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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 틀고 ㄱㄱ





각 가정이 하나의 야구팀이라 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팀의 에이스 투수이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은 감독이다.

그리고 '감독'은 '에이스 투수'에게 무한한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실제 야구에서 에이스로 기대를 받던 투수들이 무너지는 것처럼 여러분들 또한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으로 실망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내가 꿈꾸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닌데...' 하고 괴로워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실망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어느덧 "난 에이스가 아니었나봐"하고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한번 계속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는 인간의 좃같은 습성 상,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난 노력해도 안돼"하고 단정짓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알량한 감언이설로 속여 자기 배를 불리려는 놈들이 바로 한국의 더러운 좌파놈들인데,

여러분들은 좌파의 마약도 거부했다. 그래서 일베에 오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감히 말한다. 여러분들은 에이스가 될 수 있다.

물론 '에이스'의 정의는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여러분들은 마약을 거부했다는 점만으로 이미 에이스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

뽕쟁이는 절대로 에이스가 될 수 없거든.


중요한 사실은, 에이스가 되려면 노력 이외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나에게 그것을 일깨워준 사람이 있어서 오늘 소개하고자 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육성선수로 입단하여 나중에 다승왕, 사와무라상, 저팬시리즈 MVP 등 각종 상을 휩쓴 위대한 투수, 니시모토 타카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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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하는 노력의 단계

니시모토는 1956년 에히메현 마츠야마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그래도 지역에서 나름 알아주는 유망주였다. 마츠야마 상고에 진학한 니시모토는 마츠야마 야구부에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마츠야마 상고는 워낙 약소팀이었고 에히메현 대회에서 번번히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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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 표시된 곳이 에히메



강팀과 대결할 때, 니시모토를 선발로 내세우는 것이 마츠야마 상고의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카드였다. 동료들과 응원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마운드에 올랐지만 니시모토는 끝내 강팀의 공세에 무너지고 팀은 패배했다.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자책감에서 도망치기 위해 아예 그 분야에서 발을 뺀다. 하지만 니시모토는 (7번 져도 7번 도전한 맹획처럼) 이를 악물고 그 다음날부터 운동장에서 땀을 흘렸다. 언젠가는 성원에 보답할 날이 오리라 믿으면서.


하지만 마츠야마 상고는 한번도 고시엔에 나가보지 못했다. 그렇게 니시모토의 고교 생활은 실망만을 남긴 채 끝났다.

니시모토도 야구를 (대부분의 일본 고교생들처럼) 청춘의 한 페이지로서 마음 속에 묻으려 했는데... 뜻밖으로 일이 풀렸다.


197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니시모토를 지명한 것이다. 그러나 드래프트 입단이 아니라 육성선수 계약이었다.

말이 좋아 육성선수지 자이언츠는 니시모토를 육성해서 써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공이 그럭저럭 쓸만하니 타격 투수로 쓸 요량이었다.


이걸 직장에 비교한다면 대기업(요미우리)에 입사한다고 좋아서 갔는데 알고 보니 하청업체에서 일하게 된 꼴이다.

이럴 때에는 제일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자신의 이상과 현살 사이에 차이가 심할 때에는 오로지 그것만이 답이다.


니시모토는 야구가 좋았다. 2군에서도 출전시키지 않으리라는 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글러브를 창고 속에 넣어버리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3년간 한번도 성원에 보답하지 못한 자신의 야구인생은 그냥 실망인 채로 끝날 것 같았다. 니시모토는 야구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육성선수에서 반드시 1군에 올라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때부터 니시모토는 연습량을 배로 늘렸다. 타격 투수로서 타자들에게 공을 던져줄 때에도 '이것도 타자와의 대결이다'라는 생각으로 전력으로 직구를 던졌다. 하지만 니시모토의 직구는 프로야구 레벨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 빠른 편이 아니었다. 타자들은 어렵지 않게 니시모토가 전력으로 던진 공을 쳐냈다. 니시모토의 좌절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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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달리기로 단련된 니시모토의 응디. 신인 때부터 엄청난 연습량은 유명했다.





차별화의 단계

직구 스피드가 떨어지는 투수들은 살아남기 위해 변화구를 연마한다. 니시모토도 커브와 포크볼 등, 뚝 떨어지는 공을 익히려고 했다. 그런데 니시모토는 손가락이 짧은 편이었다. 두 손가락으로 공을 끼고 던지는 포크볼에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커브는 힘이 없어서 포수에게 도달하기 전에 원바운드 했다. 안 던지느니만 못한 공들이었다.  


이것으로 명백해졌다. 투수로서 니시모토는 성실함으로 다져진 체력 덕분에 이닝이터, 그리고 그럭저럭 빠른 직구를 앞세워 고교야구에서는 활약했지만 프로 레벨에서는 타자를 위협할 무기가 없었다. 


왠만한 사람들은 실망하고 '에이 거봐. 역시 난 해도 안돼' 라며 그냥 손을 털었을 것이다. 하지만 니시모토는 야구에 대한 좌절이 깊어질수록 야구가 좋아졌다. 그는 왜 자신의 직구는 약한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노력하려는 사람을 도와주려는 사람은 어디서나 나타나기 마련이다. 니시모토를 기특하게 보던 투수코치는 그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너의 직구는 슈트 회전을 하기 때문에 포수 글러브에 도착할 때에는 스피드가 떨어져."


슈트 회전이란 골프에서 슬라이스라 부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똑바로 날아가라고 던진 공이 (손가락 힘의 언밸런스로) 옆으로 휘는 현상을 일본에서 슈트 회전이라 부른다. 똑바로 날아가지 않는 공은 휘면서 파워를 잃는다. 니시모토는 직구가 똑바로 날아가지 않는다는 어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때 다른 동료가 해준 말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넌 내츄럴 슈트니까 슈트볼을 던지는 게 어때?"

슈트볼이란 투심의 일종으로 오른손 투수가 던진 공이 우타자 몸쪽으로 휘어들어가는 공을 말한다.  



슈트볼 그립. 검지보다 중지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게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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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의 슈트는 검지와 중지를 모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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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빗슈의 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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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슈트볼이라는 용어는 따로 쓰지 않는다. 일본 투수들이 투심을 잘 구사하니까 일본식 영어를 따서 shuuto ball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커터(우완이 던진 공이 좌타자 몸쪽으로 휘는 공)와 대동소이하다고 보면 된다.


직구를 던질 때에는 힘없던 공이 슈트를 던지자 뱀처럼 휘기 시작했다. 거듭된 좌절 끝에 니시모토는 희망을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변화구는 던지지 못했지만 옆으로 휘는 변화구는 잘 던질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재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십자 드라이버가 일자 나사못을 죌 수 없듯이, 직장이 요구되는 능력이 자신의 재능과 일치하라는 법은 없다.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어? 난 실력이 없나?'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면 단점으로 보였던 것이 장점으로 바뀔 수 있다. 엠창 직구는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ㅆㅅㅌㅊ 슈트로 둔갑했다.

만일 니시모토가 단지 타격투수로만 만족했더라면 그는 직구만 던져도 되었다. 그러나 그는 늘 1군 타자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을 어필할 무기가 생겼다.


자신의 재능에 맞는 새로운 무기를 발견했지만 니시모토는 '슈트볼 하나만 있으면 내 인생 ㅅㅌㅊ?' 식의 안일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슈트볼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구종들도 최소한 1군에서 경쟁할 레벨로 만들어야 했다. 니시모토는 더더욱 연습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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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의 강점인 장갑과 주포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관총과 보병들이 보조해줘야 함. 차별화된 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남들이 하는 기초도 어느 정도 해줘야 한다는 의미.



2군에 미칠듯이 휘는 ㅆㅅㅌㅊ 슈트를 던지는 투수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당시 요미우리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는 직접 니시모토를 보러 왔다. 나가시마 앞에서 패스트볼, 체인지업, 슬라이더, 그리고 슈트를 선보였다. 나가시마는 시찰을 끝내고 떠나면서 말했다.

"슈트 던지는 그 투수, 당장 1군으로 보내게."


나가시마에게 발탁된 니시모토는 1977년부터 1군 선발투수로 활약하게 되었다. 77년에는 8승을 올리며 전력감으로 인정받았다.





도전의 단계

마츠자카 다이스케의 별명은 '헤이세이(平成)의 괴물'이다. 그렇다면 '쇼와(昭和)의 괴물'은 누구일까? 바로 고교야구, 대학야구, 프로야구를 모두 주름잡은 에가와 스구루이다. 탁월한 파이어볼러에 각종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 강타자와의 대결을 즐기는 통에 자존심을 건 직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진짜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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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요미우리에 괴물 에가와가 입단하게 되었다. 재능으로 보면 니시모토와는 차원이 다른 투수였다. 그런데 니시모토는 "괴물인지 뭔지 알게 뭐냐. 프로 짬밥은 내가 위다. 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쩌면 아직 새파란 신인 에가와에게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고 물러섰다가는 이제 좀 피려고했던 자신의 야구인생이 그대로 시들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성원에 보답하지 못했음을 한으로 품고 있는 사람은 남다른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니시모토 또한 자신을 응원해주는 사람들(물론 에가와 팬들보다는 엄청 적겠지만)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결의를 갖고 1979년 시즌에 임했다.


79년, 니시모토는 8승을 기록했고 에가와는 9승을 기록했다. 잡초와 엘리트의 대결은 상상 이상으로 박빙이었다. 물론 투구 스타일은 달랐다. 에가와는 탁월한 구위로 타자를 압도하는 스타일이었고 니시모토는 땅볼을 유도해내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니시모토가 각성하게 된 분수령이 일어난 해도 바로 79년이었다.


요미우리와 히로시마의 대결에서 선발로 뛰던 니시모토는 에가와와의 경쟁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히로시마 타자들의 빠따가 불을 뿜었다. 정면대결을 했다가 안타나 홈런을 얻어맞으면 기록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니시모토는 빠지는 공을 던지며 유인했다. 하지만 히로시마 타자들이 속아줄 리도 없고 결국 그 이닝에서 포볼을 무려 3개나 내주었다. 그날 밤, 호텔에서 나가시마는 격노했다. 온화한 나가시마가 그렇게 화를 낸 적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나가시마는 니시모토의 뺨을 때리고 질타했다.

"바까야로! 투수가 도망가면 어쩌라는 거야? 타자가 쳤다고 해도 네 뒤에 있는 동료들이 널 위해 공을 잡아줄텐데 그들을 무시하는가? 투수란 놈이 도망치는 공이나 던지고, 그걸 야구라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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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가다가 앞으로 자빠지는 것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거 보다 더 멋있다는 나가시마 정신이 니시모토에게 깃들었다.



그 일로 니시모토는 각성했다. 지금까지 니시모토는 위를 향해 끝없이 달렸기에, 상대가 누구든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신의 눈앞에 있는 벽과 정면승부를 벌이면서 지금까지 성장해왔다. 그런데 이제 좀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하다보니 그것을 지키려고 도전 정신을 잠시 잃었다. 그 점을 간파한 나가시마는 아주 강하게 질책한 것이었다.


니시모토는 구속이 그렇게 빠르지 않아도 변화무쌍한 변화구(슈트)와 허를 찌르는 과감한 투구 내용으로 타자들과 정면승부를 벌이기 시작했다. 1980년에는 14승을 올리며 생애 첫 프로야구 2자리수 승리를 올렸다. 1981년에는 18승을 올리며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잡초 니시모토가 자신을 누르고 사와무라상을 수상하자 그제서야 에가와도 니시모토를 라이벌로 인정하게 되었다.



<야구 카드게임에 나온 에가와와 니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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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와는 그냥 한마디: LEG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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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의 "special ability: 불멸의 슈트"라고 씌여있음



18승은 어마어마한 업적이지만 동시에 니시모토는 피안타 기록 1위를 기록했다. 구위가 압도적이지 않아도 정면승부를 선호하기 때문에 피안타가 많아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하지만 니시모토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병살타를 끌어낼 수 있는 그의 필살무기 슈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높은 피안타 수는 니시모토에게는 상대 타자를 속이는 미끼였다. 적극적으로 상대 타자의 스윙을 유도해내는 자신의 승리패턴을 확립한 것이다. 안타를 많이 얻어맞더라도 그렇게 스윙을 유도해내다 보면 땅볼도 많이 잡을 수 있으니 자신감을 갖고 계속 스트라이크존을 향해 공을 던지자는 것이다.


니시모토는 자신이 탈삼진을 딱딱 잡아내는 타입이 아니라 땅볼 투수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던지는 직구도 포수 가까이에서 약간 흔들리는 (그래서 땅볼이 되기 쉬운) 공이었다. 그것은 '땅볼을 잡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함'이라는 거대한 전제 조건 아래 그렇게 스스로를 훈련시킨 것이다. 마찬가지로 직장생활에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해내는 것은 승리패턴을 확립하는 것과 같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퇴직 후에 통닭집이나 편의점을 하다가 몸은 몸대로 상하고 돈은 돈대로 날리는가? 야구로 비유하자면 변화구도 변변히 구사하지 못하는 투수가 오오타니나 채프먼 같은 파이어볼러를 따라하겠다고 직구만 졸라 던지다가 홈런 뻥뻥 얻어맞는 꼴이다. 편의점은 자신의 승리패턴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60세까지는 무슨 일을 해도 신통하지 못했던 커넬 샌더스가 주유소에 딸린 편의점에서 통닭을 파니까 대박이 났다. 체인점을 열기까지 고생을 하긴 했지만 샌더스의 승리 패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KFC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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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패턴은 안일함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면서 얻은 데이터를 분석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원숙함의 단계

한국에서는 교활하게 출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표창원, 손석희, 김제동 등 기회주의적 수법으로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긴 이제는 1명 채용에 1명 지원한 게 아니라 2명 채용에 2명 지원한 거니까 특혜가 아니라는 놈들까지 나온 판이지. 하지만 우리는 힉팔이나 힉진이를 부러워해서는 안되듯이 성공 사례를 볼 때 "그것이 지속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만일 여러분들이 전라도 조폭들처럼 필리핀에서 교포들 상대로 통수를 치고 다닌다면 처음 2~3년은 떼돈을 만질 것이다. 기고만장해져서 '역시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승리 패턴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아마 두테르테의 명령을 받은 경찰에게 잡혀 사형선고를 받을 수도 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이 죄짓고 살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죄를 지을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다가 빠른 시일내로 좃된 새키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성공 가능성이 아주 낮은 것이다.


니시모토가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가며 발견해낸 승리 패턴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계속 두자릿수 승리를 기록했으며 에가와와 니시모토의 원투펀치는 요미우리의 쌍두마차로 자리매김했다. 그 다음 시즌에는 다소 피로가 누적되어 두자릿수 승리는 기록하지 못했으나 86년에는 7승, 87년에는 8승 등 쏠쏠한 활약을 해주었다. 이 시기는 또한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 쿠와타 마스미로 이루어진 차세대 마운드진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이제는 고참 투수가 된 니시모토는 신인 유망주들이 성장하는 동안 팀을 굳건히 지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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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자타가 공인하는 요미우리의 에이스 니시모토



그런데 1987년을 끝으로 부상이 심해진 에가와가 은퇴를 선택했다. 니시모토는 에가와의 은퇴가 자신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니시모토의 지금까지의 프로야구 인생은 오로지 '천재 에가와에게 지지 않겠다'는 일념에 바탕한 것이었다. 흙수저에 지잡대 출신이 서울대-아이비리그 유학생에게 지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로 자신을 갈고 닦아 대기업의 에이스로 성장한 것이다. 물론 에가와는 니시모토에게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선의의 라이벌이었다. '저놈은 워낙 타고난 놈이니까 앞으로도 잘 나가겠지? 그러니 나도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말하면 '너는 나보다 잘 나가야 해. 내가 말 안해도 당연히 잘 나갈 거고'라는 우정이 전제로 깔린 것이다. 그런 라이벌을 찾아내는 것도 인생에서 성공하는 조건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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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절차탁마하던 에가와(왼쪽)와 니시모토(오른쪽).


에가와가 은퇴하고 나니 니시모토는 스스로를 갈고 닦으려는 마음의 목표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급격한 의욕 저하에 니시모토의 컨디션은 빠르게 쇠퇴했다. 1988년 4승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요미우리는 결국 니시모토를 방출했다. 


사람들은 1956년생인 니시모토가 퇴물이 되었다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니시모토를 영입하겠다고 나선 팀이 있었다. 호시노 센이치가 이끄는 주니치 드래곤즈였다. 호시노는 자신의 타자들 상대로 무수한 땅볼을 유도해내던 니시모토 때문에 (병살타가 삼진보다 더 복창 터지니까) 많은 마음의 고통을 받았다. 그는 니시모토의 피칭 기술을 늘 높이 평가해왔다. 니시모토가 요미우리에서 방출되자 주니치가 재빨리 그를 헤드헌팅한 것이다.


투장(鬪將) 호시노는 니시모토의 마음 속에 잠들어있던 투쟁본능을 다시 일깨워냈다. "언제까지 요미우리의 야구를 하려는가!? 주니치는 새로운 땅이다. 여기서 너의 나라를 만들어봐라! 센트럴리그의 강타자들 상대로 정면승부를 하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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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출신 감독인 호시노는 현역 시절 타자들과의 승부를 즐겼다. 자신의 선수들에게도 공격적인 야구를 원했다.



그리고 니시모토는 다시 일어섰다. 기술적으로 새로워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를 지금의 위치에 있게 해준 일등공신 슈트볼은 전체 볼배합의 약 50%를 차지할 정도로 계속 던졌다. 이것은 노웅(老雄)의 자존심이었다. "쳐볼 수 있으면 한번 쳐봐!" 1989년, 니시모토는 리그 최다 피안타와 피홈런을 기록했지만... 20승을 기록하면서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것이 자신의 승리패턴에 노련함을 더하고,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무장한 노웅의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은 '늙으면 공부가 안돼'라고 말한다. 물론 젊은이들이 육체적으로는 더 뛰어나다. 하지만 자신의 승리패턴이 있는 사람은 당황하지 않는다. '나는 엄청난 고생을 해가며 이 패턴을 발견했다. 수없이 나 자신을 갈고 닦았다. 젊은 패기로 이걸 이겨볼 수 있다면 어디 이겨보게!'는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강하고 끈질기다. 니시모토 또한 자신이 갈고닦은 땅볼 유도에 대한 굳은 자신감을 갖고 젊을 때 보다 더 과감하게 승부했다. 결과는 최다 피안타와 피홈런, 그리고 20승이었다. 





제2의 인생

니시모토는 1990년 두자릿수 승리(11승)을 올리며 준수한 활약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니시모토의 마지막 활약이었다. 90년 시즌 종료 후 허리 디스크 문제가 심해진 그는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이 쉽게 되지 않았다. 93년까지 부상 후유증으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은퇴를 선택했다. 타격투수로 입단한 선수는 18년의 커리어를 통해 165승 128패 17세이브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쌓아올렸다.


그 후 니시모토는 방송해설자 등으로 활동하다가 2003년, 당시 한신타이거즈의 감독을 맡은 호시노 감독의 요청에 따라 1군 투수코치로서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되었다. 그리고 한신타이거즈는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니시모토의 선수 육성 기술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사카의 악명높은 한신빠 기레기들과 맨날 싸우면서 고혈압을 얻은) 호시노 감독이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니시모토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10년에는 치바롯데 마린즈가 니시모토를 투수코치로서 영입했다. 2010년 치바롯데는 리그 우승은 놓쳤으나(리그 3위)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돌파하고 저팬시리즈까지 제패하면서 '하극상의 롯데' 전설을 썼다. 게다가 한일클럽챔피언쉽 대결에서는 한국시리즈 우승팀 SK와이번즈로 무찔렀다. 이 기적의 주역으로 지목되던 인물은 포수로서 기발한 리드를 보여준 사토자키 토모야, 그리고 두터운 투수진을 육성한 니시모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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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록 보소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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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에 점 있고 느끼한 표정이 인상적인 이 사람이 200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수비형 포수 사토자키 토모야.

(이 당시의 공격형 포수는 아베 신노스케)



기아 타이거즈에서 뛴 적도 있는 세스 그라이싱어는 치바롯데 마린즈에서 퇴물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니시모토의 지도를 받고 다시 두자릿수 승리투수로 부활했다. 그라이싱어는 니시모토 덕분이라고 코치에게 공을 돌렸으며 2012년 퍼시픽리그 신인왕 마스다 나오야도 니시모토 덕분에 신인왕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즉, 고생을 많이 하면서 성장한 투수 출신답게 가르치는 능력도 ㅆㅅㅌㅊ였다.


니시모토의 수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2012년을 끝으로 치바롯데는 니시모토와의 계약을 끝냈다. 그러자 이번엔 오릭스 버팔로즈가 재빨리 니시모토를 모셔왔다. 2012년 팀 방어율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던 오릭스는 2013년 팀 방어율이 리그 1위에 등극하는 기적을 이룩했다. (그러나 한번 빠따가 식으면 진짜로 확 식어버리는 역방향 신바람야구 때문에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2014년까지 오릭스에서 활동하던 니시모토는 2015년 한화 이글즈 투수코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김성근과 많은 시각차이를 보이고 결국 1년만에 물러났다. 현재는 계속 야구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니시모토가 물러나면서 김성근의 원맨쇼는 이제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메이저리거 알렉시 오간도가 온다고 한화가 얼마나 달라질지는 아무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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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요약 대신 에이스가 되는 방법 정리한다.


1. 누구나 하는 노력의 단계: 이건 기초 중의 기초다. 이것도 안하면서 헤ㄹ조선이네 흙수저네 해봐야 소용없음. 그리고 딱 이 정도만 하고 넘사벽이네 뭐네 해봐야 역시 무의미함.


2. 차별화의 단계: 자기만의 무기 찾기. 새로운 스펙을 쌓으려고 하지말고 단점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장점으로 만드는 길을 찾는 게 더 효율이 좋음. 그런데 무기를 살릴려면 기초도 계속 갈고닦아야 한다. 그래야 결정적일 때 무기가 빛나니까.


3. 도전의 단계: 강자들이 나타날 떄마다 겁먹고 움츠러드는 게 아니라 '내가 이 무기를 갖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한테 질 수 없다'는 각오를 갖고 도전하기. 고생은 좀 하겠지만 무기가 더욱 강력해지고 승리패턴을 발견하게 됨.


4. 원숙함의 단계: 노련함과 자신감을 가지고 일밍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