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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조선 인조의 첫째 아들이며, 이름은 이왕이다.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인조가 임금으로 즉위하고, 3년 뒤 이왕은 왕세자 책봉을 받고 소현세자가 된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조선시대에 얼마 없는 파격적인 인물이었다.
그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에 불어닥친 오랑캐의 침략.
조선에서 인조가 즉위 후 주류세력이던 서인의 친명배금정책으로 광해군시대에 있었던 후금과의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다. 당시 청나라는 떠오르는 동아시아의 패자였는데, 명나라로 진출하려는 찰나에 자신의 밑에 있던 조선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대고 있었던 것이다.
일게이들은 길가다가 갑자기 똥개새끼 하나가 자기한테 으르렁되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드盧. 저놈의 개새끼 발로 함 차뿔까 할것이다.
조선을 보는 후금의 시점.
후금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명나라를 점령하기 전에 조선이라는 똥개부터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1627년 쳐들어온다. 그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조선은 오랑캐에게 존나 뚜드려 맞고, 후금을 형이라 부르는 형제의 의를 맺게 된다.
특히 후금은 애초부터 조선을 공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면 조선이 명나라 따까리인건 개나소나 아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나라를 치면 반드시 조선은 명나라를 도와줄 것이고, 후금은 명-조선연합군과 상대해야 하는건 당연한것이었다. 따라서 명나라를 공격하기전에 좀더 약한 조선이라도 일단 제압하는것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광해군이라는 놈이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명나라를 좋아하는건지 싫어하는건지 도통 알수가 없고, 오랑캐인 자신들에게 별다른 반응이 없으니 공격하기가 애매했다. 우리편인데 공격하면 괜히 병사만 아깝고, 시간만 지체되고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원하는 그 명분을 인조대의 조선이 후금과의 외교단절이라는 것으로 딲!! 제공해주니 바로 망설임없이 어택땅.
이후 후금은 더욱 위세를 떨치고 국력을 확장시켜, 청나라로 이름을 고치고 황제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한다. 명나라는 이제 뒈진거나 마찬가지.
그러나 조선이 똥개라 그런지, 그새 자기가 당한 일을 까먹고 다시 청나라에게 계속 으르렁 되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욱 벌크업을 한 청나라는 다시 한번 들어와 조선을 존나 팬다.
그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때 조선은 청나라를 임금으로 모시는 군신의 예를 맹세하는 굴욕을 얻게 된다.
이때 조선은 청나라에 인질로 인조의 두 아들을 보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이다.
청나라에 처음 발을 딛다.
그는 청나라의 심양지역에서 처음 볼모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심양지역은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다.
소현세자 외에도 볼모로 잡혀온 사람은 무려 200명정도 되었다. 처음에 청나라는 소현세자일행에게 자국과 조선에서 보내오는 물건들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역시 전쟁포로는 전쟁포로답게 살아야 했다. 이후 청나라는 니들이 농사짓고 알아서 살라는 황제의 명을 내린다. 청나라는 땅을 뗴어주고 그들은 조선에서 잡혀온 조선인들을 농민으로 삼아 농사를 지으면서 살게 된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각종 청나라의 축제에 불려가게 된다. 황제의 즉위식, 각종 귀족들의 결혼식, 누구누구 생일등등 무슨 일이 있으면 툭하면 불려갔다.
특히 청나라는 이전 금나라가 한족의 풍습을 따라서 망한거라 하여 자신들 본연의 모습을 제도화 시켰다. 그래서 오랑캐 특성상 사냥등 원초적인 축제가 많았는데, 유목민족 특성상 말을 항상 타야했다.
조선에서의 말타기는 양반이 말위에 올라 노비가 말을 붙잡고 가는 것이었다. 농사나 짓던 민족의 조선왕자는 오랑캐의 마초적인 말타기에 적응을 못했고, 부상도 곧잘 당했다고 한다. 더구나 명나라를 치는 청나라의 군인으로도 끌려갔다. 즉 사실상 평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소현세자는 오히려 주변인들에게 인품이 훌룽한 사람이라는 칭찬까지 들을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인질로 붙잡혀 가던길에 굶주리는 청나라 백성들에게 식량까지 나누어주었다고한다. 같이 있던 신하가 정계에서 은퇴를 하면 그의 건강을 챙기도록 사람까지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때 조선은 청나라에게 그렇게 쳐맞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이 씨발노무 오랑캐새끼들, 씨바아아아알"하면서 이불킥만 하고 있던 시점인데, 이때 소현세자가 자꾸 청나라 애들과 접촉하는 일이 많아지자 도리어 인조를 비롯한 신하들은 소현세자를 "이새끼 청나라한테 붙은거 아님?" 이라고 의심하게 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그도 그럴것이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보면서 그의 대청외교능력과 전해들리는 인품등에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오? 이새끼 대단한데?"라는 느낌.
소현세자를 좃같이 대하였지만 꿋꿋히 버티는 그를 보며 때로는 칭찬하기도 하는 등 모습을 보였다.
이런 소식을 전해듣는 조선의 인조는 고려시대의 원간섭기대의 역사를 생각하며, 혹시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힘을 합쳐 내 왕위를 뺏지 않을까 의심만 깊어갔다.
소현세자는 인질생활 대부분을 여기 심양에서 보낸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인질스토리인 심양일기.
명나라의 멸망과 외국인과의 만남.
1644년 드디어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다. 청나라가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세자 역시 청황제와 함께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그는 최초로 외국인을 보게 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아담 샬이었다.
아담 샬은 명나라에 천주교를 포교하러 온 선교사지만, 그의 뛰어난 능력을 알고 있던 청 황제의 신임을 얻어 청나라의 고위관료를 역임한다. 당시 아담 샬은 최고의 천문학자였다고 한다. 중국의 천문기관의 수장을 역임햇다. 그리고 서양력을 본따 만든 대청시헌력도 만들었다.
당시 아담 샬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청 황제가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곁에 뒀다는 사실이다.
소현세자는 곧장 아담 샬의 예배당에 들어가 천주교예배를 드렸다. 아담 샬 역시 소현세자의 집을 찾아가 담론을 나누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서양의 천주교와 과학을 접하게 되었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같이 온 동생 봉림대군은 관심도 없었지만 소현세자는 달랐다.
일간에는 소현세자가 천주교를 아예 믿었다고도한다.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 기독교인 ㅍㅌㅊ?
"제가 조선으로 돌아갈 때, 이것들을 궁으로 갖고 갈 뿐만 아니라 인쇄하고 복사해서 선비들에게 알라겠습니다. 선비들은 마치 사막에 살다가 학문의 전당으로 옮겨 가는 양 기뻐할 것입니다."
아담샬의 회고록에 쓰여있는 소현세자의 편지내용이다. 소현세자는 아담샬에게서 각종 서적을 받아 서양의 과학과 천문, 천주교등등을 공부했다.
소현세자의 귀국.
1944년 청나라 황제는 베이징천도기념(명나라 멸망기념)으로 소현세자의 죄를 사면한다. 즉, 앞날이 깜깜하던 인질생활이 끝나고 그는 조선으로 돌아갈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아담 샬은 선교사 정신을 발휘하여, 소현세자에게 다음과 같은 물품을 주었다.
성교정도(아담샬이 번역한 성경책), 천문과 산학에 관한 책, 지구본1개, 천주상(그림)1개
그러나 소현세자는 조선에서는 이런건 용납될수 없을것 같다고 하여 천주상을 받는 것은 거절한다.
여기에 아담 샬은 그럼 청나라황제의 명으로 천주교인 환관과 궁녀가 가지고 들어가는 것으로 하자고 말했으며, 결국 실행해 옮겨 성공하였다.
선교사 클라쓰 뭔가 다르盧.
소현세자가 베이징에 머문기간은 60여일이었고, 이때 소현세자는 서양의 문물을 공부했다.
그리고 조선의 일부 학자들(특히 정치권력에서 멀어진 남인들)이 서학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소현세자의 죽음.
소현세자가 조선에 귀국하자, 조선은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냉담했다. 이새끼 왜 왔盧 그냥 거기서 쳐살지 ㅉㅉ. 이 느낌이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 가져온 천주교관련 물건들을 문제삼아 질책 했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들이 심양해서 한 일들을 트집잡았다.
인조가 분노를 참지 못해 소현세자의 머리를 벼루로 내리쳤다는 일화까지 있다.
귀국후 이런 생활을 겪다가 1645년 소현세자는 병을 얻어 몸져 눕게되고 대략 3일후에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에 귀국한지 3개월만이었다.
당시 소현세자가 죽고 난뒤, 그의 시체에 대한 인조실록의 내용이다.
"세자는 발병한지 수일만에 온 몸이 검은 빛이었고, 머리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옴으로 검은 멱목으로 얼굴을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 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몰랐다. 다만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인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 남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의관은 아무런 문책도 당하지 않았다. 보통 조선의 왕이나 세자들이 죽었을 경우 의관들은 아무 잘못이 없어도,, 문책을 당했으나 소현세자의 의관인 이형익에 대한 처벌자체를 인조는 금지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의 소속 궁녀들이 1646년 임금의 수랏상의 반찬인 전복구이에 독을 탔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누군가 이를 고하고, 인조는 주모자로 강씨를 지목했다. 그리고 강빈의 엄마와 강빈의 오빠들은 전부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
이후 조선은 즉각, 아담 샬에게 받은 물건들을 전부 불태우고 천주교인 환관과 궁녀들을 청나라로 되보낸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봉림대군이 급히 귀국하게 되고, 논의 단 하루만에 세자로 책봉되고 뒷날 효종이 된다.
원래 조선은 왕위계승은 적장자 원칙이었다. 즉 장남이 왕위를 받아야했으며, 장남이 죽으면 장남의 아들등이 받아야했다. 그러나 인조는 모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함과 동시에 당시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들과 밀담을 통해 효종의 세자책봉에 대한 교섭을 시도하고 성공한다.
그리고 인조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전부 제주도로 유배보내고, 그들은 전부 풍토병으로 죽는다. 당시 청나라의 신하였던 용골대가 와서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내가 데려가 가르치겠다고 말했을정도로 이들의 죽음은 누가봐도 다 예상을 했던 것이었다.
이후 즉위한 효종은 청나라 볼모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반청 북벌운동를 모토로 내걸고, 조선을 지배한다.
조선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인물들 중 최고의 지위를 가졌던 인물중 하나가 바로 이 소현세자였다. 정조보다 무려 몇백년 앞선 시대였다.
인질로 잡혀가 자신이 살기 위해 그리고 조선의 명운을 위해 한 행동들이 청나라를 찬양하는 것으로 오해받아 고국의 미움을 받고, 그는 결국 아버지에 의해 독살되었다(어디까지나 썰).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면 절대 그는 왕이 될 수 없었지만, 만약 조선에 소현세자와 뜻을 같이할 정치세력이 존재했다면 약간이나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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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일베충 맬서스 : http://www.ilbe.com/5823225740
애국보수경제학자 리스트 : http://www.ilbe.com/5843814971
조선시대 3대 기인 이지함 : http://www.ilbe.com/5846995200
천조국의 빨갱이 VS 애국보수 : http://www.ilbe.com/58548671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