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보글]
1. 고려가 황제국?
http://www.ilbe.com/1308166143 +1. 마녀사냥 하는 일베? 일베인이라면 필독
2. 천자국의 축제 팔관회 http://www.ilbe.com/1328291407
http://www.ilbe.com/1309007959" target="_blank">http://www.ilbe.com/1309007959 +2. 국까 전격해부, 옳바른 역사관에 대하여
3. 조공, 책봉 관계에 대한 고찰 http://www.ilbe.com/1350802315
http://www.ilbe.com/1090250150
*3.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자주의식과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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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고려의 국제위상
4-1. 여진정벌. 눈부신 태평성대 그리고 먹구름 http://www.ilbe.com/1403218229
http://www.ilbe.com/1311302652" target="_blank">http://www.ilbe.com/1311302652 *5.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고려사회의 공무원
4-2. 여진정벌. 고려의 대반격 여진을 정벌하다 (완결) http://www.ilbe.com/1569450039
http://www.ilbe.com/131630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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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lbe.com/1316447005
5-2. 난신 이자겸. 이자겸의 난 -불타는 황궁-
http://www.ilbe.com/1321872168
http://www.ilbe.com/132338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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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려서 재업
{preface}
고려사를 문자그대로의 딱딱함에서 벗어나 더 능동적으로 당대의 관점으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생활과 문화적 측면들을 규찰해 보는것이 지극히 합당하다고 할수있다.
하지만 딱히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전쟁사등과 비교해 흥미를 느끼기 쉽지 않은게 사실이다.
하여 장황하게 고려의 사회상에 대해 늘어 놓기 보다는 [다소 충격적 고려사] 라는 조금은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우리가 잘 모르는 고려시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보고자한다.
지금까지 고려의 자주의식과 국제적 위상, 중세 공무원의 생활상에 대해 다루었으며
오늘은 고려왕조 그 자체이자 역사였던 정신적 밑거름. 불교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높고 (高) 아름다운 (麗) 나라 고려[高麗]. 그 감춰진 역사에 한발짝 더 다가가보자.
# 오늘 인용되는 기사들의 출처 역시
정사의 기록들을 바탕으로한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광종대에 짓기 시작하여 목종9년 완성되었으며
높이가 18.21m로 석조불상으로는 동양최대이다.
⑨ 종교가 정치이자 정치가 곧 종교
이글을 읽는 여러분들 중에 "궁예"라는 인물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것이다.
-태조왕건- 이라는 사극을 계기로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중 하나인 궁예는
탁월한 지도력과 군지휘력을 통해 맨손으로 나라를 일으켰으며 군웅할거의 천하난세를 풍미한 영웅이었다.
또한 궁예는 제정의 일치를 통해 자기 자신을 살아있는 미륵으로 칭하였고,
백성들은 그런 궁예를 마음으로부터 추종하였다.
뜨겁게 타오르는 민심없이 어찌 승려가 맨손으로 한나라를 개창할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결국 호족들과의 세력다툼에서 패해 비참한 말로를 맞게된다
궁예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를 견고히 했고, 위기를 느낀 호족들은
절대권력에 도전하였으며 그는 끝내 호족 세력들에 의해 축출되고 마는것이다.
그 결과 나라는 호족들의 연합체로 굳어져버려 세력간 권력투쟁은 갈수록 심해져갔다.
이러한 내부갈등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나서도 꽤 오랜시간이 지나서인 4대 광종에 와서 비로소 일단락이 되었다.
호족들과의 대결에서 궁예는 패자요, 왕소(광종)는 승자라고도 볼수있겠다.
기록에는 그런궁예를 미륵을 자처하였고 화려한 의식과 사치는 극에달했으며
처자를 쳐 죽인 미치광이로 전하고 있으며 그런 기록들은 우리들에게 그가 광인이었다는 것을 재확인 시켜준다.
하지만
임금을 미륵으로 칭하며 신성시하던 집단의식이
과연 고려사회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을까.
-미륵대성불경변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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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 천자인 지금의 황제께서는 부처님과 하느님을 보좌하여 교화(敎化) 펴러오셨네.
창작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눈여겨 볼것이 두가지이다.
하나는 신민들이 고려의 군주를 중국과 구별되는 해동의 천자로 설정하고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부처의 신성함과 천자의 치세를 연결시켰다는점이다.
사실
이러한 제왕신권설(帝王神權說)사상은 고려왕조를 지탱했었던 뿌리였음이라.
+고려사회의 천하관에 대한 참조논문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470289&qb
고려태조 왕건이 사용한 연호 천수(天授)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한 이라는 의미이고
궁궐 정전 천덕전(天德殿)의 명칭 역시 하늘의 덕이 있다는 신성성을 강조하고있으며
심지어 태조의 시호에도 신성(神聖)이 올라간다.
군주의 신성함은 발견된 태조의 동상과 임금을 부르던 호칭해서도 상징하듯
고려의 전시기에 걸쳐 짙게 깔려있었다.
-고려 태조 동상과 고려의 임금을 부르던 호칭.
951년쯤 조성되어 봉은사 태조진전(太祖眞殿)에 모셔져 있던 고려태조의 동상은
화려한 금도금을 하였고 재를 올릴때는 동상에 비단으로된 옷을 만들어 입혔으며
머리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통천관을, 허리에는 천자의 옥대를 착용했었다.
또한 불교적 신성성을 강조하여 성기를 작게 표현헀다
이러한 태조신앙사상들은 국초 민심의 수습을 위해 주입한 한시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점차 당대의 이념이자 사회관으로 자리잡았다.
◎ 『송사 외국열전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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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에서 신민(臣民)들은 그 임금을 성상(聖上)이라고 부르고 사사로이는 엄공(嚴公)이라고도 불렀으며,
후비(后妃)를 궁주(宮主)[註241]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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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지』 <공문서를 주고받는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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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리는 모든 표문에서는 성상폐하(聖上陛下)라 칭하고
전(箋)에서는 태자전하(太子殿下)라 칭하며, 제왕(諸王)은 영공(令公)이라 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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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이상국집 33권 中..』 <최구(崔球)가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을 사양한 데 대한 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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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朕)이 보건대, 종실(宗室)이나 제후(諸侯)의 아들들은 비록 옷을 못이길 정도로 어려도, 으레 사공(司空)을 제배(除拜)한 지 오래이다.
이에 의해 말한다면, 신하로서 큰 공을 세워 제후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사세가 종실과 비등하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사공(司空)되는 것을 참용(參用)함이 매우 의리에 합당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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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열전』 - 희종 후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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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황(聖皇)께서는 고귀한 분이 되실 줄을 미리 아시고 후궁(後宮)에서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상황(上皇)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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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들에서 보듯
임금은 공식적으로 신하들에게 성상폐하(聖上陛下) 로 칭하여졌다.
스스로는 짐(朕) 이라 일컫고 때로는 성황(聖皇) -성스러운 황제- 으로 불리우기도 했으며
금나라가 발흥하여 천자의 권위가 위축되기 시작한 인종조 이전까지는
공공연히 공문서에 임금을 신성제왕(神聖帝王) 이라고 칭했다.
또한 고려황실은 스스로를 용의 후손으로 여겨 신성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고려사회에 근친혼이 성행했던 이유도 그 중 하나였다.
+여진이 마지막으로 공물을 바친것은 인종즉위년이다. 금의 건국으로 번(蕃)으로 지칭되던 제종족이 이탈하면서
고려의 울타리로서 제국의 변방을 수호하는 번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갔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불교와 정치가 하나 되어가면서 임금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그 정당성을 부여하여 백성을 하나로 묶어 고려사회속에 국초부터 전체적으로 자연스레 녹아 스며들었던 것 이었으니
다시말해 단지 궁예가 미치광이였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 역시도 종교와 정치를 연결 시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었던 것이다,
-궁예미륵
민간에서는 정말 궁예를 미륵으로 추앙 했었던듯 하다.
고려 군주의 권위를 하늘로 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통념은
"팔관회"를 통해 더욱 견고해져갔는데 팔관회는 고려 최고의 국가적 대행사이자
정치적 통합을 도모하고 해동천자의 권위를 다시한번 확인시키는 불교행사였다. ↓ ↓
◎『고려사』 권72 ‘팔관노부(八關鹵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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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에는 예법에 따라 화려하게 장신한 의식용 기물인 깃발, 악기, 부채, 지팡이, 우산을 들고 임금이 탄 초오련을 호위하는데
행렬대의 팔관의위는 3726명, 팔관 노부는 548명이 참여했을만큼 대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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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에서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토를 깔아 모두가 만세를 불렀으며
천자는 황제를 상징하는 의상인 황포(黃袍)를 입고 동서번과 북번, 탐라국등의 제후들과 제왕(諸王) ,
그리고 3경, 동·서 병마사, 4도호부 8목의 수령, 외국 상인등으로 부터 표문과 헌수,조하를 받았다.
이때 조공하는 송나라 상인들은 나라를 대표하여 참석한 경제사절단으로서
고려천자가 주재하는 축제인 팔관회의 일원으로 참여했던것이다.
또한 신하들은 팔관치어를 올려 이 날을 축하 하였는데 화려한 문장들이 즐비 하여 행사의 격을 높였다.
※ 표문 : 제후가 천자에게 제출하는 문서. ※ 치어 : 경사가 있을 때에 임금에게 올리던 축하의 글
+ 팔관회관련 참조 (http://www.ilbe.com/1309007959" target="_blank">http://www.ilbe.com/1309007959)
-일본 소장부분화 (불화속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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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안인(韓安仁) -함녕절 어연의 치어[咸寧節御宴致語]-
황하(黃河)가 맑아짐에 성인이 나시어 이제 천년 운의 아침이 돌아오고,
태주(太蔟 음력 정월의 별칭)가 적중하게 이르러 양기가 동하니,
일찍 만물의 봄이 열렸습니다.
우러러 만삭[彌月]의 상서를 생각하옵고 다 같이 하늘로부터 주신 것임을 기쁘게 여기옵니다.
육악(六樂)이 다 법부(法部)에 벌여 있고, 구빈(九賓)이 모두 명정(明庭)에 벌여 서서 잔치하며 놀매,
뭇사람과 더불어 같이 즐겨합니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성상 폐하께옵서는 예지(睿智)가 멀리 순(舜)ㆍ우(禹)를 따르시고,
문장(文章)은 한(漢)ㆍ당(唐)보다 뛰어나시어 인(仁)이 흡족하시고,
도(道)가 풍부하시되 오히려 부지런히 선(善)할 것을 생각하시며,
공을 이루고 다스림이 정하여져도 항상 공손하게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근년에 탄신이 있어서 여러 신료가 경하하는 모임을 허하지 아니하였삽더니,
지금은 북쪽의 오랑캐들이 땅을 바쳐서 귀화하옵고, 서쪽의 송 나라는 인(仁)한 이를 가까이하여 화친을 맺었으므로,
오래 간과(干戈 방패와 창. 곧 전쟁의 뜻)를 시험하지 않고, 또한 같은 문화권에 들었으며
형용이 장하고 아름다워 성한 덕의 공이 아닌 것이 없사옵고 조야가 모두 편안함을 기뻐하오니,
이른바, 태평의 다스림이 이르러 온 것이옵니다.
이에 아래로 여러 사람의 청을 따르시어 특히 번성한 의식을 강구하셨으며,
잔치를 베풀어 자애를 보이시고 관료들이 드리는 축복을 누리시니,
건도(乾道)와 곤도(坤道)는 상하 서로 편안한 때를 이루옵고,
치초(徵招 치소(徵韶)로서 악곡의 이름)와 각초(角招 각소(角韶)로서 악곡의 이름)는 군신이 서로 기뻐하는 음악을 연주하오니,
어찌 하루 아침의 빛나는 구경거리가 될 뿐이겠사옵니까. 진실로 만년의 시작이옵니다.
신들은 다행히 밝은 시대에 태어나 성한 예식에 참여함을 얻었사오니,
비록 파음(巴音 파촉의 노래)의 속되옴이 부끄럽사오나,
화축(華祝)의 말을 베풀고자 위로 임금의 위엄을 더럽히며
바로 구호(口號 즉석에서 시를 지음)를 드립니다.
+함녕절이란 고려 숙종, 예종, 원종 때 임금의 생일을 기념하던 날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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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아닌, 고려를 중심으로 하는 해동천하의 최대규모 축제였던 팔관회]는
성종대를 제외하고는 전시기에 개최 되었는데, 심지어 거란전쟁 당시에
현종은 요 성종의 40만대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하루전인 11월5일 개경에서 팔관회를 개최했을정도로
그 의미는 중한것이었으며 이는 팔관회가 단지 단순한 형식적인 축제가 아닌 출전하기전에 사기를 북돋으며 정신적인 통합을 도모하는
출사표와도 같은 기능을 한것이라 볼수있다.
팔관회출사표의 효과?가 있었는지
고려는 당대의 최강국인 거란과의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
◎《平契丹頌(평계단송)》
거란을 평정한 것을 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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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皇受命(성황수명) : 우리 성황의 받으신 명은 / 寔天所畀(식천소비) : 실로 하느님이 주신 것이도다
天爲我聖皇(천위아성황) : 하느님이 우리 성황을 위하여 / 假手韃靼耳(가수달단이) : 달단에게 손을 빈 것일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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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끝난지 수백년이 지난후에도 회상하며 임금을 성황으로 칭송할만큼
이때의 승리는 천하를 뒤집고 제국의 위상을 반석에 올린 값지고 위대한 것이었다.
이처럼
힘든 환란이 닥치거나 전란이 터지면 황실과 조정은 종교의식과 함께 태조의 위업을 되새겨
국가의 정신적 통합에 힘썼고 백성들은 단합하였다.
동북아 최강국 거란, 세계제국 몽골을 상대로 고려가 싸울수있었던 저력은 바로 이런 단합에서 비롯된것이라 할수있었다.
대몽항쟁을 하면서는 대장경을 만들었고 강화로 천도한 이듬해 가장먼저 [봉은사]를 지었는데
봉은사는 광종이 처음 창건하였으며 태조신앙의 근거지가 되었던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사찰이었으니
또한 이는 모두 불교가 고려사회에서 가진 위상을 알수있는 예들이라고 볼수있다.
다시말해 종교화 군주의 신성함이 합체된 이러한 집단의식은 국가를 지배하고 백성을 하나로 묶는 원동력이 되면서
고려사회에서 불교는 백성들의 중심사상 이자 정치 그 자체로 자리잡아 있었던 것이다.
종교인과 세속인은 큰 구별이없었고 종교는 정치와 결탁하여 성장해 갔다.
사찰의 권력이란 무엇인가
먼저 승려가 사찰의 주지를 맡거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승려들을 위한 시험인 승과를 보아야 했는데 이는 과거제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과거라 함은 바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승과에 합격한자는 승계와 승직을 수여 받았으며 이것들은 세속으로 치면
관계와 관직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이들은 국가로부터 녹봉또한 지급받았다.
사찰의 책임자인 주지는 임금이 직접 임명하였으며 거대한 사찰과 종파에는 권력자들이 포진해 있었으니
정치와 불교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불교의 권력이 정치권력과 하나되어 뻗어 나갈수 있던기반은
고려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러한 불교의 탄탄한 위상이 있었기에 가능한일이었다.
승려들은 개인적으로 친분있는 관료들과 차를 즐기기도 하고 철학을 논하기도 했을만큼 자유로웠다.
당대 사회에서 불교는 곧 고려의 국교이자 문화로 자리매김한 것이었으며
불교권력이 곧 정치권력이 되는 현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의천[법명]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왕후(王煦) .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이다
왕후는 문종의 4남으로 숙종대에 윤관과 함께 고려 정계를 주도한다.
+고려의 황금기와 대각국사 의천 관련 참조 (http://www.ilbe.com/1311302652" target="_blank">http://www.ilbe.com/131130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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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고려 불교 권력의 상징. 사찰의 규모
-영통사
의천이 영통사에서 출가해 천태종을 개창했다고 하며
불교계의 성지로 여겨진다고한다.
고려의 거대사찰중 대표적인 하나를 꼽으라면 [흥왕사(興王寺)]를 들 수가있다.
거대한 규모와 격동의 역사를 지닌 사찰로 유명한 흥왕사는 당대 세계최고의 문화 선진국이었던 송나라를 두고
'송과는 국교를 맺어도 얻을게 없다' 라고 자부했던 시절인 고려의 최전성기 문종대에 지어졌으며
창건 당시 사치스럽고 장엄하다하여 신하들의 반대가 컸다고 한다.
헌데 이 흥왕사의 1대 주지는 다른 이가아닌 바로
문종의 황자(皇子)이자 당대의 고승이며 , 숙종대의 개혁가 대각국사 의천 (大覺國師 義天)이었다.
고려중기의 유학자로 유명한 김부식은 "대각국사비"에 그에 대한 존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 영통사 대각국사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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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는 성인의 도를 갖고 태어나 배움에 뜻을 두고 세속의 영광에 조금도 미혹치 않았다.
도덕이 쇠퇴하고 학문이 황폐해가는 시대에 홀로 그런 세태를 거슬러 사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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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에 대한 고려인들의 인식을 옅 볼수가 있는 기록이다.
사실 의천이 출가를 한것은 불도에 큰뜻을 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국제정세를 살피고 불교권력을 통해 황실의 권위를 더욱 높이기 위함도 있었음이라
당시 인주이씨의 지원 아래 법상종이 크게 번성 하였는데, 의천은 이를 통합하기 위해 천태종을 개창했던 것이다.
다시말해 이는 곧 황실과 귀족간 권력을 두고 벌인 알력이라 할수있던 것이다.
+고려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으로 현화사등 주요 사찰에는 주지를,
황실에는 여럿의 황후와 태후를 대대로 배출하였으며 경원 이씨라고도 불린다.
의천은 천태종을 창시하여 불교세력을 규합하였고,
후에는 국청사의 초대 주지를 겸임하여 그 입지가 더욱 화려하였다.
앞서 말했듯 종교와 정치가 자연스레 결탁하면서 불교의 권력은 곧 사상을 통합하는 정치권력이 되었으니
의천의 영향력은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사상적으로 실로 막강하다 할만한 것이었다.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불교연구 논문의 총서인 "교장"을 간행한 후
제자들의 양성에도 힘써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편, 형인 숙종과는 국가의 막중대사를 논했으니
이 거대한 사찰은 명실상부한 불교권력의 최고 정치활동 공간이되었던 것이다.
자 그럼 흥왕사에 대한 내막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이제 그 규모를 살펴보자.
이 사찰은
대각국사의 명성에 걸맞게 그 규모 또한 상상이 안갈정도로 어마어마 하였는데,
흥왕사는 그야말로 불교권력의 상징이라고도 할수 있었음이라
사찰의 규모만 2800칸 , 사찰에 딸린 원(院) 을 합한다면 3000~3500여칸에 이르며
북한 평양방송에 따르면 발굴결과 동서800m 남북400m 로 넓이는 32만 m² 라고 한다.
사찰 하나가 자그마치 32만 m² 다.
참고하자면 전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궁궐이라는 자금성의 면적이 72만 m² 이며
조선왕조의 법궁이였던 경복궁이 증건전 총면적이 34m²라 하니
흥왕사는 경복궁보다는 조금 작으며 자금성의 절반가량의 규모인것이다.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은 흥왕사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 『고려도경』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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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왕사(興王寺)는 국성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을 나가 2리 가량 가면 시냇물에 닿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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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과 경복궁의 규모 비교
흥왕사는 이탑이금당식 이라는 특이한 구조로
정가운데에 거대한 8각목탑이 두개 위치하고있었다.
말하자면 흥왕사는 세 구획으로 된 가람배치였는데
중앙구획에는 북쪽에 거대한 강당 터가 있고 그 앞에 금당 터로 추종되는 건물유구가,
남북측선상의 전방에는 석등자리가 있고 그 양쪽에는 8각의 목탑 터가,
가람전면에는 중문 터와 이 중문과 강당 터를 둘러싼 회랑 터가 있었다.
동원은 서원과 같이 석축으로 중원과 구획 되어 있는데, 그 남쪽에는 중원보다 작은 석축단과
중문으로 보이는 유구가 있고 그 중앙은 계단자리로 추정되고 남쪽과 북쪽에도 건물터가 있다.
서원 역시 동원과 유사하게 남쪽에는 석축이 있고 그 안의 남쪽 중앙부에는 석탑지가 있으며
북쪽에는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 내 건물로는 1070년 2월에 삼층대전(三層大殿)인 자씨전(慈氏殿: 彌勒殿)을 새로 지었고
6월에는 절 주위에 성벽을 쌓게 하였으며, 1077년 봄에는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을 전성(轉成)하였다.
또 1078년에는 황금으로된 탑을 조성하였는데 이탑은 금 144근, 은 427근으로 만들어졌다.
후 에는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이[우](崔怡)가
황금 200근으로 13층탑과 화병(花甁)을 조성하여 헌납하였는데 너무 화려한 나머지
충렬왕의 비인 제국대장공주가 빼앗아 강제로 대궐로 들여왔으니 승려들이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뒤 별안간 왕이 괴질에 걸렸는데 모든약이 효험이 없자 공주는 금탑을 돌려주었으며 왕의 병이 나았다고한다.
-흥왕사의 구조
이 흥왕사는 규모도 규모지만 파란 만장한 역사의 장이기도 했다.
삼국, 통일신라, 고려, 요, 송, 일본의 불서들을 총정리해서 만든
민족의 지보(至寶) 교장(敎藏)은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으니
[교장]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은 지금까지도 불서 목록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에 속한다
또한 동양 최대의 분량이었던 초조대장경의 경판이 바로 이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몽골의 침입때에는 사찰이 불에타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그 뒤 충숙왕 때에 공사를 하여 옛모습을 되찾았고 후에 홍건적의 난으로 불탄 궁전이 수축될 동안 공민왕은 흥왕사에 머물렀는데
안도치가 공민왕을 대신하여 죽었던 흥왕사의 난(김용의 난)이 바로 이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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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민가보다 절이 많은 도시
사원과 사묘의 건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는 것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나라는 신라 말부터 부처를 섬김이 정성스러웠다.
성안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전각이 크고 웅장하면서
높고 특출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있으니
그 당시의 숭봉함이 지극하였음을 잘 알겠다.
-권근 <연복사탑중창기>-
-동양 최대 규모의 법당을 자랑하는 제주도의 약천사
국성동남쪽에 흥왕사가 있었다면 개성부 중심에는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가 있었다.
보제사는 그 규모가 얼마나 거대 했던지 당사(唐寺), 또는 대사(大寺) 라고 불리었다고 전한다.
건물이 1천여채나 되었으며 절 안에는 세개의 연못과 아홉개의 우물이있었다고 하니
이 사찰 역시 장엄하기가 그지 없었을것이다.
사찰의 첫인상은 탑이 만든다고 한다.
광통보제사의 첫인상이자 유명한 건축물로 5층 목탑이 있었는데
이 목탑은 5층 목탑으로서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법한 높이로
그 높이가 무려 60미터에 이르렀다고하며
이 는 백제에 존재했던 거대목탑으로 당대 세계최고 수준의 높이라 알려진
미륵사 9층목탑에 버금가는 높이 이다.
게다가 이 목탑은 9층이 아닌 5층이니 한층의 높이와 크기가 어마어마 했을것으로 추정된다
서긍은 이 사찰에 대해서도 느낀점을 기록하여놓았다.
◎ 『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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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찰의)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임금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ㆍ문수(文殊)ㆍ보현(普賢) 세 상이 놓여 있고,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맞은편에 거대한 종이 있는데 소리는 가라앉아 시원하지 못하다.
전례에 따라 예물의 나머지 말과 고려에서 정사와 부사에게 준 것 도합 2필에 백금 2근을 더해
향화(香花)와 과속(果? 과일과 채소)의 비용으로 주고, 불사(佛事)를 하고 불승을 공양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몸소 가지 않고 다만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이하 삼절을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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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거처보다도 웅장하다는 사찰의 정전]..
이 기록을 보니 개경의 거대 사찰인 광통보제사를 보고 서긍이 극도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미륵사 9층 목탑 복원모형
하지만
보제사에서 가장가치가 큰 보물은
거대건물도 거대탑도 아닌, 2층 각루건물인 장경전이었다.
이 건물에는 당대 1만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당대 지식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지혜가 보제사에 모여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또한, 황도(皇都) 백성들의 의료기관으로 자비전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병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한다.
이처럼
사찰 안에는 수많은 건물들과 인파들이 즐비하여
단순히 경전을 외우고 불도륵 닦는 장소가 아닌 학문과 사회 문화통합의 공간 이었으며
여말 선초의 학자였던 권근은 성 안에 민가보다 절이 많다고 묘사했을 만큼 개경에는 정말 많은 절이 있었던것같다.
사실 흥왕사와 더불어 거대사찰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광통보제사 역시
그 규모만으로 주목 받은 사찰은 아니었다. 보제사는 태조 10사찰 중 하나였기도 했던 것이다.
당연히 태조신앙과도 관계가 깊었을것이며 개경 중심지인 만큼 승과가 열리기도 했던 사찰이였으니 정치권력과의 연결고리역시 탄탄했으리라 생각된다.
이 거대했던 사찰은 조선시대에 와서 [연복사]로 개칭되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
이외에도 고려시대 화려하고 유명한 사찰로 [안화사],[현화사]등이있지만
글이 너무 길어 이만 줄이려한다.
보제사의 목탑을 비롯한 수백개의 절이 있는 도성의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중세 성당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럽의 고도 (古都)를 떠 올리면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당장 나가서 고개를 돌려 보면 거대한 성당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높디 높은 마천루가 보이는 그러한 느낌말이다.
지금까지 고려의 불교문화를 시대의 사상과 의식, 사찰의 규모등을 살펴보면서
막연히 국교가 불교인 나라 고려가 아닌 불교의 나라 고려를 새롭게 알아보았다.
교과서에서는 짧은 분량으로 배우는 많은 것들도 사실은 알고보면
알아볼수록 장대하고 화려한 역사가 감춰져 있음을 다시한번 새삼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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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줄요약.
고려군주의 신성함과 연결된
고려 사회상과 정치, 불교문화 그리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거대사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