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올린 일베갔던 글들 몇개 사진이 꼬여서 모링한테 수정좀 부탁했더니 전부다 삭제해버렸다 ㅡ ㅡ...
건의함에 올렸더니 복구는 못해준다고 죄송하다 하더라..
정보글 써본게이들은 알겠지만 ,
글쓴거 많은애들이 읽어줘서일베 간것들이 작성글보기에 차곡차곡 쌓일때 그 뿌듯함이 뭔지 알거다.
고생해서 글쓸때는 여러사람이 읽어줄때 젤 보람있잖아
근데 글하나당 적어도 3~5 시간을 투자한 글들을 삭제해 버리면.. 글쓸 의욕이 나겠니들
내가 일베레벨먹자고 이짓하는것도 아니고..
일베간글 다시 올리는건 저런상황때문이니 정보글 많은사람들 읽게하자는 좋은생각으로 양해좀 바란다.
날라간 글들 전부 재업하고 내용보충해서 일베 보낸뒤에 다음편(묘청편) 쓸 생각이다.
쩝
내용보강해서 다시 올린다, 읽었던 사람도 다시한번봐바 ~ 더다듬었고 내용도 추가되었으니.
좀길어도 꼼꼼히 읽어봐들 아리송 했던것들이 많이 풀릴거야 .
[역사정보글]
1. 고려가 황제국?
http://www.ilbe.com/1308166143
2. 천자국의 축제 팔관회
http://www.ilbe.com/1309007959
3. 조공, 책봉 관계에 대한 고찰
http://www.ilbe.com/1090250150
4-1. 여진정벌. 눈부신 태평성대 그리고 먹구름
http://www.ilbe.com/131130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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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진 특수부대 별무반}
여진의 반란과 갑신년(1104)의 치욕 이후
고려는 단호하고도 처절한 응징을 계획한다.
최고의 성군 이였던 선황(문종)의 뒤를이어
태평천하의 고려를 더욱 강성하게 만들어 반석위에 올리려했던 숙종에게
여진의 발흥은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고,자존심에 금이간 숙종은 이를갈고 또갈아 대대적인 복수를 다짐하였던것이다.
철저한 계획속에 진행된 이프로젝트는
우리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최대규모의 국가 총력전이요 정벌전인것이었다.
(또 이거로 토다는 애들있던데, 고려사 기록에 '여진의 반란' 이라고 나온다
꼭 어떻게든 스스로 깎아내리려고 일뽕 조선족국까들이 조공정도 받은거를 무슨 그렇게 표현하냐는데
다시한번 확실하게 말해둔다. 수많은여진이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되어 고려의 백성으로
살거나 귀순주가 설치되어 고려는 여진을 직접또는 기미(간접)지배했다. 기록다 있으니 그만귀찮게해라.(1편참조))
그리고 연재하는글 모두 기록중심으로 쓰는거다 내가 지어내거나 해서 쓰는 소설아니다.
윤관이 아뢰기를 '적의 형세가 측량키 어려울정도로 강성하며, 기병중심의 여진을 당해내기에 어려움이있습니다' 하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말이였다.
당시 여진은 거란(요)에게 오랜시간 압박과 수탈을 당하였는데 (여진족에 대한 설명은 1편참조)
고려는 회유책으로 여진을 지배한 반면
거란은달랐다.
거란의 횡포는 여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던것이다
그결과 여진은 응집력이 생겨 뭉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는 동여진부근의 완안부(금황실)가 있었다.
완안부는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대했고 상당수의 여진부족이 합류하였다.
여진의 주력군은 기병이였는데, 국민의 거의전체가 기마민족이며 유목하였던 거란기병의 강성함에는 비할바가 아니였다.
하지만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물듯이 여진은 스스로 결집하고 힘을모아 그에 버금가는 기병으로 거듭난것이다.
-금나라 중장기병
이에 숙종은 윤관에 건의에따라 기병중심의 여진군을 대적하기위해 대대적으로 군력을 모아 조직을 편성하니,
이것이 바로 대여진 특수부대 "별무반" 이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과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승병(僧兵)으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
그리고 도탕(跳盪)·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군(發火軍) 등의 특수군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가장 핵심은 신기군이였으며 경궁은 센화살을쏘는, 정노는 쇠뇌를 쏘는, 발화군은 화공부대였다.
-별무반
+『고려사』 윤관 열전에 보면. 별무반의 규모는 30만에 이르는데
여기에는 농민은 물론이고 직책이없는 양반과 서리,상인과 노예 그리고 승병까지 포함되었으니 그야말로 고려의 군력을 총동원 하는것이였다
거란을 뛰어넘는 강기병으로 성장하여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합세력을 구축한 여진과
패배의 치욕에 이를갈며 응징을 천명하던 고려. 양측의 국력을 총동원한 대격돌이 시작되려는것이다.
+여진정벌의 영웅, 윤관이 눈을감은지 4년이 지나 여진은 국호를 "금"이라하고(1115) 황제를 칭한후 동아시아를 제패한다.
다시말해 이전쟁은 사실상 고려와 금나라의 총력전이라고 봐도 무방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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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서잠깐 고려군의 전체 규모를 알아보자. 출처:『고려사』-병지
고려의 군사조직은 주현군,주진군,중앙군 으로 나눈다.
주진군이란 북방경계에 대비하여 항시 유지되었던 상비군으로
서경에는 해군(海軍)과 원정양반군한인잡류(元定兩班軍閑人雜類)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다.
지휘관인 장교와 누락되었을 보이는 군액까지 합치면 양계(동계+북계)의 전체 병력은 대략 14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주현군은 동북계가아닌 남방 5도(五道)와 경기(京畿) 내의 군사도(軍事道)를 단위로 각병종의 군액이 기록되어있는데
기록된 전체 군액은 보승 8,601명, 정용 19,754명, 1품 19,882명 합계 48,237명 이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 6위라하는데 2군은 황제의 친위대인 응양군과 용호군, 6위는 황도와 변경의 방비를 맡았다.
규모는 약 45,000명이다
여기에 정종2년에 설치한 호족들의 지방군, 예비군 성격인 광군이 30만 이였으며 역시 예비군 성격의 특수부대 별무반이 30만 이었다
(광군은 현종대에 주현군으로 개편됨)
▶계산해보면 항시대기하던 양계의 상비군 14만+ 주현군 48000여명 + 중앙군 4만5천 + 예비군 30여만 하여 총 53만여 명에 달한다.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겠지만 주현군을 광군에 포함시키는 견해로 본다 하여도 50만에 달하는 규모이다)
-뉘렌베르크에서 나치군 50만의 사열식
송나라 사람 서긍이 고려는 60만 강병을 보유하였다 하면서 고려의 인구가 210만 이라고 기록해놓았다.
전근대 사회의 병력동원 가능범위로 봤을때 210만의 인구에서 60만 강병이란 불가능한 수치이다.
따라서 둘중하나는 잘못 기록했다는것인데
고려의 경우 광군 외에도 거란전쟁당시 강조의 30만, 강감찬의 20만, 별무반의 30만등 대규모 병력동원기록이 여러차례있으며,
근대적 인구조사가 실시된 1906년 일본관헌에 의해서 조사된 우리 나라의 인구수를 추정하면, 통일신라시대 7세기 중엽 인구는 약 675만 명이 된다.
하여 서긍이 고려의 인구수를 잘못 기록했다고 보는것이 타당한것이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1차사료로 문헌적 가치가 높으나 곳곳에 잘못 기록한것이 있으며
송황제의 명을받아 게 바치기위한 견문록으로 중화론적 관점에서 왜곡된 부분이 더러 보인다
※후대인 조선 보다 고려가 어떻게 병력이 많을수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있는데
조선이 병조를 4번째에 두었던것에 비해 고려는 6부중에 병부를 2번째로 둘만큼 국방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국시의 기본이 북진이였으며 거란이라는 강대한 적과 대치하고있었으므로 충분히 이해할수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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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전쟁의 시작, 그리고 통쾌한 복수}
하지만
숙종은 병을얻어 큰뜻을 이루지 못한 채 붕어하고,
뒤를이어 즉위한 예종이 선황(숙종)의 유지를받들어 때를기다리며 별무반의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있을때..
선수를 친건 여진쪽이였다.
예종2년(1107) 윤10월. 여진이 고려의 국경을 침략하며 고려와 전면전을 하려는 낌새가 보였던것이다.
이에 예종이 평전인 중광전에 소장된 선황의 맹세문을 재상들에게 꺼내 보여주니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숙종께서 남긴 뜻이 이리 간절하니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태묘 에서 점을 치고 드디어 출정을 하니 중서문하성의 고위재상이 되어있었던
윤관을 원수로, 추밀원 재상 오연총을 부워수로 하는 17만7천의 대군이였다.
+17만 7천이 출정하지만 『금사』에보면 고려가 9성을 얻은후 한참 전쟁중에
첫줄정군 외에 여진이 5만,7만의 대군을 맞아 싸웠다는 기록이있는걸보면열전과 기념비에 기록되었듯 30만이 전부 투입되었을 거라 보여진다.
고려군은 속전속결로 일을 진행하였다. 먼저 계략으로 여진의 여러 지도부들을 유인하여 술을 먹인후 취한 틈을 타서 살해한다.
오아속(금 강종)이 이소식을 듣고 분노와 충격속에 완안부로 돌아가는 사이에
고려군은 치밀하게 준비하며 이를갈아 복수의 다짐을하던 대정벌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고려의 대군이 진격하여 순식간에 여러성들을 함락하고 일대를 장악하였다.
고려군의 진군이 당시 얼마나 빨랐던지 대부분은 대항도 제대로 못하고 죽거나 포로로 잡혔으니
이정도 기동력이라면 고려의 기병 역시 거란과 여진에 밀리지않는다 할수있는것이였다.
-고려의 기병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한 고려였다.
후삼국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의 편제에 기병이 절반가량인 5만여명이나 되었고
최강 거란군을 맞아 싸운 귀주대첩에서의 기병의 대활약을 보아 결코 무시할만한것이 아니었다.
고려군은 때로는 여러부대로, 때로는 대규모로 전투를 수행하였는데
발빠르게 진격하던 고려군이 문내니촌에 이르러
적이 동음성에 들어가 방어하자 윤관이 병마영할 임언과 병마판관 최홍정에게 군사를 주어 처부수었다.
이어 고려군이 석성을 공격할때에 여진의 반격이 거세어 진격할수 없었는데,
이때 병마녹사 척준경이 윤관에게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장주에서 죄를지었을때 공께서 저를 장사로 여기시어 조정에 요청해 용서해 주셨으니 금일, 이몸을 죽여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어 적의 한가운데로 돌격하여 추장 수명을 격살하니 이를본 고려군이 사기가 올라 적을 섬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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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성}
윤관은 화곶령 아래에 성을 쌓아 "웅주"라 하고,
궁한이촌에 성을 쌓아 "길주", 몽라골령 아래에 성을 쌓아 "영주", 오리금촌에 성을 쌓아 "복주"라 하였다.
또한 윤관은 영주성 안에 호국인왕사 (護國仁王寺) 와 진동보제사 (鎭東普濟寺) 두 절을 지었다.
숙종의 눈물겨웠던 맹세를 실천한것이다.
윤관의 고려군은 심각한 위기를 여럿 겪었으면서도 끈질긴 공격끝에 여진을 깊숙이 몰아부쳐 여진평정을 완료하였다.
이미 쌓은 4개의 성을 보강하고 함주 및 공험진에도 성을 쌓았으며 ,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공험진의 선춘령에 영토의 경계를 알리는 비석을 세웠으니 이때가 예종3년 2월로 대단히 빠르고 눈부신 성과였다.
의천과함께 숙종의 옆에서 신법을 주창하며 부국강병을위해 혼신을 기울였던 윤관이
드디어 뼈에 사무친 숙종의 한을 달래주던 순간이였다.
-척경입비도 (선춘령비를 세우는모습)
윤관은 좌부승선 임언을 시켜 영주 청사의 벽에 다음과 같이 쓰게하였다.
☞
여진은 본디 고구려의 한 부락으로 개마고원(盖馬高原)의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물[貢職]을 바쳤으며 역대 조종의 은택을 크게 입어 왔는데도 하루 아침에 의리에 어긋나게 배반하니 선고(先考)께서 크게 분노하셨다. 내 듣건대 옛 사람이 말하는 큰 효도란 어버이의 뜻을 잘 잇는 것일 뿐이라 하였다. 내가 지금 다행히 삼년상[達制33)]을 마치고 나라 일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의로운 깃발을 들어 무도한 것들을 쳐서 선왕의 치욕을 완전히 씻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수사도(守司徒)·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을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오연총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정예병 30만 명을 거느리고 정벌을 전담하게 하였다.
…적진으로 진격하자 삼군이 분격해 일당백으로 싸우니 마치 마른 가지를 꺾고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이 전투에 승리했다.
죽임을 당한 자가 6천여 명이고 자진해서 무기를 반납하면서 항복해온 자들이 5만여 명이었으며, 싸움터의 먼지만 바라보고도 정신을 잃고 북쪽 끝까지 달아나는 자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아!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여진이 자신들의 군사상의 열세를 생각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 이와 같았다.
☞ 고려가대군으로 여진을 격파하여 6천여명의 수급을 베고 5면여명을 포로로 잡는 큰성과를 올렸음을 기록하였다.
고려군은 이어서 의주,통태진,평융진에도 성을 쌓아 9성이 완성되었다.
윤관은 이곳에 고려인들을 이주시켜 이지역이 고려의 영토임을 확실하게 해두었다.
9성의 중심지는 길주와 함주로 각각 도독부가 설치되었다.
+고려말 편찬된 『강목』에 보면 총 6만9천호로 호당 3명으로 잡으면 20만7천, 5명으로 잡으면 34만5천명에 이르는 대규모 이주였다.
문종때의 지배영역을 전부 보전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질적 가치는 그이상이였다.
이전에는 귀순주를 설치하여 자치권을 부여하는 기미지배 방식이 주된 통치형태였는데,
이때는 여진족을 몰아내 고려인을 이주시켰으니 완전한 영토로의 편입을 의미한다.
+9성의 위치는 정확히 밝혀지지않고있다. 하지만 적어도 고려가 함흥일대를 차지하고자 30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일으키진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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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의 역습과 위대한영웅 척준경}
하지만
가슴 벅찬 영광의 순간도 잠시,
삶의 터전과 설 곳을 잃어버린 여진이 그대로 있을리 만무했다. 여진의 총공세가 시작된것이다.
여진의 2만대군이 영주성으로 쳐들어왔다
새로 개척한 광활한 지역 여기저기에 군대를 주둔시켰기에
영주성이라고 군대가 많지는 않았을터에 윤관은 수성전을 생각하는데 ,
이때 척준경이 말하기를
'시간이 흐를수록 적의 수가 늘어나고 성안의 식량은 떨어질텐데 원병이 오지않으면 어찌하겠느냐' 반문한뒤,
'저번 승리를 여러공께서 보지 못한 분이 계실 터, 금일 또한 출정하여 사력을 다해 싸울테니 공께서는 지켜보시라'
하고 용사들을 이끌고 성을 나가 돌격하여 적의 목을 마구베었다.(19명)
이에 여진은 그 기세에 눌려 군을 물리며 패주하였고 척준경은 당당하게 개선하였다.
척준경은 용장일뿐아니라 사태를 파악하는 탁월한 통찰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아속(금 강종)이 여진군 최정예 수만으로 쳐들어와 웅주성을 포위했다.
웅주성 성주가 마침 이곳에 와있던 척준경에게 말했다.
'성을 지킴이 오래 되어 군량이 떨어지고 원군이 오지 않으니 공이 성을 나가 원군을 데리고 와서 구원하지 않는다면 성중의 병졸이 살아날수가 없소 '
이에 척준경이 병졸복장으로 밤중에 성을 빠져나가 정주로 돌아간뒤 통태진에서 군을 정비하여
야등포로부터 길주에 이르러 마주친 여진군을 싹쓸어버리니 길주와 웅주성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
적이 이때입은 피해가 얼마나 컸던지,
여진은 이후 여진은 소규모로 여러지역을 약탈하는 작전을 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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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관과 척준경의 각별한 인연은 예종3년 어느날에 맺어진다.
윤관과 오연총이 이끄는 고려의 정예군 8천이 가한촌 좁은 길을 지나고있을때 매복해 있던 여진의 기습을 받았다.
고려군은 전멸하여 10여명만 살아남아 윤관의 운명이 절체절명의 순간이였다.
그런데 이때 그를 구하러 달려오는 사람이보였으니 이가바로 척준경이다 . 그가 돌진하려하자 동생인 척준신이 만류하지만 척준경은
'너는 돌아가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해라. 나는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그 의리를 다할것이다'
하면서 용사10여명을 이끌고 고함치며 돌진하여 순식간에 10여명을 격살하였고.
마침 병마판관 최홍정과 장군 이관진 등이 골짜기에서 구원병을 이끌고 왔다.
이에 여진군은 포위를 풀고 도망했고 살아서 영주성으로 돌아온 윤관은 눈물을 흘리며 척준경에게
'그대를 앞으로 자식으로 대할것이니 그대역시 그렇게 해주오 ' 하였다.
위대한 두영웅의 인연이 이렇게 드라마틱 하게 맺어지니
척준경은 용맹과 지략을 갖춘 천하 용장이였으며 윤관은 여진정벌을 기획하고 실천한 뛰어난 전략가이자 설계자였다.
+흔히들 소드마스터 척 으로 알고있는 척준경.
한국사, 아니 인류역사상 "기록" 으로만 본다면 그를 능가하는 무장이 거의 없을만큼 마치 소설과 같은 무용담을 남긴 그는
고려사에 결국 역적으로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공을 상세히 기록하여 그가 영웅이였음을 상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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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여진은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 파상공세를 한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구원군을 보내지만
개척한 땅이 워낙 넓고 9성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여진군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았던 게릴라 작전이 효과를 본것이였다.
이주시킨 백성들을 먹여살리려면 농사를 지어야했는데 적이 이러한 공세를 펼치니 그것이 가능하지가 않았다.
(본국에서 식량등을 배송하기에 이르지만 역부족이였다)
특히
집중공격을 받은곳은 길주였는데,
병마녹사 허재가 이끄는 고려군이 필사적으로 길주성을지켰다.
여진군이 수개월을 맹공하여 성이 함락당할 지경에 이르지만 허재는 끝내 이를 지켜냈다.
이공으로 허재는 병마판관으로 승진한다
예종3년 5월에는 임언과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가 여진군에 포위당하자
부원수 오연총이 김준, 왕자지에게 명령해 정예병 1만을 이끌고 사방에서 수륙으로 진격하게 하니 적을 대파하여 웅주를 구하였다.
또한 예종3년 8월에는 병마판관 왕자지와 척준경이 함주와 영주에서 여진군을 격파했으며
9월에는 역시 왕자지와 척준경이 사지령에서 여진군을 격파했다.
척준경과 왕자지, 여진정벌에서의 이둘의 활약은 가히 대단했다.
왕자지는 숙종의 왼팔이였던 소태보와 함께 고려를 호령했던 왕국모의 처남이었다.
4년3월에는 허재가 김의원과 길주관문밖에서 여진군을 격파했다
+허재는 여진정벌 또하나의 영웅이다
-여진정벌 기록화
이렇게 고려군은 여진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면서도 승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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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성의 반환 그리고 평가}
그러던중
길주를 수개월 포위한 여진군이 예종 4년 5월에 맹공을 퍼부어 성이 거의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된다.
병마부사 이관진과 병마판관 허재 등이 방어하여 싸웠지만
피해가 막심하여 사상자는 계속해늘어났다.
길주의 고려군 2천여명은 130여일 동안 포위한 여진족 수만대군과 사력을 다해 가까스로 성을 지키고있는 가운데
부원수 오연총이 구원군을 이끌고 온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공험진에 이르러 여진군의 기습에 대패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낸다.
고려조정은 여진이 이전부터 고려에게 화해와 9성반환을 간절히 요구해 오던차에
오연총의 대패를 보고받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개경에서 9성 반환을 두고 회의 를 하였는데,
평장사 최홍사 등 대부분이 찬성했고 예부낭중 박승중 등 몇명이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여진의 사절단이 다시 개경에 와서 조회하기를 요청하여 예종이 편전 남문에서 만나
그이유를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고려사』 예종4년 6월
옛날 우리 태조 영가(盈歌)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祖宗)은 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의리상 귀부(歸附)해야 마땅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의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 역시 대방(大邦, 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는데,
지난번 궁한촌(弓漢村) 사람들이 스스로 좋지 않은 일을 일으켰으나, 이는 본디 태사의 지휘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조(國朝, 고려)에서 그 국경을 범한 죄를 성토하고 다시 수호(修好)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조공(朝貢)을 끊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지난해에 대거 쳐들어와서 우리의 노약자들을 죽이고 9성을 쌓아 남아 있는 고단한 백성들로 하여금 의지할 바가 없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태사가 우리를 보내 옛 땅을 청하게 한 것이니, 삼가 바라옵건대 불쌍하게 여겨 9성 돌려주기를 허락하시고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시면,
저희들이 하늘을 두고 맹세하여 자손 대대로 공손히 세공(世貢)을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왓장 조각이나 돌멩이 하나라도 국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
☞ 지금의 지도자 오아속 또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고있으니
자손 대대로 고려에 조공하며 감히 국경에 돌맹이하나 던지지 않겠다고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교의 한 술책 이었을뿐이였으니... 고려의 태도는 너무 안일했다.
※ 이때 고려조정의 반응을 살펴보자
『동국통감』 - 예종4년
신등이 살펴보건데 …
현종(顯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 이래, 오랫동안 승평하여 비록 오랑캐들을 꾸짖고 제어하였지만 모두 관부(款附)하였으며,
여진이 가장 웅강하다고 일컬었으나 역시 귀순하였으니, 언제 우리에게 저버린 일이 있었습니까?
당시의 무신들이 공(功)을 바라고 이익을 좋아하여, 이일숙(李日肅)·임언(林彦) 같은 무리가 침공하여 정벌하기를 건의하였는데,
전(傳)에 이르기를, ‘남의 영토와 보화(寶貨)를 이롭게 여기는 것을 탐병(貪兵)이라 하는데, 탐병하는 자는 패하며,
나라가 큰 것을 믿고 백성이 많은 것을 자랑하여 적에게 위엄을 보이고자 하는 것을 교병(驕兵)이라 하는데,
교병하는 자는 멸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 여진이 가장 강성하지만 역시 귀순하였고,나라를 크게 넓혀 위엄을 보이는게 허튼짓이라는 여유를 보여준다
자부심이 지나쳐 자만심으로 이어졌던거이리라.
(윤관에 대한 질투와 정치적 모함 역시 크게작용했다고 볼수있다)
이에조정의 분위기는 이미 9성 반황 쪽으로 기울어있었으니
윤관과 오연총의 출정군이 전장에서 분투하고 있는데 벌어진 일이었다.
예종은 신하들의 공론을 수렴하여 9성 반환을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을하게된 이유는 전쟁비용의 증가로인한 백성들의 고초와 수많은 사상자 들이 생긴것 등도 있었다 .
결국
반환을 허락하니 이에 여진이 너무 감격한 나머지 울면서 감사의 절을 올렸다.
황명을 받아 병마별감 승선 최홍정과 병마사 이부상서 문관이 9성의 파괴와 출정군 귀환을 지휘했는데,
여진 추장들에게 9성을 돌려 받으려면 하늘에 맹세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추장들이
'지금부터 나쁜 마음을 지니지 아니하고 대대로 조공을 바치겠나이다. 이 맹세를 어긴다면 번토(제후의 땅)가 멸망 하리다'
하였다
-『동국통감』 예종4년 7월
… … …
+오해할까봐 미리 말하는데 나 보수성향이고 갓카 존경한다 ;
하지만
이모든 맹세들은 곧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니
9성을 반환받은 여진은 더욱 강성해져서
금나라를세워 맹세를 어기고 오히려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때서야 고려조정은 앞으로 닥칠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으리라
결국 내부정쟁의 소용돌이 (이자겸의 난) 속에 고려는 금에게 사대하게된다.
그렇다면 이 정벌은 실패했다고 봐야 할것인가?
그렇지않다.
금나라는 중원천하를 재패했음을 내세워 형식적 관계를 요구했을뿐
고려의 황제국 체제를 인정하였으며 대함에있어서도 조심스러웠다.
금나라 역사서인『금사』의 기록을보자
고려가 보주(保州) 땅을 요구하자 금태조가 거절하고
“만약 고려(高麗)가 와 보주(保州)를 탈취하려고 하면 호자고(胡刺古)· 습현(習顯) 등의 군사를 증강시켜 그에 대비해야 할 것이며, 혹시라도 병사를 연합하려 하면 함부로 가지 말고 오직 변방만 신중히 지켜라.
▷고려의 군사력을 이미 체감한 여진은 함부로 경거망동 하지 못한것이다
-금태조 완안 아골타
고려의 9성 반환은
이주민을 철수시켜 그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를 거두고
전처럼 기미지배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공험진 등을 남겨 여진의 동태를 감시 하면서 여진을 신하로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곧 9성을 반환받은 여진이 성장하여 금을 세워감에따라 여진에대한 고려의 지배력은 서서히 상실하게 된다.
9성반환은 아쉬운 결정이라고 볼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최고로 강성한 여진을 상대로
정벌전을 벌여 고려의 국력이 건재함을 다시한번 만천하에 위시하고,
북쪽 멀리 고구려와 발해의 광활한 옛땅을 실질적으로 수복해 옛영광을 재현하였으며,
금의 침략을 사전 제어하여 후대에까지 대대로 두려움을 끼쳤으니
이 사건이 갖는 의의는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할수있는것이다.
+『세종실록』권59 15년 3월 20일 에보면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
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이때의 위상이 조선시대 까지도 전해졌음을 알수있다.
이렇게 양측의 국력을 총동원했던 대전쟁은 막을 내린다.
대영웅 윤관이 운명한지 4년후(1115년). 여진이 강성하여 금을 건국하고 고려에 사대를 요구함에 따라 조정은 충격에 빠지고,
+물론 조정의 관료 대부분은 금과 형제관계를 맺는것 조차 용납할수가없었지만
황제를 능가하던 힘을 가진 이자겸이 자신의 권세에 금이갈까 두려워 사실상 독단으로 체결한다
고려에는 또하나의 거대한 전쟁이 다가 오고있었으니...
윤관의 뒤를이은 묘청을 중심으로하는 서경파 와 김부식등 신라계를 중심으로하는 개경파의 내전이그것이다.
이는 국초부터 그 갈등의 뿌리가 깊었던 서경파vs개경파 의 대립이 마침내 폭발하는 사건이였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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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은 이자겸이다 ~
3줄 요약 :
1.별무반과 여진정벌전
2.대영웅 윤관과 척준경
3.9성 반환과 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