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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린 일베갔던 글들 몇개 사진이 꼬여서 모링한테 수정좀 부탁했더니 전부다 삭제해버렸다 ㅡ ㅡ...


건의함에 올렸더니 복구는 못해준다고 죄송하다 하더라..



정보글 써본게이들은 알겠지만 , 

글쓴거 많은애들이 읽어줘서일베 간것들이 작성글보기에 차곡차곡 쌓일때 그 뿌듯함이 뭔지 알거다. 


고생해서 글쓸때는 여러사람이 읽어줄때 젤 보람있잖아 



근데 글하나당 적어도 3~5 시간을 투자한 글들을 삭제해 버리면.. 글쓸 의욕이 나겠니들

내가 일베레벨먹자고 이짓하는것도 아니고..




일베간글 다시 올리는건 저런상황때문이니 정보글 많은사람들 읽게하자는 좋은생각으로 양해좀 바란다. 


날라간 글들 전부 재업하고 내용보충해서 일베 보낸뒤에 다음편(묘청편) 쓸 생각이다.


쩝  









내용보강해서 다시 올린다, 읽었던 사람도 다시한번봐바 ~ 더다듬었고 내용도 추가되었으니.




좀길어도 꼼꼼히 읽어봐들 아리송 했던것들이 많이 풀릴거야 .








[역사정보글]


1. 고려가 황제국?

http://www.ilbe.com/1308166143


2. 천자국의 축제 팔관회

http://www.ilbe.com/1309007959


3. 조공, 책봉 관계에 대한 고찰 

http://www.ilbe.com/1090250150








{성군 문종과 고려의 태평 천하 }



27년여간의 거대한전쟁고려거란 전쟁이 막을내리고 


고려는 삼한 통합의 영웅 태조왕건이 나라를 개국한이래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아니. 어쩌면 세계속에 한국이 이정도로 당당했던적이 있었을까 싶을정도로 그 자신감과 위상은 통쾌한것이요 대단한것이였다. 






구국의 영웅- 인공(仁憲公)강감찬 장군과 귀주대첩

 1.jpg      2.jpg               

이 전쟁으로 고요전쟁은 막을내렸다.

이후 수만많은 주변 부족이 조공을해왔다. 심지어 요의 관첩을 받던 여진족이 그것을 버리고 고려에 귀속을청해왔으며

대거란에서의 전리품과 여진족을 데리고 송 수도 개봉(카이펑) 에 가서 승전행사를했을정도로  

고려는 동아시아 최고의 위상과 발언권을 가지게되고 이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요순시대와 비견할만한 이 황금시대는 전란을 마무리한 현종의 뒤를 이은 9대 덕종, 10대 정종을 지나, 

11대 문종 황제에 와서 절정에 다랐다.

고려인들은 임금을 황제 또는 천자로 인식하고 그렇게 불렀다. [위에 링크 한 정보글 참조]그러므로 지금부터 당대인의 시각에 따라 임금은 황제나 천자로 지칭한다

+문종은 현종의 셋째 아들로 덕종과 정종의 이복동생이다. 





이때 고려인의 자신감이란 중궁(송)과 교통 해봤자 별다른 실익이 없을것이라며 송과의 교류를 거부했으니

오히려 고려의 군사력이 절실했던 송쪽에서 눈치를보다가 1068년 고려에 국교재개를 위한 사신을 보내왔을정도였다.

+『고려사-문종12년』참고





##그럼 지금부터 최전성기의 고려를 조금더 자세히 알아보자 ##










태평성대의 고려는 개략 이러했다. 


『풍입송』中.

3.jpg  


해동 천자天子, 지금 황제께서 

부처님과 하느님이 도우셔서 교화펴러 오셨네 

세계를 다스리는 은혜 깊어 멀고 가까운 곳이든 옛날과 지금이든 비할 자가 드무네 

외국이 몸소 달려와 다 귀의하고, 사방 국경이 편안해 창칼과 깃발을 거두니 융성한 덕이 요,탕 임금조차 견주기 어려워라 


태평을 때와 장소에 맞추어 즐기니 생활과 퉁소 소리가 물 끓듯 하고 음악 소리가 가득 차네 . 

집집마다 기뻐해 기도하며 축원하느라 향 피우고 좋은 음식 올리니 우리 성상폐하께서 만세까지 장수하여 산악과 하늘처럼 영원하소서

사해四海는 태평으로 오르고 덕이 있어 모두 요 임금 때보다 낫고 변경에는 일이 하나도 발생하지 않아 장군의 보검이 휘두름을 쉬네 


남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가 스스로 와서 조공하며 백가지 보배를 우리 천자 폐하께 바치네 금 계단 옥 전각에서 만세를 부르며 우리 임금께서 보위에 오래 계시기를 기원하나니 이 태평시절에 관현악기와 노래 소리가 아름다워라 







↑↑이는 고려 속악의 하나인 풍입송의 구절이다.


고려의 임금은 해동천자요, 외국이 남북쪽 오랑캐가 스스로 와서 고려에 조공을 바치며 , 

중국신화속에 태평성대를 이끈 군주 요 임금때 보다 낫다며 찬미 하고있다. 

(작자미상에 시대는 정확히 밝혀지지않았으나 전성기 고려의 태평함을 찬양하고있음을 알수있다)

 


조선의 태평성대라 불리는 세종 때 조차 굶어죽는 백성들이 많았다는 기록이있는데 


창고에 쌀이 붉게썩을 정도로 넘쳐나 집집마다 넉넉했다는 기록은 


광개토태왕릉비 말고는 고려의 문종 시기가 유일하다.







-광개토 대왕릉비

4.jpg  








종치세를 고려인들은 태평성대로 인식하여 이후 후계자들은 

이때의 제도를 지켜야할 이상적 규범으로 여겨 '구제' 라하였는데, 토지를 지급하는 전시과가 완성된것이 이때이다 


또한 고려최대 규모의 사찰인 흥왕사역시 문종때에 완공되고, 

종때 거란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극복했다하여 목판에 새긴 초조대장경 역시 문종때 대략 완성되어 불교문화가 꽃피었다. 


이에 더해 12개의 사립학교인 '사학 12도' 가 생겨나 다양한 인재를 풍부하게 공급하며 유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불교와 유학의 발전을 동시에 이끌었던 고려사 최고의 성군 문종 

5.jpg  엣헴 







정치면에서 역시 문종은 어느 제왕 보다도 강력하고 안정된 황권을 행사하였으니 


특정 신하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고 신하들의 의견을 다양하게 수렴하여 결정을 내렸으며,


출신에 하자가 있는가 보다는 능력을 중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자연은 당시 신진가문 출신으로 장원급제하였던입지 전적의 인물로 문종을 도와 고려의 전성기를 만들어낸다.) 




또한 문종은 즉위후 금은으로 치장되어있던 답두와 용상을 동,철로 바꿨을 정도로 검소하였으니 

사람들이 공경과 두려움으로 선망하였다 

+후에 이자연은 문종에게 딸을 셋이나 바쳐 황실외척세력이 되는데 그의 손자 이자겸이 바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희대의 난신 이자겸이다.

(뒤에 이자겸편 참조)

  









여진은 대대로 고려에 사대하였는데 여진족에 대한 고려의 지배역시 문종 때에 절정에 다랐다


이때에 수많은 무리들이 고려의 군현이 되기를 요청했는데 

이는 아예 고려의 지방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어 고려인으로 살겠다는 것이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4월- 에 보면 



동북 변방 15주 바깥 동여진이 서로 이어 귀부하자 그들을 고려의 군현郡縣으로 편입하였다. 


5월에는 서여진의 여러부족이 동여진에 사례에 의거해 고려의 주군州郡이 되기를 요청하니 허용했다.


7월에는 흑수 통역관 '가서로'가 동여진을 설득하여 고려의 주현이 되도록 만드는데 공을 세웠다며 

그에게 고려 무반 산원을 임명하고 '고맹' 이라는 이름을 내린다. 


이는 흑수 즉 북만주의 흑룡강 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여진을 문종은 평화적인 회유책으로 지배했지만 때로는 강경하게 응징하기도 했다. 


문종이 치세 34년에 동여진이 반기를 들자 서해도 장연 사람인 평장사 문정을 "판행영병마사"에 임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정벌케 한것이 그 대표적 예다. 


그의 고려군은 여진을 습격해 적장39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거란,송,고려가 삼각의 세력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고려가 거란 및 송과 실리 외교를 펼치면서 여진족을 지배했다.








이렇게 고려는 문종치세하에 눈부시게 빛나는 태평성대의 절정을 맞이했던것이다.

6.jpg  


하지만 


이 위대한 제왕 문종 도 세월에따라 병앞에 무릎을 꿇게되니 


치세 36년에는 온수 온천에 까지 내려가 몸을담근다. 


허나 결국 37년 7월에 황도 개경의 중광에서 65세의 나이로 붕어하니 고려의 큰별이 진것이다   












{숙종과 윤관, 의천이 꿈꾸던 고려}




문종에게는 아들들이 많았는데


인예태후 이씨의 소생인 태자(太子) 훈, 국원공(國原公)운, 계림공(公)희 등이였다. 


이들은 후에 차례로 순종, 선종, 숙종으로 황위에 오른다.

+그외에 대각국사의천 ,도생승통이있다






형으로부터 황위를 계승 했던 문종은 동생들이 아닌 아들, 


그중 장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자하여 훈을 일찍히 태자에 책봉하였는데

문종사후 태자가 즉위 하니 이가 12대 순종이다.






하지만 순종은 원래몸이 병약하여 즉위한 지 넛달이 못되어 세상을 뜨게되고

문종의 두아들 국원공과 계림공의 경쟁구도로 돌입하는데, 국원공이 즉위하여 13대 선종이다.


선종은 1089년 회경전(황궁 정전)에 13층 금탑을 세우고 인예황후등의 청에 따라 천태종의 중심사찰인 국청사를 짓게하는등 

국정을 돌보다가 치세8년에들어 병을얻었다.

+천태종은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 에의해 교종과 선종을 절충하여 창시되었다.






이때 계림공의 영향력과 세력은 이미 황제를 능가할정도로 강력하게 성장해있었는데 선종은 11년에 병이 악화되어 결국 5월에 눈을감고 그원자가 어린나이에 황위에 오르니 15대 헌종이다. 


이때 계림공은 그누구보다 권력에 목말라 있었으니 고려판 세조와 단종이 만나게 되는것이었다.

(왕국모와 소태보, 계링공왕희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 암투에 대해서는 여기서 깊게 다루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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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계림공 희는 헌종 원년7월에 정변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하여 권좌에 오르니 그가바로 16대 숙종인것이다. 

숙종은 세조에 밀리지않을 만큼 황권강화를 위해서라면 단호하고도 비정한 결단도 주저하지 않았다.

+헌종은 숙종의 허락을 받아 흥성궁에 머물렀으나 숙종2년 14세에 나이로 붕어하였다 (살해당했을 가능성이크다)


숙종은 황위에 올라 고려의 태평성대를 계속해서 본존하고 지켜나가는데 혼신을 다하였는데, 이때 등장하는게 바로 윤관이다. 


윤관은 의천과 함께 고려의 신법을 주창하고나섰는데, 

신법의 성격은 첫째가 부국강병이요 둘째도 부국강병이고 셋째도 부국강병이었다.




의천과 윤관에 의해 대두된 이신법은 여진정벌이후 예종대에 가서 시들해지지만 

윤관의 아들 윤언이에게로 유지가 넘어가 그 불씨를 여전히 뜨겁게 태우게 되니 

결국에는 서경파와 개경파의 사상초유의 내전으로 번지게 된다.」





의천은 천태종을 창시해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승려이면서 다양한분야에 정통하여 경제분야에도 능통했었다. 

먼저 숙종은 의천의 주청으로 주전도감을 두어 동전주조를 진행하였다.


상공업진흥을 위한 것이였다. 


다음으로 윤관의 말에따라 별무반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증강한다. 

신법이란 이렇듯 그 정책의 핵심이 부국강병에있었던것이다.

+고려에서는 정치와 불교가 밀접한 관련이있었다. 게다가 의천의 경우 황자였으며 천태종의 창시자였으며 진보개혁론자였던것이다. 

+별무반은 농민은 물론 직책이없는 양반, 서리,상인,노예,승도까지 포함하는 거국적 구성이였으며

고려사』-윤관 열전- 에 보면 그규모가 30만이였다고한다

(여진정벌2편 참조)





-대각국사 의천                                              -문숙공(文肅公) 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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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숙종에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주대첩이후 150여년 이상 지속되는 고려의 황금기는 


조금씩 흔들려갔으니 그원인은 여진족에있었다.







여진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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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진은 본래 발해가 망하고 말갈로부터 분파 되어진것이다. 


여진은 시대에 따라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로 불렸으며, 

10세기 초의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했고,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 칭하였다.

(광개토 대왕때 숙신을 완전히 병합하였으며 남북국시대에는 발해에 속했다.)

- 여진이 세운나라 => 금나라, 청나라 (이런것도 구별못하고 헛소리하는 국까들 있어서 써놓음 ㅡ ㅡ..)


당시 대부분의 말갈이 발해에 속해있었지만 

그중 흑수말갈은 꽤 강한힘을 가지고있어서 발해의 영향력 하에 독립성을 어느정도 유지했다. 


그후 발해에서 벗어난 흑수부를 여진으로 불렀는데 이들이 고려에 대대로 사대하였던동여진이다 .

금나라 황실인 완안부가 바로이 동여진이였다.

+대체로 만주 서쪽에 거주한 서여진은 거란에, 동여진(흑룡강일대의 북여진포함)은 고려에 사대하였다









이러한 여진의 일부는 이미 태조왕건때 귀부하여 후삼국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전투에 

고려 제번의 속민으로서 기병1만여기가 참여하는데 유금필이 데려온 흑수와 철륵까지 포함되어있었으니 


고려의 영향력이 이때 이미 송화강유역 과 북만주 일대까지 뻗어있음을 알수있다

+『고려사』와 『남당서』,『해동역사』의 내용인데 

남당서에는  고려가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자 왜(일본),탐부,환어라,철륵 등이 모두 고려에 내부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말이 1만이지.. 기병1만기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어마어마할것이다

기병1만이 고려를위해 참전했을정도로 그 유대감은 국초부터 깊었다고 할수있는것이었다.



또한 여진은 거란의 2차 침입때 고려와 연합작전을 펼처 거란군을 상대한적도있다.





충절공(忠節公) 유금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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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필은 한국역사상 손에꼽는 백전백승 불패의 명장중 한명으로 후삼국 통일의 일등공신이였다










시간이 흘러 고려에 귀순한 여진은 더욱 많아지고 고려는 직접 군현으로 편입시켰으니 

이는 형식적 사대가 아니라 실질적인 통치를 받았던것이다.

고려의 귀순한 여진은 요와의 교류를 금지당했고 종족간 전투또한 고려의 허락을 받아야 할수있었다.







금나라 역사서『금사』에는 금의 시조가 "함보"라는 고려인이라 한다. 

3형제 중에서 함보와 보활리가 여진으로 왔는데 그중"함보"가 금시조라는것이다. 


다음으로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사람 "금준" 이 여진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나라 선조가 되었다고한다. 



또한 평주승려 극수가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인과 결혼해 "고을 태사" 를 낳았고 고을이 "활라 태사"를 낳았고, 

활라는 여러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이 핵리발(금 세조), 막내아들이 영가(금 목종) 이였다.

+또한 이에 더해 말갈(여진)이 고구려와 발해의 백성으로 수백년을 살아왔고 ,금나라의 개국공신세력과 지배세력에 

발해인이 황실외척으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점등을들어 학계에서는 금나라를 우리역사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들도 나온다.









{드리우는 먹구름. 고려의 치욕과 굳은각오}



숙종 9년 이러한 여진이 강성해져 반란을 일으켰다 . 


역사와 민족에는 흥망성쇠가 있듯이 여진이 바로그 적절한때를 맞이한것이다. 



영가(금 목종)는 세력을 확대하여 상당수의 여진을 통합하였는데,1102년 에 정주定州의 관문 밖에 와 주둔하여 도전했지만 

영가는 고려에게 순종하여 숙종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조회했다. 




하지만 

영가의 조카인 오아속은 달랐다. 

오아속이 추장이 되자 여진은 고려에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기 시작하여 고려에 귀화한 여진을 족치고 

그 기병이 정주 관문 밖에 주둔하였다.




이에 숙종은 임간을 보내 토벌케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여진의 공격을 받아 고려군 태반이 사망하는 사태에 이른것이다. 




이때 번쩍 하고 등장한이가 있었으니 하급관리였던 척준경이다. 

척준경이 말에 갑옷을 입혀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적장 한 명을 베고 포로로 잡힌 고려병사 둘을 구출한것이다. 


그리고 적을향해 활을쏘아 몇명을 죽이니 적이 주춤하였다. 이틈을타 고려군은 다시 성안으로 되돌아올수있었다. 

하지만 여진군은 승기를 타서 정주의 선덕 관성關城   에 들어와 고려군을 살육한다.

(척준경의 이야기는 뒤편에서 더상세히 다룰것)





이에 숙종은 임간을 해임하고 윤관을 "동북면 행영도통"으로 삼아 파견한다. 


하지만 윤관역시 큰성과를 올리지 못하여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니 고려의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갑신년1104의 치욕이었다.

 

 11.jpg

엑윽엑엑






선황이 이룩한 찬란한 고려를 더 강성하게 발전시키고자 했던 숙종은 충격을 받을수밖에없었다. 


숙종은 곧 하늘에 맹세코 적을 토벌한후에 그곳에 절을 짓겠다 천명하였다.





재상이 된 윤관이 말하기를 

'적의 형세를 보니 측량키 어려울정도로 강성하며 적군은 기병이많아  대적하기에 어려웠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기병중심의 별무반이 편성되니 

고려의 처절한 복수전이 시작되려하고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10년 8월에 서경(평양)에 행차 하여 여진정벌의 의지를 다지지만 그곳에서 병을 얻어 급히 황성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황성앞 장평문에 이르러 수레에서 52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영구가 궁성의 서화문에 도착하니

태자와 여러신하들이 통곡하였다.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보낸 "계림공 왕희" 숙종은 이렇게 여진정벌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채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고 ,

대업의 숙제는 16대 예종에게로 넘어간다.








  

다음편은 ..


(2) {고려의 대반격 .여진을 정벌하다}



아 상세 하게 쓰려니까 분량이 너무 많으네 시간 오래 걸려서 썼으니 재밌게들 봐줘라잉  










3줄요약:

1. 귀주대첩이후 황금기를 맞이한 고려

2.고려판 세조 계림공의 집권

3.여진의 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