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ilbe.com/2443200001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기획전' 을 둘러싼 알력다툼에 대해 아라보자.ggabojun
http://www.ilbe.com/2469700092 ----------------- '특별검사제도' 에서 새누리당 vs. 민주당 역대전적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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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많고 할일이 없어서 자꾸 일베에 글을 올리게 되네..빨리 이딴 거 끊어야 내 생활이 될텐데 씨발.
오늘은 나라를 지킨 전쟁영웅과 나치에 협력한 매국노, 두 가지 엇갈린 평가를 받는 프랑스인, '필립 페탱' 에 대해서 알아볼까 해.
출처 - 네이버 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932)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rsakes&logNo=130174986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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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페탱 (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etain, 1856년 4월 24일 ~ 1951년 7월 23일)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rsakes&logNo=130174986285
1856년 출생.
1916년 2월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 제2군단을 이끌다.
1918년 11월, 프랑스군의 원수 취임.
1934년 국방장관 취임.
1940년 6월 17일 항복선언을 함.(그의 나이 84세)
1940년 6월 22일 독일과의 휴전협정을 체결함.
1942년 11월 나치에 의해 모든 권력 상실.
1944년 9월 7일, 페탱과 그의 내각은 독일 남부 도시인 지그마링엔(Sigmaringen)으로 끌려갔고, 그 곳에서 은퇴.
1945년 4월, 프랑스로 돌아와 전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으로 사형을 언고받다. 이후 고령으로 총살형 대신 종신형으로 낮추어짐.
1951년 7월 23일, 유배지인 되 섬에서 사망.
이 글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자세히 서술하기보다는(씹 스압이 될테니..) 정보는 되도록이면 간략하게,
마지막에는 일게이들과 같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에 대해 내 의견을 적게 될 거야.
글을 읽어보고 나서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게이들은 맨 윗 출처에 나온 두 개의 링크를 열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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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민의 아들, 전쟁영웅으로 온 국민의 스타가 되다.
'앙리 필립 페탱'은 프랑스 북부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생시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지. 승진은 느린 편이었지만 그를 확~ 전쟁영웅으로 띄워준 계기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 이야. 평시에는 빛을 못 보다가 전시에 빛을 보는 몇몇 역사적 인물들이 있지. 페탱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어.(수성의 달인)
1916년 2월, 베르됭 전투(Battle of Verdun)은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역량을 총동원한 한판 승부였어. 당시 프랑스 제2군 사령관이었던 페탱은 드 카스텔노 장군에 의해 수비 지휘관으로 임명되고, 페탱은 우선 포병 운용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고 보급로 확보를 하게 되지. (이 때 나이가 무려 60세! 삼국지 황충 떠오르노?)

전투는 10개월이나 이어졌고, 결국 독일군이 패함으로써 역사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승리로 돌아가는 중요한 전기' 로 평가 돼.
또한 대령 시절의 페탱은 병사들로부터 '그가 지휘하면 듀글 확률이 적다' 라는 이유와 온화한 성품으로 인기가 많았다고 해.
네이버 캐스트 에 나온 내용을 잠깐 보고 넘어가자.
--> '그 때까지의 보병 전술은 용맹한 ‘일제 돌격’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관총을 비롯한 강력한 화기가 등장하면서 그런 전술은 제 무덤을 파는 것이 되었는데, 그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 페탱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시작 시점에는 기존의 전술을 고집하는 지휘관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그토록 전사자가 많이 나오기도 했다. 반면 참호와 철조망에 의존하면서 자동화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을 편 페탱은 이내 두각을 나타냈고, 불가능할 것 같던 장군 진급은 물론 가장 중요한 전선을 맡아 지휘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눈여겨 볼 것은 그 유명한 '샤를 드골' 프랑스 초대 대통령이 중위로써 처음 야전군에 배속되어 모신 상관이 바로 '필립 페탱' 대령이야. 드골은 페탱을 옆에서 모시면서 그를 존경하게 되고 따르게 되지.

(한 때 사이 좋았던 시절..드골(왼쪽)과 페탱. 나중에 고갱과 고흐처럼 틀어지게 된다.)
또한 그를 영웅으로 띄워준 베르됭 전투 후, '니벨' 이라는 어떤 일게이 같은 장군이 미칠듯한 공세전략을 펴고 이게 실패함으로써 프랑스군의 대규모 항명사태를 가져오게 되는데(무려 전체 프랑스 군의 절반이 참호로 복귀하길 거부함) 니벨은 짤리고, 병사들에게 신망받던 페탱이 총사령관이 되어 항명사태를 진압하게 돼.
이 때 병사들 중 3472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554명 사형선고, 49명에게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어.(긴박했던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말이야.)
페탱은 이런 징벌조치를 단행할 시 재판에 회부될 자들을 선정함에 있어서 그 부대의 장교와 하사관들이 병사들의 동의 하에 해서 부작용을 최소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1918년 11월, 공로와 업적을 인정받아 프랑스의 원수(元帥)로 승진했고, 이어 최고위 군사직(최고 군사회의 부의장 겸 육군 감찰관)에 임명돼.

(페탱 원수시절 수여받은 지휘봉..아주..크..크고..아름다워.. 울퉁불퉁 별 모양 구슬도 박았노?)

(베르됭 전투의 영웅, ㅍㅌㅊ?)
이게 얼마나 높은 영예였냐 하면,
후에 페탱이 재판을 받을 때 사형선고를 받고 모든 계급을 박탈당할 때에도 사법부는 '프랑스의 원수' 직을 박탈할 수 없었다고 해.(평생 까방권 획득?)
2. 전쟁영웅의 정치계 입문
; 사실 좀 안타까워. 군인이 정치계에 입문하면서 나중에 패가망신하는 케이스가 많은데, 페탱도 그 중 하나야.
1934년 국방장관을 맡으면서 처음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페탱은, 우리나라의 해방초기 혼란처럼 안개 속의 정국(파시즘, 골수좌파, 중도파 저마다 정권 수립하고 퇴장하길 반복..)을 바라보게 돼.
외교 ㅎㅌㅊ, 군사력도 ㅎㅌㅊ, 여러 식민지들에서 독립운동으로 바깥 상황도 ㅎㅌㅊ.. 아주 그냥 좆까튼 상황에 놓인 거야.
이런 상황에서 환멸을 느낀 페탱은 80대 중반의 나이에 정계에서 은퇴, 에스파냐 주재 대사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
근데 프랑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줘야 하는 굴욕을 받았던 독일이 나치와 히틀러를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거야.
폴란드를 점령하고 제일 먼저 침략한 강대국은 바로..프랑스였지.(다 아는 내용 자꾸 써서 미안~)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웠던 프랑스는 결국..나치 독일에게 엄청난 굴욕을 맛보게 되지.

(일부러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는 나치 독일군)

(으헝헝헝ㅎㄴ머허엏어허ㅓ어허어허엏)
패전의 책임을 지고 '달리디에' 내각이 퇴진한 다음 집권한 '폴 레이노' 수상 내각은 파리를 포기, 보르도로 튀어버리는데,(임진왜란 때 선조 생각나노..)
프랑스 정부가 후퇴하자, 약 800만 명의 민간인들도 뒤를 따른 아주 대탈주극이 일어났다고 해.
http://www.newsmak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2428
네이버 캐스트 의 내용을 잠깐 보자.
--> '레이노는 페탱의 높은 국민적 인기를 활용하고자, 이미 80대 중반의 나이로 은퇴해 있던 그를 전시내각에 다시 불러들였다. 페탱의 부관이었고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드골(드골의 맏아들인 필립은 페탱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도 함께였다. 하지만 “정부를 알제리로 옮겨서라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드골과 “패전은 현실이다. 현실을 인정하면서 최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페탱의 대립 속에 레이노는 정권을 페탱에게 넘겼고, 드골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여기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한 드골과, 나치와 평화협정을 맺은 페탱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게 되지.
(폴 레이노 수상은 사임하고 나서 독일에 끌려가 1년 반 동안 감금생활을 한 후, 독일의 항복과 더불어 프랑스로 복귀, 헌법회의의 한 멤버로 등장하게 돼.)
6월 18일 페탱 신임 수상은 라디오로 히틀러에게 휴전을 제의하고, 이튿날 드골은 영국으로 망명, 철저 항전을 호소한다.

국민적 인기가 높은 노쇠한 은퇴 장성(당시 나이 84세)을 다시 끌어내 협상장에서 히틀러와 악수시킨다라..
페탱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악역을 자처한 걸까?
3. 비시(Vichy)정부의 수장이 되어 나치에 협력하다.

(비시정부의 국기와..가운데 깨알같은 페텔이 수여받은 지휘봉..프랑스를 북/남으로 갈라서 통치한 나치정권(빨간색)과 비시정부(파란색))
'Vichy 정부' 란 이름은 이 괴뢰정부가 그 수도를 오베르뉴의 작은 온천도시 '비시'에 두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호텔이 많아서 수도로 선정되었다는데, 왜 호텔 많은 곳을 선정했는지는 잘 모르겠노..)

(오늘날 대한민국 김치녀들의 잇 아이템, 비시 수분크림, ㅍㅌㅊ?)
잠깐 곁다리로 새면, 비시는 고대로마시대부터 유명했던, 프랑스 대표 온천도시였지. Vichy 화장품은 거기서 나온 미네랄 온천수로 만들어진 것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비시 정부는 '괴뢰' 정부는 아니야. 나치가 강제적으로 세운 정부가 아니라, 프랑스 의회에 의해 통과된, 합법적인 정부이지만,
뭐 그건..한일합방이 국제법을 지킨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소용없는 것이지. 나치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나치는 프랑스 전체 면적의 5분의 2인 남부 프랑스에 '비시 정부'의 국가주석 페탱에게 행정권, 입법권을 포함한 '전권'을 부여하며 통치하게 하지만,
결국 2년 뒤 그냥 비시 정부를 없애버리고 직접 통치를 하게 돼.
네이버 캐스트 曰,
--> '페탱은 파시스트가 아니었지만, 나이든 군인으로서 민주주의의 복잡한 과정에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특히 프랑스가 진 이유는 1936년의 인민전선정부를 비롯한 좌파의 '비애국적' 정책과 당리당략에만 골몰하는 정치인들의 드잡이에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독일의 총통 체제와 흡사한 독재적 체제를 구축했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와 노동3권을 크게 제약했다. 영장없이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게 하는 등 기본적 인권도 훼손시켰다.'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의 '한스 린다' 대령..본 게이들은 아마 알 것이다..나치의 유대인 색출..
오오미, 우유 마시고 파이프 물면서 협박하던 크리스토프 왈츠 성님, 지리것소..)
비시 정부는 프랑스 젊은이들을 독일로 징발했고, 기업들로 하여금 나치 독일의 군수품을 생산하게 했으며,
독일의 유대인 박멸 정책에 협력해서 프랑스의 유대인들을 색출해야 했어.
그리고 프랑스 경찰의 손으로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수색, 체포해서 독일에 넘겨준,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지.
또한 독일은 페탱의 승인을 거쳐서 군수물자와 식량을 멋대로 징발하게 돼.
(근데 페탱은 사실 얼굴마담이었고, 실제로 총리인 '피에르 라발'이 실질적으로 나치에 제일 협력하고 나치를 선전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정설이야.
라발은 나중에 연합군으로부터 해방된 프랑스를 떠나 독일로 피하고 결국 미군에 항복하는데, 프랑스 법정으로 끌려와 총살당함.)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141806251&code=100100
그 와중에도 페탱은 때때로 소극적이지만 나름대로 나치 정권에 저항을 했는데,
가령 독일이 독일군 두 명이 살해된 일을 앙갚음하여 독일에 억류된 프랑스군 포로 백 명을 처형하겠다고 했을 때 히틀러에게 "그러면 제일 먼저 나부터 죽여라'
하고 맞서서 결국 처형 위협을 철회시킨 적도 있어.(하지만 포로 송환은 fail..)
4. 늙은 영웅의 파란만장한 삶, 영욕의 세월 뒤에는 굴욕만이 남다.
종전과 함께 파리로 화려하게 복귀한 샤를 드골은 나치 협력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흥분한 레지스탕스 대원들, 공산당원들, 일반인의 손으로 '숙청' 이 행해졌어.

(살벌했던 당시 분위기..생생하노)
지루하지만, 네이버 캐스트 내용을 한 번 더 보자.
--> '정식 재판 절차 없이 처형된 사람이 종전이 채 되기도 전에 1만 명에 육박했다. 이후 협력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이 약 30만 명, 실형을 선고 받은 사람은 10만 명에 달했다(그 중 7천 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실제로 처형된 숫자는 1500명 정도다). 이런 가운데 비시정부를, 페탱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매일같이 이어졌다. 프랑스 공산당은 전쟁이 끝나면서 와해된 언론 시스템을 재빨리 장악하여 페탱 처단을 부르짖었고, 드골은 그들과 손을 잡고 재판을 추진했다(그 과정에서 드골은 스탈린과 히틀러가 동맹을 맺고 있을 동안에 프랑스 공산당이 나치에 협력했던 일을 불문에 붙인다는 밀약을 맺었다). 마침내 1945년 7월 말에 시작된 재판은 레지스탕스 출신자들과 국회의원들이 반반씩 배심원을 맡고, 앙드레 모르네가 검사, 자크 이조르니가 변호인, 폴 몬지보가 주재판사를 맡고 있었다.'
5. 수많은 논란의 여지가 된 재판
검사 측은 휴전협정과 비시정부 수립이 불법이었다고 공격했고, 페탱의 변호인 측은 모두가 기존 헌법과 법률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고 반박했어.
결국, 주된 쟁점은 '비시정부가 점령 시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였지.
* 페탱 측의 주장
; 휴전협정과 비시 프랑스의 확보는 프랑스 전 지역이 적에게 넘어가는 상황보다 분명히 나았으며, 프랑스 식민지(특히 북아프리카)가 보전되고 프랑스 병력(특히 강력한 해군 전력)이 전쟁에 불참함으로써 연합군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조성했다고 주장함.
* 검사 측의 주장
; 차라리 프랑스 전역이 점령되는 편이 임시정부와 레지스탕스 활동에 더 큰 힘을 부여했을 것이라고 주장함.
여기서 페탱 측이 가장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쟁점은 비시정부의 손으로 레지스탕스를 공격한 사실이었어.(위에 빨간 글씨에서도 나와있지만)
하지만 독일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했던 레지스탕스 대원 하나는
“페탱 정부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고,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이해한다”고 증언했어.
그리고 과연 검찰 측 사람들이 페탱을 단죄할 자격이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었지.
이조르니 변호사는 검사를 맡고 있던 '앙드레 모르네' 역시 웬만큼 점령군에게 협력했었다고 폭로했고..
"드골? 그는 런던에서 편안히 지내며 처칠과 골프나 치러 다니지 않았는가?
페탱이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을 더럽히는 동안 그가 실질적으로 한 일이 뭐가 있는가?"
'배심원의 심리는 8월 14일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 몬지보 판사는 5년 유배형을 제안했지만, 대체로 레지스탕스 출신 배심원들에게 무시당했다. 그들은 거의 전원이 사형을 주장했다. 반면 국회의원 출신 배심원은 유대계인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형에 반대했다. 결국 다수결로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 다만 페탱의 고령을 참작해서, 집행 유예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8월 15일, 법정에서 판결문이 낭독되자 페탱은 정신을 잃고 자리에 쓰러졌다.'
(출처 - 네이버 캐스트)
6. 몇몇의 추모객을 뒤로 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

그 뒤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볼까?
드골은 나치 협력자 숙청이 대충 끝나자 그때까지 한편이었던 공산당을 맹렬히 탄압하며 반공 우익 정치인의 면모를 드러냈어. 그리고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들 때 비시정부의 체제를 많이 참조하며 대통령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늘리게 되지.
한편 페탱의 재판은 잘못이었으며 페탱은 억울한 희생자였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이어져서, 오늘날에도 페탱의 사망일이면 어김없이 그를 추도하고자 페탱이 숨을 거둔 '일드외'(= '되' 섬)을 찾는 순례자들이 있고.. 비록 그 대부분은 극우적 성향의 노인들이긴 하지만 말야...
1973년에는 필립 메탱의 묘소가 있는 되 섬에서 묘소 도굴 사건이 일어났어. 이는 그의 유해를 '두오몽' 전몰용사묘지로 이장하겠다는 추종자들의 소행으로 추측된다고 해.
구국의 영웅에서 민족의 반역자로 추락한 '필립 페탱' 은 법원의 선고 이후 되 섬으로 옮겨져서 대부분 병원 침대에서 6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낸 후,
1951년 7월 23일에 영욕의 삶을 마감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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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에필로그
나는 필립 페탱의 삶을 돌아보면서 제일 먼저 대한민국을 북괴뢰군의 침략에서부터 지켜낸,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 이 떠올랐어.
일게이들은 다 알겠지만, 백선엽 장군은 정말 위대한 대한민국의 군인이셔. 하지만 만주국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경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야.
(그가 직접 자서전에 밝힌 사실임.)
근데 좌파 언론이나 종북주의자들은 백선엽 장군의 흠을 가지고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기에만 바쁘지.
삼국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 조조가 장수의 군대에 의해 도망을 치다가 말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난감해할 때, 그의 첫째 아들이 자신의 멀쩡한 말을 넘겨주고 "아버지, 어서 탈출하십시오." 라고 말하고는 자신은 전사한 일화 말야. 그 때 조조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 고맙다." 하고 말 고삐를 넘겨 받지.
소설가 이문열 선생은 이렇게 말해.
필부(匹夫)는 거기서 망설이고 또한 주저했을 것이라고..아버지가 되어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근데 조조가 정말 대단한 것은 부자의 정을 이기고 냉철한 상황 판단으로 전장을 벗어나서 결국 나중에 장수의 군대를 격파하고 복수를 하게 되지. 즉, 둘 다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인륜을 저버리고 나중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조에게 군웅의 자질이 있다고 하지.(오래 전에 읽은 거라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안 난다.)
마찬가지로 필립 페탱이 84세의 노구를 이끌고 나치 괴뢰 정부의 수장을 맡은 것은 나치의 부역자로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보다는 나치의 손아귀에서 남프랑스를 지켜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나는 생각해. 그 시점에서 이미 개인의 영욕은 저 뒤편으로 넘긴 거지.
......
프랑스 내에서도 그를 향한 여론의 관점은 엇갈리나 봐.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rsakes&logNo=130174986285
- 1944년 9월 프랑스 여론연구소 여론조사에서 프랑스 국민의 58%는 페탱을 재판해서는 안 된다거나 무죄라는 의견을 표했고 가벼운 처벌을 주장하는 의견이 29%, 사형 또는 종신형을 주장한 의견은 3% 에 불과했다고 한다.
- 1980년 5월 르 피가로 지 여론조사에서는 프랑스인의 66%가 페탱의 1940-44년 사이의 행적을 비난할 수 없다는 대답을 했고,
- 1994년 11월의 여론조사에서는 페탱 원수가 프랑스를 배반했다는 의견이 22%, 선의의 오판을 한 것이라는 의견이 24%,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페탱이 나서서 희생했다는 의견이 30% 였다고 한다.

끝으로 그의 재판장에서의 마지막 변론을 한 번 보자.
“여러분…. 저는 1940년 7월에 프랑스 국민의 대표에게서 권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 저는 이 권력을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는 데 썼습니다. 그것은 제 명예를 스스로 더럽히는 선택이었습니다. (…) 제 목에는 언제나 칼이 들이밀어져 있었습니다. 적의 강요 앞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 저는 갖은 애를 써야만 했습니다. 역사는 제가 여러분을 지키고자 얼마나 애썼는지 밝혀줄 것입니다.”
“…저를 단죄하시려거든, 그것이 마지막 단죄이게 하십시오. 어떤 프랑스인도 합법적인 지도자의 지시를 따랐다는 이유로 구속되거나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세상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바, 여러분은 정의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그 무고한 사람은 져야 할 짐을 지겠습니다. 프랑스의 원수(마레샬 드 프랑스)는 누구의 은혜도 구걸하지 않으니까요. 여러분의 심판은 신과 후손들의 몫입니다. 그들은 저의 양심과 저의 기억을 두고 올바른 심판을 내릴 것입니다. 저는 프랑스의 손에 저를 맡깁니다!”
* 3줄 요약
1. 필립 페탱에게는 1차대전 전쟁 영웅이라는 공과, 2차대전 비시정부 수장이라는 과가 함께 있다.
2. 하지만 그의 과는 공에 비해서 필요 이상으로 크게 부풀려짐. 게다가 '과'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림.
3. 우리나라 좌파로부터 수없이 공격당하는 대한민국 수립/구국영웅들에 대해서도 한 번씩 생각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