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관련글 썼던 정보게이다.
일베 갔었던 국까 저격글이 여러개 더있었는데 모링이가 실수로 삭제 해버렸는데
http://www.ilbe.com/1115687184
이건 삭제 안된건데 한번봐라 아주 재미있을거다
이글은 일베 갔던 국까 저격글의 대표격으로 보고들 느끼는 바가 많을거라 생각해서 이것만 복구한다.
많은 반발중에 한국사를 까면 국까 조선족 일뽕이냐? 라며 따지던데
절대 그렇지 않다.
자료와,기록을 토대로한 팩트로 반박을 하라 이거다
기록과 자료 없이 자기가 한국을 싫어한다고 주관대로 깎아내리면 국까이지 무엇인가
● 대부분 국까들 과의 대화 패턴은 이렇다
[1]
a: 고려는 요,송,금에 사대한 소국일뿐이야
나: 그래? 왜?
a: 조공하고 책봉받은거보면 모르냐?
나:송나라는 서하에도 조공하고 요나라에도 조공하고 금나라에도 조공했는데
특히 금나라에게는 황제둘 포로로 잡혀서 나라망하고 남송은 금나라한테 칭신하며 사대했는데.
a: 그거랑 고려가 사대한거랑 같냐?
나: ??
[2]
b : 어쩄든 고려는 중국변방의 소국일 뿐이야 . 그러니까 조공하고 책봉받았지
나: 그것보다 더 심층적으로 실질적 관계를 알수있는 기록들이 수두룩한데?
b : 뭐
나: 당시의 정세라든가, 국가의 성쇠에 따라 종합적으로 판단해볼만한 근거들 말야
b : 그게뭔데
나: 그렇다면 고려에 조공하고 직간접 통치를 받은 여진의 금나라에게 사대한 송나라는 소국이네?
불과 여진이 고려에 사대한때와 송이 금에 사대하기 까지 기간이 15남짓밖에 안되는데
b : 그건 여진이 쎄지니까 어쩔수없는거지 ㅡ ㅡ
나: ??
[3]
c: 외국에서 고려를 황제취급 안했는데 무슨 황제냐
나:외국이 어떻게 대하느냐가 황제국의 기준이야?
c: 당연한거아니냐? 지 혼자 황제라고 씨부리면 뭐하냐
나: 여기 여기이런 기록에 보면 외국역시 고려의 황제를 인정했음을 알수있는데?
c : 못믿겠다. 기록이 맞다는걸 입증해라
나 : ?
나: 여진이 스스로 이르기를 번토(제후의 땅)라고 표현한것은?
c: ..
나: 그럼 후에 송은 여진 금나라에 책봉을 받고 송왕으로 불렸던 기록이 있으니 그때의 송나라는 왕국인거네?
c: 구라치지마라 그런기록이어딨냐
나: 송사 금 열전 여기 여기 이부분에
c : ㅉㅉ 국뽕 새끼
이런식이다. 그냥 애초에 자국비하적인 판단을 깔고들어간다.
기록을 보여줘도 절대인정하지않는 답정너. 빨갱이들과 전혀다르지않다
이러니 조선족짱깨가 아니라고 볼수가없지 않겠는가
스스로들 생각해봐라
광주를 사태 또는 폭동이라고 보는것이 개인의 역사적 판단에 의한것인지
아니면 일베라는 단체의 소속된 무조건적인 집단의식에서 나온것인지.
본인들이 전자라면
정통교육의 권위로 모든것을 해결하는 고지식함이아닌
항상 자료와 기록을 우선시해서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사고하는 잣대를
중세사,고대사 라고 갖지 못할 이유가없지 않은가.
이글을 보면 내가왜 헛소리하는 것들을
싸잡아서 조선족으로 몰아갔는지 알수있을것이다.
(밑에나오는 얘는 그나마 뭐 제시라도 했다.)
아니 몰아가는게 아니라 여전히 그들이
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역사를 깎아내리려하는 쓰레기 같은 집단이란 생각에는 변함없다.
심지어 자국의 역사를 자국인의 시각으로 해석해야 하는게 당연한것을
왜 고려인의 중심으로 서술하냐며 외국이 보는 시각을 중심으로 써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작자도 있었다.
아니 그럼, 우리역사를 보는데 당연히 당대의 자국인의 시각으로 해석을 해야지
중국인, 일본인의 시각으로 해석을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린 조선족이 아니다(대부분) . 또한 왜인들의 후손도 아니며 거란의 후예역시 아니다.
우리역사를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하는게 손가락질 받을 일이라면 우리역사는 누가지켜준단말인가
심지어 기록따윈 중요한게 아니니 자국중심의 해석은 집어치우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까지 들었다.
안그래도 당대의 기록이 날아가버려 간접적으로 이해를 해야하는 고려사를두고
고려인들이 이를 듣는 다면 참 통탄할 노릇이다.
지금부터 추잡하고 더러운 국까들의 수준이란게 어떤것인지 확실하게 들춰 보이겠다
(팩트에서 틀린부분이 있으면 지적해라들 정정하겠다)
(이글은 어그제 고려 팔관회 관련글로 일베간 내글의 저격글에 대한 재저격글임
앞으로 나는 어제 나를 저격했던 니나민X끼리 를 OOOO 란 별칭으로 구별함)
(어그제 일베갔던 본인 저격글 3개)
1.http://www.ilbe.com/index.php?_filter=search&mid=ilbe&search_target=title&search_keyword=%EC%A0%80%EA%B2%A9&document_srl=1128106614
2.http://www.ilbe.com/1130786623
3.http://www.ilbe.com/1127378011
(이 글로 재저격 맞고 전부 일베에서 내려감)
마침그떄 시간대가 그랬는지 기가 찰정도로 수준이하 국까들이 많아서 이렇게 글로 써서 게시한다.
저거보고 일베수준이 이것밖에 안되었나, 진짜 친일 조선족 새끼들이 판치는 곳인가 싶기도하고 착잡했다.
먼저
OOOO은 본인에게 고려사를 미화 했다하는데
"미화" 라는 말은 아름답게 꾸밈이란 뜻이며 여기서 "꾸밈"이란 말은
거짓이나 없는 것을 그럴듯 하게 꾸며댄다. 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누차 강조했지만 약 7~80프로를 "기록" 에 의거해 기술했으며
나머지 2~30프로는 기타 논문,독서를 통한 지식으로 썼다고 말했다.
(밑에 반박내용에도 출처를 명백하게 밝힐것이다)
"논리" 라는 말은 말이나 글에서의 짜임새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짜임이란것의 "핵심"은 단연 사실이다
오로지 "사실" 을 기본형으로 해서 그 살들을 붙이는것이다
중요한건 "사실" 이지 현란한 혀놀림이나 판단을 흐리는 오만가지 잡설이아니라는 소리다.
우리는 그것을 진중권과 변희재의 토론을 통해 확실하게 배웠었다
이러한 "사실" 을 찾아내는 과정으로는 직접사료가 남아있다면
그것이 곧 최고의 가치를 가지겠지만
고려사의경우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태·혜·정·광·경·성·목의 7대실록 .총 36권이었으나 왜란때 춘추관에서 소실됨)
우리는1차 간접사료인 고려사,고려사절요등을 통해 추정해 보는것이 일반적이다 .
어찌 하였던 본인은 간접사료 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글을썼고
하다못해 네이버 백과사전이라도 인용했다.
oooo 가 이것들을 부정하고싶다면
네이버 백과사전은 믿을게 못된다 or 이런기록은 못믿는다 식의 답정너로 일관할게 아니라
공신력을 인정받는게 먼저일것이다.
교수들의 논문, 학계의 입장은 각자의 입장이 전부 다르다.
논문 한두개읽고 oooo처럼
이것은 학계에서 인정받는 설이니 내가맞고 너는틀렸다 ?
ㅡ> 인정 받은것이라면 네이버 백과사전에 항의를해서 바꿔놓던지.
아니면 지금까지 강조했었고 지금부터 지겹도록 강조하듯 누가봐도 끄떡여지는
신빙성있는 "증거" 와 그를통해 유추 할수있는 사실, 또는 "기록"에 의한 비판만이 인정될것이다.
OOOO이 여론몰이를 해서 어이가 없게도 OOOO이 올린글이 전부? 일베에 갔었다.
개인적으로 수모를 당했던 국까들이 전부 튀어나와서 난리를 쳤는데
바보가 여럿모인다고 해서 사실이 변하는건아니다
대부분은 역사관련해서 휘둘리기 일수일거다.
휘둘려서 욕하는것은 개인의 판단력의 결여이니 그마저 하나하나 상대하고싶진않다.
다만 삐뚫어진 역사관으로 다수여론을 휘둘르는 파렴치한 국까들 박멸을 위해 쓴다.
솔찍히 들러붙은 저능아 국까들 전부 닉이라도 공개하고 무데기로 망신줄까헀지만
하도 많아서 그렇게까진 하지않을것이고
싸그리 정리해서 반론&반론 써볼까한다 몇시간에 걸쳐서 이글을 쓸지도 모르겠다.
그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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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부분의 자료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는것이다
(출처를 밝힌것들은 OOOO의 주관이 다분하다)
A
oooo가 쓴글 중에 그나마 기록에 출처에 의해 비판한 것이 있는데. 서긍의 고려도경이다.
고려도경은 송사신 서긍이 고려에서 보고 들은것을 기술한것으로 직접사료적 가치가 있다.
본인은 솔찍히 말해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고려도경을 구석구석 자세히 들춰보지는않았다.
하지만 "기록" 을 비판하려면 oooo처럼 출처없이 주관이
가미된 날조 사료가아닌 명백한 "증거" 가 우선시 되어야하는 것은 확실히 알고있다.
한 예를 보자
(oooo 가 저격으로 제시한 자료) ↓
그런가?
한번보자 ☞ (만월대의 구조)
?????
oooo이 제시한 자료와는 달리 분명 고려황궁 만월대의 궐문은 황제국의 예에 맞게
주작문,승평문,신봉문,창합문,전문을 거쳐 정전인 회경전에 이르기까지 5개의문을통과해야한다
한마디로 서긍 또는 oooo 둘중에 하나는 사실을 "날조" 한것이 되는것이다
oooo은 이에 대해 확실하게 해명해야할것이다
이처럼 기록에의한 직간접사료를 부정하려면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한다
(서긍의 고려도경이 직접사료로의 가치는 있지만 그가 자국 중심으로 보고 들은것이기에 상당수 사실과 다른부분이 많이있다)
ex) 고려도경에 보면 혜종 왕무의 이복동생인 광종을 그 아들로 기록하고있으며
관직명등에서 고구려의 관직이 섞여있고 고려에 없는 관직도 기록하는등 잘못된기록이많음)
또한 고려도경은 송 황제에게 보고 되었기때문에 중화론적 입장에서 서술한부분이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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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자료의 출처가 없다.
로마자로 문맥을 나눈것보니 누군가의 리포트나 ,서적 따위가 되는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절대 기록보다 우선할수있는 신빙성있는 자료라고 볼수가없다
또한 본인이 써서 일베에 간 글들의 핵심 내용은 진정한 천자국의 의미는
겉으로보이는 "형식" 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실질적인 국제위상이라는것이다.
http://www.ilbe.com/1090250150 조공책봉관계에 대한 고찰
http://www.ilbe.com/1308166143 :진짜배기 황제국 고려
http://www.ilbe.com/1309007959 :고려 최고의 축제 팔관회
11C 동아시아는 송,요,고려 모두 황제국의 체제를 유지하던시기였다.
송의 경제력은 세계최강이였고 요의 군사력 또한 세계최강수준이였다.
당시 송은 황제국의 체면을 유지하는대신 굴욕적인 외교를 맺고 요에게 조공했고.
그런 요 최전성기시절, 최고의 군주와 강력한 군사로 고려를 세차례나 침입하지만 결국에는 고려의 완승으로 끝이난다
(1차전은 외교전의 승리.2차전은 무승부, 3차전은 군사력의 완승이다)
2차는 고려의 승전이라고 까지는 하지않겠다.
임금이 피난하고 개경을 넘겨줬지만 요성종역시 강조에게 고전에 고전을 하였고,
결국에는 양규 등에의해 후방보급이 차단되어 요로 귀국하면서도 여러차례 수천,수만 단위로 큰피해를 입는다
가령 2차전을 패전이라 하더라도 결론인 3차전은 누구도 부인할수없이 거란군이 궤멸된 고려의 완승이다
방어전 이기에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군사가 많았기에 당연하다 이런 말같지도 않은 궤변은 집어 치워라
전쟁에 있어서 당연함이란 없다.
역사상보면 병력과 지형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전한 기록은 수두룩하다.
굳이 자랑스러운 우리의 승리를 타국의 입장에서 대변하고자 한다면 그 정체성부터 확인해봐야 할것이다
이때 요성종이 얼마나 격분했는지 소배압의 얼굴가죽을 찢어버려 죽이겠다고 했을정도였다고한다
출처: 고려사 강감찬 열전
소배압은 요경종의 사위이며 성종은 경종의 맏아들이다. 소배압은 한마디로 요의 황실종친인것이다
후에 빈왕으로 봉해며 또한 소배압은 송군을 격파한 전적도 있다. 이런그가 이끄는 거란군은 최정예병이였음을 유추해볼수있다
[ 귀주대첩에서의 고려의 완승으로 동아시아 질서는 재편되어 가던것이었다 ]
++그렇다면 고려가 대파한 이 "거란" 이란 민족은 어떤민족이었을까?
거란은 대대로 유목민족이였으며, 북방의 초원에서 바람처럼 나타나 중국대륙을 습격했다.
-『신오대사. 거란전』- 에보면
그들은 중국인들의 얼굴 껍질을 벗기고, 눈을 파내고, 머리털을 뽑고, 팔을 부러뜨려 죽였다한다.
중국인들이 거란을 얼마나 두려웠는지 짐작해볼수있다. 강력하고, 빠른, 잔혹함으로 그들을 표현하고있다
거란은 이러한 강력한 기마부대로 부족을 통일하고 동북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고려는 이러한 동북아의 패자, 당대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대요제국을 상대로 혈전을 벌였던것이다.
이귀주대첩은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는 거대한사건이 되었다.
고려사에보면 귀주대첩이후. 1021년 만주의 철리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이
-[고려사] 현종 12년 계사일. 철리국(鐵利國)에서 사신을 보내 전과 같이 귀부할 것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그를비롯 수많은 기타 여러부족국가 들이 고려에 조공을 하고 여진같은경우 한달에 한번꼴로 조공을한다
심지어 거란에게 받았던 관첩을 버리고 고려에 귀순하는 여진족도 생겼을정도이니 이때의 정세는
확실하게 고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음을 알수있다.
또한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지만 후에는 반대로 고려의 사대를 받고
송나라 역시 금나라에 칭신하게 된다 .
이러한 상황속에 진정한 황제국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실익을 위해 체면 살려주는 의식치례?
아니다. 그기준이란 분명 당시 실질적 국제질서가 되어야 하는것이다.
요약 : "조공외교는 사대조공이 아닌 자존심만 쎄고 실리도 못챙기는 짱개들 비위 맞추며
실리를 찾기위한 "외교의 한 방법" 그이상 이하도 아니였다" 라고
두번째로 일베간글에 요약을 분명히 해두었음
(위에 링크한 조공,책봉 관계에 대한 고찰)
그러므로 송황제에게 책봉을 받았니 조서를영접했니 따위의 내용은
내글에대한 저격자체가 성립이 될수없는것이다.
#########################################
C
(역시나 출처는 밝히지 않고있다. 아까그 리포트의 한부분이라 예상된다)
+설사 이내용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본인은 핀트자체를 겉으로 보여지는 허례 가아닌
실질적인 국제질서로 잡았기에 이 역시 2번글에대한 반박은 될수없다.
OOOO의 말처럼 고려가 거란의 밑이라는걸 스스로 인식하고있었다면
애초에 전쟁이 일어날 일 또한 없었을것이다.
고려가 스스로 낮음을 확실하게 인정했다면
후방이 두려워 고려를 선공하는 일 따윈 없었을것이다 그렇지않은가?
전란을 종식하고자 하는 고려정부의 지극히 외교적 발언을
마치 고려인이 사대 유전자라도 바탕에 깔아두고 살았던 마냥 표현하고있다.
물론 고려 임금은 거란에 직접 내현한 역사가 있지도, 있을수도 없었다.
고려태조는 거란을 오랑캐로 여겨 선물로 보내온 낙타를 굶겨 죽였고
중국과 연합해 거란에 대한 공격까지 도모한바있다.
고려임금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거란에 입조할수 있겠는가
거란입장에서 중원평정을 위해 고려가 걸림돌이였음은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다
화친을 청하고 말뿐인 내현을 말했다해서 고려가 스스로 거란의 아래임을 자처했다?
OOOO의 주관이 다분한 대목 이라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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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이번에는 출처를 밝혔다. 요나라의 사서인 "요사" 이다 그런데.. )
ㅡ> 고려의 애원이라고 폄하 하고있다. 애원이라,
본인은 지금까지 대승을거둔 승전국이 "애원"을 하는 역사는 들어본적도없다.
자료의 기록은 1005년으로 귀주대첩 이전이지만, 고려가 거란에 애원해서 국가를 지켜낼 생각이였다면
강조의 30만 대군과 강감찬의 20만 대군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땅에서 솓았겠는가
역시나 "보통 ~~이렇게해석해" 라든가 주관이다분한
출처가 없이 불분명한 공신력없는 문구를 도입해 혼란을 가중시킨다 . (거란의 입장에서 해석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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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역시나 위와 같은 글씨체의 정체불명의 자료이다)
ㅡ>위에 핀트가 겉으로 보이는 조공,책봉 관계 따위가 아닌 실질적 위상이라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겉으로 보이는 의식을 강조하고있다.
실제 연호사용등의 의미는 귀국과의 교역을 바란다는 뜻을 중국 중심으로 풀어쓴 것에 불과하다.
고려는 상황 에따라 요,송의 연호를 번갈아 가며 썼다. 한마디로 필요하면 쓰고 필요없으면 버렸다 이말이다
이러한데도 연호의 사용이 국가의 실익이아닌 사대정신에 기초한것이라 할수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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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역시 같은 글씨체의 같은 내용이다)
+참고로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조공","책봉" 관계에 대해서는 논문 몇개만 읽어봐도그 허구성 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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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역시나 같은글씨체의 출처불분명한 이자료로 마무리를 하고있다)
ㅡ> 결국에는 조공,책봉 과같은
겉으로 보여지는 관계가아닌 실질적 국제위상에 핀트를 맞춘 내주장에 대해서는
단하나의 반박도 하지 못한것이다
계속해서 이런 억지를 부린다면 OOOO은
●송이 서하에 조공을 바쳤음에도 서하는 송의 책봉을 받았다는것
●송은 또한 요에게 굴욕 외교로 조공을 바쳤음에도 요는 송의 황제국 체면을 세워준것
●여진이 고려에게 평생조공을 약속했던 여진정벌에서 윤관 사후 4년만에 금제국을 세우며 고려에게 사대요구를한것
등등에 대해서도 설명 할수있어야 할것이다.
:조공 책봉 관계는 누차 말했듯 고려입장에서 국가의 실익을 위해 겉으로 체면을 유지해주는것.
형식치례 그이상 이하도 아니였다.
다음을 보고 확실히 이해해보자
++ 송사 외국열전 [고려]
○ [희녕(熙寧)] 3년(A.D.1070
군(郡)·현(縣)에서 [고려(高麗)의 사신을] 접대하는 옛 준례가 없어 백성들이 퍽 괴로웠는데, 규정을 만들어 반포(頒布)하고,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또 고려(高麗) 사신이 중국말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재리(財利)를 엿보는 자들이 사사로이 왕래할까 염려하여 [고려(高麗) 사신이] 이르는 곳 마다 왕래를 금지시켰다
○ [희녕(熙寧)] 9년(A.D.1076; 高麗 文宗 30) 에 또 최사훈(崔思訓)을 보내 오자, 중귀인(中貴人)에게 명하여 도정(都亭)· 서역(西驛)의 예(例)에 따라 객관(客館)을 수리하여[註167] 고려(高麗) 사신들을 더욱 후하게 대우하도록 하니, 사신으로 오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 정화(政和) 연간(A.D.1111~1117; 高麗 睿宗 6~12) 에 고려(高麗)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註203] 예우(禮遇)가 서하국(西夏國)보다 위에 있었고, 요(遼)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 압반관(押伴官) 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註211]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고려(高麗)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ㅡ>송의 사서인 "송사" 의 내용을 발췌한것이다
고려의 사신을 접대하느라 백성들이 괴로웠다고한다. 무슨의미일까 각자들 해석해보자
대우가 후해져 사신으로 오는자가 더욱 많아졌다고 한다.
또한 국가를 미폐케 하였다고한다 한마디로 고려는 송에게 삥을 뜯어가는 것이였다
OOOO의 주장과달리 송 입장에서 의미도 없는 소국 고려따위를
요사신과 동급으로 여겨 추밀원에서 대접을 한것을보면 송나라는 참 예의가 바른나라인가보다
그런데 재밌는건 이런기록이 송나라에 국한된것이 아니라는것이였다.
역시 송사의 기록이다
[고려(高麗)의] 사신이 거란(契丹)에 이르면 더욱 거만하고 포학스러워 관반(館伴)이나 공경(公卿)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함부로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으로 쳤다.
그렇다 OOOO이 거란에게 조공과 책봉을 받은 주변의 소국이라는
그"고려"와 당대 최강국인 그 "거란"이다.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질을 한단다.. 각자해석해보자
:: 이처럼 고려는 사실상 조공외교를 통해 국가의 실익과 제국의 위상을 동시에 챙겼었던 것이다.
가끔 고려가 제국이면 대한제국도 제국이고 일본도 제국이냐는 반론들이 들어오는데.
그것과는 애초에 개념자체가 다른얘기이다
일본이 아무리 천황 운운해봤자 당시 중국이나 한국에서 일본을 최고 대우한예는 없었다.
동아시아균형의 한축을 담당했던 고려와 일본은
비교대상이아니었던 것이다
++ 참고로 송나라 사람인 곽약허의 [도화견문지] 에보면 일본은 고려의 속국이라고 주장하고있다.
또한 자치통감 남당서 역시 일본이 고려에 일찍이 귀부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일본이 고려의 속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정세 에서의 일본의 위치를 짐작할수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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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에서 말한것과같이 "기록"보다 학계니 정황이니하며
주관이 가미된 논문따위를 더 우선시한다는것이다.
(물론 "기록" 이 100프로 맞는건 아닐수있지만 그기록을 부정하려면 위의
"만월대 구조" 와같은 명백한증거가있어야할것이다)
위에 OOOO이 인용한 자료가 저명한 교수의 논문인지. 시중에 굴러다니는 잡서인지 본인은 관심이 없다.
확실한것은 아직까지 논쟁이 되고있는부분에 대해서는
첫번째로 먼저 직접사료 OR 1차사료등의 교차검증을통한 진위여부가 먼저 가려져야 할것이며
그게 힘들다하면 "확실한 증거" 가 있어야 한다는것이다.
이는 내글을 저격한 OOOO의 요약이다.
OOOO의 한줄요약 : 팔관회는 불교적 색체가 있어도, 호국불교를 주제로 한 행사라고 보지 않는 시각이 많다
->본인:애초에 내주장 자체가 신라시대의 호국불교적 성향이였던 팔관회가 고려에 와서는 정치,문화의 통합을 이룩하는 대축제로 자리매김했다는것이다
OOOO: 신라의 팔관회 자체가 호국불교적 성향이 아니라는 해석이 많다
->본인: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팔관회는 호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OOOO은 (백희가무가 자주등장한다는 내용을 들어 신라의 팔관회가 호국불교 성향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네이버백과사전에 삼국
사기의 기록에 의해 신라의 팔관회가 호국성격을 지녔다는 내용을 뒤짚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된다.
백희 가무와 호국불교는 무조건 상반된다고 볼수있을것인가? )
++또한 본인은 분명 원글에 기존의 토착신앙으로 정신적 통합을 도모했었고 반도에 불교가 들어옴에따라
자연스럽게 그것이 변용되어 불교가 호국불교적인 성향으로 발전했을것으로 생각된다고 주석을 달아두었다
OOOO: 네이버 백과사전은 신뢰 할수가 없다.
?????
신뢰 할수없으면 위에 말한것과 같이 누구나 인정할만한 "증거" 를 들어서 입증을 하던지 공신력을 인정받아 네이버
사전 내용을 바꾸던지 할것이지 학자들 사이에서도 확증된것이 없는것을 들어 남을 저격을 한것은 "치졸함"의 극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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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ㅡ> 본인은 애초에 원글에 궁예가 팔관회를 개최하였고,
모두알다시피 궁예는 승려출신이기에 불교와 관련이 깊다하였다 이뿐이다
OOOO은 출처불분명의 자료를 들고와 신라시대의 팔관회가 삼국사기의 기록에의하면 호국불교적 성향이 짙었다는 내용이 떡하니 있는데도
불구하고 백희가무를 통해 신라시대의 팔관회 자체가 불교적 성향이 없었다는 주장을들어 궁예의 팔관회에 까지 확대시켜 대입한것이다
본인은 궁예가 승려출신이며 팔관회를 열었다고했을뿐 궁예를 팔관회에 연결시킨적도 없으며 확대해석한적도없다.
오로지 "고려 팔관회의 성격" 에 대해서 글을썼을뿐이다
저런 반박이 도무지 왜나온건지 이해할수가없다
마지막으로 최승로의 건의에 "백희가무가 난무하고 본래의 성격이 퇴색되어" 라고 한점을 들고나왔는데
토속신앙적 요소가 짙었다는거자체가 먼저 설명한거처럼
토속신앙으로의 정신적통합 -> 불교도입 -> 불교가 토속신앙적 변용(정신적 통합) ->
최승로의 건의 (OO의 주장에 의하면 백희가무를 잡기취급하고 사치가 심해져폐지) = 신라의 팔관회가
"호국불교적 성향이아님" 이 항상 성립할 당위성이 없다는것이다.
설사 이것이 설득력이 있다할지라도 위에 말한것과같이 아직 논쟁중인 부분이기에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진리로 여겨 저격글을 쓰는 작태는 뻔뻔함이라는것이다.
한마디로 호국불교의 목적자체가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는것인데 백희가무가
있었다고해서 호국불교가 아니라는 법은없다 라는것이다.
=>이렇기에 본인은 고려의 팔관회를 기존의 호국불교적 성향에서
확장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확인하고 경제무역을 도모하며
문화적 대통합을 이룬 대행사로 서술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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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쭉 보면 알겠지만 oooo의주관적 편견이 들어간,
그의 역사관을 짐작하게할만한 표현들이 참많다.
우리 역사를 중국의 신하이며 초라한 역사로 깎아내림으로 일관하는데
그러자면 설명해야 할것들이 참많을것이다.
I
중요하지도 않아서 고려사신을 자신들이 조공바친 요제국과 같은 최고대우를 했고
사신접대때문에 국가가 피폐해졌나보다
거란에이어 이번에는 송의 입장에서 대변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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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송 조정 에서는 고려를 최고수준으로 예우해도
대송의 사신 께서는 고려임금 따위에게 굽신거릴 수가 없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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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이제 타겟이 조선 까지 확대된다.
OOOO은 이러한 역사관적 주관으로 우리역사를 폄하하고있음을 알수있다.
그렇다면 OOOO은 설명해야할것이 참많을것이다.
1.송에서 고려사신을 요사신과 같이 추밀원에서 최고예우 한것
2.소국 고려를 대접하느라 나라가 피폐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송사에 있는것
3.고요 전쟁이후 고려에게 철리국을 비롯 수많은 부족국가들이 고려의 영토가 되기를 청하거나 이후 백년이 넘도록 한달에 한번꼴 꾸준히 조공을 한것을 통해 생각해볼수있는 당시 국제질서 (당시 여진 여러부족이 거란의 직첩을 버리고 고려에 귀속을청함)
4.거란 이나 송이 고려에 군사요청을 했을때 고려가 거절한것 (조공하고 책봉을 받는 신하국이 감히 대국의 명을 거절할수있는가?)
5.고려에 조공또는 무역기록이 남았던 수많은 국가들이 조선조에 와서 그기록이 끊긴것
6.대여진 정벌이후 고려에 평생조공 하겠다는 약속을 한뒤 윤관사후 4년만에 금제국을 건국하고 동아시아를 석권했던 금이 고려의 황제국 체제를 인정해준것 (당시 사실상 이자겸의 독단으로 금에 사대를 하게됨)
등등.
<이와중에 발견한 OOOO의 치졸함>
빨간줄을 보면 알겠지만 다른닉으로 시간이 왔다갔다한다.
ㅡ> 43분 니나X족끼리, 44분 박X자 , 49분 7초 니나X족끼리, 49 분 30초 박X자
????
아마도 물타기 여론조장을 하고싶어 저런 추잡한 행동을 했나보다.
정말 처음부터 역사 정보글을 쓰면서 놀랐다. 이른바 무분별한 "국까" 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마 수십명은 상대한거같은데
자신의 상식이 깨지고 무시당한것에 대한반감인지 모르겠으나 막무가내 들인 국까들도 여럿있었다.
시간을 내어 이글을 쓴이유는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한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폄하하고 깎아 내리려는 소수 불순한 세력들에 의해 휘둘리고,
혼란스러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국까들이 많이 드는 반론중에 대표적인것 하나를 들어보겠다. 고려는 몽골에 굴복한 비참한 역사라한다.
그렇다면 서하에 조공하고 요에 조공하고 고려에 휘둘렸으며 결국에는 금에 황제둘이 포로로 붙잡혀 나라가 망해버린 "송"이나,
유래없는 대제국을 이룩했지만 결국에는 도적떼(홍건적)가 근본이되어 일어난 명에의해 망하고 황제가 도망쳐 죽은 "몽골" 의 역사는
볼품이 없이 하찮은 것들인가?
아니다 송역시 당대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이였으며 몽골제국은 뭐.. 따로설명안하겠다.
결국 어느 나라나 찬란했던 역사와 어두운 역사가있는것이다. 그런데 어두운면만을 부각시켜 스스로
를 깎아 내리는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돌아보며 부끄러워 해야할일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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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마치며
본인은 역사학도는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역사에 흥미가 많았던 23살의 평범한 남자임을 밝힌다.
전문적으로 배우고 연구하는 역사학도들에 비해서는 그 지식의 양이 부족하다고 할수있겠다.
하지만 난 이거 하나는 확신 할수가있다.
이정희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고해서 대한민국의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받는것은 아니다.
지식이란 자료를 접해서 습득하면 그만인것이고 누가더 먼저 누가더 많이 보았냐의 차이일뿐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본적인 "가치관" 과 "판단력" 이 지식의 많고 적음에앞서
근본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할 필수적인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국까라는 부류들.
조선족,일뽕 부터 시작해서 정상적인 교과교육을 받은 사람까지 여러부류가 있을것이다.
선동이라는게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것인지는 다들 알고는있다.
자신은 그런부류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선동당한 좌익빨갱이들 역시 그들이 믿는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나를 포함해 이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옳바른 역사관과 판단의 중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언제 어떻게 국까로 돌변해 버릴지 모른다는것이다.
여기저기 간사한 뱀의 혀놀림이 장황한 현실속에
가치관이 흔들린다면 중요한것들만
기억하면된다.
자유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 반 국가적사고(친북 ,종북) 는 어떠한 이유를 붙여도 용납될수없다는것과
스스로의 역사를 타당하지 않은 이유와 근거로 헐뜯고 깎아내리는것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부정하는,
그어떤 이유를 붙여도 용납될수없다는것이다.
이게 팩트다
스스로 자국비하하고 노예근성 , 패배의식 찌들어서 살면서 국까짓하면
그게아주 깨어있는거같고 똑똑한거 같으냐들
정신차려라들 스스로 경각심 가져야한다 우리모두
몇일전 음모저격 맞아서 해명글 올렸었는데,
http://www.ilbe.com/1328291407
댓글들 보며 그래도 많은사람이 내글을 찾아주고
도움을 얻었다는 댓글들을 보고 다시생각해봤다.
아무리 양질의 글을 써봤자 음모와 모략이 판친다면 그글은 아무 의미 없는 잡글이 될뿐이다.
재밌게 읽어주는건 고맙지만
정보글을 쓰는취지 (정보와 의견을 공유하고 공부해나가자는) 에 부합하는 양질의 글로 만들어주려면
짤막하게라도 읽고 느낀 자신의 의견을 댓글을 남겨주는 풍토가 자리잡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베주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다만 반박할때는 예의를 차리면서 기록과 자료를 중심으로 해주길 당부한다.
나는 로보트가 아니다.
다짜고짜 국뽕 ㅁㅈㅎ 이딴식으로 나온다면 나역시 당연히 좋게 반응 할수없다 .
어그제 말했듯 당분간 연재글 (이자겸뒤로 묘청과 김부식) 은 쉴생각이고
시간봐서 조만간 고려관련 생소한 지식들 정리해서 글한번 쓰고 추후에 다시 연재 할생각이다.
글 재밌게 읽어줬던 게이들한테는 정식으로 고맙다는 인사 하고싶다 .
요약 :
1.무조건 우리역사를 깎아내리는 국까는 빨갱이와 다를바없다.
2.기록과 자료를 왜곡하지 않는범위 내에서 능동적, 다각적 판단력을 기르자
3.그것이 자국의 역사를 옳바르게 이해하는 기본 중 기본이다.
우리역사, 공부해보면 충분히 자부심가질만한 가치가있는 역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