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분분한 듯하나, 한국측 해석은 '대승'으로 귀결되어 있어 조금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역사는 여타의 기록으로 비교 검증해 그 진실을 찾는 것이 올바른 자세다. 그래야 그 역사에서 교훈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반추하여 올곧은 행로를 내딛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곡되고 과장된 교육은 日本이나 한국 다 마찬가지로 후학들을
협량하게 만들어 관점의 협소함만을 체득시켜줄 따름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인정하고 싶은 것만 가르치려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찬가지다.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도 이 점 주의할 일이다.
노량해전의 목표는 이순신 장군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여 섬멸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고니시가 가지는 상징성으로 미루어보건대
조명 수군은 전쟁의 종결에서 하나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었을 게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시마즈가 이끄는 사쓰마군이 진군해 온다. 이때 시마즈의 병력 7천 다치바나 무네시게 병력 5천. 소 요시토시 1천에다 병참과
운송을 담당했던 데라자와 히로타카의 병력 1천이 합세했다. 함선 3백척 추정. 주력은 시마즈 군이었다.
그리고 양측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자네가 올린 전과 기록은 당시 조선측의 기록이다. 일본측은 이 해전에 대한 기록을 <일향기>
<정한록> <일본전사 조선역>에 기재되어 있으나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시마즈 가문의 정한록에는 무사 26명(이름 기재)과 전사자
다수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 잡병인 아시가루나 격군이 포함되어 있을 게다.
이 해전의 목표를 조명수군은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시마즈군은 고니시 부대의 600척의 무사 퇴각을 달성했다. 주요한 지휘관이 사망한 경우는 이순신, 등자룡을 포함한 조명수군이었고 일본측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을 내려야 하는가. 단순히 열세이나 승리라고 보아야 하나?
객관적 정황을 살피고 비교해 해석하는 것이 역사를 읽는 자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