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없이 쓴 글이 일베가서 좀 놀랬다

[정보/칼럼] 늘어나는 후진국의 인구 딜레마와 구명보트 윤리: 프롤로그: http://www.ilbe.com/1410964384


역시나 멜서스 인구론 거들먹 거리면서 실패한 이론 나올줄 알았다.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속담에 꺼진불도 다시 보자고 했다.


멜서스 인구론에 따르면


첫 번째 전제는 인간이 생산하는 생계 수단인 식량은 산술급수적 성장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식량은 동일한 시간안에 동일한 양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백분율로 계산하면 시간당 증가율이 감소함을 의미한다. 

두 번째 전제는 이에 비해 인구는 기하급수적 성장 법칙을 따른 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자 계산 방법인 복리처럼 같은 시간 내, 같은 성장률이라 할지라도 기본이 되는 인구수가 달라지기 때문에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한다. 

세 번째 전제는 노동자 계층이나 하위 계층 사람들 대다수는 물질적인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출산율을 높인다는 것이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면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식량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인구수가 식량의 양을 초과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라고 하는데 짤 하나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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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래프에서 식량곡선과 인구곡선이 교차점을 지나게 되면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면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식량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인구수가 식량의 양을 초과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인류 삶의 질은 다시 하락되게 된다. 즉 최소한의 생존 수준 (Subsistence) 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글 시작하기전에 한가지 가정을 하겠다 - 아주 중요하다 
지구를 인간에 비유하자, 지구가 인간처럼 아프고 면역이라는게 있고 몸 스스로 병균과 싸우듯 지구도 그런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많은 게이들 논리를 보아하니 멜서스 인구론


"그러나 산업혁명 이래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맬서스의 예측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왔다. 식량생산이나 인구 모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으며, 1인당 소득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서구 선진국 사회는 식량의 걱정 없이 성욕을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맬서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삼은 고전경제학은 자본주의 미래에 대하여 무엇 하나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가장 빈번히 나오는 지적 사항은 맬서스를 비롯한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기술진보의 위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래 인류의 기술진보는 눈부시도록 빠르게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줄요약: 기술발전율이 인구 증가율을 상쇄하기 때문에 인류는 걱정없이 인구를 늘려왔다고.


자 이게 약 200년전 얘기다. 지금 문맥에 한번 따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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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F라고 경제학에서는 Technology(기술)라고 생각한다

Durable goods는 내구재 = 내구재는 오래도록 쓸 수 있는 재화 (cars, buildings, TVs, machinery)

Nondurable goods는 맥주와 샴푸와 같이 보통 한 번 또는 몇 번 사용함으로써 소비되는 유형재


위 그래프 보다시피 자동차나 아이폰 그런것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발전하는건 맞다,

근데 비내구재의 기술력은 거의 정체수준이다 TFP 전체수준만 봐도 스태그 네이션 수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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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경제학 포스팅을 읽어보니 비내구재 재화 측정이 어려워서 스태그라는데 다른 말로는 인터넷이나 정보통신 발달 수준이 발달되면 발달될수록 

아이폰이나 티비같은 내구재 같은 기술력 발전에서 큰 차이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리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사실 90년대 인터넷과 비교해서 지금의 인터넷이 나는 그렇게 막 영화 소설에 나올만큼 발달 안했다고 생각은 한다만..


일단 그래프에서 나온것 처럼 기술력이 정체되었다고 생각하자.


기술력은 정체가 되어간다.


근데 인구 증가는 꾸준히 증가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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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멜서스가 말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면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식량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인구수가 식량의 양을 초과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지점을 우리는 이미 지났거나 지나가고 있는중이다. 사실 빌게이츠도 생각보다 지금 기술 발전율이 너무 느리다는 인터뷰를 했었는데

기사를 못찾겠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앞서 게이들이 말한대로 기술 증가와 수명연장으로 인구 상승률이 떨어지는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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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증가율이 떨어지는데 그럼 다행이냐고 생각할 애들 있나 모르겠는데 지금

살아있는 인간만 70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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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절대다수는 후진국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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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더불어서 지구온난화 환경오염 문제마저도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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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메인이다 얼마전에는 토네이도 때문에 아주 쑥대밭이 되었지?


실제로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다. 뭐 지구 온난화 음모론이니 뭐니 그 얘기는 여기서 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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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해 동안 기상이변과 기후변화 때문에 말들도 많고 실제로 곡물 가격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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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뭐 현 상황에 대한 설명은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고.


앞서 내가 가정한 것 중에 지구를 인간으로 보자고 했다.


이제 좀 감이 잡히나? 만약에 인간이 병균 Parasite와 같은 존재라면 인간의 몸은 어떻게 반응할까? 면역이 병균과 싸우겠지?

면역=자연재해, 기후변화


어쨌거나 지구는 스스로 자정을 하려고 할것이다.


선진국들은 인프라가 갖춰져 있기 때문에 자연재해가 와도 충분히 복구가 가능하다 


허나 후진국들은? 



이런 상황에서 외부 변화와 위기에 완벽히 노출 되어 있다는거다.


즉 간단히 정리하자면 절대다수의 후진국 빈곤층은 자연재해와 식량 위기에 100% 영향 받는다. 즉 이런애들은 원래 썰리고 썰리는게


자연의 이치이고 Ecology 생태계 (몸)이 하는 일이다.


여기서 하딩의 공유지의 비극과 구명보트 윤리가 나온다.


구명보트 윤리: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반하는 경우


세계의 3분의 2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고 있고, 나머지 3분의 1인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미국이 가장 부유하다. 부자나라 각각을 상대적으로 부자인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는 구명보트로 볼 수 있다. 바다에 빠진 보트 밖 가난한 나라 국민들은 헤엄을 치고 있는데, 누가 보트를 태워주기를 원할까? 아니면 적어도 누가 부를 기꺼이 나누려고 할까? 도대체 구명보트의 승객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선 구명보트의 제한된 수용용량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국가의 토지는 특정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제한된 수용용량이 있고, 지금의 에너지 위기가 보여주듯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는 토지의 수용용량을 이미 초과했다. 


도덕의 바다에서 표류하기


우리는 50명이 타고 있는 구명보트에 앉아있다. 60명이 수용인원이어서, 10명이 더 탈 공간이 있다. 우리는 구명보트 밖에서 제발 보트를 타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100명의 사람들이 헤엄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형제”라는 기독교적 이상이나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라는 막시스트의 이상과 같은 몇몇 판단 기준이 존재한다. 그러나 물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필요’라는 것이 승선이고, 그들 모두를 ‘우리 형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두를 구조하면 60명 수용인원에 150명이 타기 때문에 보트는 가라앉고 만다. 
현실적으로 10명을 태운다고 할 때 그 선택은 어떻게 할 것이며, 여분의 공간을 남겨두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안전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어, 한 나라의 농업 분야에서 초과수용의 여유를 안전율로 남겨두지 않는다면, 농작물의 병충해나 날씨의 악화는 비참한 결과들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가 안전성을 고려해 한 사람도 태우지 않기로 한다면 생존은 가능하지만 배를 타려는 사람들을 막아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라면 도덕적으로는 견디기 힘들다. 나의 대답은 간단한데, “보트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다.” 이것은 양심적 가책을 덜 수는 있지만 구명보트의 윤리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죄책감을 느낀 사람으로부터 자리를 양보 받은 가난한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올라타지 조차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잉인구와 기근문제에 대해 우리가 풀어야만 할 문제이다. 구명보트의 가혹한 윤리는 우리가 부국과 빈국의 생산능력 차이를 고려하면 더욱 가혹해진다.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부국 사람들의 인구가 2배로 증가하는데 소요되는 시간 87년, 보트 밖에서 헤엄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인구가 2배로 증가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35년이다. 자연자원의 고갈이 점점 더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빈국과 부국의 번영의 차이는 점점 더 증가할 것이다.  

부자와 빈자의 증가


미국이 다른 7개 국가(콜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모로코, 파키스탄, 태국, 필리핀)와 자원을 같은 비율로 공유한다고 가정하자. 미국인들과 미국인이 아닌 나라의 인구 비율이 1:1이라고 가정하자. 현재 2억1천만인 미국 인구는 87년 뒤에 2배가 늘어 4억2천만이 되는데, 나머지 국가는 21년마다 배가되어 미국인구가 2배가 될 때 35억4천만으로 증가한다. 미국인 한사람은 8명이상의 사람들과 가용자원을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각자가 “필요량만큼” 이용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수요량은 인구규모, 인구증가율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결국, 우주선 윤리 관점에서 보면 나눔으로 인한 박애주의적 부담은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공유지의 비극


우주선 윤리의 근본적인 오류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연결된다는데 있다. 사유재산권 체제하에서 개인은 소유한 재산을 잘 관리해야할 책임이 있는데, 그렇지 않았을 경우 그 부담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오기 때문이다. 농부는 목초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소를 사육하지 않는데, 만약에 소가 너무 많으면 토양침식, 목초지 훼손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목초지가 공유지로 개방되어 있다면, 이용권한과 관리책임의 불일치가 발생한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정수준에서 이용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모든 사람이 적절한 절제와 통제에 기반을 두어 이용할 경우 문제가 없지만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의 욕구를 주장할 경우 자발적인 통제 시스템은 쉽게 무너진다. 즉 복잡한 세계에서 완벽한 인간들로 이뤄지지 않은 경우 통제가 없으면 파괴는 불가피한데 이를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한다. 오늘날 교육의 중요 기능의 하나는 공유지의 비극의 가능성과 위험에 대한 인식제고에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물과 공기는 공유재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오염되었다. 인구증가와 일인당 배출해내는 오염물질의 증가는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공유재에 대한 책임있는 통제시스템을 갖추는 것만이 우리의 땅, 대기, 물, 수자원을 지킬 수 있다. 

세계식량은행


최근 일종의 식량예치제도인 세계식량은행 창설 요구가 증가했다. 세계식량은행은 강력한 인도주의적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나 설립을 결정하기 전에 이러한 정치적 압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평화를 위한 식량 프로그램’, 미국 공공법 480이 답을 갖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지난 20여 년간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잉여식량을 식량이 부족하고, 인구가 많은 국가에 투자해왔다. 그러나 P.L.480이 법제화 되었을 때, 비즈니스잡지 포브스의 헤드라인(수백만의 기아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지원: 이것이 미국 산업계에 어떻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은 이 법의 통과 이면에 미국산업체의 이익 실현과 관련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1960-1970년 동안 미국 세금납세자들은 총 79억불을 평화식량프로그램에 지출했다. 1948-1970년 사이에는 경제원조 형태로 500억불을 지불했는데, 이것은 결국 곡물기업과 농업기계기업에 흘러들어갔다. 정부가 식량을 시장가격에 매입해서 원조하기 때문에 곡물수요 증가는 곡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식량을 더 생산해내기 위해서 농기계 업체, 비료회사, 농약회사는 이윤을 획득했고, 물론 철도, 항만, 해운, 저장업체도 호황을 누렸다. 평화식량프로그램은 초기의도와 무관하게 거대한 관료조직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달러추출


평화식량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지지한 사람들은 이런 특정 이익의 중요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늘 인도주의적 지원의 타당성과 효과에 대해서만 강조한다. 침묵하는 이기적인 이익과 여론을 주도하는 인도주의적 속죄가 결합해서 미국의 납세자들로부터 성공적으로 돈을 징수하고 있다. 세계식량은행의 설립도 비슷한 로비방식을 거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잠재적인 이기적인 이익추구의 폐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장점을 더 많이 가진 진정한 인도주의적 프로그램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식량은행을 제안한 사람들은 세계식량공급을 “긴급”이나 “위기”라고 언급을 한다. 그런데 무엇이 “비상상태”인가?

고생으로부터 배운 경험 
예상치 못한 긴급 상황은 대비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위기상황을 잘 극복하는 국가도 있고, 그렇지 못한 국가도 있다. 위기로부터 교훈을 얻는 국가들은 제도를 수정하고, 특정 위험에 대비해 예산을 마련한다. 요셉은 2000년 전에 이미 이집트의 파라오 왕에게 생산량이 줄어들 때를 대비해 식량을 비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지구상의 수많은 정부가 아직도 이 정책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식량은행을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있어서, 빈국은 위급한 상황이면 늘 도움을 청하고, 요셉이 제시한 방식을 따를 동기를 갖지 못한다. 결국 가난한 나라는 식량 위기라는 위급 상황에 대해 경험을 배우지 못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더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인구조절- 거친 길


가난한 나라의 평균인구 증가율은 매년 2.5%이지만 부국은 0.8%이다. 부국은 식량비축을 하지만 빈국은 오히려 대비책이 없다. 빈국이 외부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지 못한다면 인구 증가율은 점차적으로 작황실패나 기근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다. 만약에 필요할 때마다 세계은행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을 수 있다면 인구도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결국 세계식량은행은 단기적으로 식량에 대한 수요를 줄일 수 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수요를 끊임없이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전지구적 식량 공유시스템이 없을 경우 빈국과 부국의 인구 비율은 안정화될 것이다. 인구과잉상태를 보이고 있는 빈국의 인구는 감소하고, 여유가 있는 부국의 인구수는 증가한다. 그러나 세계식량은행과 같은 체계적인 식량공유시스템이 존재한다면 빈국과 부국의 인구 증가율 차이는 커질 것이다. 신생아의 88%는 빈국에서 나머지 12%는 부국에서 출생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비율은 더 악화될 것이다. 
세계식량은행은 위장한 공유지이다. 사람들은 공유재인 세계식량은행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동기를 갖고 있다. 국제적인 원조정책은 때론 수혜국에게 환영을 받기 보다는 불신과 적대감을 조장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 생선과 기적의 쌀


현대사회의 외국지원 방식은 돈과 식량을 직접지원하기 보다는 기술과 정책자문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속담에 “한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면 하루 식량이 되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록펠러와 포드 재단은 빈곤국가에서 농업기술 향샹을 위한 프로그램에 재정 지원을 했고, 기적적인 곡물 생산 증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좋은 의도로 출발한 인도주의적 노력에 있어서 우선 근본적인 인간생태를 고려해야 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20년 전 록펠러재단의 부이사장은 식량생산 증진방식에 대한 회의를 표현했다. 그는 지구에서 증가하는 인구의 수를 우리 몸에 암세포의 성장에 비유하면서, “암적인 인구성장은 식량을 필요로 한다 : 그러나 식량이 충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환경 과부하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환경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식량, 공기, 물, 산림, 해변, 조경, 황야 등. 만약에 우리가 증가하는 인구에 필요한 식량공급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자원의 일인당 공급량을 줄여야 한다. 
인도의 인구는 총 6억으로, 매년 1천5백만 명씩 증가하는 인구로 인해 환경과 자원에 부담을 주고 있다. 인도의 산림면적은 3백 년 전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외부의 의료 및 식량 지원을 통해 유지되는 인도의 경우 궁극적으로 현재와 미래세대의 삶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  
공유지에 대한 마지막 사례는 미국 내에서 이민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을 회피하는 것이다. 누구든 현재 미국의 이민정책에 대해 질문하면 즉석에서 완고, 편견, 자기민족중심주의, 배타주의, 고립주의,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런 비난에 앞서 현재의 이민정책은 전체적인 선이나 미래세대의 이익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특정이익에 얽매어 대립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예전에 했던 일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주요 언론과 연구논문은 과거 외국인을 열등유전자 집단으로 여김으로써 외국인을 그들을 배척하는 근거로 활용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그런 잘못된 개념에 의해 지금의 배타적인 정책이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이유들도 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정부는 연간 40만 명을 순이민 인구로 추정한다. 불법이민을 포함할 경우 60만 명이 된다. 자연증감율(사망인구를 초과하는 출생인구)은 170만 명 선이다. 이민자는 자연인구증감율의 19(합법)~37(불법포함)%를 차지한다. 정부의 출산억제정책, 인플레이션과 주택부족, 미국여성의 출산율이 감소하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인구증가에서 이민이 차지하는 부분이 커질 것이다. 

이민 vs. 식량공급


세계식량은행은 사람들에게 식량을 가져다주면서 가난한 나라의 환경고갈을 촉진한다. 반면에 통제되지 않은 이민은 사람을 식량이 풍부한 지역으로 이동시키면서 부국의 환경악화를 가속화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민을 선호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만 부유한 이민대상국에서는 왜 이것을 활성화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기적인 관점에서 열악한 작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받기 때문이다.
반면, 하와이 지식인들은 환경, 인구수용력을 고려하여 다른 49개주로부터 인구유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친구, 친척들이 하와이로 이주하는 것에 대한 폐쇄정책에 대해 논쟁이 시작되었다. 찬성하는 이들은 하와이의 생태적 한계에 대한 미래세대의 권한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 측은 우리 모두가 이민자인데 어떻게 이민을 반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정의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인디언원주민을 제외한 시민은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강탈한 죄인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미국인이 향유하고 있는 부의 원천은 인디언 소유의 자원으로부터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인디언들에게 토지를 돌려줘야 할까?

순수정의 vs. 현실


순수정의라는 개념은 불합리성으로의 무한 회귀를 유발한다. 수세기전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속적인 무질서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이러한 순수정의에 대한 거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제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률은 재산권 보호에 그것도 상대적으로 최근의 재산권에 한해 중점을 두었다. 
우리는 사실상 모두가 도둑들의 후손이며, 지구상의 자원은 불평등하게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내일을 위한 여정을 우리가 서있는 현재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의 생산력이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부를 똑같이 나눌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하면 우리의 손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손자들은 엄청나게 파괴된 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공동의 시스템을 만드는 세계식량은행이나 이미규제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환경파괴로부터 세계의 일정부분이라도 지키고 싶다면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인구증가와 이용가능한 자원의 사용을 제어할 수 있는 진정한 세계정부 없이는 우주선의 공유윤리는 불가능하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생존은 가혹하긴 하지만 구명보트의 윤리에 의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손들은 부족함이 없이 만족할 것이다. 


http://blog.naver.com/whalewatch/150077636590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빈국을 돕는건 밑바진 독에 물을 붓는것과 같기 때문에 차라리 살수 있는 사람이라도 윤택하게 살자라는 논리다.


자 이게 지금 닥친 현실이다.


니 밥 굶고 남 도와줄래? 그 남들은 그렇게 고마워 하지도 않는다


아 그럼 모두가 고기 먹지말고 그럼 옥수수 먹으면 되겠네요. 과연 인간이 그렇게 이타적이고 사마리안 같은 존재인가?

인간은 동물의 연장선상이다. 지극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이 시간에도 인구는 계속 늘어난다. 인류의 희소성 인간의 가치는 계속 떨어져 간다.

막말로 어느새 중국인이나 인도인 하나 죽는건 바퀴벌레 죽는것보다 더 못한 세상이다.


인간성이 상실되어간다. 앞으로 남은건 선택이다. 희소성 회복으로 인간성을 살리느냐 아님 지구의 병균으로써 살아갈텐가?


선진국은 인구가 줄어들고 있고 지켜야 할 부는 많다. vs. 후진국은 그걸 빼앗아 오고 싶다.


신자유주의 아래 세계화가 다수의 인구를 윤택하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중국인 Marginal Product of Labor 그러니까 쉬운말로 중국인 하나가 생산할수 있는재화양이 다른 서구나 외국 근로자에 비해서 상당히 낮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중국인 노동자가 생산하는 재화량은 다른 외국 노동자 생산량보다 낮고 생산성이 떨어지는데 그 재화를 생산하기 위한 자원양은 같다 고로 Diminishing Returns to Scale 즉 돌아오는 이익의 양이 적다.

케인지언 이론에서 유효수효 이론이 나올텐데. 근데 중국인이 소비하는 재화의 양은 제한되어있다 무작정 생산도 못함. 그러니 생산량 생산성 둘다 ㅎㅌㅊ다

결국엔 선진국에서는 일자리 공동화 되고 중국애들은 별로 벌지도 못하는 막장 같은 경제가 지금경제다.


선진국은 그래서 머리를 쓰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이민 문제와 신세계 질서가 연결되는지는 다음글에 쓴다.


3줄요약:

기술발전 정체

인구 폭증

이대로 가면 좆망


[출처] [서평] 가렛 하딩의 구명보트 윤리 |작성자 고래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