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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1865년 조선의 한 기울어가던 양반서자 무관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기에 그의 아버지는 크게 될 인물이라 여겨 그에게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자신이 서얼출신이고, 무관집안이었기 떄문에 문과에 급제한들 자신의 아들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윤치호의 아버지는 당시 개화파의 수장인 박규수에게 윤치호를 보내 공부하게 한다.


윤치호는 16살에 처음으로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파견된다. 이 곳에서 그는 서구의 과학,교육,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고 이에 푹 빠진 그는 현재 양반 상민 천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비인간적인 봉건체제의 중국과 조선의 유교가 씹노답이라는 생각을 갖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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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이기 요즘같은 시대에 이게 뭐하는 짓이盧 씨발. 이라고 생각한 윤치호.



서양에 눈을 뜨는 윤치호.


일본에서 공부를 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등 당시 일본의 개화사상가들을 만나고, 일본이 근대화를 통해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그리고 서양의 민주주의를 보면서 이것이 바로 조선의 미래이자 이시대의 정답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때 영어를 공부해야할지말지 망설였었는데, 당시 김옥균이 영어를 공부하면 반드시 좋을 것이라고 충고해서 공부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주미공사의 통역관으로 활동한다. 그는 영어실력이 뛰어났는데, 당시에 조선에서는 영어를 쓰는 자가 거의 없었기에, 조정은 전적으로 영어관련해서는 윤치호에 의존했다. 그도 그럴것이 영어를 쓰는 조선인이 거의 없어,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을 조선인들은 이해할수가 없었고, 그마저도 영어->일본어나 중국어->한글 이렇게 번역과정을 거쳤지만 이것을 윤치호는 직접 번역하고 조선말로 풀이했던 일까지 했다. 윤치호는 직접 영어->한글로 번역했던 것이다. 이건 조선사람 중 윤치호만 할 수 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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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이盧.



이후 관직생활을 하던 그는 그는 특히 당시 개화파의 주요인물인 김옥균과 어울린다. 그러나 그는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려 하자, 그러나 그는 이것이 성공할수 없다고 부정적으로 보았고, 적극적인 참여는 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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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 그가 일으킨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성공한지 3일만에 진압되고, 김옥균은 도망다니다가 암살당한 뒤 부관참시된다. 김옥균은 당시 독도에 사람을 거주시켜 만국법(국제법)에 따라 우리영토로 인정받자고 주장한 인물이다. 실제로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1883년 독도에 주민을 이주시킨다. 똑똑하盧


도피생활을하며 조선을 경멸하는 윤치호.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여파로 개화당파로 몰려, 중국으로 도망간다. 이곳에서 그는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등을 상대로 영어교사생활을 한다.


"청인(중국인)의 집은 음침하기 짝이 없어 일본 사람의 정결하고 명랑한 집에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똥뒷간 같은 집이야 어찌 청인의 2층 집에 비하겠는가."


당시 중국에서 잠깐 머물던 윤치호의 일기내용이다. 중국은 죳나 죳같은 곳인데, 조선은 더 죳같은 곳이라면서 디스하는것도 빼놓지 않는다.

참고로 이때 중국인인 마애방이라는 여성과 결혼한다. 중국인을 평생 경멸하던 그였지만, 중국인 아내만큼은 지독하게 사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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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침한 청나라의 2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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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뒷간 같은 조선의 집.


그는 중국에서의 짧은 도피생활 이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미국의 극심한 인종차별을 보며 분노하기도 하며, 반대로 범접할 수 없는 미국의 강함에 경의를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국제질서의 흐름을 보면서 조선이 얼마나 죳같은지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다. 특히 중국을 아직도 대국이라 빨아대고 있던 조선을 리얼 병신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그리고 세계의 흐름을 보건데 중국은 죳나 씹병신인데, 이를 대국이라 여기면서 아직도 조선인들은 후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치호는 특히 미국에서 자신을 비롯한 황인종들이 백인들에게 얼마나 무시를 당하는지, 백인들이 흑인들을 얼마나 차별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는 미국의 교회에서 아프리카에 선교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가 도리어 미국 내 흑인들은 다 쓸어버려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모습을 보고 총격을 받고 나아가 백인전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1890년 5월18일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 -1893년 11월 1일


즉 그는 백인이 우리같은 황인종에게 어떤 짓을 할지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느꼈으며, 중국인은 죳나 병신이라는 걸 중국생활을 통해 느꼈다. 결국 그에게 남은 선진국은 일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선 그냥 해서는 답이 없음을 느끼고, 나처럼 서구적 교육을 통해 일단 구시대적인 유교적발상에 머물러 있는 죳도 모르는 조선민초들부터 깨우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공부를 하며 깨달았듯이, 조선인민들도 이렇게 깨달아야 제대로 개혁이 이루어질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또한 그는 미국생활을 하면서 사회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사회진화론의 핵심인 적자생존의 야만적인 논리에 충격을 받지만, 그것이 선진국들사이에서 대세였던 관계로 이 또한 현실이 아닌가 하면서 현실을 깨닫는 모습도 보인다.



조선으로 귀국한 윤치호.


1895년 러시아대관식에 참여하려는 민영환을 따라 미국에서 유럽으로 또 유럽에서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만민공동회등을 통해 조선의 민중에게 게몽을 하려고 노력한다. 이와 마음이 맞았던 안창호, 서재필, 이상재등과 독립신문까지 창간하며 제2대 회장까지 맡게 될만큼 열심히 활동한다. 조선인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해서, 평등에 대해서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는 조선민중들이 조선의 개혁을 위해 교육을 받고 뭔가 깨닫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그들을 외면했으며, 그들이 세우려는 입헌군주국에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유교적인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특히 조선의 고종이 입헌군주국을 세우려는 독립신문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권력을 뺏는 반역모의로 여겨 황국협회을 통해 무차별린치를 가하게 되고, 결국 독립신문이 무너짐과 동시에 윤치호의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생각까지 무너진다. 


윤치호의 머릿속은 분명 조선 민중들의 권리향상을 위해, 그들이 더 이상 병신인 중국이 아닌 세계의 흐름을 알고 조선이 더욱 좋은 나라로 발전하기 위해 자기가 노력을 하였으나 이새끼들이 돌대가리인지 이해를 못하는건지 자꾸 자신들을 거부했으며, 오히려 조선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자신이 고종황제에게 불충한 자로 낙인까지 찍히자 그는 이제 더 이상 조선은 뭘 해도 안되는 병신같은 나라라 생각하고, 조선의 개혁자체를 포기하는게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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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그 역시 갑신정변 실패이후 오히려 윤치호보다 더욱 조선은 죳같이 답이 없는 나라라 여겼다. 갑신정변이후 일가족이 몰살당했으며, 왕은 자기를 반역자로 쫓아내고, 망명시절에 암살자까지 파견해 자신을 죽이려 했기 떄문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자격을 따고 미국인이 되어 독립신문의 고문으로 다시 조선에 귀국하였다. 이떄 거의 대부분 한번도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영어만을 사용했을정도로 더 이상 조선을 조국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조선을 떠날떄도, "귀국정부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간다"라고 지인들에게 말을 남겼다. 그의 이런 행동에 윤치호조차 바지에 오줌을 찌렸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승만 김규식등에게 미국유학을 권하고 빨리 을사조약을 반대하라고 편지를 고종에게 쓰는등 남다른(?)애정을 보인다. 

 



답 없는 조선을 포기한 윤치호.


1911년 윤치호는 데라우치총독암살미수 사건을 빌미로, 한국의 독립운동가 105인을 잡아들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간다. 3년동안 옥살이를 하며 그는 일본의 모진고문을 견디다 못해 더 이상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서약을 받고 풀려난다.


"우리 조선 민족은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상호 구별이 없어질때까지 노력할 필요가 있다.(중략) 앞으로 일본의 여러 유신 신사들과 어울리며 일선 민족의 행복을 위해 양 민족 동화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 -1915년 3월14일 매일신보 인터뷰.



그러나 이후에도 그는 교육,계몽관련 사업에는 꾸준히 참여했다. YMCA의 설립을 지원하거나 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하고, 여러 전문학교의 교장등을 맡는등 적극적이었으나, 다만 독립운동의 참여만큼은 일절 거부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을 위해 민족대표자들중 한명인 최남선이 윤치호에게 가 국민대표로 서명하자는 권유를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독립대표들이 생각했던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이 사실 승전국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아무 상관도 없는 일본이랑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사람들에게 주장했던 윤치호였다. 따라서 3.1운동 역시 그냥 죳도 아닐께 뻔한데, 니들이 뭘 하겠냐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들을 


"자신이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순진한 사람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저주 받을 악마와 같은 존재"


라고 비난하면서, 정작 3.1운동이 벌어지고 난 뒤, 만세를 외치는 학생들이 일본순사들에게 잡혀가자 손도 안쓰는 독립운동대표들을 보며 이런 새끼들 꼬임에 넘어간 순진한 학생들이 불쌍하다며 분노를 하고, 학생들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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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딴걸 한다고 해서 독립이 되盧. 라고 생각한 윤치호.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민족자결주의란, 각 민족이 의지에 따라서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권리이다. 물론 말만 그럴뿐이고, 실제로는 당시 1차세계대전 패전국들의 식민지들은 독립했으나 승전국들(일본포함)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해달라는 권유를 받지만, 그는 조선의 독립문제는 회의에서 거론조차 안될 것이며, 그 누구도 조선의 독립에 관심도 안 가질것이라 말하며 거절한다.


한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당시 안창호를 비롯한 서북파와 이승만등을 비롯한 기호파(경기+충청)가 서로 비난하는 일이 잦았는데, 윤치호는 이 상황을 보면서 역시 독립운동한다는 새끼들도 이런데 무슨놈의 조선이 독립이냐 하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조선의 독립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절대 이루어질수 없다고 생각했다.


1,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행동하는 한국인의 습성

2. 끊이지 않는 조선 내부의 파벌싸움

3.유교적인 도덕 강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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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의 이성 90%의 감성으로 움직이는 한국인들.



1934년 일본은 그에게 중추원의 참의직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거절한다. 


1938년 수양동우회사건과 흥업구락부사건으로 국내의 독립운동가와 학자들이 구속되자 그는 자신의 신원보증을 통해 그들을 석방시키기도 한다.


이런 일렬의 사건들을 통해 윤치호는 보통 소극적친일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맹목적인 친일이 아닌, 친일을 하면서 그 밑에서 조선의 개혁을 꿈꿨던 자들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은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180도 뒤바뀌게 된다.



일본이 이제 동아시아의 왕이다.


몇천년간의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중국이 일본한테 죳나 얻어터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죳나 처참하게 두드려 맞고 있었다. 그는 이제 일본이 사실상 동아시아의 패자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엄청난 힘 앞에 조선은 더 이상 독립이고 나발이고 평생 일본의 속국으로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발빠르게 시대의 흐름을 읽던 그는 일본 밑에서라도 점진적인 개방을 통해 조선을 발전시키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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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영토의 모습. 중국의 주요 도시는 전부 일본이 냠냠.


그는 과거 거절했던 중추원의 참의직을 수락하고, 일본귀족으로 편입된다. 



통수 맞은 윤치호.



그러나 1945년 윤치호의 생각이 보기좋게 빗나간다. 갑자기 일본이 미국에게 대들고 죳나 뚜드려 맞고 뒈진것이다. 윤치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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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씨발 이새끼들 뭐하盧!!!!


이후 조선은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 그리고 윤치호는 친일파라는 오명을 쓰고 평생 비난에 시달리다 죽게된다.


그러나 윤치호는 자신에 대한 비난에, 이건 한국독립운동가들의 노오력으로해서 된게 아니라 미국때문에 된것이다. 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당시 한국인들은 누구나 다 친일파가 됬을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그동안 윤치호는 평생 살면서 자아비판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대부분은 친일을 했던 자신에 대한 자아비판이라고 해석한다. 


과연 윤치호는 자신이 죽을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지 않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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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일베충 맬서스 : http://www.ilbe.com/5823225740

애국보수경제학자 리스트 : http://www.ilbe.com/5843814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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