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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입구라는 유명한 이론을 주장한 사람이자, 이로인해 한국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의 원흉이라는 비난까지 받는 사람이다. 일본에서는 1만엔권의 표지모델이기도 하며, 이토히로부미가 화폐모델에서 퇴출됬을때도, 그는 아직도 한자리를 꿰차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그냥 후쿠자와 유키치이다.(여기서는 선생님을 센세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유키치를 부르는 말이므로 못알아듣는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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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엔.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급 표지모델.



이미 일본에서는 일뽕맞은 일본제국주의시대의 이토히로부미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생각되는 사람인 것이다. 이는 그가 단순한 인물이 아닌 점을 알 수 있다.  


유키치는 조선시대 개화파들의 실질적인 스승이었으며, 조선에 영향을 크게 끼친 인물이다. 그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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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1835년 1월 10일 ~ 1901년 2월 3일)



어린시절



그는 1835년 오사카지방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하급무사였는데, 조선으로 따지면 중인정도 되는 계급이었다. 


이떄 일본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의 막부정권이 들어선다. 일명 에도막부인데, 이 막부체제는 일본에서 최초의 중앙집권적 정부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만큼 일본의 전국통일 및 중앙집권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는데, 이것은 조선의 영향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성리학, 특히 경상도 지방의 이황의성리학이 일본에 약탈되면서, 일본에 조선의성리학적 신분체제가 흡수되고, 에도막부정부는 이 성리학을 이용한다. 이황의 성리학이란 조선의 신분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그런 일파였기 때문에, 체제안정에 있어서는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조선왕조처럼 갈 수 있는 것이었다.(도적적이고 철학적인 면을 강조).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사농공상의 신분체계가 잡히고, 250년간 이것이 일본을 지배한다.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통신사에 열광했던 이유도 사실은 에도막부가 조선의 성리학을 이용해서 일본을 통치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지배계급인 사무라이들을 성리학적 윤리를 통해 제압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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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놈들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성리학까지 가져간다. 병신들이盧.



그러나 일본은 조선과 달랐다. 옛날부터 무사들이 지배하던 일본은 양반이라는 계급대신 무사계급이 그 윗자리를 차지하였고, 일본은 애초부터 해양세력이었기 때문에 상업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이미 동남아까지 내려가 일본인들은 마을을 형성하고 무역을 하던 족속들이었다. 


일본이 통일이 되면서 몇백년간 국정운영이 안정이 되자 상인들이 미친듯이 힘을 늘려가기 시작한다. 이게 얼마나 엄청났는지 겐로쿠 호황이라고 불린다. 자세히 써주고 싶지만 생략한다. 한가지만 쓰자면, 당시에 천황이 개병신새끼(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지극해 자신의 호위무사가 모기를 죽였다는 이유로 그를 유배보냄. 이토 아와지노카미사건.)라서 국가 재정이 파탄날지경이었는데, 이걸 상인들에 메꿔준다. 특히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들의 월급을 이 상인들이 줌으로써, 신분체제가 살살 흔들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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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너무 사랑한 도쿠가와 츠나요시. 개를 위해 20만평 개집을 지어주고, 동물을 다치게 하면 사람을 벌을 줬다. 피를 빨던 모기를 죽인 자기 부하를 유배까지보낸다. 



후쿠자와 유키치로 돌아와서 그의 집안이 하급무사 출신이라 성리학을 꿈꾸던 아버지와 형이 죽자, 이 죳같은 일본의 신분쳬제하에선(조선이 수출한 자랑스런 사회제도이다. KIA~)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한문학이 아닌 기존의 신분체제를 부정하는 난학을 공부하고자 마음먹고 미친듯이 공부한다. 조선의 성리학의 영향때문에 일본의 신분체제 역시 매우 꽉꽉 막혀있었다. 무사계급과 일반계급이 쓰는 언어가 달랐으며(조선에서 한문과 한글을 따로 썼듯이), 심지어 아이들조차 신분계급에 따라 하고 노는 놀이가 달랐다. 그는 죽은 아버지와 형을 보면서 일본의 신분체제를 개혁하기로, 나아가 일본의 모든 사회체제를 바꾸기로 결심힌다. 역시 성리학은 답이 없다는걸 깨닫盧



서양을 공부하는 유키치


그가 공부하던 난학이란, 네덜란드학문으로서 당시 일본 에도막부는 조선처럼 쇄국정책을 펼쳤지만, 유일하게 무역을 하던 곳이 바로 나가사키항구에서의 네덜란드였다. 가끔 박연, 하멜등 네덜란드인들이 조선에 흘러들어온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박연은 아예 한국에 살던 네덜란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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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이 유일하게 서양이랑 무역하던 곳.


특히 유키치가 난학을 공부하고자 마음 먹은 이유는 이 당시 일본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1853년 쿠로후네사건(일본판 강화도조약)때문이라고 볼수도 있다. 미국의 페리제독이 검은색 배를 타고 와서 일본에 대포를 빵빵쏴대면서 개항을 요구한 사건이다. 미국의 엄청난 모습에 지려버린 일본정부는 결국 미국과 수교를 맺게 되고, 이는 타 서양국가들과의 조약으로 쭉 이어진다. 이 사건은 그냥 조선의 운요호사건이랑 판박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 사건을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맺는데 고스란히 써먹은 것이다. 조약내용조차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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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그린 미국의 선박(쿠로후네). 배가 검은 이유는 썩지말라고 콜타르를 칠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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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용된 미국 선박의 모습.


그린새끼 눈깔이 삐었盧.. 그만큼 이 사건이 얼마나 일본인들에게 공포를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건에서 서양의 대포이야기는 일본 전국으로 퍼지게 되고, 이 포술을 공부하기 위해 그는 네덜란드어를 공부했다.(당시엔 어디까지나 네덜란드만이 유일한 무역국가)


당대 최고의 난학자가 된 유키치는 1858년도쿄로 건너가 난학당을 세우고, 일본인들을 가르치게 된다. 



1859년 유키치는 우연히 요코하마를 방문하게 된다. 요코하마는 쿠로후네 사건이후 미국인들의 거류지였다. 유키치는 이곳에서 자신이 공부한 네덜란드어는 써먹지도 못한채 돌아다니면서 충격을 받는다. 그도 그럴것이 미국인 거류지라 전부 영어를 썼기때문이다. 그리고 도쿄에서 머무르면서 네덜란드는 사실 개죳밥이었으며, 미국영국이 짱이라는 말을 전해 들으면서 더더욱 충격에 빠진다. 그로부터 자신이 가르치던 개죳밥나라의 난학을 때려치고, 최강국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860년 일본최초의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마찬가지로 엄청난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이후 영어사전을 가져와 일영사전을 일본 최초로 만들게 된다. 



서양을 보고 충격받은 유키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미국의 자유쥬의적,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충격을 받는다. 한 예로, 일본인들은 에도막부의 역사와 그 후손들의 현재 생활등을 개나소나 알고 있었지만, 이 양키놈들은 지네나라 대통령의 후손들이 뭘하는지조차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유럽등을 순차적으로 방문하면서 그는 서양의 매력에 푹 빠진다.


"프랑스는 징병제라는데 영국은 징병제가 아니란다. 도대체 왜 나라마다 제도가 다른 것일까 궁금했다. 선거법은 아예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법률에 기초해서 실행하는지, 국회는 어떤 관공서인지 물었다. 그러나 질문받은 상대는 그저 웃을 수밖에. 더 황당한 것은 당파가 둘로 나뉘어 태평천하에서도 정치적인 싸움질을 해댄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적인 상대방과 함께 술 마시고 밥을 먹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닷새로 열흘이고 걸려서 간신히 납득했다."


동양이었으면, 당파싸움으로 한쪽은 걍 뒈져야 정상인데, 서양은 그 정치적 적수들이 죽질 않아서 신기했던 유키치였다. 이외에도 기차, 자동차, 선박등등 서양의 모든 면을 보고 공부하며, 이것이 일본에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1863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서양사정"이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일본의 개혁과 서구문물의 유입을 주장한다.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대중적인 토론과 회의등을 통해 이를 전국적인 논의가 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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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엔 쇄국정책의 에도막부가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영국의 영사관이 불에타고, 지방의 번이 미국상선을 멋대로 포격하고, 천황이 양키들을 몰아내달라고 신사에 기도를 드리는등 서양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대였다. 후쿠자와 유키치조차 몇차례 자객으로 인한 피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키치의 책은 엄청나게 팔리면서 그는 많은 돈을 벌게 된다. 그만큼 서양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그는 이 돈을 이용하여 1868년 게이오의숙(훗날 게이오대학)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일본인들에게 가르친다. 그는 이후 1872년 "학문을 권장함"이라는 책도 쓰게 되는데, 이책은 서양에서까지 소개될정도였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그가 쓴 "학문을 권장함"이라는 책의 서문에 나온 말이다. 이 말은 너무 유명하여 서양에까지 책이 번역되면서 소개된다.  간단하게 해석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천부인권의 사상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준 것이며, 남이 침범할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일신독립하여 일국독립한다"


역시 같은 책에 나온 내용이다. 그는 국가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우선 개인부터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일본 개개인의 사상적측면의 전환). 무지하고 게으른 국민들은 정부의 압제등을 당하게 되고 국가가 무력해지며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낼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과거 구봉건체제의 에도막부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유키치는 서양의 사상에 그대로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당시 메이지유신을 한 후에도 국가주의적인 면이 나타나는 등의 특이한 면이 있었는데, 유키치는 이런 모습을 비판하며 정부와 인민은 상하관계가 아닌 계약관계(사회계약론)라면서 당시 정한론을 주장하는 군국주의자들을 비난했다. 개인이 학문을 닦아야 이런 정부의 압제에서 벗어나 진정한 국가의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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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표적 정한론자 요시다쇼인. 그는 존왕양이를 주장한 일본판 척화론자 였으며, 매우 과격해서 이후 암살음모에 연루되 사형된다. 그의 제자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이며, 오늘날 아베신조 역시 그를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의 기원은 이 사람이다. 



메이지 유신과 후쿠자와 유키치


메이지 유신은 1868년 사이고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등 인물이 주축이 되어 군사쿠테타를 일으켜 성공한 혁명이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1866년 사스마와 조슈를 하나로 합치고, 쇼군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실질적인 정권을 잡는다. 이후 이를 이용하여 왕궁의 문을 군인으로 막아서고 당시 어린 메이지일왕에게 새 시대를 알리는 포고령을 읽도록 지시함으로써 메이지유신의 발단이 된다. 이후 일본전국이 천황파(메이지유신)와 막부파(기존에도막부)간 두쪽으로 나뉘어 엄청난 내전이 벌어지게 되고(일명 무진전쟁), 근대식 군대로 탈바꿈한 천황파가 결국 승리하게 되면서 메이지유신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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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의 주인공들. 조선판 개화당이다. 맨 왼쪽이 이토히로부미.



사실 일본의 근대개혁은 엄청난 내전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막부파의 지지기반이던 사무라이들은 몰락하며, 일본정부의 골칫거리가 된다. 이로 인해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과거 도요토미히데요시가 그랬던 것처럼 정한론의 발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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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정부 10년후 몰락한 사무라이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다. 일명 세이난전쟁(1877년). 그러나 신식군대앞에 쳐발리고 일본을 지배했던 사무라이들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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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난 전쟁을 다룬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사실 메이지 유신은 서양의 기술적인 면을 따라 가고자 한 것이지 서양의 사상등 일본의 사회개혁과는 큰 관련이 없는 그런 개혁이었다. 당시 정부의 정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군국주의성이 다분은 메이지정부에 유키치는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정부의 거듭된 인사요청에도 불구하고 거절을 하고, 재야에서 일본의 지식인 양성에 힘을 쓴다. 그는 폐번치현(번을 없애고 현을 만드는 일본의 치방제도)등을 주장하며 일본의 사회개혁에 앞장서게 된다.



중립적 언론을 원한 유키치


그는 1882년 지지신보(훗날 산케이신문이 흡수한다)를 발간한다. 당시에는 친정부적인 요미우리 신문, 반정부적인(자유,진보) 아사히 신문이 있었는데 유키치는 이들이 아닌 보다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면으로서의 언론을 원했다. 일본의 기존 언론들은 친정부적이거나 당파적인 거의 대변인 수준의 언론들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 그나마 재야에 있는 자신이 중립적인 언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지지신보라는 신문을 발간하는 계기가 된다.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영향으로 이후 조선의 개화파들은 조선에 한성순보, 독립신문등을 창간하게 되고 유키치는 이들을 지원한다. 특히 한국의 첫 신문인 한성순보가 국한문혼용방법을 사용 한 것은 이 유키치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조선의 초기 신문발간에 영향을 미친인물이다. (애초에 이런 신문을 만든 개화파들이 유키치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특히 유키치는 조선인 제자들과 같이 조선의 상황을 일본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에 조선의 정치상황등을 소개하고, 또는 춘향전등 조선소설등을 일본에 번역하는 도움을 주는 등 일본대중에게 조선의 이모저모를 알렸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후 나올 아시아연대론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연대론과 조선을 개화시키고자 한 일본인.


당시 서양은 제국주의를 필두로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던 시점이었다. 일본 역시 쿠로후네사건으로 양키들에게 탈탈 터리고 난 뒤였다. 이미 아프리카와 중남미 동남아는 전부 서양에게 탈탈 털렸다. 남은건 동아시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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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동양도 이런 짓이 일어날꺼라 생각한 유키치.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어느정도 성공했지만, 이것가지고는 서양의 침략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청과 조선은 아예 근대화도 못한 미개국이었다. 하지만 어느정도 개화가 가능한 반개사회였기 때문에,  따라서 어느정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중심으로 청과 조선이 개화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충분히 그들도 문명개화를 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가 연합하여 서양의 세력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아시아연대론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유키치는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근대화를 통해 발전한 조선과 연합해서 서양세력을 방어하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다.이로 인해 그는 조선의 개화파들이 근대화를 할 수 있도록 성심껏 지원을 해주었다. 


조선에서 1881년 신사유람단이 파견될때도 서자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농업이나 기술학교에 갈뻔한 윤치호를 김옥균과 유길준과 같이 상급학교로 보낸 것도 유키치였다. 


조선의 개화파들은 진작부터 일본에서 문명개화론자로 명성을 날리던 유키치를 만나고 싶어했으며, 유키치와 만나면서 그의 사상에 감명을 받게 되고, 공부하게 된다. 조선의 개화파들이 친일파로 불리던 원천은 바로 이 유키치때문이었다. 


조선의 개화파들이 시행한 대부분의 정책들과 사상은 유키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이후 조선의 첫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하는데도 조언을 해주었다. 이미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지신보를 발간한 그는 조선의 신문 발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성순보가 국한문혼용체로 발간하려한 이유는 유키치의 조언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은 양반들이 한문을 사용했지만, 유키치는 조선의 인민들은 한글을 사용하고 이것이 더 편하니 한글을 쓰라고 조언을 했다. 황성신문등 한문으로쓰인 신문이 유학자들용이지만, 한글로 쓰인 것들은 조선 백성들이 보라고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곧 조선인민들의 교육을 원했던 유키치와 조선 개화파들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일신독립 일국독립의 유키치의 사상이었다. 한성순보의 고문에 이노우에 가오루가 들어간 것도 유키치의 도움이었다. 그러나 한성순보는 활자등의 문제로 순한문으로 출판되다 갑신정변이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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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성순보.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는 신문이었지만, 한글로 쓰여진게 아니었던 까닭에 조선인민들은 읽지도 못했다.


지지신보를 시찰한 유길준과 서재필은 이후 조선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제2대 회장 윤치호 역시 유키치에게 자문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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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글로 쓰여진 문신닙독. 이는 갑신정변의 실패가 조선인민들의 무지함때문이라 생각해, 개화파들이 그들에게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고 조선인민들의 사상개혁을 위해서 한글을 사용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의 여러 개혁정책들 중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갑신정변 이었다. 당시 조선의 김옥균은 일본내에서도 알아주는 일뽕맞은 조선인이었다.(여기서 일뽕은 당시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양반에 세도가 출신의 김옥균의 조국근대화의 열정과 열의, 문관출신이지만 군사학교를 자청해 들어가 상민 노비와 같이 군사훈련을 받던 서재필을 보고 특히 깊은 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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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조선의 근대화를 원했던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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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양반가의 자제이지만 스스로 군사학교에 들어가 신식군사교육을 배운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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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치를 가장 존경했던 유길준. 그는 조사시찰단이 끝나고 일본에 다시 들어가 게이오의숙에서 유치키에게 배운다. 조선중립론 주장자.



그는 이들이 일본에 방문했을때부터 부국강병과, 구봉건체제의 신분질서 철폐, 문벌타파 등등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유키치는 조선의 미래가 이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일본에서 주장하던 자신의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인생을 바꾸게 하는 일대 대사건이 조선에서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조선의 갑신정변


김옥균은 조선으로 돌아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과정을 보고 이와 비슷한 갑신정변을 계획한다. 왜냐하면 당시에 민씨일파의 정치가 너무 죳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청나라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한탄하며, 청나라에서 온 묄렌도르프라는 왠 죳같은 외국인 새끼가 당오전발행을 주장하며 조선의 화폐를 개병신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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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를 병신으로 만든 민씨일족의 민비. 우리는 이 장면을 보고 그녀가 일본놈들에 의해 희생당한 시대적으로 가련한 여인으로 거한 국뽕치사량을 맞는다.


조선후기는 이 민비의 일족들의 정치로 인해 반병신 개판오분전 상태가 된 걸 우리는 현재 기억도 안한다. 을미사변이 흥선대원군, 유길준 등등이 엮였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다 이런 이유때문이다. 물론 쪽바리 개새끼 씨발놈 ㅇㅋ



메이지유신 과정을 살펴보면 일부 무사계급이 메이지일왕을 가두고 포고령을 발포한뒤 성공한 근대화개혁이었다.

갑신정변도 우정국개국축하연을 계기로, 수구파들을 내치고 일으킨 무력쿠테타였다. 메이지유신과 비슷한 전개라고 볼 수 있다. 


감신정변은 흔히 민중을 생각하지 않은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메이지유신도 마찬가지의 개혁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 사건 이후 천황파 VS 막부파 같에 내전이 벌어진다. 결국 권력다툼의 일환이다. 일본 민중들은 전혀 연관이 없었다.


대신 메이지유신과의 차이점은 조선의 민씨왕비는 당시 친청파였다는 점이다. 김옥균일당은 일부 수구파세력을 처형하고, 조선의 중앙정부인 왕과 왕비를 장악했지만, 이미 왕비측은 친청파였기 때문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 갑신정변은 3일만에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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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몰아내는 것은 기존 몇백년간의 중국사대주의를 몰아내는, 나아가 조선 전체를 바꿀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나, 결국 그 중국에 의해 실패한다. 


메이지유신은 천황파(개화파)의 승리였다면, 갑신정변은 친청파(수구파)가 결국 승리한다. 


갑신정변 당시에 김옥균은 유키치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유키치는 일본의 자유당 민병대원을 조선으로 보내 이들을 지원하려 했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거절로 실패하게 된다. 이토히로부미의 조선견제 ㅍㅌㅊ?


이후 갑신정변은 실패하고 주동자들은 처형되거나 도망가게된다. 유키치는 이 과정에서 조선정부가 행하는 연좌제등으로 그의 조선인 제자들이 능지처참을 당하는 등 박멸되자 매우 분노한다. 


이 갑신정변의 사건은 그동안 아시아연대론을 주장하던 온화한 유키치를 매우 급진적인 과격파로 만들게 되는 원인이 된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유키치의 조선제자들이었는데, 이들이 다 반역으로 몰려 몰살당하거나 추방당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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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길거리에 효수된 능지처참 당한 김옥균의 머리(1894년). 이 사건은 전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졌다. 북한의 연이은 처형소식을 듣는 우리의 모습을 서양인들이 느꼈다고 보면 된다.



탈아입구와 미개한 아시아인


그는 1885년 그 유명한 탈아론을 자신의 신문 지지신보에 게제한다.


서구화의 바람이 동양을 향해 불어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모든 국가는 서구사회와 더불어 이 운동에 동참하여 문명의 열매를 맛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명은 홍역과 같지만, 여러 이로운 점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홍역보다는 이롭다. 그러므로 국가는 문명에 거역할 수 없으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문명화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부는 걸림돌일 뿐이며, 이를 뒤집어야만 일본에서 문명화를 이룰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탈아)'이다. 비록 일본이 이미 정신적으로는 아시아를 벗어났지만, 이웃의 두 나라(청와 조선)는 개혁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유교적 가르침은 모두 위선적이고 뻔뻔할 뿐이다. 중국과 일본의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들은 곧 세계열강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서구인들은 언제나 일본, 중국, 한국을 같은 문화를 가진 비슷한 나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입론에게 걸림돌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나쁜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에,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



바로 이 내용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청과 조선은 이미 개혁할 의지가 없는 병신새끼들이기 때문에, 얘들은 이제 양키들에게 죳나 뚜드려쳐맞기만 할 뿐이고, 얘들과 같이 어울리면 우리 일본도 같이 쳐맞을건 뻔하니까 더 이상 이들과 친구맺는걸 관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찐따들이랑 어울리면 괜히 나까지 일찐들한테 쳐맞으니 찐따들을 버리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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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그가 주장했던 찐따들을 내가 정상인으로 만들어서 같이 일찐들과 싸우자는 아시아연대론을 생각하면, 조선의 갑신정변의 실패가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는지 알수 있다. 


이어서 그는 조선에 대해 여러가지 비판을 쏟아낸다.



"인간 사바세계의 지옥이 조선의 경성에 출현했다. 나는 이 나라를 보고 야만인이라 평하기보다 요마악귀의 지옥국이라 평하고자 한다."

(헬지옥반도의 기원이 여기서 나옴 ㅇㅈ?)


"조선 인민 일반의 이해 어떤지를 논할 때는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을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이다." -1885년 8월 13일.


여기서의 멸망이란 조선정부를 뜻하는 것이며, 그는 이렇게 곧 조선이 망할 것이라는 둥의 말을 쏟아낸다. 물론 이때 그는 추후에 일본이 조선을 멸망시킬지는 생각도 못했다. 그는 조선이 서양한테 죤나 쳐맞고 아프리카나 동남아처럼 뒈질거라 생각했다. 그 이유는 바로 밑의 문장에서 알 수 있다. 


"조선은 가령 그들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속국이 된다고 해도 반갑지 않은 나라다. 그러므로 조선과의 교제가 우리의 희망대로 이루어진다해도 그것은 일본의 독립을 위한 권세를 강화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선의 사절이 중국인들과 함께 미국에 가는 것은 거지와 천민이 합께 손잡고 가는 것과 같다"


"조선은 부패한 유생의 소굴로서 위로는 뜻이 크고 과단성 있는 인물이 없고, 국민은 노예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


"조선은 상하 모두가 문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학자는 있지만 중국의 문자만 알뿐 세계정세는 모르고 있다. 그 나라의 질을 평가한다면 글자만 아는 야만국이라 하겠다."



그가 갑신정변의 실패를 듣고 얼마나 멘붕상태였는지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이후 그는 1901년에 사망한다. 일본은 1905년에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를 제압하고, 동아시아의 선진국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이어 1910년 조선을 접수하고, 1930년대 중일전쟁을 통해 중국을 흡수해 동아시아의 패자가 된다. 


일부 사람들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의 탈아론과 각종 조선의 비난을 가지고 일본의 조선침략의 원흉이라고 말을 하지만, 실상은 저렇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유키치의 아시아연대론과 비슷한 논리이지만, 이들은 군국주의자들이 주장하던 것이며, 유키치는 오히려 살아생전에 군국주의자들을 비난하고, 예전부터 있어왔던 정한론(조선을 정벌하자) 반대론자 였다. 왜냐면 그는 당시에 일본은 갓 근대화한 나라로써 조선이나 청나라를 침략하기엔 실력이 부족했고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 일본은 아직 사상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개인적인 사상근대화가 먼저 더 필요했던 시점으로서 전쟁은 생각도 안하던 그였다. 그것이 바로 그의 아시아연대론이 나온 배경이었다. 


이런 아시아연대론이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그런 영향력을 발휘할수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개화파들은 그래서 유키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개화파들은 일본놈들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런 사상을 가지고 일종의 연대를 꿈꿨던 것이다. 


특히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도 이 유키치의 아시아연대론과 비슷한 논리다.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가 이 동양평화에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토히로부미는 조선을 합방시켜 조선의 독립을 없애버렸기때문에 안중근에게는 동양의 평화를 깨트린 개씨발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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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땅땅빵! 이 사건 이후 안중근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영웅으로 생각한다.


그가 집필한 동양평화론의 서문에는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했으며,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부조하여 서세동점의 서구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수 있다는 내용이다. 완전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연대론 표절이다.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이 주축이 되서 조선과 청나라를 종속시켜 동아시아의 평화를 말하는 논리였다면, 안중근은 3국의 독립상태로 연대해 동양평화와 서구열강에 대응하자는 논리였다. 당연히 조선의 독립을 부정해 동양평화를 깨뜨린 이토히로부미는 뒈져야 했다. 


안중근의 저 논리는 어디서 많이 봤지 않盧. 안중근이 병신이어서 일본에게 속아서 이 논리를 주장했을까? 그 이전 조선의 김옥균등 개화파들도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속아 친일을 한 것인가? 당시 서구의 제국주의에 맞서 조국(일본과 조선) 나아가 동아시아를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한 것이다. 김옥균 및 안중근이 븅신돌대가리라서 일본인한테 속은게 아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노선은 그와 딴판이었다는 것일뿐이다. 유키치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재야 지식인이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식인이었는지는 몰라도 일본의 정치와는 큰 관련이 없던 인물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아시아를 벗어나 구미세계와 함께한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걸 쓴 배경에는 조선의 갑신정변의 실패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이건 일본의 제국주의자들로 흘러들어가 침략을 위한 정당성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유키치가 일본의 이 1930년대 대동아공영론을 위해 미리미리 밑밥을 깔아놓았을까? 개소리인건 자신도 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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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치의 탈아입구론은 이런식으로 변질되어 일본의 머릿속에 자리잡혀 있다. 
feat.설명충(위 사진은 백인이 되고 싶은 일본소녀의 성형이야기)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의 일본침략에 대비해 조선과 청을 이용하는 아시아연대론을 주장했다. 다만, 일본만이 현재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된 상태였으므로 일본이 주도해서 조선과 청을 개혁개방시켜야 한다는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특히 일본과 가까운 조선,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에 매우 관심을 보이고 열정적이었던 김옥균을 비롯한 조선의 개화파등을 보고, 자신의 이론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그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지원을 해주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으며, 그가 꿈꿨던 이론 역시 깨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탈아론을 주창하며 일본이 조선과 청나라같은 미개인들과 섞이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본은 후에 이 이론을 변형시켜 침략전쟁에 이용한다. 


조선의 갑신정변이 동아시아 전체를 흔드는 엄청난 스노우볼을 가져온 것이다. 


 



만약 조선의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지 않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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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일베충 윤치호 : http://www.ilbe.com/5865950654

경제학의 일베충 맬서스 : http://www.ilbe.com/582322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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