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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역사 정보글 ]]
○ 고려가 황제국 ? / http://www.ilbe.com/1308166143" target="_blank">http://www.ilbe.com/1308166143
○ 천자국의 축제 팔관회 / http://www.ilbe.com/1309007959
○ 조공, 책봉 관계에 대한 고찰 / http://www.ilbe.com/1090250150
○ 동아시아 제국의 역학관계와 왕호의 이해 [태왕(대왕) / 황제 / 선우 ] / http://www.ilbe.com/2038206359" target="_blank">http://www.ilbe.com/2038206359
○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자주의식과 고려 / http://www.ilbe.com/1365228469
○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고려의 국제위상 / http://www.ilbe.com/1403218229
○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고려사회의 공무원 / http://www.ilbe.com/1569450039
○ 기록으로 보는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불교의 나라 고려 / http://www.ilbe.com/1961705354
○ 기록으로 보는 충격적인 고려사 <<보충 겸 최종 정리>> / http://www.ilbe.com/2041269185" target="_blank">http://www.ilbe.com/2041269185
[ 흥미진진 고려시대 주요사건 ]
○ 여진정벌. 눈부신 태평성대 그리고 먹구름 / http://www.ilbe.com/1311302652
○ 여진정벌. 고려의 대반격 여진을 정벌하다 (완결) / http://www.ilbe.com/1316308155
○ 난신 이자겸. 황실인척으로 권력을 움켜쥐다 / http://www.ilbe.com/1316447005
○ 난신 이자겸. 이자겸의 난 -불타는 황궁- / http://www.ilbe.com/1321872168
○ 난신 이자겸. 이자겸 천하의몰락과 새로운 바람 (완결) / http://www.ilbe.com/1323381546
+ 마녀사냥 하는 일베? 일베인이라면 필독 / http://www.ilbe.com/1328291407
+ 국까 전격해부, 옳바른 역사관에 대하여 / http://www.ilbe.com/1350802315
전 글에 이어 (http://www.ilbe.com/2041269185" target="_blank">http://www.ilbe.com/2041269185 -최종 정리 (전))
지금까지 고려사 관련하여 썼던 글 들을 정리하며 설명이 부족했던부분 또는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할 흥미롭고 아리송한 상식들을 직접 찾아본 자료 토대로 써보고자 한다.
말하자면 엑기스 라고 할 수도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주목해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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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거란을 정벌하려 했던 고려 태조(太祖) 왕건.
-『자치통감』권 285 후진기(後晋紀)
고려의 왕건王建은 군사를 일으켜 이웃 나라들을 멸하여, 국력이 자못 강대하였다.
이때 왕건이 호승 말라襪囉를 통하여 고조高祖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임금이 거란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조정과 함께 그들을 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고조는 회보하지 않았다
◎ 대 거란 정책에 있어 강경책을 고수하였던 고려 .
국초부터 그들(거란)과 대립하여 결국 3번에 걸친 침입을 맞아 대 전쟁을 치루었던 고려는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우리역사의 자랑스러운 부분으로 기억되고있다.
하지만 많은 이 들은 모르고 있다.
사실 이 전쟁은 고려 태조 왕건의 정벌전으로 시작 될 뻔하였다는 것을
- 고려 태조 왕건 (우측 앉은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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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나라 고조(高祖)가 석자되는 칼을 들어 천하를 통일했던 것처럼 무공을 떨치셨으며,
은나라 탕왕(湯王)이 9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폭군을 정벌했던 것처럼 분연히 흥기하셨으니,
그 고결함을 아무도 따라올 수 없고 그 위대함은 이름 붙일 수조차 없나이다.”
- 고려 고종이 태조에게 올린 책문 中..
고구려를 계승을 천명했던 고려의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분개했다.
마침내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군을 토벌하고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통일 대업을 마친 태조는 거란정벌을 결심.
중원의 신흥국 후진과의 연합을 도모하여 거란을 정벌코자 했다.
- 오대십국시대 -후진 고조 석경당
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쇠망하여 오대십국 시대가 한참 전개되던 시기였는데, 그 중에서도 후량 후당을 이어 후진의 시대 였으며
후진의 건국 시기는 936년으로 고려의 후삼국 통일 시점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하지만 진 고조 석경당은 고려 태조의 그릇에 비기지 못하였다.
위 기록에서 보듯 석경당은 연합하여 거란을 정벌하자는 고려 태조의 제의를 거절하는데, 여기에는 그럴법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후진은 거란의 힘을 빌어 일어난 나라였던 것이다. 거란에게 군사원조를 받아 후당을 멸망시키고 황제가 된 고조(석경당)는
거란에게 연운16주를 할양,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을 부황제 (父皇帝), 즉 아버지 황제라 칭하고 떠받들고 있었다.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 -거란 백탑
거란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부족을 통합하여 발해를 멸망 시키고 서방 원정을 마친 거란에게
중원의 열국들은 그다지 위협적인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태조 야율아보기의 뒤를 이어 거란의 2대 황제가된 태종 야율덕광은 고려에 화친제의를 하며 낙타를 보냈던 인물로
그의 치세 당시 거란은 고려와 같이 얼마되지 않은 신흥제국이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중국경략에 나섰으며, 당 멸망 후 일어난 5대 정통왕조인 후진을 위성국으로 삼아 중원 대륙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
신하들이..
'성상(聖上)께서 백성들의 부모 노릇을 하시다가 오늘 저희 신하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등은 애통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할 뿐입니다' 하니
태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뜬 구름과 같은 인생이란 예부터 그러한 것이다' 하고 잠시후 죽었다...
- 고려사 태조 26년 (943) 계묘년
-▷ 재위에 있으며 건국 부터 통일이라는 위대한 대업을 일생에 이루었던 고려 태조 왕건.
그는 '인생이란 뜬구름과 같다' 는 말을 남긴채 그렇게 눈을 감았다. 태조 사후 통일과 더불어 태조의 유훈이자
신생국 고려의 최대 숙원사업이었던 북벌이라는 막중한 과제는 후손들에게 마땅히 해결해야할 책무이자 숙제로 위임되었으며,
태조의 뒤를 이어 통일 전쟁등 수 많은 전장터를 누비며 그 전공이 크고 또한 무공이 화려했던 [정윤正胤(황태자)] 무武가 제위帝位를 이었다.
그리하여 고려에는 2대 혜종이, 후진에는 석경당의 뒤를 이어 석중귀(출제)가 즉위하였는데
출제는 고조와는 달리 거란에 대한 사대를 철회하고 강경한 태도로 일관헀다.
출제 즉위 후.
이번에는 후진에서 고려와 연합 하고자 사람을 보냈지만,
고려의 군사력이 형편없음을 보고 연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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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려에 내부하였다 ..
- 자치통감 진(晉) 천복(天福)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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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고려의 국력은 막강했다.
이미 후삼국 통일전쟁인 일리천 전투 당시 10만여명의 보기병을 동원한 예가 있는 고려였다.
사분오열된 중국대륙의 제국(諸國)들 입장에서 고려의 군사력이란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 하지만 태조 사후 고려는 양규, 박술희, 왕식렴 세력의 삼파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정국이 매우 불안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란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고려정부는 후진에 일부러 흐트러진 군대를 보여주었을 확률이 높다.
=◈ 태조의 거란 정벌계획의 의의 ◈=
결국 고려와의 연합없이 단독으로 거란과 전쟁을 벌인 후진은 얼마 되지 않아 거란에 의해 수도 개봉이 함락당하고
멸망하게 되니 출제를 마지막 황제로 하여 2대 10년 사직으로 역사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은밀하게 추진 되었던 이 거창한 계획은
끝내 실현 되지 못했는데 여말의 문인이자 비평가로 유명한 이제현은 이 기록 자체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문춘공 이제현
《통감(通鑑)》에 실린 말에 의하면, 우리 태조(太祖)가 호승(胡僧)인 말라(襪羅)를 통하여 진 고제(晉高帝)에게 말하기를,
“발해(渤海)는 우리와 통혼(通婚)한 사이인데, 그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니, 그대 나라와 합세하여 거란을 토벌하자.”
하였으나 고조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제(少帝 고조의 아들)가 거란과 원수가 되므로 말라는 다시 거란의 토벌을 말하였다...
... 곧 병기를 거두고 백성을 편히 쉬게 하며 문교(文敎)를 닦으니, 발해의 장군 신덕례(申德禮)ㆍ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ㆍ
공부경(工部卿) 대덕예(大德譽) 등 수천 수만 명이 서로 앞을 다투어 귀화하였는데, 그 발해와 혼인하였다는 말 따위는 국사(國史)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조는 심원한 지략으로 공명을 힘쓰지 않았는데, 오계(五季)의 말엽에 중원이 온통 혼란에 빠져,
함께 손잡고 일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왜 몰랐을 것이며, 석랑(石郞)과 제파(帝?)와의 친교 관계에 이간할 수 없다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또 어찌 사신 한 사람도 보내지 않고 타국의 중[僧]을 바다를 건너 보내어 초창기의 미비한 진(晉)과 모의해서
발해를 위해 한창 강성한 거란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아주려 하였겠는가?
또 곽인우가 왔을 때 과연 우리 군사의 허실과 강약을 다 엿볼 수 있었겠는가? 진(晉)의 군신(君臣)이 전에는 말라의 말에 혹하였다가
뒤에는 인우의 말을 믿고, 곧 우리 태조를 과장한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역옹패설 전집1
물론 실제로 태조가 거란을 치려 했는지의 판단은 각자에게 맞겨야 할 것이나 본인은 통감의 기록을 신뢰하는 쪽에 속한다.
이제현의 말 처럼 고려 태조 왕건은 뛰어난 군 통솔력과 더불어 유연하고 노련한 정치력과
처세술을 갖춘 군주였고 그런 그가 당시 동아시아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위 기록을 신뢰 한다는 것이다.
그가 정말 발해를 위한 마음으로 거란정벌을 계획 했는지는 확언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고려가 국초부터 넓은 지역의 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 하였고, 그러한 영향력을 제국(帝國)의 기반으로 했던 나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에 속했었던 말갈(여진)에 대한 지배력이 많은 부분 거란에게로 넘어 갔고
이는 즉 북진을 국시로 했던 고려와 정면 충돌 할수 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 했다.
다시 말해 태조의 계획은 고려의 번국(蕃國)들의 이탈을 막기위해 예종대에 실시되었던
여진 대정벌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텐데 이는 해동천하의 패권을 굳건히 하려는 최소한의 조치였던 것이다.
대게 여러 제국의 개국군주들을 보면 뛰어난 군사능력은 기본이요, 더불어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모험심 또한 두루 갖추는 법이다.
왕건이라고 그 넓은 발해 지역을 통째로 내어주고 싶었을까. 더군다나 삼국을 통일하고 북방을 호령 하고자 했던 그가 말이다.
태조가 보여준 대거란 강경책 (거란이 바친 낙타를 굶겨 죽이고 그 사신30여명을 귀양 보낸 만부교 사건 등.) 은
태조로서 그의 모험심과 강단, 그리고 의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통감기록의 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왕건이 극단적 정벌전 까지계획 했던 것은 형식적인 의리 따위에 의한 것이 아닌
그 나름의 현실적인 돌파구가 아니었을까
우리 태조께서는 즉위한 후, 김부(金傅)가 아직 복속해 오지 않고 견훤이 아직도 항복해오기 전이었는데도
자주 서도(西都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의 국경지역을 순시하셨다.
그 뜻도 또한 고구려 동명왕의 옛 땅을 내 집에 대대로 전해온 보배로 생각하고서 반드시 석권하여
차지하려 한 것이니, 결코 닭이나 오리같이 하찮은 것을 얻는데 만족한 것이 아니었다.
/ 고려사 태조 논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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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려의 임금은 황제(皇帝)라 불린적이 없다?
-『동국이상국집』 - 황자(皇子)와 공주(公主)의 봉책연례(封冊宴禮)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 폐하는 덕이 백왕 중에서 뛰어나고
공이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보다 높으십니다...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가서 특히 책봉하는 명을 주라.”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연반(筵伴)한 영공들께서도 은하(銀河)처럼 맑고 체악(棣萼)처럼 빛나옵니다...
◎ 위의 기록은 고려 무신집권기 문인으로 유명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내용이다.
-문순공 이규보
이규보는 수태보 문하시랑 평장사. 태자태보로 치사 하였는데 그가 비록 최씨정권 아래에 승승장구 하였으나
당대의 문장가로서 민중의 입장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진실되게 반영했으며
고려인으로서의 자주성과 자부심을 고무했다는 평가 또한 받고있다.
이 외에 고려시대 금석문에서도
고려의 임금을 황제로 칭한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고려의 역사는 사실 고려실록이 소실 되어 그 실체를 온전히 알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금석문등 1차사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으니 다음 참조 링크의 금석문 부분을 확인하자.
참조 : http://www.ilbe.com/1308166143" target="_blank">http://www.ilbe.com/1308166143 (고려와 황제국 체제)
그 뿐이 아니다.
심지어 고려가 내부적으로만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즉 외국으로 부터도 황제로 불렸음을 증명 하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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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금나라 사신은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동쪽 일본국[日域] 사절은 보물을 바치며 황제라 부르나이다.
- 고려사 의종 24년(1170) 경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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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종대라면 고려는 이미 극성기를 지나 제종족의 이탈로 천자국의 질서가 무너져가던 시기이다.
하지만 일본은 고려임금을 여전히 황제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전성하던 시절에는
일본을 비롯한 고려 천하의 제번들로부터 임금이 황제라 불리었음을 확증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 이에 대한 반론으로 조선 역시 황제로 불려졌던 예가 있었다고 할수 있겠으나 실제 황제국의 제도로 운영이 되었던 나라가
외국으로 부터 그렇게 불린것과 그렇지 않은 나라가 일시적으로 극존칭을 받은 것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황제' 는 중화 민족에게서 최초로 쓰여 정착됐던 왕호일뿐,
독자 왕호가 아닌 "황제"를 사용 했다는 것이 그다지 자랑스러운 부분은 아니다.
참조: http://www.ilbe.com/2038206359" target="_blank">http://www.ilbe.com/2038206359 (동아시아의 제국 질서와 왕호의 이해)
-최초의 황제 진시황
신 등이 논의한 결과 '옛날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및 태황(泰皇)이 있었다. 그 중에서 태황이 가장 귀한 이름이다.' 라고 했습니다.
... 왕이 듣고 대답했다. "태황(泰皇)에서 태(泰) 자를 빼고 그냥 황(皇)이라 칭하고 다시 옛날의 호칭인 제(帝_ 자를 취하여
나를 부를 때는 황제(皇帝)라 하라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 고려의 임금은 황제보다는 천자天子, 성황聖皇, 신성제왕神聖帝王, 대왕大王, 엄공嚴公등으로 더 많이 불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황제로 불리기도 하였는가 라고 묻는 다면 그에 대한 답은 yes다.
그러나 호칭 자체가 "황제" 인가 아닌가는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고려가 자주성을 가지고 제후국이 아닌 제국의 체제로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 하지만 제국의 통치자를 뜻하는 "emperor" 역시 황제로 번역되고, 우리에겐 그게 익숙하니 고려의 임금은 그냥 황제로 지칭하겠다.
=◈ 고려의 황제국 체제에 대한 개인적 견해 ◈=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려를 외왕내제 (외국에는 왕, 국내에서는 황제)의 나라로 알고있다.
이는 체제의 기본형을 황제국으로 외부에는 왕을 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대의 고려인들의 인식속에 고려는
엄연히 별개의 천하를 운영하는 제국(帝國) 이었다.
때문에 고려천하의 질서에 속한 여러 소국인 번국(蕃國) / (藩國)이 있었으며 내지인과 번국인의 구별이 있었다.
엄밀이 말한다면 고려는 내제[부분적 외왕]국이다 .당시고려를 기준으로 외국은 수많은 나라가 있었으며 외국은 요,송등 특정 나라에 제한 하지 않는다.
그 수많은 세력들중 적어도 고려의 천하범위에 속하던 외국들에 대해서는 고려의 임금이 황제로 군림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덧붙여 고려의 실리외교노선에 대해 반쪽짜리 황제국이다 라고 폄하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원적 천하론에 의해 운영되었던 고려가
독자 천하의 범위가 아닌 구별되는 천하에 대해 굳이 무리해서 천자국임을 주장해야 했는가? 라는 의문을 던질 뿐이다.
물론 묘청, 정지상등을 비롯 고려 중심론적 천하관을 가진 세력이 적지않게 존재하긴 했지만말이다.
어쩄든 "황제" 라는 단어 자체가 쓰였는가 쓰이지 않았는가를 따지는것 자체가 어찌보면 참 유치한 내용인데..
그래도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고 본인 글 내용중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이기에 마무리 정리 해본다.
개인적으로는
고려시대 자료에서 신성함과 거룩함, 천자의 존칭인 성(聖)을 강조하였고 직접 대면시에는 공식적으로
성상폐하聖上陛下를 사용했던 걸로 보아 그 중 "[성황聖皇]" 이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 아 심원(深遠)하신 우리 성황 / 於穆聖皇
진실로 문무를 겸하셨네 / 允文允虎 ...
... 우리 성황의 시대에 / 我聖皇之代
무엇인들 제 처소를 얻지 못하리 / 何物不得所 ...
/ 동국이상국집 제 19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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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천자(天子)와 제왕(諸王)
-『고려사 열전』 종실 서문』
고려는 종실 사람으로서 친존(親尊)한 이를 책봉하여 공(公)이라 하였고, 그 버금 가까운 이를 후(侯), 비교적 촌수가 먼 이를 백(伯),
어린이를 사도(司徒)·사공(司空)3)이라 했으며, 이들을 총칭하여 제왕(諸王)이라 하였다.
-『고려사』 문종 7년, 계사년(癸巳年), 1053년
경자일에 대동강에 가서 배를 타고 제왕(諸王)·재추(宰樞)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흥복사(興福寺)로 행차하여,
마침내 대동강에 이르러 배에 올라 상장군(上將軍) 이상의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제왕諸王.
『고려사』에 따르면 종실을 공·후·백에 책봉하여 총칭한 이들을
제왕諸王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사전적 개념은 "여러 왕"이다.
여기서 공·후·백 이란 고대 중국 주나라에서 천자가 제후에게 주던 작위로
위 내용을 통해 고려가 이를 제도로 받아들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정도 설명으로는 그들의 역할과 존재를 이해하기 어렵다.
고려사를 읽다 보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제왕.
이들은 대체 누구이고 어떠한 존재들 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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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재상의 물망이 아닌데도 삼공(三公)의 자리에 앉게 되니, 팔정(八政)을 닦고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함을 무슨 덕으로 하리까
... 마음은 얇은 얼음을 밟듯 조심하여 더욱 제후의 효(孝)를 다할 것이며, 몸은 울타리가 되어 힘껏 천자의 집을 바르게 하겠습니다.
신은 못내[無任] 운운.
- 동국이상국전집 제29권 / 종실 면이 수사도 광릉후에 제수됨을 사은하는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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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임금이 천자였다면 당연히 그 아래에는 천자의 황은을 입는 제후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존재들이 바로 고려의 제왕諸王 이었다.
이들 공 후 백 제왕은 모두 영공令公 으로 불렸으며
종친에 대한 경칭으로는 영공전하令公殿下,비종친의 경우 영공저하令公邸下 또는 각하閣下로 불리었는데 일반적으로
종친은 [공][후][백] <제왕> 으로, 비종친은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을 전부 봉하였다.
※ 일반적으로 황자皇子에게는 후侯가, 부마에게는 백伯이 초봉 되었음.
※ 각하는 고려에서 종2품이상의 재추에 대한 경칭이기도함.
-오등제후
오등작의 기본 개념은 위와 같으며.
고려는 비종친 제후 역시 종친과 마찬가지로 oo공/oo후/oo백으로 불리곤 했었다.
->> ex) [경원공(이자연)], [낙랑후(김부식)], [영평백 (윤관)] ...
그렇다면 종친과 비종친 제후는 어떻게 구별했을까.
여기에는 미묘한 차이를 두어 구별 할 수 있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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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경원군개국공(慶源郡開國公)으로
봉하고 식읍(食邑) 3천 호를 더해주었다
- 고려사 열전 / 이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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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록은 이자연을 봉작한 것으로 정식 봉작명은 경원군 개국공으로 줄여서 [군공] 이었다.
이 처럼 종친의 제후는 oo공, oo후로 봉했던 반면 종친이 아닌 제후는 oo군개국공(군공), oo현개국후(현후) 등으로 봉하여
구별 할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공][후]는 제왕이었으니 서열은 당연히 [공][후]가 [군공][현후] 보다 상위에 있다.
이처럼 제후들의 서열은 경칭과 작위명으로 구별 되었는데,
비종친 제후諸侯는 일반적으로는 제왕諸王의 반열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 공훈에 따라 제왕의 반열에 오를수 있었음을 다음 기록으로 알수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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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朕)이 보건대, 종실(宗室)이나 제후(諸侯)의 아들들은 비록 옷을 못이길 정도로 어려도, 으레 사공(司空)을 제배(除拜)한 지 오래이다.
이에 의해 말한다면, 신하로서 큰 공을 세워 제후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사세가 종실과 비등하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사공(司空)되는 것을 참용(參用)함이 매우 의리에 합당하니...
- 동국이상국집 / 최구(崔球)가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을 사양한 데 대한 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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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의 수사공이란 제국에서 황제의 정치고문 역할을 하는 삼공삼사중 하나로 정1품의 명예직이다.
실직으로는 종1품 문하시중이 최고직이며 고려 외명부의 정1품에는 대장공주大長公主 등이있었다.
※ 원칙적으로 [공][후][백] 종친 제왕諸王의 작위는 세습되지 않고 그 아들은 최고 관직인 사공으로 임명됐는데
위 기록은 종친(제왕)은 아니지만 그 아들을 사공으로 임명했던 사례로, 최구는 최충헌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는 강종의 서녀인 정화택주였다.
이 처럼 때로는 종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왕의 반열에 들었던 이들이 있었는데.
“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 익성정국 동심좌명 치리우모 일덕안사
제세희재 찬화협보 익량상즙 주번한주당경 광찬우익 복벽재조 격천관일 늑정기상...
... 특진 금자광록대부 수태사 개부의동삼사 중서령 상주국 상장군 판어사대사 진강공(晉康公) 식읍 10,000호 식실봉 3,000호 ”
(최충헌의) 관직은 품계의 끝이 있어 다시 더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단지 그 보상(輔相)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를 만들어
해마다 아름다운 칭호를 더할 따름이었다. <묘지명 中..>
바로
최충헌과 같은 경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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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을 문하시중(門下侍中)·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로, 기홍수(奇洪壽)를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임명했다. - 고려사 희종 원년(1205)
최충헌(崔忠獻)을 책봉(册封)하여 진강후(晉康侯)로 삼고, 부(府)를 세워 흥녕부(興寧府)라 하며, 요속(僚屬)을 두게 하고,
흥덕궁(興德宮)을 여기에 소속시켰다.... 책사(册使)와 부사(副使)를 유숙하게 하였는데, 그 장구(帳具)·화과(花果)·사죽(絲竹)·
성기(聲伎)의 성대함이 삼한(三韓)이 생긴 이래 인신(人臣)의 집에서는 없었던 정도였다. 이후로는 최충헌이 궁궐에 드나들 때
편복(便服)을 입고 일산(日傘)을 쓰고 다녔으며, 시종(侍從)하는 문객(門客)이 거의 3천여 인이나 되었다
- 동국통감 희종 2년(1206)병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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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충헌은 1205년에는 진강군후로, 다음해에는 진강후로 진봉되어 제왕의 반열에 올랐음을 알 수있는데
제왕은 이처럼 부府를 세워 요속(관료)를 둘 수 있었으며 별도의 궁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종친이 제왕의 반열에 오른 이는 매우 이례적으로 몇몇에 제한 되었으며
대게 비종친의 제후는 [현남] 또는 [개국자], [현백] 등이 초봉 되었다.
※ 최충헌은 비종친이기에 경칭은 그대로 저하邸下였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제왕들의 별궁에 관한 것으로
이에 대한 정보를 고려도경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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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궁(鷄林宮)은 왕부(王府) 서쪽에 있고 부여궁(扶餘宮)은 유암산(由巖山) 동쪽에 있으며, 또한 진한(辰韓)ㆍ조선(朝鮮)
ㆍ상안(常安,장안(長安))ㆍ낙랑(樂浪)ㆍ변한(卞韓) ㆍ금관(金冠)의 6궁이 성안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임금의 형제가 거처하는 곳이다.
-고려도경 제6권 궁전(宮殿) 2 - 별궁(別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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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 관련 봉작자 (제왕) 들은 다음과 같다.
[평양[후]->[상안(장안)공] // ┃상안공 왕수王琇 (문종-子) ┃.┃평양공 정간왕 왕기 (현종-子) ┃
[조선[후]공] // ┃조선국 양헌왕 왕도 (문종-子) ┃.┃ 조선국공 이자겸 ┃
[낙랑[백][후]공] // ┃낙랑후 왕영 (현종-孫子) ┃.┃ 낙랑후 왕경 (정종-子) ┃
[진한[후]공] // ┃ 진한공 왕유 (문종-子) ┃
[부여[후]공] // ┃부여공 왕수 (문종-子) ┃
[계림[후]공] // ┃ 계림공 왕희(숙종) ┃
[변한후] // ┃변한후 왕음 (문종-子) ┃
[금관후] // ┃ 금관후 왕비 (문종-子) ┃
※ 제왕 중에는 실제 왕작을 받은 인물들도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추봉)
┃조선국 양헌왕┃ //조선공 도
┃문원대왕┃ // 광종-弟
┃낙랑왕┃//신라 경순왕
┃정간왕┃ // 평양공 기
{{ 고려의 별궁 }}
-파주 혜음원지 표본-
※ 고려에는 이러한 별궁과 관련된 봉작자들이 모두 존재했는데 주목 할만한 것은 별궁들의 명칭이다.
그 명칭들은 하나같이 전부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위에 있었던 국가와 지역명을 담고 있었다.
<조선궁>은 고조선을 <진한궁>은 과거 삼한의 진한을 <부여궁>은 옛 동·북 부여, 또는 백제를
<장안궁>은 고구려의 수도 장안을 <낙랑궁>은 한사군중 하나인 낙랑을 <계림궁>은 신라를
<변한궁>은 과거 삼한의 변한을 <금관궁>은 금관가야를 각 궁전의 명칭과 작위명에 담고있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와 같이 고려의 천자가 과거 이미 합병된 여러나라들의 국명을 상용하여 제후들을 봉작했다는 것이다.
즉 고려가 과거 고조선과 삼한을 모두 통합한 정통제국이라는 계승의식을 가졌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별궁은 이들 8궁외에 수창궁과 적격궁을 포함하여 기본 10궁이 있었으며 비종친 제왕들에게 역시
별도의 궁전을 마련해 주었다. 최충헌의 흥덕궁興德宮 이자겸의 의친궁懿親宮등이 그것들이다.
- 천자의 의복 황룡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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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12년(1058) 4월. 예사(禮司)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어복(御服) 가운데 의례를 갖출 때에는 마땅히 홍색과 황색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 나머지 색도 입을 수 있는지 예전의 문헌을 널리 살펴보고 보고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이제 살펴 보건대... 당사(唐史)』62)에서는, ‘천자는 적황색을 입는다’ 라고 기록하면서
사서(士庶)들에게는 삼황색(三黃色)63)의 사용을 금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개원례(開元禮)』64)에서는, ‘
황제가 원구(園丘)에서 풍년 비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강사포(絳紗袍)65)를 입는다’고 적었으며...
기록들이 이러하니 ... 지금 입으시는 홍색과 황색 이외에는 따로 쓸 만한 색이 없습니다.”
제왕諸王의 위상은 별궁의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황자皇子와 황친皇親 또는 천자天子의 부마駙馬 였던 만큼
의복 또한 그에 더욱 걸맞는 품위와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기록에서 보듯 임금은 천자를 상징하는 황색의 황룡포(자황포)를 입었다.
그렇다면
[제왕諸王]들의 복식은 어떠한 의복을 입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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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4년에는 공(公)으로 승진 책봉하고 다음과 같은 책문을 내렸다.
...너는 하늘이 낸 천품으로 날 때부터 그것을 알았다... 이처럼 너의 덕이 성대하니 짐의 마음은 참으로 기쁘도다...
마땅히 윤음(綸音)3)을 내어 책봉의 명령을 주고 예물을 갖추어 군은(君恩)을 펴야 할 터이며,
봉토를 나누어 오등(五等)의 높은 작위에 임명하고 곤룡포와 면류관을 내려 구장(九章)의 제도에 맞추어야 할 터이니라.
- 고려사 열전 / 대방공 왕보 / (숙종(肅宗)의 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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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왕諸王들이 곤룡포와 구장을 받았다는 것은 사뭇 놀라운 기록이다.
곤룡포와 면류관 그리고 구장복은 임금의 상징이다. 조선조에서는 국왕이 제례때 구장복을 입었다. (천자는 십이장복)
물론 요,송 등의 나라에서 고려에 구장복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와 별개인 독자적 천하의 제후로서
왕의 의복을 갖추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이들은 의복 뿐 아니라 그에 대한 경칭에 있어서도
"전하殿下"로 제후국의 국왕에 대한 경칭과 동일 하였다.
=◈ 간단하게 정리하면 제왕(諸王)이란 천자국 체제로 운영된 고려의 제후왕이다 ◈=
물론 이들이 국정에 대하여 엄청난 권한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정계 진출은 일반적으로 제한 되었고 , 명예적인 작위를 받을 뿐이었는데 중국 대부분의 왕조와 비슷한 체제였다.
또한 이들은 존귀한 지위로서 천자에게 넓은 봉토(식읍)를 하사 받았으니
제후로서 재산상의 자치가 허용 되었으며 식읍의 호수 역시 중국의 제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가 갖는 상징성이란 무시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고려의 제후왕으로서의 권위와 자부심도 상당 하였을 것이다.
“진킴태자[眞金太子]는 중서령(中書令)이며,영녕공(永寧公)은 고려의 상서령(尙書令)이기에
품계가 황태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자칭하고 있습니다.” 라며 고발하자,
황제[쿠빌라이 칸]가 크게 노하여 왕준이 거느리던 병사와 말을 빼앗아버렸다.
// 고려사 열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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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삼류의 군대인가
-『원사』외이열전 [고려]
...추밀원(樞密院)의 신하들이 고려(高麗)의 정벌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다. 지난날 마형(馬亨)[註153]이 말하기를, ...
“이제 [그들이] 비록 들어와 조회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렵다. 군사를 잘 무장하여 길을 빌리되
일본(日本)에 쳐들어 간다고 명분을 내세우고는 기회를 틈타 그 나라를 습격하여 군(郡)· 현(縣)으로 정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위로는 나라의 위세가 깍이고 아래로는 군사들만 잃게 됩니다...
...추밀원(樞密院) 경력(經歷) 마희기(馬希驥)[註155]도 역시 말하기를,
“오늘날의 고려(高麗)는 곧 옛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 세나라를 병합하여 통일된 나라입니다.
대체로 번진(藩鎭)이란 권력이 양분되면 제압하기 쉽고 제후(諸侯)란 강성하면 신하로 두기 어렵습니다.
저들 주(州)와 성(城)의 군사와 백성의 많고 적음을 조사하여 이간시켜서 양분되게 하고,...
◎ 한때 60만 강병을 운용헀던 고려, 하지만 대몽항쟁 당시의 고려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 든 상태였다.
군벌귀족의 연합체적 성격과 중앙정부의 통제로 운영되었던 고려의 정상적인 군사 시스템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으니
최충헌은 황제의 최정예 호위군인 금군 가운데서도 특출난 자를 따로 모아 도방 구성원 사조직체인 문객으로 차출 했으며
기병부대 역시 도방의 마별초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최씨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전력이 획일화 되어 버렸던 것이다.
-몽골군 전투도
반면 몽골군은 당대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그들의 군사 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사』기록에 따르면 세계 최강이라는 몽골 조정 내에는 고려가 삼국을 통합한 나라인 만큼 강성하기 떄문에
전쟁에서 패할것 또한 염려하여 정면 공격보다는 속임수와 습격, 그리고 이간계를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여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때는 1269년.
대부분의 정복사업은 끝마쳤으며 이미 몽골의 주적 이었던 금나라가 망한지도 30여년이 흐른 후였다.
고려에 삼류 수준의 군대를 투입 할 이유가 없었다.
고려에 쳐들어온 몽골군이 삼류 였다면 고려군의 수준은 그 보다 더한 삼류중 삼류 였을것이다.
하지만 고려인들의 정신력만은 삼류가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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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가 귀주를 포위하고 있을 때 그들 장수 가운데 나이가 일흔에 가까운 사람이 있었는데,
성 아래까지 와서 성과 병장기들을 돌아보고, “내가 성인이 되어 종군하면서 천하의 성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두루 보았지만
이처럼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성 안에 있는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모두 장군이나 재상이 될 것이다.”
라고 감탄한 일이 있었다.뒤에 박서는 과연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임명되었다.
- 고려사 열전 / 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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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상황이 고려가 개국한지 300여년 이래 가장 쇠약했을때에 가장 강성한 적을 만났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기록에서 몽골 장수는 그런 고려군을 두고 이렇듯 끈질긴 군대를 본적이 없다 감탄하고 있다.
박서는 몽골과 화의를 맺었으니 항복하라는 중앙조정의 명이 있었음에도 적들과 맞서 싸웠으며
민희는 그런 박서의 고집에 자결하려는 시늉 까지 하였을 정도로 전투에 대한 집념은 치열 했다.
고려군은 삼류의 군대를 만나 그토록 분전 했는가
- 처인성 전투와 김윤후
처인성에서는 고려군이 농민들과 함께 성을 지켰으며 끝내 승장 김윤후가 몽골군 원수 살리타를 죽여
그 군대를 철수 시켰다. 당시 몽골군을 삼류로 깎아내려 국가와 민족을 수호했던 대몽항쟁의 선조들을 폄훼 하고자 한다면,
진실로 삼류였던 천민과 농민을 모아 항전. 승려 출신으로 적장을 죽여 물리쳤던 고려인의 저력 또한 대단하다 할 것이다.
천하제일의 몽골군은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삼류군이라 단정 하면서
고려의 천민,농민들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을 능가하는 일류전사 였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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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이 스스로 권황제(權皇帝)라 일컬으면서 전려(氈廬)에 앉았는데,
수놓은 비단으로 장식하였고 부인(婦人)을 좌우에 벌여 세웠습니다. 이에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능히 수비할 수 있으면 수비하고,
항복하려면 항복할 것이며, 싸우려면 싸울 것이로되, 마땅히 속히 결정하도록 하라.’ 하고, 또 ‘너의 관직이 무엇이냐?’고 물으므로,
분대관(分臺官)이라고 대답하였더니, ‘너는 소관(小官)이다. 대관(大官)인 사람이 속히 와서 항복하라' 하였습니다 ...
-『고려사』고종 18년 , 신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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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살리타. 적어도 그의 지위는 삼류가 아니었다.
고려사에서는 살례탑(살리타)이 자칭 권황제라 일컬었다고 말한다.
권 황제란 황제의 권한을 대리 받았다는 의미인데 과연 권황제 살리타이의 군사가 삼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 살리타의 군이 순수 몽골군이 아니었기에 삼류라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글쎄...
9서당은 신라의 핵심 중앙군으로 고구려,백제,말갈,보덕 등의 피정복민들이 전체 구성의 3/2 였다.
권황제가 의심 스럽다면
우리는 몽골의 5차침입 당시 총 지휘관이었던 예구와 타차르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몽골 제국의 황제는 칭키스 칸의 손자 몽케 칸이었는데 ,
-몽케 칸
몽골제국 4대 황제 헌종. 몽케 칸
바그다드로 진격하여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를 멸망 시켰으며 남송 원정중 병사한다.
쿠빌라이 칸의 형이다.
몽케는 그의 뜻을 알리는 조서를 고려에 전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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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황제가 조서를 전했는데...
짐은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게 하려 하는데,
너희들이 명령에 거역하므로 짐의 숙부인 예구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에 나서게 한 것이다.
정성껏 명령을 받아들인다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이나 명령을 거역한다면 짐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몽고의 예구대왕[也窟大王]이 아토(阿土) 등 16명을 보내 왔다...
-고려사 고종 40년(1253) 계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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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구는 칭기스 칸의 동생인 주치 카사르의 아들로
살리타가 권황제였다면 예구는 황제(몽케)의 숙부로 예구대왕也窟大王 으로 불렸다.
또한 그와 함께 고려에 왔던 타차르는 사준사구중 한명인 보로클의 아들.
보로클 역시 칭기스 칸과 같이 자랐으며 칸의 어머니 호엘룬으로 부터 형제의 대우를 받았던 인물이다.
-무칼리 (사준) -수부타이 (사구)
사준사구(四駿四狗).
네 마리의 충성스런 준마와 충견이라는 뜻으로, 칭기스 칸을 도와 몽골 제국을 건설한 제국 최고의 8공신을 지칭.
몽골사를 넘어 세계역사에 있어서도 최고의 전술가로 꼽히는 수부타이 역시 사구의 한 사람 이었으며
사구에는 그를 포함 제베, 쿠빌라이, 제르메가. 사준에는 무칼리, 보로클, 티라운, 보오르추가 있음
하지만
적의 약하고 강한 기세를 떠나서 고려가 당대의 최고의 강대국들과 맞설 수 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고려사 『김방경 열전』에 보면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 당시 몽골 도원수 쿠둔은 이렇게 말하였다.
-상락군개국공 김방경
...박지량과 김흔·조변·이당공(李唐公)·김천록·신혁(申奕) 등이 역전하자 왜군은 대패해 삼대[麻]처럼 시체가 즐비했다.
쿠둔은 “ 몽고 사람이 비록 전투에 익숙하다고 하지만 어찌 고려군보다 더하겠는가?”
라고 탄복했다. 모든 부대가 전투를 벌이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 김방경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몽골군과 함께 삼별초를 진압하고 일본원정을 수행했으며 상락군 개국공에 봉해졌다.
=◈ 고려가 상대한 몽골군이 삼류였다는 말들은 결국은 추측에 불과했다. ◈=
물론 몽골의 1차침입 당시에는 금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고려에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딱히 금이 고려에 비해 월등히 강력해서가 아니라 금과 몽골간의 지독한 원한관계 때문)
하지만 그 후에도 몽골은 무려 총 7번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고, 끝내 고려의 태자가 입조하자
쿠빌라이는 당태종도 꿇리지 못한 나라의 태자가 와서 항복하니 하늘의 뜻이라며 감격을 표했다.
권황제 살리타는 고려에서 전사했고 몽골 황제의 숙부가 총사령관으로 고려를 쳐들어왔다.
과연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이 삼류였다 주장 할수 있을지, 그 판단은 각자에게 맡겨본다.
...오늘날 온 천하에서 신복(臣服)치 않는 건 오직 그대 나라[고려]와 송(宋) 뿐이다.
송(宋)나라가 믿는 것은 장강(長江)이었으나 장강(長江)의 험(險)함을 잃자
의지할 것은 사천(四川)과 양광(兩廣)이었소.
// 원사 외이열전 [고려]
{원 세조 쿠빌라이의 칙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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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사, 원사, 송사, 동국이상국집, 익재집, 동국통감
● 네이버 지식백과 , wiki
● 국민대 박종기 교수 칼럼, 서울대 노명호 교수 논문
● 각종 고려사 관련 서적
-개경의 생활사,
-고려의 황도 개경,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꾸다,
-고려사 열정과 자존의500년
-고려시대사의 길잡이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려 북진을 꿈꾸다
-고려 500년을 호령한 황제의 나라
-새로쓴 500년 고려사
-고려왕조실록 등
3줄요약.
1. 기록으로 보는
2. 다소 충격적인 고려사
3. 완전 끝.
다음글은 아마 전에 썼던 이자겸편 이어서 묘청 김부식에 대해 쓸 거같은데
요즘 좀 바빠서 언제 올라올지 장담은 못하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