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올린 일베갔던 글들 몇개 사진이 꼬여서 모링한테 수정좀 부탁했더니 전부다 삭제해버렸다 ㅡ ㅡ...
건의함에 올렸더니 복구는 못해준다고 죄송하다 하더라..
정보글 써본게이들은 알겠지만 ,
글쓴거 많은애들이 읽어줘서일베 간것들이 작성글보기에 차곡차곡 쌓일때 그 뿌듯함이 뭔지 알거다.
고생해서 글쓸때는 여러사람이 읽어줄때 젤 보람있잖아
근데 글하나당 적어도 3~5 시간을 투자한 글들을 삭제해 버리면.. 글쓸 의욕이 나겠니들
내가 일베레벨먹자고 이짓하는것도 아니고..
일베간글 다시 올리는건 저런상황때문이니 정보글 많은사람들 읽게하자는 좋은생각으로 양해좀 바란다.
날라간 글들 전부 재업하고 내용보충해서 일베 보낸뒤에 다음편(묘청편) 쓸 생각이다.
쩝
내용보강해서 다시 올린다, 읽었던 사람도 다시한번봐바 ~ 더다듬었고 내용도 추가되었으니.
좀길어도 꼼꼼히 읽어봐들 아리송 했던것들이 많이 풀릴거야 .
[역사정보글]
1. 고려가 황제국?
http://www.ilbe.com/1308166143
2. 천자국의 축제 팔관회
http://www.ilbe.com/1309007959
3. 조공, 책봉 관계에 대한 고찰
http://www.ilbe.com/109025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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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여진정벌. 눈부신 태평성대 그리고 먹구름
http://www.ilbe.com/1311302652
4-2. 여진정벌. 고려의 대반격 여진을 정벌하다 (완결)
http://www.ilbe.com/131630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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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lbe.com/1316447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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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권력에 도전하는 황권}
이자겸에 맞서 군사 쿠데타를 결심한 인종은
측근 김찬을 이수,김인존 등에게 보내 의견을 묻는데,
그들이 아뢰기를
'임금께서 이자겸의 외손이며 그세력이 가벼이 볼수 없기에 틈새가 생기기를 신중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를 받아 들이지 않는 인종은 ,
이미 정변에대한 의지가 확고했으니,,
인종 4년(1126) 2월
마침내 고려의 절대권력 이자겸을 제거하기위한 거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상장군 최탁과 오탁 등이 군사를 일으켜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등을 살해한뒤 그 시신을 궁성 밖으로 던졌다.
+최탁과 오탁은 자신들보다 계급이 낮았던 척준신이 척준경의 그늘아래 병부상서(국방부 제2장관)로 직급이 뛰어오른것에 불만을 품고 거사에 동참했다.
그러자 내직(內直) 학문(學文)과 낭중(郞中) 왕의(王毅)가 성을 넘어 도망하여
급히 이자겸에게 이사실을 알렸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그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고이기에 어찌할바를 몰랐다.
설마아니 할아버지이자 절대권력자 이자겸을 몰아내고자 임금이 군사정변을 일으킬줄 누가 감히 알았으랴
이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격분하였다.
그 자식과 동생이 느닷없이 죽임 당하였으니,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것이다
모두가 당황하고있는가운데 척준경이 앞장서 움직였다.
그는 곧바로 휘하 수십인을 거느리고
황성 남문인 주작문을 돌파하여 궁성의 저지선을 뚫고 신봉문에 도달해 큰소리로 고함을 쳤는데
그 일당이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르는 쿠데타 세력은 척준경의 기에 눌려 어찌할바를 모르고 문을 걸어잠구니
무장으로서 척준경에대한 두려움이란게 이정도였던것이다 .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고려의 궁성이 본래 전투를 수행 할수있는 발어참성에서 비롯된 황성이었다는 것이다.
정변 둘째 날이 밝아오자
척준경은 일단 군졸들을 불러모아 무장시켜 곧대군이 궁궐을 포위했고
이자겸의 아들 의장(義莊)이 승려300인을 이끌어 합세하자
이들과 함께 재진격하여 파죽지세로 궁성 정문인 승평문을 돌파한다.
이에 황실 호위군은 맥없이 무너져 갔으니,
감히 그누가 여진정벌의 영웅이자 전설인 척준경의 군대에 항거 할수있었을까.
제아무리 황명이라도 할지라도 쉽지 않았으리라
예상치 못한 전개 속에 상황이 위급해 지자,
인종은 의연하게 대처하듯 수습하고자 했는데
신봉문에 나아가 황산(黃傘)을 펼치고 좌정하는 묘책을 마련하니,
이를본 척준경의 군졸들이 모두 황공하여 절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더해 인종이 모른체 시치미떼며
'그대들은 어찌하여 황궁에 무기를 들고 난입했는가. 오늘의 일은 별일이 아니니 돌아들가라' 하니
군사들이 갑옷과 무기를 버렸다.
인종의 묘안이 분위기를 전환시켜 버린듯했다.
-즉위식에 보이는 황산
+황산이란 황실의 법가위장에 쓰인 노란 양산으로 황색은 황제를 상징한다하여 충렬왕27년 사용이 금지된다
하지만
이를본 척준경이 노하여 검을 뽑고 군졸들에게 호령하자
궁성을 수비하는 중앙군과 이자겸군 사이에 다시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격한 상황속에 의장의 승려 무리들은 도끼로 신봉문 기둥을 찍어대니
수비군이 문루 위에서 쏜 화살에 머리가 관통되어 즉사했고
심지어 인종을 향해 화살이 날아가기도 했을정도였다.
양측의 각축전이 심화되자 이대로 두고볼수 없었던 이자겸은
사람을 보내 난을 일으킨 주동자를 내놓으라며 협박하지만 인종은 묵묵부답이였다.
시간이지나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조급해진 척준경은 궁문에 불을내 주동자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평장사 이수(이공수)가 반대했지만
척준경은 굽히지않고 동화문 회랑에 장작을 쌓아 불을질러 나오는 자를 모두 죽이라 명령했다.
멀쩡하던 아들과 동생을 잃었으니 그의 이성또한 흔들리지 않을수 없었으리라
척준경은 이때의 실수를 훗날 크게 반성한다.
곧 화염이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번져 궁인들이 모두 놀라 도망갔고
척준경의 군대는 정전으로 통하는 좌액문에서 황실 경호군인 금위군과 대치한다.
매서운 긴장속에 밤이되자 인종은 몸을피해 궁성 후원 산호정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인종은 '짐이 김인존의 말을 듣지 않은것이 한스럽구나'
하며 섣불리 일을 벌인것에 대해 탄식하고
결국
이자겸에게 선양 하기를 결정한다.
서신을 받은 이자겸이 한참을 고민하던중
이공수가 '비록 조서가 있을지언정 어찌 감히 신하가 그럴수 있는가' 하며 다그치자
여러 재상들의 비난을 염려한 이자겸은 울며 겨자먹기로 이를 사양한다.
정변 셋째 날이 밝아왔다.
이자겸은 사람을보내 임금에게 남궁으로 나가기를 강요했고
인종은 궁성의 서화문을 나와 말을타고 황성을 빠져나와 연덕궁에 이르렀다.
인종의 수행원인 홍관이 서화문 밖에서 살해 당했고,
척준경은 부하인 낭장 장성(張成)을 보내 인종을 인도하던 오탁을 잡아죽이게했다
또한 군사를 보내 최탁,안보린 등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 대부분을 죽였다.
정변 넷째 날에는
이자겸이 지록연과 김찬을 멀리 유배보냈는데 ,
현종대의 충신이였던 지채문의 아들로 정변에 가담한 지록연은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에 의해 심한 고문을 당한뒤 호송되던중
이자겸 일당인 윤한尹翰에 의해 아직 숨이 붙은 채로 사지가 잘려 길옆에 묻혔다.
이렇게 무너진 황권을 회복하기 야심찬 도전을 했던 인종의 정변은 실패로 끝나게된다.
이사건을 [이자겸의 난]이라 하니
이후 이자겸의 천하권세는 더욱 기세등등 하게되고 황실의 권위는 바닥까지 추락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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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버린 천자국의 권위}
정변이 실패로 끝난 다음달 3월
이자겸은 강제로 인종이 자신의 개인 저택인 중흥택의 서원에 머물게 한다.
그곳 까지가는 길에 인종은 황룡포가 찢어지고,
복두가 기둥에 부딪혀 부서지기까지 하는 등 차마 황제로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치욕적인 모습이였다.
이를본 이자겸 부부가 통곡하며 말하기를
'황후가 입궁하면서부터 태자 낳기를 원했고, 성인(聖人)께서 태어나시자 하늘에 오래 살기를 빌어 안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천지 귀신이 나의 지성을 굽어살피시는데, 오늘날 도리어 적신(賊臣)의 말을 믿어 골육을 해치고자 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였다.
☞ 이말을 정리하자면 '그러게 누가 까불래?' 하고 권력때문에 가족을 내치려한 인종을 비꼬는것이였다
..............
+이자겸의 둘째 딸이 예종과 결혼해 인종을 낳았으니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가 되는것이였다
-발견된 고려시대 귀족의 저택규모
+이자겸의 중흥택은 서원 정사를 돌보고 백관회의까지 열은 것을 보아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으리라 추청된다.
황실의 권위가 이렇듯 땅에 떨어져 모든 정사가 이자겸의 사실상 독단으로 이루어지던 이시기에
설상가상으로 중흥택에서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당시 요나라를 1125년(인종3년)에 멸망시킨 금나라가 고려에게 사대를 요구한것이다.
백관들은 금의 형제 관계 요구도 거절해 왔으니, 군신관계 요구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소리였다.
-불화속의 고려 고관
선황 숙종과 함께 황금기 고려의 태양이 지지않기를 바라며 신법을 주창하고,
30만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정벌을 단행해 부국강병고려를 꿈꿨던 문숙공 윤관
그가 들었다면 무덤속에서 억장이 무너져 피눈물을 쏟았으리라
신료 모두가 불가하다는 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윤관의 아들 윤언이가 특히 격렬하게 반대하여 간곡히 아뢰기를
'우리 임금이 근심하고 신하가 모욕을 당하니 저는 감히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습니다.
여진은 본래 우리의 자손이기에 신하가 되어 천자국(고려)에 조회하여왔으며,
국경 부근 여진인은 모두 우리나라에 속한지 오래입니다. 우리가 어찌 반대로 신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역시 윤관의 아들다운 기백이 넘치는 말이었다.
+윤언이는 윤관의 아들로 여진정벌 당시 함께 종군하여 용감하게 싸웠으며
훗날 금국정벌을 주장하는 묘청등의 서경파와 같은뜻을 내보여 개경파 세력에 맞서게 되는 주축이자 김부식의 라이벌이다.
(하지만 예고없던 서경천도운동이 정부에 대한 반란으로일어나자 이를 제압하는데 참여하게된다)
하지만
이자겸과 척준경은 다른 논리를 펼쳤다.
금나라가 전에는 소국이였지만 지금은 대단히 흥해서 형세상 사대하지 않을수 없다는것이었다.
여진정벌의 대영웅이자 전설로 알려진 척준경.
윤관의 목숨을 구해 양자로 대우 받았던 그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현실적인 통찰력과 안목을 깨우친것일까
아니면 권력의 맛에 심취한 나머지 정권 안정을위해 나라의 국격을 실추 시킨것일까.
어찌되었던 확실한것은 그가 변했다는 것이리라
이에 인종은 이지미를 대묘에 보내 금에대한 사대의 여부를 점치게 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 절차였을뿐 이지미는 이자겸의 아들이었으니 점괘는 이니 나와있는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어쩔수없이 고려는 금에 사대 하여 4월 사절을 파견해 신하를 칭하게된다.
윤언이는 이러한 현실을 보고 심히 부끄러워 애통해 하여 가슴속에 뜨거운 불길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함께 여진을 정벌했던 척준경과 윤언이가 서로 다른길을 가는 순간이였다.
남송이 이미 금에게 칭신하여 조공을 하고있었다고 할지라도 고려입장에서는
대대로 지속되던 군신의 관계가 서로 바뀌었으니 ..
이때의 일은 곧 고려를 거대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몰아치게 할정도로 그 충격이 실로 심각했던것이다.
정변실패로 이미 수족을 잃어 허수아비에 불과한 군주로 전락해버린 인종.
그를 일으켜 세워줄 충신은 과연 누구일까.
스스로 일어나는수 밖에는 없는것인가
고려는 점점더 끝을알수없는 혼란으로 빠져드는듯 한데...
다음편은 ..
{3} 이자겸 천하의 몰락과 척준경의 실각.
3줄요약.
1.인종의 친위 쿠데타 이자겸의 난
2.불쌍한 인종..
3.금에 사대하는 고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