알면서 우리역사상 전무후무한 전국시대. 후삼국시대가 얼마나 흥미진진했는지에 대해서는 잘몰라.
고려사를 그저 삼국시대와 조선시대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지
여기에는 교육의 문제도있겠고, 사료부족의 문제도 있겠으나
어찌되었던 우리는 고려를 그렇게 이해하고있다.
그래서 나는 찬란했던 우리의 중세사 "고려"에대해서 조금더 깊이, 구체적으로 이해해보자는 취지로
고려관련 역사글을 써보려해.
글쓰면서 나도 봤던거 복습하고 몰랐던부분 알게되는것도있어 보람있게생각하고 있다.
전에누가 왜 고려 관련글만 쓰느냐고 물어본적이있는데,
먼저 너무 아깝다는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역동적이고 생동감있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대해 많이들 모른다는게.
나도사실 어릴때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처음 관심을가졌을때에는 무조건 고구려 짱짱맨 !
했었는데 조금더 깊이 파볼수록 값지고 매력있는 역사가 고려사 라는생각이들게하더라
두번째로 일베역사글중에 고대사, 근세사등은 유익한 자료 많이 올라는데 비해
고려사 관련해서는 글자체가 잘 안올라오더라고,
다른부분은 여러 정보게이들이 고생해주고 있으니 나는 고려사를 중점적으로 탐구해보기로 헀음.
지금까지는 고려의 체제 이해에 관한 글을 썼는데 (본글, 팔관회)
앞으로 굵직한 사건위주로 또는 잘들 모르는 흥미있는 부분에 대해서 써볼생각
(세계속의 국제도시-고려황도개경 , 후삼국-천하영웅들의 시대 ,
희대의 난신 -이자겸 , 최대규모 국가총력정벌전 -여진정벌, 고려의 황금기를 구가하다-문종황제) 등등
여요전쟁에대해서는 올라오는 글이 있는거같아서 패스하려고함
+저중에서 또는 관심있는 부분 추천들해주면 참고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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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그럼 지금부터 황제국 고려에 대해서 시원하게 파헤쳐 보자 }}
▷
서로가 황제를 참칭하고 자부하던 동북아의 중세시대
과연 진짜 의미의 황제국이란 어떤의미 일까.
타국 으로부터 말로만 황제국임을 인정받으며 내가 황제요 내가 천자요 하고 거드름피우는것인가?
아니다.
그기준이란 분명 당시의 실질적 국제질서가 되어야한다.
단언컨데 나는 우리가 중화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자학적 역사관에서 필히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한다
황제란 애초에 왕중왕을 뜻하는 , 중국에서 만들어낸 절대권위를 나타내는 단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권위"가 무너져 버렸다면 황제국으로서의 의미가 있는걸까?
시대에 따라 임금을 나타내는 칭호는 변해왔다. 황제냐 대왕이냐 왕이냐는 중요하지않다.
"왕" 이란 단어역시 그의미가 지존이자 절대자를 뜻하는 단어였고, 그 왕이 흔해지자 왕중의 왕을 뜻하는 의미로 나타난게 대왕, 또는 황제다.
황제가 왕중의 왕을 뜻한다고 해서 몽골의 절대자를 뜻하는 단어인 "칸"이 황제보다 아래에 있는가?
칸이 황제이상의 의미를 갖느냐, 아니면 일개부족의 우두머리일 뿐이냐를 결정하는것은 바로 국가의 위상과 국력이다.
즉 임금을 황제라고 부르느냐 대왕으로 부르느냐 또는 대칸으로 부르느냐 이따위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말이다.
※ point는 중화중심에서 "황제" 라는 단어에 연연해 하지말고
당시의 상황과 국제질서를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파악해야한다는것이다
다음을보자
cf)
강성해진 "서하"는 독자연호를 선포하고 황제국임을 천하에 알렸다. 하지만 송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서하와 송은 전쟁을 하게된다.
결과는 송의 참패였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 되어가자 서하는 송과의 교류가 끊김에 따라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결국 양측은 송(宋)이 매년 은(銀) 7만2천냥, 비단 15만3000필, 차 5만근을 서하(西夏)에 지급하고, 국경에 무역장을 개설해 교역을 허용하는대신
-송은 서하에게 조공을 하는댓가로 황제국의 체면을 살린것이다.
이러한예는 송과 요 사이에서도 볼수있다.
송은 요와의 전쟁에서 패배로 "전연의맹" 이라 불리우는 굴욕적 조약을 맺는데,
내용은 송이 형, 요가 아우가 되는 관계를 맺는 대신에 송은 요에게 막대한양의 조공을 바친다는것이다.
-요는 송의 체면을 살려주는대신 이익을 챙겼고. 내막은 송이 요에 굴복하여 조공을 바쳤던것이다
+결국 송은 후에 고려의 제번(속국)이었던 여진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황제둘이 포로로 잡혀가 나라가 망하는 참변을 당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 겨우 명맥을 유지 하지만 금나라에 신하의 예를 취하고 조공을 바친다.
이러고도 송나라가 진정한 황제국이라고이라고 자부할수있을까?
송나라는 중국의 한족이고 서하는 송의 책봉을 받았으며
요는 송의 아우였으니 천하의 중심은 송나라다! 라고 할수있는가 이말이다.
☞ 그래도 송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되는사람은 철저하게 한족중심의 자학사관에 찌들어있는것이다.
그게아니라면 본인이 한국말을 하며 중국역사를 배우는 조선족이거나
이상하게 한국사람들은 요,서하 등이 황제국이라는것에대해서는 별다른 토를 달지않고 수긍하면서도
실제 국제질서에서 그들 이상의 대우를 받았던 우리역사에 대해서는 스스로 깎아내리고 작아지려든다.
참 아이러니하다
이를 바탕으로 본인은 대내외로 실질적인 권위를 세우고 국가위상을 인정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할수있는 나라여야지 진정한 황제국의 의미가 있다라고 말하고 싶은것이다.
다시말해 체면치레가 아닌 실질적 관계를 초점으로 두고 접근해야 한다는것
지금부터 위에서 짚은 포인트를 중심으로 제국의위상과 국가체제를 모두 갖추었던
우리역사 고려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이해해보자. 먼저 체제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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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본적으로 고려가 천자국 체제를 갖추었던 증거에 대해서 정리해보자
-천자국 고려
① 고려는 임금을 만나러가기까지 5개의 문을 통과해야한다 (조선같은경우 제후국의 예로 3개의문을통과)
② 정치체제에있어 천자국 체제인 6부를 사용했다 (조선같은경우 제후국의 예로 6조를 사용)
③ 용어 자체가 천자국의 그것과 같음 (폐하, 절일, 황상, 태후, 태자, 조서, 짐 등등)
④ 고려황제는 황제가 입는 담황색의 황룡포를 입었다 (조선 같은경우에는 빨간색 곤룡포를 입었다)
⑤ 천자국이 제천의식을 행하는 원구단이있었다 (이는 대한제국에와서 다시 부활된다)
⑥ 친왕제를 변용해 천자국의 제도인 봉작제를 시행하여 제후왕 들에게 식읍과 작위를 하사했다.
⑦ 그밖에 금석문에 남아있는 많은 기록들 (금석문은 1차 직접 사료로 신빙성이 매우높다할수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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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황궁 만월대
고려와 조선의 궁궐문 차이 (황제국 고려와 제후국 조선)
+고려황궁 만월대의 궐문은 황제국의 예에 맞게
주작문,승평문,신봉문,창합문,전문을 거쳐 정전인 회경전에 이르기까지 5개의문을통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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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관제
성종(成宗)대에 마련된 고려시대 최고 중앙관부로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의 2성과
이(吏)·병(兵)·호(戶)·형(刑)·예(禮)·공(工)의 6부(部)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는 원래 당(唐)의 제도를 모방한 것인데 고려와 달리 당은 3성병립제로서,
조칙(詔勅)을 작성하는 중서성(中書省)과 이를 심의하는 문하성(門下省) 및 그것을 맡아 집행하는 상서성(尙書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고려가 단순히 당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고려초에는 광평성(廣評省)과 내봉성(內奉省)·내의성(內議省) 등 경종초까지 유지되는 중앙관부가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2성6부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즉 고려초의 제도와 당나라의 제도가 결합하여 독자적으로 운영된 2성6부제가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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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구단
천자국만이 하늘에 제를드리는 둥근단으로 고려가 황제국이라는 명백한 근거
(대한제국에 와서 부활)
-->고려의 백성들은 임금을 황제로 여겼고 천자로 불렀다.
외교문서에 칭제를 하지않았으니 외왕내제일뿐이라고?? 억지 노노하자
이러한 제천의식을 주기적으로 드린 고려가
외국의 사절이 왔을때나 외국인들 앞에서만 황상폐하로 부르던것을 주상전하로 부를수는 없는노릇이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 태자전하가 세자저하로 황성이라 부르던것이 왕성으로 , 병부상서가 병조판서로 될수도 없는것이지
실제로 다른나라가 이런 고려를 터치 하지도 못했을뿐더러 (그랬다가 요나라 처럼 박살남)
이미 국제사회의 인식에서 고려는 황제국으로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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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봉작제
-영화 공작부인
봉작 (封爵)[명사] 1. 제후(諸侯)로 봉하고 관작(官爵)을 줌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cf) 평양공(平壤公) - 현종 4남 . 낙랑후(樂浪侯) - 정종 3남 .광평백(廣平伯) - 종실 원(源) 등등 ..
▷봉작이 황자들에게만 부여된것은아니다.
황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후(侯)가 초봉되었으며(태자는 황위를 이을것이므로 봉작을 하지않았다)
기타 황실종친들과 유력호족 및 공신들에게도 식읍과 작위를 하사했다.
+최고작위인 공(公) 같은경우에는 식읍3000호가 내려졌다고 기록하고있음
cf) 최충헌: 晉康公(진강공) .
김준: 海陽侯(해양후)
고려는 종실1) 사람으로서 친존(親尊)한 이를 책봉2)하여 공(公)이라 하였고,
그 버금 가까운 이를 후(侯), 비교적 촌수가 먼 이를 백(伯), 어린이를 사도(司徒)·사공(司空)3)이라 했으며, 이들을 총칭하여 제왕(諸王)이라 하였다.
출처:『고려사열전- 종실서문』
☞
〈무릇 우리 황(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1077년) >
※ 親王 [ 친왕 ]황제(黃帝)의 아들이나 형제(兄弟)를 이른는 말
?? "친왕" 이 나온다.
용수산(龍首山) 고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고려조의 문종(文宗)이 일찍이 이 산에 올라서,
친왕(親王)과 재추(宰樞)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 해주목
※재추: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의 대신들을 가르키는말
"친왕" 여기에도 나오盧
觀光順化 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 食邑八千戶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팔천호
>> (고려 경종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을 낙랑왕에 봉했으며 식읍8천호를 봉했다)
+신라의 경순왕을 낙랑왕에 봉했다는기록이다. 곧 고려의 임금은 왕중의 왕 . 황제였던것이다
또한 기록에서 이자겸을 조선국공(朝鮮國公) 왕기를 개성국공(開城國公) 등에 봉한것을 보아
당시 고려의 황실종친과 황자, 공신들이 친왕으로 인식되었고 고려 사회에서 봉작제가 친왕제의 성격을 띄고있었음을 짐작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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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금석문들을보자
임금(皇)께서 피석하여 공경을 다하였고..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965년)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우리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도 지극하신 정의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금상황제(今上皇帝)의 만세를 기원합니다.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977년)
+ 태평이 송의 연호(태평흥국)라는 주장들이있으나 구태여 고려의 불좌상에 송의황제를 칭송할
까닭이 없으므로 본인은 경종의 연호라고 추측한다
봉황(鳳皇)의 은혜를 입었으며..
연곡사현각선사탑비(979년)
임금(皇)께서는 이에 크게 감동하고..황유(皇猷)입음을 경축하여..
지곡사진관선사비(981년)
광종대왕(光宗大王)이 황(皇)위에 올랐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1025년)
엎드려 황제폐하(皇帝陛下)의 덕이 하늘과 땅에 떨치고..
보현사석탑(1044년)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부석사원융국사비(1053년)
황상(皇上)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 봄 정월에 이르러..
칠장사혜소국사비(1060년)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이자연묘지명(1061년)
무릇 우리 황(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1077년)
공이 황후(皇后)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황후(皇后)가 안에서 공을 불러..
최계방묘지명(1117년)
5남 응추는 황자(皇子)인 극세승통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식묘지명(1156년)
태자(儲皇) 역시 그 아름답고 고움을 슬피 여겨 특별히 제물을 내리고 각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왕영녀왕씨묘지명(1186년)
때는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원년 모월 모일이다.
개천사석탑(1214년)
황태제(皇太弟)가 바로 신종(神宗)이다.
최충헌묘지명(1219년)
[거란의] 천자는 공이 우리 임금(皇)의 친족이고..
최의묘지명(1223년)
::금석문에 기록된 칭제기록만 보더라도 당시 고려인들은 임금을 천자. 즉 황제로 인식하고있음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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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다음은 천자국 고려의 실질적인 운영질서에 대해서 알아보자
◎ 팔관회
(황제의 권위를 세우고 정치력을 강화하던. 불교행사 이상의 의미로 국가 최고의행사. -팔관회 관련글 참조-)
●고려의 무역범위
+교지국- 베트남// 섬라곡국- 타이// 마팔국- 인도// 대식국 -이슬람
-이외에 고려는 송.요.여진.왜. 기타 수많은 부족국가 및 소국들과 교역하였다
-고려가 동아시아의 소국에 불과헀다면 저 먼나라의 상인들이 고려까지 교역을 하러올 이유가 있었을까?
●고려의 대외무역 (조공) 기록중 일부만 고려사절요를 토대로 정리한것
태조:월국(吳越國) 사람들이 고려로 귀순·투항하다 .탐라국(耽羅國)의 태자 말노(末老)가 조공을 하다
정종:동여진(東女眞)에서 말 700필을 조공하다
현종: 남초(南楚)에서 조공을 하다 .철리국(鐵利國)에서 조공을 하며 속국이 되기를 자청하다.
서여진(西女眞)이 말(馬) 등을 조공하다 .강남인(江南人)들이 토산물을 조공하다 .동흑수국(동흑수국)에서 토산물을 조공하다 .
불내국(弗奈國)에서 토산물을 조공하다.대식국(大食國) 사람들이 토산물을 조공하다
+대식국이란 당대 초강대국 이슬람 제국[사라센제국]을 말함.
대식국이 고려의 속국 이라는것이 아니라 이를통해 당시 고려의 무역규모를 짐작할수있다
정종:동서번국(東西蕃國), 북여진(北女眞), 서북여진(西北女眞), 탁라( 羅)에서 토산물을 헌상하다
문종:.호남(湖南)과 형호(荊湖)에서 조공사절이 오다 .서번(西蕃)의 장군을 고려의 장군으로 임명하다
-->몇가지만 발췌한것으로 이러한 기록은 고려사 전범위에걸쳐 심심찮게 찾아볼수있다
+현종 떄의 기록만 살펴보자
- 현종 때의 대외무역(조공) 기록중 일부만 발췌한것-
기유일. 여진말갈(女眞靺鞨)의 목사(木史)가 부락민들을 데리고 와 입조하므로, 작위와 의복과 기물을 내려주었다.
신축일. 송나라 천주(泉州) 사람 임인복(林仁福) 등 40명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병신일. 송나라의 천주(泉州) 사람 이전(李
) 등 30여 명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묘일. 동여진 추장 아로대(阿盧大)와 서여진 추장 아개(阿盖) 등이 와서 입조했다
무진일. 철리국(鐵利國) 임금 나사(那沙)의 사신인 아로태(阿盧太)가 와서 토종말을 바쳤다.
경인일. 동흑수국(東黑水國) 추장 구돌라(仇突羅)가 와서 토종말과 병장기를 바쳤다
병자일. 탐라(耽羅)에서 특산물을 바쳤다
갑인일. 대식국(大食國) 의 열라자(悅羅慈) 등 백 명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이슬람제국)
신사일. 대식국(大食國)의 만하(蠻夏)·선나자(詵羅慈) 등 백 명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계축일. 탐라의 세자(世子) 고오노(孤烏弩)가 입조해 왔으므로, 그에게 유격 장군(游擊將軍) 벼슬을 주고 예복 한 벌을 내려주었다.
●다음은 귀주대첩 이후 주변국들과의 조공및 무역기록이다
경신 11년(1020)
1.흑수말갈(黑水靺鞨)의 알시경(閼尸頃)ㆍ고지문(高之門) 등 24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2.서여진의 추장 고두화(高豆化)가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3.동여진의 검불라(黔弗羅) 등 7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4.송의 천주(泉州) 사람 회지(懷贄)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5.여진의 귀덕장군(歸德將軍) 불나(弗那)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6.동여진의 추장 달로(達魯)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쌀 3백 석을 바쳤다.
7.흑수말갈 오두나(烏頭那) 등 70여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8.불내국(弗奈國)의 추장 사가문(沙訶問)이 여진의 노울달(奴鬱達)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신유 12년(1021)
1.봄 정월에 흑수말갈의 추장 아두타불(阿豆陀弗) 등이 와서 말과 활ㆍ화살을 바쳤다.
2.2월에 거란이 어사대부(御史大夫) 요거신(姚居信)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3.동여진의 회화장군(懷化將軍) 마저개(摩底介)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4.철리국(鐵利國)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전과 같이 귀부하기를 청하였다.
5.거란 동경의 사자 산기상시(散騎常侍) 장징악(張澄岳)이 예물을 가지고 왔다.
6.흑수말갈의 소물개(蘇勿盖)와 고지문(高之門)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7.동서 여진의 추장 아로대(阿盧大)와 아개(阿盖) 등이 내조하였다.
(중원의 송이 굴욕적 외교를맺고 조공을바쳤던 요나라를 대파한 당시 고려의 국제적 위상은
그야말로 최절정기였음을 수많은 조공,무역활동을 통한 국제정세속에서 알수있다)
이렇게 고려는 주변 소국및 부족국가 위에 천자국으로 군림하며 영향권을 행사했고 당대의 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했다 (위에 팔관회 관련 링크글 참조)
허접 나부래기들 거느리면 뭐하냐고? ,
철리국같은경우 만주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던 국가였음에도 고려영토로 귀속되기를 청했고
당나라의 골칫덩이였던 흑수말갈은 말갈세력 중에서도 최고로 강성해 발해 마저도 직접 지배는 못했으며
여진은 후에 금제국을 세워서 요 송을 날려버린다.
+참고로 여진정벌의 스타 윤관이 죽고 4년뒤에 여진은 금나라를 세우고 동아시아를 제패한다.
다시말해 당시 고려가 상대한 여진은 금황실(완안부)과 같다고 볼수있으며 한참 강성한 발흥기의 여진이였다고 할수있다. (여진정벌편 참조)
++ 단순교역을 두고도 조공왔다고 뻥튀기하는 중국과달리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책봉 - 관계에 대해서는 논문 몇개만 읽어봐도그 허구성 을 알수있다.)
기록에서의 연계성으로 보아 고려는 이들에대해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알수있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이 전쟁으로 고요전쟁은 막을내렸다.
이후 많은주변부족이 조공을해왔고, (심지어 요의 관첩을 받던 여진족이 요의 그것을 버리고 고려에 귀속을청해온다)
대거란전에서의 전리품과 여진족을 데리고 송 수도 개봉(카이펑) 에 가서 승전행사를했을정도로
당시고려는 동아시아 최고의 위상과 발언권을 가지게되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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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조공 책봉 관계는 누차 말했듯 고려입장에서 국가의 실익을 위해 겉으로 체면을 유지해주는것.
즉 형식치례 그이상 이하도 아니였다. (위에 링크 해둔 일베갔던글中..)
송사 외국열전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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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녕(熙寧)] 3년(A.D.1070
군(郡)·현(縣)에서 [고려(高麗)의 사신을] 접대하는 옛 준례가 없어 백성들이 퍽 괴로웠는데, 규정을 만들어 반포(頒布)하고,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또 고려(高麗) 사신이 중국말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재리(財利)를 엿보는 자들이 사사로이 왕래할까 염려하여 [고려(高麗) 사신이] 이르는 곳 마다 왕래를 금지시켰다
○ [희녕(熙寧)] 9년(A.D.1076; 高麗 文宗 30) 에 또 최사훈(崔思訓)을 보내 오자, 중귀인(中貴人)에게 명하여 도정(都亭)· 서역(西驛)의 예(例)에 따라 객관(客館)을 수리하여[註167] 고려(高麗) 사신들을 더욱 후하게 대우하도록 하니,사신으로 오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 정화(政和) 연간(A.D.1111~1117; 高麗 睿宗 6~12) 에 고려(高麗)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註203] 예우(禮遇)가 서하국(西夏國)보다 위에 있었고, 요(遼)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 압반관(押伴官) 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註211]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고려(高麗)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 이는 송나라의 『송사』 내용을 발췌한것들이다.
송에서는 고려사신을 조공사가 아닌 국신사로 맞았으며 요의사신과 같이 추밀원에서 최고수준의 예우를 했다.
송이 조공을 바치던 서하보다 고려가 상위대우를 받았던것이다
또한 고려의 사신을 접대하느라 송의 백성들이 괴로웠다고하며 그 대우가 후해져 사신으로 오는자가 더욱 많아졌다고 한다.
무슨의미일까? 각자들 해석해보자 .
게다가 국가를 미폐케 하였다고하니 한마디로 고려는 송에게 삥을 뜯어가는 것이였다
※ 그런데 재밌는건 이런기록이 송나라에 국한된것이 아니라는것.
역시 -송사-의 기록이다
[고려(高麗)의] 사신이 거란(契丹)에 이르면 더욱 거만하고 포학스러워 관반(館伴)이나 공경(公卿)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함부로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으로 쳤다.
이번에는 고려사신이 거란인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질을 한단다..
송이(자신들만 당한게아니라는)자존심을 살리려고 거란을 깎아내린 기록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알수있는것은 송이 고려에 대해 상당히 위축되어있음이다.
※ 이런 기록들이 우리측 역사서도 아닌 중국측 기록정사에 떡하니 남아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포장하고 허세부리기 좋아하는 중국역사에 말이다.
후에 요, 송이 군사를요청을 했을때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다
(조공하고 책봉이나 받는 신하국따위가 감히 대국의 명을 거절할수있는가?)
결국 요,송 모두 곧 여진의 금나라에 의해 나라의 문을닫게 된다.
::이처럼 고려는 사실상 조공외교(중국인들 입장에서의 허울뿐이였던)를 통해
국가의 실익과 제국의 위상을 동시에 챙겼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당시 중원통일 패권국이 없기에 고려가 기를 필수있었다고하는데,
고려가 싸워이긴 요는 유목제국 중에서도 손에꼽는 강력한 제국이였으며
군사력으로는 당대 세계최강국이였다.
여타 한족 제국들에 비해 강했으면 강했지 결코 약했다고 볼수없을것이다.
(중국역사상 강성했던 제국은 거의가 유목제국이였음) ex- 수(선비) 당(선비) 요(거란) 금(여진) 원(몽골) 청(여진) 등등
그런 요제국의 최전성기의 황제가 40만대군으로 친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굴복시키지 못하였고
황실 친위군이라 볼수있는 10만대군이 고려에 와서 궤멸을 당하고 대패했다.
->소배압은 요 경종의 사위이며 성종은 경종의 맏아들이다. 소배압은 한마디로 요의 황실종친인것이다 (후에 그는 빈왕으로 봉해진다)
또한 소배압은 송군을 격파한 전적도 있는 명장이었다. 이런 그가 이끄는 거란군은 황실친위군 내지 요제국의 최정예병이였음이라
물론 대륙이 통일이되지않았기에 힘의 균형이 서로 팽팽하게 대립되었던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힘이 약했기에 상대적으로 고려가 자주성을 내보였다 말하는것은 옳지않을것이다.
(몽골제국 같은상황은 유래가 없는경우였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40여년 간이나 항전했던게 고려다.
조선의 인조가 40여일 만에 청에게 머리를 조아린것과 대비된다.)
+금에대한 사대는 고려내부의 정치적 성격이 많이 개입되었다고 볼수있다.(이자겸편 참조)
☞ 이렇게 명백한 증거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조공책봉 관계를 들어 고려는 황제국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외교를 통해 얻은실리와 그를 토대로 성장시킨 국력 , 국가적위상, 어느하나 놓치지 않던 고려의 실리외교와
기타 다른나라들의 사대조공은 그성격 자체가 다른것이다
가끔 고려가 제국이면 대한제국도 제국이고 일본도 제국이냐는 반론들이 들어오는데. 그것과는 애초에 개념자체가 다른얘기이다
일본이 아무리 천황이라고 떠들어봤자 당시 중국이나 한국에서 일본을 최고 대우한다거나 일본을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돌아갔던적은 없었다.
동아시아균형의 한축을 담당했던 고려와 일본은비교대상이아니였던것이다
++ 참고로 송나라 사람인 곽약허의 [도화견문지] 에보면 일본은 고려의 속국이라고 기록하고있다
(일본이 고려의 속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정세 에서의 일본의 위치를 짐작할수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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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시원하게 정리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해 안가는 부분이있다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많이들 궁금해하는거 두가지만 추려봤다
1. 그런데 왜 고려사에는 제후국 용어와 황제국 용어를 혼용해서 썼는가
(왕태자,왕후 등등)
▷고려사의경우 1차직접사료인 『고려실록』 이 현재 남아있지가않은상황에서 당대인의 시각으로 고려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태·혜·정·광·경·성·목의 7대실록 .총 36권이었으나 왜란때 춘추관에서 소실됨)
그러므로 간접사료인 고려사,고려사절요등을 통해 추정해 보는것이 일반적인데,
이사서들은 조선조에 와서 편찬된것이다.
고려사를 조선에서 편찬했으니 제후국이였던 조선의 시각에서 볼때
자신들이 멸한 고려가 황제를 참칭하는것에 대해 주관적 개입이 없었다고 볼수없었을것이다.
이는 선초에 와서 고려관련 역사서가 여러번 재편되었던것, 고려시대에 편찬한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를 자주국의 예에 따라 본기부터 기록한반면
고려사는 기전체사서임에도 불구하고 본기없이 세가부터 기록하는점 을보면 알수는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황제 보다는 전통적으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썼고
당시 고려에게는 그자체가 생소했기때문에 혼용해서 사용한 기록이 남아있을수가있다
(중국과 달리 태자를 여럿두고 그중 적장자를 "정윤"으로 부른것 등을보면 국초에는 그 체제가 확실하게 자리잡지못했음을 알수있다
물론 대왕이라는 칭호 역시 왕중의 왕 즉 황제와 같은 뜻으로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자주국이였다.
이런이유로 중국인들은 조선의 왕들중에서 세종대왕을 "대왕"으로 높여 부르는것에대해 의아해 한다고 한다)
2. 고려.. 제국치고는 영토가 너무 작은거아니냐
▷고려의 영토에 관해서는 학자들이 계속 연구중이다.
윤관이 쌓은 9성의 위치역시 아직 제대로 밝혀진것이아니며
위에서보듯 만주의 철리국이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고 귀부하기를 청했던것, 『금사』에 금시조가 고려인이며 여진은 고려를 대대로 부모의 나라로
여겼다고 한점과 고려사의 기록들을 들어(여진정벌편참조)
많은 부족국가들에 기미주를 설치하여 간접지배했으며 때로는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하여 직접지배헀음을 알수있다.
++ 다음 기록들을보자
①『고려사』현종 17년(1026) 병인 윤 5월
甲子 契丹遣御院判官耶律骨打 來請假途 將如東北女眞 不許
갑자일에 거란이 어원판관(御院判官) 야율골타(耶律骨打)를 보내어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리려 하였는데 불허(不許)하였다.
→ 고려의 영토가 함경도 일대뿐이였다면 거란이 고려에게 길을 빌릴 이유가있었을까.
이는 당시 고려가 여진으로 가는길목을 영토로 삼고있었음을 방증 하는것이라 볼수있다
② 『고려사』지리서(地理序)
惣京四 牧八 府十五 郡一百二十九 縣三百三十五 鎭二十九 其四履 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句麗 而東北過之 今略據沿革之見於史策者 作地理志
모두 합하여 경(京)이 4개, 목(牧)이 8개, 부(府)가 15개, 군(郡)이 129개, 현(縣)이 335개, 진(鎭)이 29개였다. 그 사방 경계를 보면, 서북은 당(唐)나라 이래로 압록(鴨綠: 압록강)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다.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이제 대략 사책에 나타난 연혁에 근거하여 지리지(地理志)를 짓는다
→ 고려의 동북쪽 경계가 고구려를 넘어 섰다고 기록하고있다 (발해의 경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예상된다)
③ 『고려사』지리서(地理序)
其所管州郡 共五百八十餘 東國地理之盛 極於此矣
다스리는 주군(州郡)이 모두 오백팔십여 개였으니 동국(東國:여기서는 아국[我國]과 비슷한 의미) 지리의 번성함이 여기서 극치에 달했다.
→ 고려의 영토가 우리가 배운 대로 압록강선과 천리장성에서 멈춰 큰 변화가 없었다면 지리의 번성,
즉 영토의 넓어짐을 이러한 표현으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몽골비사』에는 쿠빌라이칸이 말하기를
-고려는 만리나 되는나라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친히 쳐들어가도 항복을 받지 못하였으나,그 태자가 직접 내 앞에 오니... 라고 기록한것을 보아
당시 고려의 영토 작지않았음을 짐작하게한다,
설령 만리가 정확한 수치가아닐 지라도 당시 고려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으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수있다.
[김창현 -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꾸다 中..]
고려의 여진지배는 문종때에 절정기에 다다랐다.
문종27년 2월에는 이미 고려에 귀순한 동여진 귀순주의 도령대상大常(고려의 관작), 고도화古刀化,창주昌州 의 도령 귀덕장군(고려의 관작) 고사高舍, 그리고 전성주氈城州 -공주恭州- 복주服州-온주溫州-성주誠州의 도령(지도자) 등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 안으로 붙어 군현이 되기를 요청했다.
아예 고려의 지방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어 귀화해 고려인으로 살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수용되었다.
동북 변방 15주州 바깥의 동여진이 서로 이어 귀부하자 문종이 27년 4월에 그들을 고려의 군현郡縣으로 편입했다.
5월에는 서여진의 여러부족이 동여진의 사례에 의거해 고려의 주군州郡이 되기를 요청하니 허용했다.
7월에는 흑수역어(통역관) 가서로加西老가 동여진을 설득해 고려의 주현이 되도록 만드는 데 공로를 세웠다며 그를 고려의 무반인 산원(정8품)에 임명하고 고맹高孟이라는 성명을 하사했다.
이는 흑수 즉 북만주의 흑룡강 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음을 시사한다.
고려의 북동쪽 영역은 허인욱의 연구(2001)에 의하면 만주 장광재령까지 뻗어나갔는데, 발해의 상경 용천부가 있던 지역, 즉 현재 중국의
지린(길림) 일대, 송화강 유역을 포함하는 거대한 땅이었다.
거란 요나라조차 용천(발해 상경) 까지는 고려의 북쪽 국경으로 인정했다.
고려정부는 귀순한 여진족 부락을 자치권을부여해 귀순주를 통해 지배하거나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해 직접 지배했다.
고려가 여진족 거주지에 여러 주州들을 설치하거나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시켰으니, 이러한 여진족은 단순히 고려를 형식적으로 사대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고려의 통치를 받았다.
고려에 귀순한 여진족은 우리 여진을 의미하는 '아번我蕃' 이라 불려졌는데 그들은 요와의 교류를 금지당했으며 종족간의 전투도 고려의 허락을 받고 고려 관원의 참관하에 행해졌다.
문종이래 백두산 북쪽 너머 저 멀리 장광재령에 이르는 광활한 만주벌판을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하여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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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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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까들이 많이 드는 반론중에 대표적인것 하나가. 고려는 몽골에 굴복한 비참한 역사라는것이다.
그렇다면 서하에 조공하고 요에 조공하고 고려에 휘둘렸으며 결국에는 금에 황제둘이 포로로 붙잡혀 나라가 망해버린 "송"이나,
유래없는 대제국을 이룩했지만 결국에는 도적떼(홍건적)가 근본이되어 일어난 명에의해 망하고 황제가 도망쳐서 죽은 "원" 의 역사는
볼품이 없이 하찮은 것들인가?
아니다 송 역시 당대 세계최고의 경제대국이였으며 몽골제국은 뭐.. 따로설명안하겠다.
세상 모든것에 영원이란 없는것이다. 그것은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어느 나라나 찬란했던 역사와 어두운 역사가있는것인데 어두운면만을 부각시켜 스스로를 깎아 내리려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정체성들을 돌아보며 부끄러워 해야할것이다.
-대하사극 제국의 아침
고려 : 내가 천하의 중심인데 너도 황제고 너도 황제라고? 그래 뭐 정그러면 니들 황제라고 인정해줄게
물론 말로만 ㅋㅋㅋ
대신에 실리는 우리가 챙겨갈테니 그렇게들 알고있으라이
우리는 그 실리 토대로 쌓은 국력으로 말뿐인 황제국이 아니라 진짜배기 황제국으로
3줄 요약
중세 동아시아는 다원적 천하관이 공존하던시대다.
중화사상 국가만의 천하관이 아닌 고려역시 독자적 천하관을 가지고 실용적 으로 운영해나가며 실질적 으로
국제사회에서 그 위상을 당당하게 인정받았던 명실상부한 천자국이였던것이다.
-// 다음글은 한국사 최대규모 국가총력정벌전 여진정벌에대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