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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호주의 상징물이자 문화적인 아이콘, 호주의 '김머중컨벤션센터' 라 불릴만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에 대해 알아보자.
뭐 워낙 유명한 건물이고 호주 워홀로 갔다온 일게이들도 많을테니 잘 알겠지만
여기서는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적어볼 거야.
잘 읽어봐주었으면 좋겠어. (글에 있는 내용 및 자료는 주로 http://theoperahouseproject.com 에서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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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그 탄생의 배경
1954년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주(州) 주지사인 '조셉 케이힐'은 자기 지역에 '아주 삐까번쩍하고 호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될 만한 건축물을 지어보자'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이에 호주 ABC 방송국 사장 '찰스 모제스'는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뉴사우스웨일즈 주 음악당의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었던 '유진 구센스' 라는 사람을 조셉 케이힐에게 소개시켜 주지.
셋은 쿵짝이 잘 맞아서 뉴사우스웨일즈 주 제1의 도시인 시드니에 문화, 예술, 오락의 구심점이 될만한 건물을 짓고 이를 '오페라하우스' 라 명명하기로 그 자리에서 결정했어. 유진 구센스는 케이힐 주지사에게 한창 유럽 출신 이민자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던 이 경제 중심의 도시 시드니에 세계적인 문화적인 공간 하나쯤은 필요하다며 설득했지. 마침 구센스는 46년 ABC 방송국에서 창단한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 가 더 넓은 공간에서 공연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거든.
이에 케이힐 주지사는 본격적인 계획에 착수하고, 건축물 설계를 의뢰할 디자인심사위원회를 구성하지.
1955년 케이힐 주지사는 드디어 시드니의 21개 후보지역 중 '베네롱 포인트' 를 낙점, 국제적인 디자인 공모전을 낸다.

(빨간 박스 안)
'베네롱 포인트' 란? - 호주에 처음 이민 온 백인들이 '울랄라와레 베네롱' 이라는 어보리진(호주 원주민)을 앞잡이 삼아 원주민에 대한 약탈, 노예로 팔아넘기기 등을 시전했는데,(물론 호주역사에는 최초로 서양식 교육을 받으며 문물을 받아들인 원주민으로 나옴.) 당시 베네롱이 처음 잡혔던 장소(어보리진어로 '투-보-굴')를 기념, 베네롱 포인트로 명명하게 되지. 최초의 원주민 뒤통수 '울랄라와레 베네롱', ㅍㅌㅊ?

(뒤통수의 결과로..결국 이런 신세밖에 안됨.)
2. 오페라하우스 디자인 공모전
주지사 조셉 케이힐은 베네롱 포인트에 지어질 오페라 하우스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공모전에 제시했는데 그것은 '미래를 바꿀만한, 현재의 디자인과는 다른 혁신적인 디자인' 이라는 것이었지.
공모전 출품은 1955년 12월에 시작해서 1년 뒤인 다음해 12월에 마감이 되었는데, 무려 28개국에서 약 220개의 공모작이 모여들게 돼.
근데 1956년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조셉 케이힐 주지사가 재선에 성공해서 앞으로 4년 임기를 채울 예정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시드니 음악당 대표이사인 유진 구센스가 빈과 함부르크에 있는 오페라하우스 구경을 마치고 의견을 심사위원회에 제출하려고 시드니 공항에 내렸는데 불법물 소지 혐의로 공항에서 체포된 거야. 구센스는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호주를 떠나 로마로 튀어버림.
중요한 후원자 중 한 명이 어이없이 떠나갔지만, 주지사라는 버팀목 삼아 시드니에 오페라하우스를 지으려는 열망은 커져만 가고..
디자인공모심사위원회는 총 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해리 애쉬워스 - 위원장
콥덴 파크스
레슬리 마틴
이에로 사리넨
이 중 '이에로 사리넨' 은 미국인 건축 디자이너로, 당시 이 네 명 중에서는 가장 유명했대.
근데 이에로 사리넨만 심사 시작일보다 4일 늦게 도착해서 나머지 3명의 심사위원이 200여개의 디자인 중 1차 심사로 통과시킨 것만 보게 되었어.
사리넨이 통과된 디자인들을 검토하고 나서는 모두 기대 이하라서 1차에서 탈락한 디자인들을 뒤적거리고 있다가 218번째 디자인이 똭! 눈에 띄게 된거지.
그게 바로 무명의 38세 건축 디자이너, '요른 웃존(Jørn Utzon)' 의 작품이었어.

(초기 스케치)



(실제 공모전에 제출했던 드로잉)
(당선된 공모전 우승작을 보고 있는 네 명의 심사위원들. 그림 오른쪽 맨 처음이 이에로 사리넨)
이에로 사리넨은 당시에 한창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 TWA 터미널 설계로 정신없던 터에 이 1차 탈락작품을 보고 엄청나게 큰 감명을 받아. 때문에 그가 디자인한 TWA 터미널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 아닐 수 없잖아?
(TWA 항공사는 망했지만, TWA 공항터미널은 영원하다..일게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ㅆㅅㅌㅊ 건축물로 '죽기 전에 봐야 할~~~무슨무슨 시리즈'에 거의 매번 포함되는 건축물야.)
사리넨은 곧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218번째 작품이 짱짱맨!' 이라고 설득을 하게 되고, 처음에는 나머지 3명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제일 연장자인 위원장 해리 애쉬워스가 수긍을 하자 나머지 두 명도 그 의견에 따르게 돼.
2,3번째 심사는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최종 선정작으로 '요른 웃존' 의 작품이 떡하니 걸린다.
(케이힐 주지사가 우승자의 이름을 호명할 때 Jørn Utzon 을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몰라 봉투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던 일화도 있다.)
이 때 탈락한 건축디자이너들은 르 꼬르뷔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알바알토, 루드비히 미스반데르로에 등 건축학계에서 헉 소리날 만한 유명 건축가들이었어.
사람들은 우승작을 보고 다들 어안이 벙벙했어. 왜냐하면 선정작이 건축설계도가 아닌, 예비 드로잉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에 불과했고, 디자인이 공학적인 요소를 전혀 반영하지 않아 당시 기술로는 디자인대로 건축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어.
3. Jørn Utzon

'요른 웃존'은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선박설계사였어.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선박 건조하는 걸 보고 자랐지. 12세 때 가족과 함께 간 스톡홀름 만국박람회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돼. 건축설계에서도 한창 모더니즘의 바람으로 기존의 틀을 깨는 디자인이 소개되었거든.
19세 때 코펜하겐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자마자 나치 점령 하의 덴마크에서 떠나 스웨덴으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일을 하면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물을 자세히 볼 기회를 얻는다.(함께 일을 하진 않았지만)
알바알토 와도 잠깐 일을 같이 하면서 북유럽의 전통양식을 모더니즘에 결합하는 양식의 건축설계를 경험하고, 40년대 후반에는 파리에서 르 꼬르뷔제를 만났고, 이후 모로코, 북미, 남미여행을 하면서 루드비히 미스반데르로에, 이에로 사리넨 과 안면을 트게 되지.
..지루하지?
근데 굵은 글씨 보고 있나? 그보다 스승, 또는 훨씬 더 유명세를 타고 있던 당시의 쟁쟁한 건축가들을 다 제치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공모작에서 우승을 하는 영광을 안게 된 거야. 특히,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이에로 사리넨과의 만남은 그가 공모작에서 우승을 하는 데에 참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어?
(그러니깐 인생 헛살지 마라 일게이들아.)
모로코, 북미, 남미 여행을 하며 그는 특히 모로코의 진흙벽돌가옥 과 마야, 아즈텍 문명의 피라미드와 유적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해. 특히, 오페라하우스 디자인에는 마야 피라미드의 기단(밑부분, 포디움) 양식을 따라했다고..


(좀 비슷해 보이나?)
아무튼, 논란 속에서도 디자인의 현실성보단 천재성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고 곧 공사에 착수하는데, '오베 아럽(Ove Arup)' 이란 사람(ㅆㅂ 이름이 왤케 다들 좃같냐, 건축가들은?)이 요른 웃존에게 당선 축하 편지를 쓰며 자신이 세운 건축회사, '오베 아럽 & 파트너' 에 수주를 맡기라는 요청을 하게 돼.
(오베 아럽은 당시 ㅅㅌㅊ 건축 엔지니어였으며, 그의 회사는 지금까지도 굉장히 실력있는 건축회사로 인정받고 있음.)
요른 웃존은 런던으로 날라가 심사위원장이었던 레슬리 마틴을 통해 오베 아럽과 계약을 하게 되지.
그 때 시드니에서는 건설비용에 많은 예산이 소요될 거란 논란으로 시 의회에서 한 바탕 씨름이 벌어지게 되지만, 주지사 조셉 케이힐은 긴 다툼 끝에 오페라하우스 건설자금을 1년에 많게는 4번씩 펀드 공모로 모금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위원회는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염원하던 시 여론을 감안, 자신만만하게 2달 내에 350만 파운드 모금을 목표로 펀드 공모를 하게 되는데,
2달 --> 5달로 기간이 길어져버려.(시작부터 좆지 안타..)
요른 웃존은 드디어 1957년 7월, 시드니에 도착하게 되는데 키 크고 잘생긴 외모로 한 번 시드니 시민들의 환호를 받아.
오페라하우스의 건설계획을 발표한 현장에서 한 시간 만에 2500명으로부터 23만 파운드를 기부금으로 거둬들이고 조셉 케이힐 주지사도 펀드에서 10만 파운드를 건네주게 돼.
이후 펀드레이징 파티에서 웃존은 플루트연주자한테 볼키스로 50 파운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와이프로부터 볼키스로 또 50 파운드 등등 이후로 펀드모금행사에서 줄줄이 볼키스로 건당 50 파운드 모금을 하게 된다.

(50파운드 내고 웃존과 키스하려고 줄줄이 선 여인네들..부왘부왘)
근데 웃존은 처음부터 오페라하우스 건립위원회와 심각한 마찰을 빚었어. 웃존은 돈, 시간과는 상관없이 가장 완벽한 건축물을 만드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야.
조셉 케이힐 주지사는 웃존에게 힘을 실어주는데, 심지어는 웃존이 '베네롱 포인트의 북쪽 선착장이 눈에 거슬립니다' 라고 하자 통화 한 번만으로 그걸 없애버려. 게다가 여론도 웃존에게 호의적이었지.
3주의 체류기간을 마치고 웃존은 일본,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의 조개껍질 모양 천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데
사실 그 때까지도 어떻게 세부 드로잉을 해야하는지 모를 정도로 체계화된 계획이 없었어.
건립위원회는 6개월 내에 세부계획을 발표하라고 압박했고, 이에 그는 처음 드로잉과는 아주 다른 모양의 설계도면을 합친 'The Red Book' 을 위원회에 보내.


캬~보기에는 정말 아름답지 않노? 근데 이 드로잉들은 초기보다 지붕은 더 굴곡지고 끝은 날카로워졌으며, 각각의 지붕들은 곡면의 호가 제각각의 반지름을 갖고 따로 놀고 있었어. 미적으로는 더 나아졌지만, 점점 실제 건설될 수 있는 가능성과는 멀어지고 있었지..
4. 설계와 건설의 빡침
이뤄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설계도를 가지고 공사를 착수해야 하는 오베 아럽 건설회사 사장은 공사를 3 단계로 나눌 계획을 세워.
Podium(기단), Roof(지붕), Interior(실내구조) 로 나눠서, 기단을 지을 동안 설계자 웃존과 공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복잡한 지붕 및 실내구조를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낼 시간을 벌어주었던 거지.


지붕도 지붕이지만, 보다시피 실내설계가 더 어려웠지..굴곡진 지붕 아래에 구조물들을 넣어야 했으니..

메인홀 지붕의 공학적 스케치. 설계공학자들의 빡침이 느껴지노?
아무튼 여차저차해서 머릿돌을 놓고 공사를 시작하게 되지.

건물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던지, 심지어는 머릿돌에 박히는 시금석조차도 웃존의 아버지 선박설계회사에 의뢰를 해서 바다건너 들여옴.

당시 축하연 때 사용됐던 시금석 모양의 케잌.
근데 얼마 후 주지사 조셉 케이힐이 급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건축비용을 대는 데에 난항을 가져와. 가장 큰 후원자가 뒈져버렸으니..
(케이힐 주지사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성공적인 건설을 자신의 정치적인 발판으로 삼고자 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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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빨간 박스 부분이 바로 '포디움'(기단) 인데,


요른 웃존이 훗날 위대한 설계디자이너로 평가받는 이유는 지붕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바로 이 '포디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내부적으로는 오페라 가수, 무용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습실, 각종 무대장치, 동선을 이루는 복도 등이 모두 다 이 포디움 안으로 들어가 있고
외부적으로 볼 때에는 포디움의 존재가 건축물의 튼튼한 기반을 이루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지.
위에서 얘기했듯, 이 포디움은 요른 웃존이 북미와 남미 지역 아즈텍,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 건축물을 보면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허나,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있었는데
첫째, 베나롱 포인트 지역의 지질학적 조사가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는 거야. 시공사는 오페라하우스가 세워질 베나롱 포인트가 주변과 비슷하게 사암층으로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실제로는 충적토가 쌓인 땅이었어. 따라서 기반공사를 단단히 해야 했지.


(씨이이이이이발!)
두번째, 아직 지붕 설계가 어떻게 될 지 결정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포디움이 받칠 지붕의 무게를 정확히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
하지만 그냥 지음.
Stage 1 에서는 요른 웃존 외에도 오베 아럽의 천재성도 발휘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메인 홀 천정의 콘크리트 빔 이었어.
웃존의 설계 초안에는 포디움 메인 홀에 계단과 함께 몇몇 기둥모양 구조물이 있었는데, 오베 아럽은 이를 보자마자 기둥모양을 없애자고 제안을 해.

나중에 웃존으로부터 '오베의 발명품' 이라고 불리는 이 콘크리트 빔은 U, V, T 자 모양의 단면을 자유자재로 변형하면서 배치시켜, 위로부터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됐어.
Stage 1 에만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게 되지만, 공사과정을 지켜보는 위원회와 시민들은 하나하나씩 완성되어가는 예술적인 건축물의 탄생에 많은 지지를 보내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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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디움이 완성되는 동안, 요른 웃존은 덴마크와 영국 런던에 있는 그의 설계사 사무실에서 오베 아럽 등과 함께 지붕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되었는데, 그의 오피스와 시드니의 공사현장으로 설계 디자이너, 건축가를 꿈꾸는 각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오게 되면서 유명세를 타지.
지붕의 설계와 공정은 세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째, 각 지붕이 동일한 반지름의 호로 이루어지지 않아, 공사기간과 비용을 단축시킬 수 있는 조립식 공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었어.
둘째, 요른 웃존은 아럽이 만든 콘크리트 빔의 아름다움에 감탄, 지붕도 똑같이 철제 빔을 내부에 노출시킨 채로 둘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

바로 요렇게~ 이게 바로 'rib structure'
근데 아럽의 파트너이자 수학자였던 '로널드 젠킨스'는 이 구조가 지붕을 구조적으로 너무 취약하게 만든다며

이렇게 바꿀 것을 제안했어. 안쪽과 바깥쪽의 콘크리트 판을 두꺼운 철제 빔으로 연결시켜 놓는 'shell structure' 대로 하면 요른 웃존의 설계 응모작과도 비슷한 효과도 낼 수 있었지.(철제 빔이 바깥으로 노출되지 않으니깐)
하지만 웃존은 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했어. 건축을 기만하는 설계라고 생각했지. 아럽의 콘크리트 빔을 본 이후로는 구조물을 내부에서 보이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봐.
요른 웃존이 당시에 한 말,
"I don't care what it costs, I don't care what scandal it causes, I don't care how long it takes, but that's what I want."
여러 번의 마찰 끝에 아럽은 젠킨스를 스스로 해고시키고, 이 둘을 합친 설계를 내놓게 되는데

두 가지 방식을 같이 사용하면서 구조적인 안정성도 추구하고 웃존이 원하는 rib structure를 유지하는 방식이었지.
웃존도 여기에 만족하고 이대로 하기로 결정하게 돼.
하지만 세번째 문제가 있었어. 각 지붕이 따로따로 놀기 때문에 철제 빔(rib)은 굉장히 특수한 구조로 이뤄져야 했으며 지붕과 지붕을 잇는 부분에서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난감했거든.
결국, 첫번째 문제가 둘째, 셋째 문제를 일으키는 셈이었어. 또한 지붕에 붙일 타일이 수도없이 필요하기 때문에 각 지붕들을 같은 곡률을 가진 호로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지.
5. 위대한 발견; '조개껍질'에서 '구' 모양으로의 전환
아럽에게서 또 한 번 잔소리('같은 곡률 가진 호로 만들어서 조립식 공정 가능하게 하라고!') 를 들은 요른 웃존은 문득 생각하게 돼.
'조개껍질과 껍질을 포갰을 때 사이 공간이 남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이어서 이렇게 생각하지. '하나의 구의 표면에 지붕 모양을 그려서 잘라내면 같은 곡률을 가진 호가 아닐까?'
아내가 가져온 오렌지 껍질을 벗기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그가 우승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에로 사리넨은
TWA 터미널을 설계할 때 자몽 껍질을 벗기다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해.

이에 바로 모형을 만들어서 테스트해 보고,

이런 모양을 설계를 하게 되지. 유레카, 문제 해결!

(오페라하우스에선 기념비적인 이 사건을 동판에 새겨서 전시해 놨음)
웃존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럽에게 전화를 걸어 마구 떠들어댔으나, 아럽은 머릿속에 이미지도 잘 그려지지 않고, 팩스도 없었기 때문에 바로 그쪽으로 가겠다고 했다고 해. 런던에서 덴마크 도시인 헬레벡(Hellebæk)으로.
6. 파탄난 동업관계
덴마크에 도착한 아럽은 웃존의 천재성에 감탄했으나 속으로는 약간 벙찌게 되지. 왜냐하면 지난 3년간 'Red Book' 에 있었던 지붕 구조 설계모양을 웃존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 모양대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웃존은 자기가 이렇게 간단히 바꿔버린 거야. 아럽은 웃존에 대해 서서히 환멸을 느끼게 돼.
또한 웃존의 설명을 듣고 나서 아럽은 금방 이 설계변경안이 오페라하우스의 내부 공간을 굉장히 많이 바꿔버리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돼.
이때쯤 오베 아럽은 그의 회사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 집중하느라 자금사정이 좋지 않았고 일에 대한 심한 스트레스가 겹친 탓인지 가끔씩 기절을 하고 몸이 안 좋아져 오스트리아로 요양을 가게 돼. 요른 웃존은 상대하기 쉬운 성격이 아니었지. 지나치게 오만했고, 소수의 실력있는 인원만 건축설계사무실에 남겨놓고 싶어했지만,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같이 커다란 공사는 소수정원으로는 택도 없었지. 주변에 몰려들던 많은 사람들도 그의 푸대접과 오만함에 지쳐서 하나 둘씩 떠나가기 시작해.

아무튼간 호주에서는 그가 도착하면 귀빈들이 마중나와서 같이 식사도 하고..사람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았어. 그를 건축의 난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으로 여겼지. 실제로 그가 문제를 해결한 것은 굉장히 원론적인 것이었고, 이를 현장에서 건축에 적용시키는 데에는 또한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웃존은 사람들에게 '내가 바로 문제를 해결했다' 라고 하고 떠들고 다녔다고 해. 오베 아럽은 이런 웃존의 태도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어.
아럽은 드디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건의 많은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해. 그 동안 중책을 너무 많이 맡고 있어서 회사 사정도 안 좋아지고 본인 건강도 안 좋아지고..요른 웃존은 그런 아럽에게 "현장 매니지먼트가 이번 일의 가장 쉬운 파트입니다. 대부분은 그냥 일을 하면서 배우면 되니까요." 라고 허세를 부리지.
드디어 아럽과 웃존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이 나고..Stage 2 중간부터는 요른 웃존이 건설 총괄을 맡게 되지만..그는 건축 디자이너이지, 현장 건축가의 소질은 없었어.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도 겪고 시간도 질질 끌어지지만 공사는 그래도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어. 아럽의 아이디어였던 중앙홀의 콘크리트 빔은 계획보다 무게를 더 많이 받쳐주지 못해서 다시 뜯어내고 재시공 해야 했다고 해.(소음을 줄이기 위해 아침 러시아워에 진행함) 당시엔 공사장 안전장비도 없었지만, 공사기간 중 죽은 인부는 단 한명이었어. 건설시공도 'Hornibrooks' 라는 퀸즈랜드의 새 회사가 맡게 되었지. 건설과정에서 불가능은 없어 보였어.
7. 웃존, 점점 지쳐가다.

Stage 2의 공사기간은 총 3년. 처음 계획의 약 두 배였고, 건설비는 천문학적으로 오르고 있었어. 350만 파운드 모금액으로 시작한 게 1천250만 파운드 까지 치솟게 되었지. 물론, 공사자금 조달에는 어려움이 없었어. 펀드공모로 언제든지 조달할 수 있었으니깐. 오히려 쓰고도 남을 지경이었지. 그만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또 일부 시민들은 공공 주택이나 병원을 지어야 할 돈이 전부 오페라하우스로 쏠리고 있다고 비난했지.
요른 웃존도 점점 지쳐갔어. 그가 원했던 건축물은 이보다 더 완벽한 완성물이었는데..건축기술의 한계를 이유로 그가 처음에 원했던 이상형과는 점점 멀어진다고 그는 생각했어.
지붕 디자인이 조립식 공정이 가능하도록 바뀌면서, 내부 공간은 더 좁아졌어. 처음 설계한 오케스트라 공연장의 좌석은 재배치되어야 했고, 음향이 가장자리까지 도달하도록 좌석 간격이나 넓이도 다시 배치해야 했지.
그의 큰형이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죽고, 형수와 조카들을 덴마크로 거둬들이기 위해 유럽으로 날아간 후 웃존은 시드니에 돌아와 공사현장인 베네롱 포인트와 멀찍이 떨어진 한적한 곳에 건축설계사무실을 차리는데, 이걸로 정부와 마찰을 빚고..공사비는 1천700만 파운드까지 올라가고..정부에서 파견나온 관리가 웃존을 굉장히 무례하게 대하는 사건까지 일어나.
웃존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했고, 전화연결도 되지 않았어. 건축현장엔 일주일에 두 번밖에 안 나가보았고, 집의 문에는 폭발한 전화기 그림이 붙어 있었지.
아직 Stage 3 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8. David Hughes의 부임과 Jørn Utzon의 사임
다음 선거에 노동당이 지고 자유당의 David Hughes가 뉴사우스웨일즈주의 지사로 오게 되면서 그는 이 매력적인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프로젝트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이용하고자 하지.
그는 웃존에게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마침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웃존을 사임시키게 돼.
하지만 막상 짤라버리자, 국내 여론은 웃존을 다시 데려오라는 요구를 하고 전세계에서 웃존의 복직을 탄원하는 성명서가 도착하지.


(대자보지..는 아니고 그냥 데모)

(당시 윌리엄 휴즈를 풍자한 그림)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공사는 진척이 되어 stage 2 는 끝나가고 있었고

건축물의 아름다운 지붕이 서서히 드러나자 사람들은 더욱 더 웃존의 컴백을 바랐지만, 휴즈는 단호히 거부했어.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지붕에는 4253개의 틀 위에 스웨덴에서 수입해온 105만 6천개의 무광택 타일을 붙여서 완성되었다. 무광택인 이유는 햇빛에 반사되어 풍경사진이 잘 나오지 않을 것을 우려한 것..타일의 디자인은 호주 원주민인 애보리진 아트를 기초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쪽은 보통 유리, 다른 한쪽은 황홍색을 코팅한 프랑스제 2중 유리가 2000장 사용. 벽과 계단에 쓰인 소재는 뉴사우스웨일주 타라나 지방에서 채굴된 분홍빛 혼합 화강암.
1966년 4월, 공사를 맡은 지 8년, 시드니에 온 지 3년만에 요른 웃존은 가족과 함께 호주를 몰래 떠나.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신 돌아오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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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Hall, Todd, Littlemore, Farmer 란 건설디자이너/건축가(정부 쪽에서 고용한)들은 웃존을 찾아가기도 하고, 웃존으로 하여금 다시 자리를 맡도록 설득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모두 실패. 이 네 사람이 stage 3 를 맡아 진행하게 돼. 웃존의 스케치, 사무실의 조수로부터 받은 설계자료를 바탕으로 인테리어 공사를 하게 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인테리어 공사는 웃존과는 상관이 없는 공사였지. 웃존은 떠날 때까지도 stage 3 의 구체적인 설계를 하지 않았으니깐.
이 네 명은 구체적인 설계도면을 제출하게 되는데..가장 큰 이슈는 바로 '메인 홀'을 오페라 용도가 아닌, 오케스트라 공연장으로만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었어.
오베 아럽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의 편지를 윌리엄 휴즈 주지사에게 보냈는데, 그건 처음 계획대로 메인 홀이 오페라 공연 외에 여러가지 다른 용도로 쓰이도록 애를 써서 디자인을 했기 때문이야. 또한 그렇게 되면 여태껏 그토록 공을 들여 완성했던, 포디움 내의 무대장치들은 모두 다 쓸모없어지는 거였거든.


Stage 2 의 완성 후 웃존도 데이비드 휴즈에게 서신을 보내게 되는데, 자신이 맡아서 stage 3 를 끝내게 해달라는 것이었어.
하지만 윌리엄 휴즈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또 다시 거절하고..
결국 호주인 네 명이서 공사를 마무리짓게 돼.

공식 사이트의 콘서트 홀 소개를 보면, 무대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검은색으로 무대를 칠했으며, 무대 위쪽에는 18개 도넛모양의 아크릴 음향 반사판이 달려 있어 악기 소리들을 무대 위로 다시 반사시킨다고.. 콘서트홀의 중앙에는 10,500개의 파이프와 5단짜리 건반으로 이뤄진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프오르간이 위치하고 있대.
그러면 소요된 총 공사비용은?

stage 1 하고 stage 2 하고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쓰게 되지~
세금 잡아먹는 괴물, ㅍㅌㅊ? 내가 제일 처음에 '호주의 슨상님컨벤션센터' 라고 했던 이유가 짐작가노?
초기 예상비용 350만 파운드 --> 최종 비용 1억 200만 파운드
물론, 공기도 늘어지고 해서 물가상승률도 감안해야 겠지만..무려 30배 가까이 뛰어버렸어.
그래도 개관 행사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초청해서 하고

그 후로는 호주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자 관광명소가 되었지.

일게이들, 이제 가리비 껍질 모양의 지붕 말고 든든한 응딩이, 포디움도 눈에 들어오노?
가끔 이런 이벤트를 보여주기도 하고~
http://www.youtube.com/watch?v=vZljVZ1vc4c

심지어는 레고로도 나온다..사고 싶네 쩝
9. 완성..그 이후
요른 웃존은 이후 시드니를 떠난지 33년이 지나, 새로운 뉴사우스웨일즈 주의 정부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유지/보수와 관련된 공사계약을 하게 돼.
하지만 이전의 상처가 남아있었는지, 직접 시드니로는 가지 않고 호주의 엔지니어들이 웃존을 찾아가서 자문을 받지.
무명의 건축가였던 요른 웃존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디자인을 계기로 건축 디자이너로써의 커리어를 쌓게 되고,
2003년에는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 상을 수상.
http://www.pritzkerprize.com/laureates/2003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코펜하겐의 '박스베어드 교회')
이후 다시는 호주 땅을 밟지 않은 채로 2008년 90세에 노짱을 따라가..평생 자신의 걸작인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완성된 모습을 실제로 보지도 못한 채로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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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줄 요약
1.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2. 호주를 대표하는 ㅆㅅㅌㅊ 건축물이지만
3.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http://www.utzoncenter.dk <-- 요른 웃존 건축설계사무소 홈페이지(지금은 그의 아들인 얀 웃존 이 소장으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