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비가 생긴 이유는 일단은 유복이라는 사람부터 알아야 하는데
유복은 조조의 부하이며 200년에 여강지역이 초토화 되었는데 이는 매건(매성), 뇌서, 진란이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원소와 싸우고 있었고(관도대전 시기) 여력이 없어 양주자사로 유복을 파견하였다.

(합비 건설을 지휘하는 유복)
유복은 홀로 빈 성으로 가 학교를 세우고 관소를 세웠으며 매성, 뇌서, 진란을 위로했는데 감복한 나머지 이들이 스스로 공물을 보냈고 결국에는 귀순(!)까지 하게 되었다.
합비 근처에 제방을 쌓고 둔전을 하여 나날이 발전하여 백성들은 농사가 잘되고 재물을 쌓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합비가 발전되려는 중에 208년 유복은 사망했고 결국 매성, 뇌서, 진란이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장료, 우금, 장패, 장합을 보내 이들의 목을 베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합비를 보호한 장제 자통)
1차 합비 공방전
- 208년 12월 손권은 여강 구강군의 합비를 공격 준비를 했다.
손권은 합비를 공략하는데 한 달 이상, 혹은 100일 이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결국 함락하지 못했다.
당시 장제가 합비를 지키고 있었는데 조조는 손권의 침공 소식을 듣고 장희에게 군사 1,000명을 보내 합비 수호를 명령하였다.
장제는 아군의 합류 소식을 듣고는 "4만명의 아군이 오니 얼른 맞이하라"고 부하들에게 거짓 명령서를 보냈는데
중간에 가로챈 손권군이 이 내용을 믿고 확인하지도 않고 철수하였다.
2차 합비 공방전, 카운터 등장
- 215년 익양 대치(장사군 익양현)에서 손권은 3군을 얻었고 어느정도 정리가 되어 합비로 향했다.
10만 군대를 끌고 온 손권에게 장료, 악진, 이전, 설제는 7,000명의 병력으로 합비를 수호할 수 밖에 없었다.
호군 직책의 설제는 조조의 교서를 들고 와 읽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군 설제는 문관)
"장 장군, 이 장군은 나가서 싸우고, 악 장군은 성을 지키며 호군 설제는 싸우지 말라"
14배 넘는 적군과의 수적 싸움에서 나가 싸우라는 명령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료는 '적이 정비하기 전에 먼저 기세를 꺾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이를 장수들에게 설득하려 하나 악진, 이전은 미덥지 않았다.
악진은 장료를 항장 출신 장수로 보고 있었고, 이전은 이건 이라는 자신의 숙부가 여포군에게 죽었기 때문에 사이는 최악이었다.
장료 "여러분들이 의심한다면 나 혼자 나아가 적과 싸울 것이오."
이에 이전이 뉘우치고 말하길
이전 "이건 국가의 큰일이니 내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의를 잊을 수 없소. 같이 나가겠습니다."
다짐을 받은 장료는 800명의 결사대를 추려내 잔치를 베풀고 든든히 먹여 준비를 마쳤다.
그날 밤 손권의 대장기가 있는 본진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눈이 보이는 시야까지 왔고 손권은 당황하여 주변 언덕으로 도망갔고
장료는 욕을 하며 손권에게 도발하였으나 손권은 움직이지 못했다.
중간에 결사대 일부가 낙오하자 "장군은 우리를 버리십니까!?" 라는 말을 듣고 급히 돌아가 모두 구출(!!)시키며 돌아왔다.

(합비를 지키는 안문의 장문원)
소요진 전투
장료의 기세로 손권은 합비를 함락도 못하고 10일 후 풍토병이 돌기 시작해 손권은 회군을 명했다.
이상하게 손권은 본군은 다 퇴각시키고 최후방 후위까지 1,000명이 남아 있었는데 이때 장료가 기습을 또 해왔다.
여몽, 서성, 장흠, 진무, 송겸은 적과 싸우고 능통은 손권을 보호하였으며 손권은 활을 쏘면서 직접 싸우며 도망갔다.
이 과정에서 진무는 전사하고 서성은 상처를 입고 창을 잃어 버린 걸 하제가 찾아왔으며 능통도 상처를 많이 입게 되었다.
장료는 이렇게 이름을 남기고 222년 병이 깊어져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하드 카운터 등장
위는 합비에 만총을 보내 오나라 방어선을 유지하였다.
- 229년 봄에 손권은 합비 침공 시도를 했으나 싸우지 못하고 그냥 물러나게 되었다.
- 230년 겨울이 되어 손권이 합비 공격을 널리 알렸고 만총은 표문을 올려 연주, 예주 군대 소집을 요청했다.
합비에 도착한 손권은 빠르게 물러났는데 만총은 거짓으로 물러나 우리의 구원병 (연주, 예주군)을 멈추게 한 후 재차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 파악하고 구원병을 멈추지 말고 보내달라 표문을 올렸다.
10여일이 지나 손권은 합비에 다시 왔는데 생각만큼 되지 않자 공략을 못하고 돌아갔다.

(합비신성의 수호자 만총 백녕)
- 231년 손권은 장수 손포를 보내 위군에 항복을 청했는데 왕릉은 이 항복을 받아들였고 만총은 반대했다.
당시 만총은 수도에 부름을 받았는데 왕릉에게 병사를 주지 않은 것을 부하에게 명령했다.
결국 왕릉은 병사를 얻지 못해 700명으로 맞이 했는데 거짓항복한 손포의 기습으로 병사의 절반이 죽었다.
명제 조예는 만총을 마주하면서 적임자라 확실히 여겼고 다시 임지인 합비로 보냈다.
- 232년 육손이 여강을 공격하자(이 당시 여강은 위, 오 반으로 나뉜 국경지대) 논의하는 제장들은 구원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만총은 유인이라 생각했고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양구에서 견제했고 손권군은 물러났다.
- 233년 만총은 상소를 올렸다.
합비는 늘 포위 당하기 좋은 곳이어서 기존 성을 부수고 30리 밖에 새로 성을 지어야 한다고 진언했으며
장제가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예는 만총의 진언을 받아들여 합비에는 새로이 신성을 건축하였다.
- 233년 손권이 신성을 포위하려 했는데 새로 지어진 신성이 물과 멀리 떨어져 있어 배를 띄워 공격을 못했다.
만총은 보병, 기병 6천을 매복시켰고 손권은 해안으로 올라와 기세를 과시했으나 갑자기 복병이 나타나
손권의 군대 수백명의 머리를 베었다. 물속으로 도망가다 죽은 사람도 있었다.
- 234년 5월 손권은 육손과 제갈근을 강하, 면구에 보냈으며 손소와 장승은 광릉, 회양으로 보냈다.
손권 자신은 10만 대군을 인솔해 합비 신성을 포위했다.
만총은 수십명의 힘 센 사람을 모아 소나무를 베고 기름을 모아서 바람 방향에 맞춰 화공을 사용하였다.
병장기가 활활 타오르고 화살을 쏴 손권의 조카 손태를 죽였다.
결국 손권은 군을 물려 물러나게 되었다.
- 234년 손권은 촉과의 약속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 다시 합비 신성으로 향했는데 주연과 전종을 선봉으로 세웠다.
그러나 병사들이 질병에 걸려 공격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 235년 봄에 손권은 강북으로 병사를 파견해 밭농사를 하게 했는데
8월에 되어 수확철이 되자 만총은 수확할 시기에 멀리 흩어질 시기를 느껴 습격을 예상했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군대를 파견해 적을 격파하고 곡물을 불태워 돌아왔다.
- 238년 만총은 노령으로 소환되어 태위로 승진하였다.
- 242년 만총은 세상을 떠났다. 만총의 가족은 대대로 아들, 손자가 8척이 되는 거한이었다. (1척당 23cm로 계산하면 184cm 정도)
손권은 만총이 있는 동안 합비에 8번 시도해 8번 다 패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