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제4-1탄. 欲呑高麗 先誅百濟 - 7세기 동북아시아 정세

https://www.ilbe.com/4042796083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제4-2탄. 백제의 군사제도와 5방령

 https://www.ilbe.com/4045275070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제-4-3탄. 나당연합군의 기만전술 - 덕물도 회담.

 https://www.ilbe.com/4056070392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제4-死탄. 기벌포는 어디인가? - 백제군의 배치

https://www.ilbe.com/4079829111



































졸작을 읽어주는 밀게이들이 있어 Ya~! Feel so good!

원래는 다 쓰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리게 됬盧.....

이번편은 기벌포 전투당시 백제군의 배치와 기벌포 전투의 초중반의 상황에 대해  전승설화와 사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맞추어 가볼께.
























欲汝伐吾國 何爲指路乎
 
네가 감히 우리나라를 치고자 하는데, 어찌 길을 가르쳐주겠느냐!?
  
全羅南道 群山市 五聖山 傳說 中 一部




戰死易, 假道難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어주긴 어렵다.

東萊府使 宋象賢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이야기를 알거야. 우스겟소리로 요즘은 5년마다 강산이 바뀐다고 할 정도로 국토개발은 점점 빨라지고 있는 추세이지.




5~10년주기로 강산이 변한다고들 하는데 1300여년전의 강산은 우리가 예측하기 힘들정도이겠지?

전편의 댓글에서 어떤 밀게이가 지형에 관한 내용을 적었는데, 이번편의 핵심과 아주 유사하다고 생각해.






1300여년전의 사건을 현대의 지형에 맞춰 설명하기엔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해서 
 
먼저 서기 660년 음력 7월 6일 기벌포 전투의 현장이였던 現 군산의 지형에 대해서 살펴보고 넘어가볼께.



























1914년_군산시가지_토지이용.jpg

1914년 군산의 토지이용도




1356년동안 거의 안 바뀐 서천과 달리 군산의 해안선 변화는 1998년을 기준으로 볼 때 가까이는 외항국가공단사업으로 내초도와 오식도 등의 섬들이 육지화 하였고 일제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인들의 간척사업으로 당시까지는 섬이었던 옥구군 옥봉리(무의인도) 일대의 어은리, 선연리, 사호촌, 칠호촌, 산북동 등이 바다였다가 새로운 경작지화 하였어.








1923년_군산시가도.jpg
1923년 군산의 지형도



또한 1923년 지형도에 따르면 나포면 옥곤리에서 서포리까지의 금강연안은 갈대밭과 뻘밭이었는데 이곳에 간척 사업을 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되어있어. 이전에는 아마도 취성산 줄기와 불지산 줄기까지 금강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여.





1934년_군산시가도.jpg
1934년 군산의 지형도



이 당시 간척된 땅들은 회현면 금광리와 학당리에서 대야면 지경리, 죽산리까지의 선을 경계로 만경강 하구까지 이르는 대야뜰과 영병산 줄기의 남쪽에 위치한 옥구읍 상평리에서 수산리, 이곡리와 회현면 월연리와 금광리에 걸치는 수산이곡뜰 등으로 일제의 쌀생산을 위한 일인들의 농업이민 속에서 총독부에 의한 계획적인 인위적 간척사업이 20세기 초에 이루어져 군산의 해안선 모습은 큰 변화를 겪었지.
 
때문에 1920년대 작성된 군산의 모습은 현재와는 무척 다름을 알 수 있어.









군산시.jpg



이렇듯이 80여 년의 시간 속에서도 지도의 변화가 놀라울 정도인데 하물며 1300년 전의 군산모습은 어떠했을까 상상이 가지 않아.
 
서기 660년 7월 6일 당시 군산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근대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작은 단서라도 확인해보는 과정을 밟아 보면서 백제군의 최종 배치와 당군의 공격로에 대해서 알아보는게 좋을거 같아.
 
 























군산안내.jpg
군산안내 23~24p




기록이 남아있는 일제 때에는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은 간척사업으로 인한 해안선의 변화가 심하였으며 1915년에 발행된 군산안내(伊藤光三郞-群山築港起工祝賀會記錄係)에 의하면 군산은 서쪽 및 남쪽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동쪽은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협소한 곳으로 나와 있는데, 현재의 중동일대는 당시에는 갯뻘의 갈대밭 지대였으나 1929년 매립한 것으로 나와 있어.
 










대동여지도_군산.jpg


조선 철종 때 만들어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철종 12년-1863)에 나온 군산은 임피와 옥구현 중심의 교통망과 함께 현재의 은파 저수지가 미제(米堤)방죽으로 표기된 모습이 특이하며 만경강 북안인 현재의 회현면에 고사포(古沙浦)가 표시되어있어 이병도 박사 등이 고사포를 백제의 고사비성으로 비정하여 주류성 한산설(건지산성)의 근거가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지.



 



전라우도_군산진.jpg

그 이전인 조선왕조 숙종 27년(1701)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에는 현재 군산시의 지명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는데 군산진영을 중심으로 내영리(신흥동), 당정리(월명동, 금광동), 강변리, 구영리(영화동), 거석리(개복동, 중앙로), 죽성리, 경포리, 경장리 등의 명칭이 나오는데 군산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마을이 있고 현재의 평지는 거의 갯펄이나 갈대밭으로 보여.
 
특이한 점은 현재의 금성산에서 발원하는 경포천과 오성산에서 출발하는 둔덕천이 지도에 표시되어있고 경포천의 끝부분에는 대형다리가 그려져 있으며 경포천과 둔덕천이 만나는 현재의 구암동의 구암동산 지역이 섬으로 표시되고 있는 모습이지.
 
아마도 일제 때의 중동, 경암동, 경장동, 구암동 일원이 갯뻘과 갈대밭이었다면 약 백여년 전인 1701년에는 중동, 경암동 지역에 배가 정박해 있고 구암동산이 섬으로 표시되는 건 놀라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해.






여지도서_수영지.jpg

 
 또 하나의 지도인 여지도서 수영지(水營誌)에 소장된 군산진 지도에는 뱃길과 함께 성종실록(成宗實錄)에 기록된 노인성(혹은 군산진성)의 성곽이 현재의 대명동, 창성동, 평화동 유역에 위치함을 볼 수 있는데, 이 노인성은 세종 초기에 군산진을 고군산으로부터 옥구현 북쪽 진포로 옮겨오면서 쌓은 것으로 보이며 진의 명칭은 군산진으로 하였으나 진성은 노인성이라 호칭한 것으로 보여.
 
 
 
 
 
 
 
  




 
18세기의 지도를 통해본 군산은 그야말로 해안의 갈대숲이 무성한 한적한 수군지영임을 알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전의 지도는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어. 하지만 군산지역 마을의 유래나 지명의 유래를 보면 그 지역의 모습이 추측 가능하지.
 
 
 
 
이러한 군산의 백제시대 모습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주장을 발견 할 수 있는데, 백강이 동진강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 오오와라(大原利武)는 금강하구의 지형이 한때 큰 변화가 있었다는 색다른 주장을 하였어.
 
그는 그의 저서인 朝鮮の古代史に就て​에서 백제시대 금강하구는 현재의 모습처럼 북에서 서쪽으로 서류하지 않고 군산 및 옥구지방이 있는 동쪽으로 남향하여 현재의 만경강 하구에 유입하였다고 주장했어.
 
이러한 주장은 해안충적평야의 지질주상도(조선총독부 1937년)의 자료를 보면 이해할 수 있어.




군산시_지질주상도.jpg
스샷이 안되서 1970년 지질주상도 대체...


이 자료에서는 구암동에서 신시청, 미장들, 평사들, 석교들을 거쳐 칠다리를 지나 수산이곡평야의 만경강 하구에 이르는 해안 충적평야의 충적층 구조를 보여주는데 이 지역은 모두 1m이내의 표토층만 걷어내면 가는 모래의 세사층과 점토층이 지하 15m 이상 쌓여있어 이곳이 과거에 바닷물 또는 밀물썰물의 영향권 내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전라우도_군산진.jpg

이러한 증거는 1701년의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에서 구암동에 있는 구암동산이 섬으로 표시됨을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 돼.
 
 
또한 현재의 경포천이 만경강이 보이는 금성산 근처까지 이어져있고 평사들에 있는 쌍봉리의 봉서마을은 배가 돌아갔다는 유래에서 지금도 돌머리로 불리우고 있고 쌍봉리 평사마을은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는다는 평사낙안형의 지명으로 지질조사에서 내륙인데도 불구하고 조개가 출토되는 지역으로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마을이 강가에 있었다는 명칭들이 많이 남아있어.
 
또한 석교들에 있는 석교, 옥교마을은 이 지역이 옛날에는 금강과 만경강의 합수지점이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으며 마을명칭도 마을의 땅이 질어서 마을과 마을을 돌로 징검다리를 놓고 다녔다는 뜻에서 다리 교(橋)자를 사용하였지.
 
또한 금성리의 칠다리 근처의 내류마을에서는 패총지가 발견되었고 이 지역은 옛날에는 나루터로서 배가 닿았다고 전해지고 있지.







군산의_평원지대.jpg


이러한 마을의 유래와 명칭들을 볼 때 현재 구암동 세풍합판이 있는 지역에서 군산시청의 남쪽에 위치한 만경강 너머 김제 망해사가 보이는 뻥뚫린 지역은 오밀조밀한 산이 유독 많은 군산에서는 보기 드믄 지형으로 여러 경황으로 보아 백제시대의 군산지역은 웅진사비를 흘러온 금강줄기가 그 하구인 군산지역에서는 구암동산 근처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져 본 줄기는 현재의 모습인 도선장 앞으로 흘렀고 그 지류가 구암동산을 지나 경장동, 미장들, 평사들, 석교들을 지나 당북리의 돛대산과 금성리의 박지산 사이로 난 줄기를 따라 만경강 하구똑으로 입수된 것으로 보여.
 


최종적으로 정리하면 서기 660년 당시 군산의 모습은 다음과 같아.


660년_당시_군산.jpg

서기 660년 당시 군산의 모습







이로서 660년 당시 군산의 지형에 대해 비정해 봤어.
 
이로서 끝내면 좋겠지만 우린 앞서 백제군이 서천과 군산일대에 진을 치고 있다는것만 알 뿐 자세하게는 알지 못해.
 
이 문제를 알기 위하여 일단 우리는 먼저 당시 군산지역에서 사람들이 살던 생활구역을 알아야 할 거 같아.
 
 
 
 
 
 
 
이 의문의 실마리는 진단학회에서 출간한 한국사 고대편에 나와있는 마한 54개국 중에서 전북지방에 있는 국명을 알아봄으로써 찾을 수 있었어.






마한시대_군산의_삼국.jpg

마한시대 군산의 삼국(三國)의 위치


이 내용은 본래 중국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 마한조에 나온 내용으로 마한의 54개 국명 중 군산지역에는 대략 세 개의 국명인 비리국(회현) 신흥국(임피) 사노국(옥구)이 있는 것으로 연구되었지.
 
전주, 정읍 등지에는 하나의 나라이름만이 존재하는데 유독 좁은 군산지역만 세 개의 국가명이 나오는 것 또한 현재의 군산시가 과거 옥구군이었던 육지와 가까이 있는 섬이었던 이유도 있지 않을까라고 필자는 추측하고 있어.
  
군산지역의 마한 삼국 중 옥구지방은 마한시대에는 사노국(斯盧國)으로 불리웠고 백제시대에는 마서량현(馬西良縣)으로 불리웠는데 마한 시대 당시 하나의 국가가 수천에서 최대 5만명의 백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백제의 마서량현때에는 마한 시대보다 인구가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진 않았을거야.
 







당시_부부리현-마서량현의_해안방어선_.jpg

서기 660년 당시 마서량현과 부부리현의 해안 방어선
(필자 추측-논문과 발굴자료를 바탕으로...)



이 마서량현이 웅진강구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어 강을 지킨 백제군은 마서량현(옥구)의 병사들이었을 것이며 해안 방어선은 현재의 옥구읍성과 대산산성 그리고 사자암 봉수대(백제-사자봉 보루)까지의 월병산 줄기를 포함한 섬 전체 둘레에 해안 방책이 설치되고 당시 섬이었을 성산토성이 최전선이었으며 그 안쪽인 군산대 뒤 지역인 개삼마을, 신관마을로 이어지는 월명산의 줄기들에도 해안 방책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
 
그 중에서 중심지역은 현재는 폐교가 된 상평 초등학교가 있는 옥구읍 읍내리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
 



옥구읍성_토단.JPG

옥구읍성의 토단



옥구읍의 옥구읍성은 조선시대 문종원년(1451) 신축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읍성의 서쪽 성벽 아래로 백제 고유형태인 토단식 방책지를 확인할 수 있어 조선시대 읍성을 신축하기 이전에 이미 사용하지 않는 폐성의 형태로 남아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서천군의_지리.jpg

충청남도 서천군의 지리적 특성
(녹색은 주요 능선을 표기함)



군산과 마찬가지로 서천에도 마한 54개 소국 중 3개의 국가가 서천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서천읍의 아림국(兒林國), 비인면의 비미국(卑彌國), 한산면의 치리국국(致利鞠國)이 존재하였지.
 
서천읍을 중심으로 보면 북서-북-북동-동쪽이 산으로 막혀있으며, 또한 북서쪽의 비인면은 서해바다와 맞닿아 있는 서쪽을 제외한 전방향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내륙에서 진격해 오는 적들은 산을 넘던지, 아님 금강이나 바다를 통해 침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에 서천지역에는 3개의 소국이 자리 잡았다고 필자는 생각해.







마한시대_서천의_삼국.jpg

마한시대의 서천의 삼국(三國)의 위치와 명칭




이 3개의 소국 중 비인면의 비미국과 한산면의 치리국국은 3세기 이후 백제에 편입 되었지만, 서천읍의 아림국은 4세기 이후 백제에 편입되었는데, 이는 아림국 주변의 넓은 농토를 기반으로 나머지 두 소국보다 강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백제에 저항하였다고 볼 수 있지.
 
마찬가지로 마한 시대 당시 하나의 소국이 수 천에서 만여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백제 시대의 설림군(아람국) 또한 인구가 늘면 늘었지 줄진 않았을 거라고 판단하는데, 설림군은 웅진강구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또한 사비성으로 가는 주요 육로 중 하나였으므로 이곳을 지킨 백제군은 크게 3곳에 해안 방어선을 설치했을거야.






당시_설림군-비상현의_해안방어선.jpg

서기 660년 당시 설림군-비상현의 해안방어선 추측예상도
(GOP철책처럼 쭈욱 이어진 해안방어선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하나는 서천군 장항읍의 장암산성, 송내리산성, 중태산성을 위시하여 서쪽과 남쪽을 중심으로 목책을 설치하였으며, 이중 해안과 가장 가까운 장암산성과 송내리산성이 장항읍 방어선의 최전선이자 이 2곳 중 한곳이 백제군의 지휘부가 설치되었을 장소였을거야.
 


장구리산성의 남측성벽.jpg

장구리산성의 남측 성벽



다른 하나는 서천군 마서면의 한성리 산성과 장구리 산성을 중심으로 한 해안방어선일거야.
 
이곳은 설림군과 가장 가깝고 또한 비인면의 비상현과 가까운곳이라서 이곳은 설림군 병력 일부과 비상현군이 배치되었을거야.
 



도삼리에서 바라본 금강하구둑.jpg

도삼리에서 바라본 금강하구둑


 
마지막 하나는 장항읍 동쪽에 위치한 원수리,당선리,도삼리 방면의 해안방어선일거야.
 
이곳은 금강하구를 막고있는 백제 수군의 측면을 보호하면서 혹시나 있는 상륙전에 대비하기 위해 해안선을 중심으로 방책을 세워 놨을거야.








여기까지면 백제군의 병력이 집중 운용 되어서 당군의 상륙작전을 막았을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백제군의 병력은 분산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고군산군도.jpg


전편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당군이 고군산군도에 상륙한 것은 백제군에 대한 교란작전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전략적 목표로 삼았던 것은 ‘단기간 내 사비성 함락’이 목표였어. 
 
이는 덕물도 회담의 내용에서 잘 나타나 있지.
 







1.jpg

백제 조정도 나당연합군의 속전속결의 전략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을거야.
당군이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모습을 들어 낸 것은 결국 뒤집어서 말하면 빠른 시일 내로 결전을 강요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지와 다르게 해상의 보급선은 날씨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매우 커.
12만명에 이르는 대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온 당군에게 해상을 통한 군량수송은 전략적으로 중차대한 과제였지.
 
당시 당군의 해상수송의 애로점에 관한 기록이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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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高宗征遼,令仁軌監統水軍,以後期坐免,特令以白衣隨軍自效。 
 
현경 5년, 고종이 유인궤에게 수군을 지휘하도록 명하였는데
 풍량을 만나 배가 침몰하고 많은 수군들이 물에 빠져 죽자 스스로 백의종군하였다. 
 
舊唐書 券84 列傳 第34 劉仁軌 郝處俊 裴行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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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慶五年,伐遼,義府欲斥以罪,使督漕,而船果覆沒。坐免官,白衣隨軍

현경 5년, (백제) 치려고 하자 명을 받들어 군량운송을 책임하였는데
배가 침몰하여 군량이 가라앉자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하였다.
 
新唐書 券108 列傳 第33 劉仁軌 裴行儉子 婁師德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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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수송이라고 필자가 표현했지만 사실상 이 기록은 소정방의 나당연합군 수군함대가 서해안을 따라 남진할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해.
 
 
660년 6~7월은 양력으로 7~9월에 해당되는 시기이며, 이때 한반도는 태풍의 영향권에 놓여있는 시기이지.
 
아마 풍량을 만나 배가 침몰한 기록은 이때 태풍 or 열대성 저기압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고 추론 할 수 있어.
 
 
 
 
 
이러한 해상 사정으로 원정이 잘못하면 좌초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은 10일 사비성 남쪽 現 강경읍에서 신라군과 합류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므로 단기간 내 강경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금강 하구, 즉 기벌포를 공격해야 했어.
 
금강 하구를 공격하기위해 당군을 상륙시키려면 크게 두 곳이지.
 
 
 
 
 
서천과 군산
 
 
 
 
 
백제조정은 당군이 덕물도에 상륙한 시점에서 빠른 결전을 요구해 올것을 간파하였고 또한 결전 장소를 크게 2곳으로 비정하고 있었어.
 
전편에서 우린 당군의 기만전술로 백제의 서방군을 임존성과 기군(現서산)으로 결집시켰던것을 알고 있어.
 
이 두곳과 사비성의 해상관문인 기벌포가 백제 조정의 결전장소로 비정된 곳이라 필자는 생각해.
 





660년_6월말_7월초_각국의_병력집결지_및_진격로.jpg

서기 660년 6월 21일 ~ 7월 3일까지의 양군의 진격,집결지



 
서방령군과 북방령군을 결집시켰던 백제조정이 중방령군을 결집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건 어불성설이야.
 
당군이 해상을 통해 덕물도로 상륙한 시점에서 백제조정은 기벌포의 전략적인 위치를 잘 알고 있었지.

이는 전편에서 살펴봤듯 백제조정의 혼란에 대한 기록에서 자세히 나와있지.



 
 
 
 
 당군의_이동경로.jpg
 
 중방령군이 결집하기 위해 준비하였지만  당군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주공방향을 간 본 상황에서 한곳에 병력을 집중하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였어.
(당나라 함대에 놀아난 서방령군은 두말할것도 없구.... 거하게 놀아난 서방령군 일부와 북방령군은 결국 소부리벌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버리지..)






몇일간의 항해 후 군대 정비를 위해 바로 상륙작전을 펼치지 않고 어느 섬에 상륙하여 휴식을 취한 후 공격 할 것을 백제 군수뇌부들도 알고 있었을거야.
 
문제는 그곳이 어디인가? 였지.







고군산군도에서의_당군의_예상_공격루트.jpg

고군산군도에서의 당군의 예상 공격루트



당군이 상륙한 고군산군도의 위치는 現 새만금 방조제가 있는 곳이야.
 
고군산군도에서 상륙방향을 지정한다면 크게 4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군산시 옥구읍과 회현면 일대, 금강하구 , 다른 하나는 김제시 광활면과 진봉면,성덕면 일대, 마지막으로 부안군 계화면 일대로 나눌수 있어.
 
어느쪽으로 공격하더라도 넓은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상륙만 한다면 ‘Load to Sabiseong’의 시발점이였지.





중방군의_이동_및_배치경로.jpg

중방령군의 예상 이동경로


상륙지점을 모른다는 전제하에 필자가 추측해보면, 당시 중방령군은 군산,김제,부안의 해안선을 중심으로 넓게 분산 배치 되었을거야.
※일반적으로 회전에서의 분산배치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서해안의 상륙작전에서는 소수의 방어군이 다수의 공격군을 막을수 있는 갯벌지형때문에 분산 배치 하였을것으로 추론했어.
 

반론으로 '사비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제일 빠른 루트는 금강을 이용하여 수륙병진이 아닌가?' 하겠지만, 부안은 멀리 있기 때문에 필자도 그렇게 많은 병력은 배치되었다고는 생각하지않아.
 
 
하지만 김제 광활면,진봉면 방면은 다르지.










 당군의_김제_광활면-진봉면_상륙시_예상_공격루트.jpg

당군의 김제 광활면-진봉면 상륙시 예상 공격루트
 

광활면과 진봉면에 당군이 상륙하면 군산의 배후를 공략 할 수 있으며, 아니면 바로 백제의 식량창고인 금마저(익산)으로 진군할 수 도 있었지. 결국 당군이 이곳에 상륙한다면 사비성의 관문인 금강 하구를 공격할때, 당 수군 함대와 협공을 할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군사학적 지식이 일천한 필자라면 김제 광할면 방면에도 백제의 수비 병력을 배치하였을거야.
 
당군의 상륙을 하루만 묶어 놓으면 분산 배치 되었던 병력을 동원해서 막을 수 있기 때문이지.








또한 서천의 설림군 또한 당군의 예상 상륙지점이였어.
 
 
나당연합군의 기벌포 상륙작전이 마치 군산 일대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흑치상지가 추장 10여인과 함께 소정방에게 항복 후 백제가 멸망하고 난 뒤, 다같이 임존성으로 도망친 기록과 서천군 문산면 지원리의 지원리 산성 북쪽에 사장터, 군영터가 존재하는 점을 근거로 당시 나당연합군의 상륙지점은 크게 서천과 군산일대로 볼 수 있어.
 
이는 필자의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기벌포 상륙작전이 끝나고 다음날인 10일 즈음, 충남 서천군 문산면 지원리산성 일대에서 좌평 의직을 지원하기 위해 남하하던 귀실복신의 서방령군과 당군이 격돌하였다고 추측하고 있어.
※이는 다음편인 오성산전투,천방산전투 편에서 자세히 다뤄볼께.
 
  
 
 
사비성이 일반적으로 작은 성도 아니였으며, 동북아시아 성곽 유적에서 사비성이 차지하는 위상은 남달라.






부여_사비성_성곽_분포.jpg

부여 사비성의 성곽 분포


사비성 전투편에서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사비성은 現 부여읍 면적의 80%에 이르는 지역 전체를 둘러싼 외성과 내성을 갖춘 2중 방어성이며, 또한 사비성을 중심으로 전방위로 방어적 성격의 산성들이 산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벌포에서 사비성을 함락시킨다고 하면 북쪽과 남쪽을 제외한 동쪽,서쪽지역에서 동시에 공격해야하지.




 나당연합군의_진격로.jpg

 
결국 필자의 추측으로는 당군의 일부가 사비성 서쪽지역을 공격하려고 서천일대에 상륙한 후 現 661번 지방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지원리와 은곡리를 넘어 부여군 남면 금천리에서 금천을 따라 진격하여 사비성 서쪽을 공략하려고 하였을거야.
 
  
 
 
결론적으로 나당연합군의 기만전술편에서 필자가 서술했듯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에서는 ‘이에 병사를 합하여 웅진 어귀를 막고 강을 따라 주둔시켰다.’ 라는 기록을 볼 때, 백제군은 분산 배치된 병력 중 하나가 공격당하면 한곳으로 모여 당군을 저지시키려고 하였다고 볼 수 있어.
 
※ 참고로 여기서 ‘이에 병사를 합하여 웅진 어귀를 막고 강을 따라 주둔시켰다‘라는 기록은 황산벌 전투가 끝난 후 백제 패잔병이 군산으로 도망쳐 당군과 또 교전하였다고 주장하는 사학자(아마추어)들이 간혹있는데, 군산과 황산벌은 직선거리로만 50km가 넘는 거리야. 이를 길어야 반나절만에 갔다고 볼 수 없지. 결국 이 문장의 해석은 서천,군산,김제,부안에 분산 배치된 백제군을 뜻하며, 합하여 웅진 어귀를 막고 강을 따라 주둔시켰다는 금강 하구/ 만경강 하구 / 동진강 하구를 뜻한 것이라고 필자의 짧은 머리로 추론해봤어.
 
 
 
 
이로서 기벌포 전투에 대한 모든 윤곽이 들어났어.
 
전편과 본편의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서기 660년 7월 5일, 양군의 최종적인 배치는 다음과 같았을거야.
 









 660년_7월_5일_양군_최종_배치도.jpg

  서기 660년 7월 5일 양군 최종 배치도
 (방,군,성 배치 병력의 80% 추산 + 군역제도 기반의 필자의 추론 수치)
 
 
 
 
이제 위의 그림과 사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군산시 옥구군 지역과 서천군 장항읍 지역을 비교 확인하면서 전투상황을 필자의 추론을 덧 붙여 그려볼게.
 










기벌포.jpg
 
서기 660년 7월 6일, 여명을 배경으로 수평선 너머로 나당연합군의 함선 1900여척이 모습을 들어내면서 고대 동아시아 최대 상륙작전인 기벌포전투의 서막이 올랐어.
 
  
소정방의 기벌포 상륙 전투는 우리와 중국 양측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구당서 열전 소정방전을 보면 기벌포 상륙작전의 전개과정이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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賊屯兵據江。定方升東岸,乘山而陣,與之大戰,揚帆蓋海,相續而至。賊師敗績,死者數千人,
自餘奔散。遇潮且上,連舳入江,定方於岸上擁陣,水陸齊進,飛楫鼓噪,直趣真都。去城二十許裏,
賊傾國來拒,大戰破之,殺虜萬餘人
 
 
舊唐書 列傳 83 蘇定方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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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에서 주목해야 될 문장들을 하나하나 뽑아보면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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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顯慶五年,從幸太原,製授熊津道大總管,率師討百濟。定方自城山濟海,至熊津江口
현경오년 소정방은 성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웅진강구에 도착하였다.
 
㉡ 賊屯兵據江
적이 강을 지키고 있으니
 
㉢ 定方升東岸,乘山而陣,與之大戰
정방은 동쪽기슭에 올라 산위에 진을 치고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 揚帆蓋海,相續而至。賊師敗績,死者數千人,自餘奔散
돛을 달고 바다를 덮으며 꼬리를 물고 들이닥치니 적병은 무너지고 수천이 죽고 나머지는 흩어졌다.
 
㉤ 遇潮且上,連舳入江,定方於岸上擁陣,水陸齊進,飛楫鼓噪
조수를 만나 배들이 연이어 강에 들어섰고 정방은 안상에서 이를 감싸며 수륙이 함께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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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열전 소정방전에 나온 기록을 나눠보면 5개의 전개상황으로 나타낼 수 있어.
 
  
위 글은 660년 7월 9일의 기벌포에서의 전투를 중국인 역사가가 담담하게 사건이 벌어진 시간 순서대로 적은 것임을 알 수 있지.
  
이제 필자는 위의 구당서(舊唐書) 내용과 지금까지 알아본 내용을 바탕으로 뼈에 살을 붙이듯 이야기를 풀어가 볼게.
 
  




덕적도.jpg
 덕물도 (現 인천광역시 웅진군 덕적면 덕적도)
 
 
위의 내용에는 우리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내용과는 다르게 당군이 덕물도에 상륙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성산을 출발한 후 바로 첫 전투현장인 백제의 웅진강구에 도착한 것으로 적고 있어.
  
 
 
웅진강구라는 명칭을 앞에서 누차 설명했듯이 우리측 자료에는 기벌포 백강이라 적고 있으나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자치통감 등의 자료에는 오직 웅진강구 혹은 웅진구라고 적어 중국인들이 금강을 처음 알았을때의 명칭인 "곰나루"를 한자로 웅진이라고 적은 이두식 표현으로 금강 즉 웅진강이라는 명칭이 중국에서는 금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화하여 적으므로써 우리와 다른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봐.
 




당군의_이동경로.jpg

덕물도 이후 당나라 함대 기동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본 것처럼 당군은 6월 21일 덕물도에 상륙한 후, 몇일뒤 서해안 내해를 따라 내려오면서 백제 서방령군을 묶어 놓은 후 7월 5일 고군산군도에 상륙하여 군 체제 정비 및 휴식을 취한 후 7월 6일 아침 상륙작전을 펼쳤어.
 
 
 
 
상륙작전이 일어난 시간에 대해서 양음력변환기 등을 이용해서 추론하려고 하였지만 1391년 이전의 양음력변환기가 인터넷상에 없어서 결국 부정시법과 평균시법을 대입한 후 오차를 줄이기 위해 경점법을 이용하여 엑셀 매크로로 계산해봤는데 맞을려나 모르겠盧....
 
무튼 서해안의 만조와 간조시간은 대략적으로 6시간 주기로 4번 일어나는데, 만조시각은 대략 아침 06~11시까지며, 필자가 계산해 본 결과 당시 음력 7월 6일 만조시각은 오전 06시 41분이였으므로, 나당연합군의 공격일시는 일출을 기점으로 일어났을거라 추론했어.
*계산이 틀릴확률이 높으니 이른 아침이라고 생각하면 편할거 같盧....
 
 
  
 
 
 
 
  
다음으로 나오는 ㉡'적이 강에 진을 치고 있으니'라는 내용은 당시에는 현재의 군산시 지역이 만조시에는 섬이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해안의 어느쪽에 진을 치고 있었느냐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앞서 우리는 위에서 백제군은 마서량현과 부부리현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는걸 추론했어.
 


당시_부부리현-마서량현의_해안방어선_.jpg


마서량현은 금강하구와 만경강 하구 방어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해.
  
'강에 진을 치고 있으니'란 문장에서 강(江)이기 때문에 이는 만경강과 금강 두곳의 위치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생각 할 수 있어.
 
결국 이 두 강을 방어하기 위해 백제군이 배치를 한다면 마서량현의 전략적 위치는 두말 할 것 없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또한 나당연합군이 이 마서량현을 점령하면 얻는 상륙작전의 이점은 실로 막대하다고 볼 수 있어.
 

마서량현의_전략적_위치.jpg

마서량현 점령시 당군의 공격루트



마서량현의 북쪽은 설림군(現서천군)이며, 동쪽은 시산군(現 군산)이였으므로 이곳을 점령하면 설림군과 시산군을 측면에서 공격 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소정방의 입장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점령해야 되는 곳이였지.

지리적 이점도 중요하긴 하지만 마서량현을 점령하게되므로서 당군이 얻는 더욱 중요한 이점은 바로 금강하구에 포진하던 '백제수군을 압박 할 수 있다'라고 볼수 있어.  따라서 당군이 처음 상륙작전을 펼칠때 본 백제군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마서량현의 백제군이였으며, 나당연합군의 첫 공격은 마서량현 공략전이였을거야.
 



백제군.jpg


이렇게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던 마서량현을 공략하려던 나당연합군은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는 백제군의 강력한 저항이였어.

해안선과 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당연합군의 상륙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으며, 이곳의 방어군은 사비성의 관문인 마서량현을 지키는 정예 中 정예병이였으니 쉽사리 점령 할 수가 없었지.

마서량현을 정면으로 공격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던 나당연합군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 정방은 동쪽기슭에 올라 산위에 진을 치고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定方升東岸,乘山而陣,與之大戰)라는 문장에서 엿볼수 있지.






구당서.jpg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의 주력부대가 상륙한 지점을 뜻하는 문장인 '동쪽기슭에 올라(定方升東岸)'는 기벌포 지역이 어떤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는 곳인가 하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어.
 
구당서에는 이 문장을 '적이 강에 진을 치고 있으니 정방은 동쪽강기슭에 올라 산위에 진을 치고'라고 적고 있는데, 이 내용은 기벌포라는 지역에 있었을 세 장소를 나타내고 있어.


백제병이 진을 치고 있는 곳, 정방이 상륙한 동쪽기슭, 정방이 올라 진을 친 산. 이 세곳 중 한곳인 동쪽기슭은 어디일까?








사신도.jpg


이 내용을 신당서 열전 소열전에서는 '정방이 좌측 벼랑에 나아가(定方出左涯)'라고 다르게 적고있어.
 
그러나 이러한 내용의 차이는 고대의 방위개념인 사신도에서 청룡이 좌측을 가리키며 동쪽을 나타낸다는 의미를 이해하면 좌측과 동쪽은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지.
 
이곳에서 가리키는 동쪽이 어디인지는 우리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아.
 
 
  
 
  
 

삼국사기.jpg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에는 '기벌포에서 백제병을 만나 뒤에서 공격하여 대패시켰다.(到 伎伐浦遇百濟兵逆擊大敗之)'라고 나오는데, 이 내용을 당서(唐書)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당나라군이 바닷가를 지키는 백제군을 정면 돌파하지 못하고 뒤쪽으로 돌아 동쪽기슭에 상륙한 후 산에 진을 치고 적의 뒤에서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되지.
 
백제군이 진을 친 강의 뒤로돌아 상륙한 곳이 곧 동쪽(좌측)기슭이라고 추론할 수 있어.






나당연합군의_최초_상륙지점.jpg

나당연합군(소정방의 中軍)의 최초 상륙지점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나당연합군의 선공은 現 옥구읍인 당시 마서량현 섬이였으며, 강력한 해안방어선에 부딪친 나당연합군은 이곳을 점령하기위해 마서량현의 후방을 공략하기 위해 어느 특정지역에 상륙하였는데, 당시의 군산지형과 접합시키면 마서량현(옥구)을 중심으로한 해안방어선의 뒤쪽은 지금은 사라진 강줄기인 시청에서 칠다리 사이의 금강지류이며 당의 입장에서 방위상의 동안(東岸) 및 좌안(左涯)는 마서량쪽이 아닌 부부리현(夫夫里縣-회현)쪽 강변이 바로 소정방의 중군이 상륙한 지점이라고 판단 할 수 있어.
 
 
13만 대군중 절반만 이지역에 상륙하여도 6만이라는 대부대이지.






노르망디.jpg

노르망디 상륙작전



현재나 과거나 전쟁시 상륙작전은 큰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는데, 방어자는 자신의 지역에서 전투 준비를 끝낸 상태인 반변, 배에서 육지로 뛰어나가는 상륙병은 방어자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소정방이 대군을 백제군이 전력이 집중된 마서량현의 남쪽이 아닌 뒤쪽인 강건너편 동쪽기슭에 상륙시킨 것은 백제군의 허를 찌른 것이라 볼 수 있어.
 











갯벌.jpg


백제군의 허를 찌른것 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마서량현에 대한 상륙전을 펼치자 당군은 크게 당황하였는데, 다름아닌 갯벌때문이였어.

당군에 비해 수적열세였던 백제군이 분산배치했던 이유가 바로 이 갯벌때문이였지.




 
이에 관한 사서의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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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伎伐浦海岸泥不可行​
 
기벌포에 이르자 해안이 진수렁(갯벌)이라 빠져서 나아갈 수 없었다.
 
三國史記 列傳 金柳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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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는 이와같이 갯벌로 인해 당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는 단편적인 기록을 확인 할 수 있었어.
 
정확히 어느곳에 상륙을 하였길래 갯벌이 나타났을까?
 
 
 
구당서의 '동쪽기슭에 올라(定方升東岸)'와 삼국사기의 '뒤로 돌아서 공격하여(逆擊)'라는 문장으로 인해 당나라군의 상륙지역이 금강하구의 군산지역 중에서도 성산면과 개정면, 회현면 지역임을 알 수 있었어. 
 
그렇다면 당군의 상륙지에 대한 더 명확한 증거는 없는 것일까?
 
 
 
 
 
 
 

 

 
필자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서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여 강을 지키는 백제군의 뒤로 돌아 동쪽에 상륙후 공격했다(到 伎伐浦遇百濟兵逆擊大敗之)"는 내용의 상륙장소에 대한 지역적 특징을 알 수 있는 문장을 찾을 수 있었어.
 
또한 위의 사서 내용의 뒷 내용을 살펴보면 '이에 버드나무가지를 깔고 수렁을 건너 나아갈 수 있었다.(不可行乃布柳席以師)'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를 바탕으로 추론하자면 소정방이 상륙한 동쪽기슭은 갯벌이 있는 강가이며 또한 갯벌에 깔을 버드나무가 많은 지역임을 알 수 있어.
 
갯벌이 있다는 내용은 서해안의 큰 특징이 갯벌에 있음을 볼 때 특별한 내용은 아니야..
 





버드나무.jpg

그러나 버드나무가 많은 지역이라는 특징은 군산지역중 한 지역에 관심을 가질수 있지.
 
군산시 옥산면 금성리 일대는 지금은 사라진 금강의 지류가 만경강과 합류되는 여울목에 자리잡고 있는데 금성리 주변에는 이 근처에서는 보기 드물게 버드나무와 관련된 마을 명칭이 확인 할 수 있어.
 







3개_마을.jpg

외류(外柳)마을, 내류(內柳)마을, 평유(平柳)의 위치 
 

 
금성산 기슭의 3개 마을인 외류(外柳)마을, 내류(內柳)마을, 평유(平柳)마을이 그곳인데, 마을주민들은 밧버들(외류), 안버듯(내류), 버들마을(평유)로 부르고 있지.
  
이 지역의 명칭은 옛부터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위의 세마을 주변의 명칭들도 백강에서의 전투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해.
 
이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는 금성리의 금성산은 예전에는 박지산(朴只山)으로 불리웠고 이 산의 남쪽줄기에 자리한 마을인 배그매의 옛명칭이 박박리(朴朴里)고 이곳에 있는 저수지의 명칭이 박박제인 점으로 보아 박지산도 원명칭은 박박지산(朴朴只山)으로 보여.
 




금성산.jpg

左음 로드kill뷰로 본 금성산


이 박박지산이라는 명칭은 고어에서 박(朴)이 '밝다<희다<온<아'로 사용이 되었는데 '온'이나 '아'가 백제어에서 크다를 뜻하기도 하지만 박이 두 번 반복되는 박박이라는 뜻이 밝고 밝은 즉 흰(白)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박작지에서 지(只)라는 단어는 고대 백제어에서 己, 支와 함께 단어의 어미에 붙으면 산성(山城)을 의미하는 지명어미가 되지.
 
  
따라서 박박지산은 백제시대에 흰산성(白山城)혹은 큰산성이라 불리운 것으로 추론 할 수 있어.
 




박지산성 서쪽 회곽도.jpg

박지산성 서쪽 회곽도
(문제될시 자삭하겠습니다...무단펌 죄송합니다..)


이러한 흰산성이라는 명칭은 97년 산성답사에서 금성산(박지산)에서 백제식 계통인 테머리식 산성을 찾아냄으로서 확인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내용으로 보면 배그매의 옛명칭인 박박리도 흰마을(白村)이 되며 현재의 명칭인 배그매도 배그-매의 배그가 백의 파자로 보고 매자는 마을을 뜻하므로 배그-매<흰<백촌(白村)이 됨으로서 그 뜻은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어.
 



백석마을.jpg

금성산(박지산)과 백석마을의 위치
 
 
또 한가지 놀라운 점은 박지산의 북서편에 자리한 옥산면 당북리의 백석산은 박지산과 함께 금강의 지류가 만경강에 입수되는 여울의 양쪽을 지키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백석산의 기슭에 백석마을이 있어. 
 
백석이라는 명칭은 백석(白石)마을 뒷산인 백석산에서 흰돌이 난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는데 현재 주민들은 흔-돌마을이라 부르고 있지.
  
그런데 백석은 일본어로 백(白)이 ハク(白), 석(石)은 スソ(村) 즉 백촌을 뜻하기도 해.
 
이밖에도 당북리의 북서쪽에 위치한 백토마을은 옛명칭이 백뚝개로서 흰여울목이라는 뜻이기도 하지.
 






백강구_전투.jpg

이렇게 이 지역에서 백강, 백촌강과 관련된 명칭들이 다수 발견됨을 볼 때 옛날에는 나루터가 있었다는 박지산의 버드나무와 관련되 세마을 주변지역이 당나라군의 기벌포 상륙작전시 상륙지점임을 확인할 수가 있고 더불어 박박지산이 흰산성(白山城)이고 배그매가 흰마을 즉 백촌, 그앞 백석마을 또한 백촌, 백뚝개가 흰여울로 이지역이 바로 성충과 흥수가 지켜야 한다는 백제의 요로 기벌포 백강 지역이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백촌강 전투의 현장임을 확인 할 수 있었어.
 
 
이상의 내용에서 소정방의 상륙지를 군산시 옥산면의 금성리 일대로 확인하였어.








금성산에서_본_마서량현_방어진.jpg

박지산(現금성산)에서 바라본 마서량현(現옥구읍)의 백제군 해안방어선의 모습
 
 
이렇게 보면 소정방이 진을 친 산은 당연히 박박지산이 되며 박박지산에 진을 치고 뒤에서 공격한 백제의 해안진지는 박박지산 정상에서 눈 앞에 보이는 현재의 옥구읍내리에 있는 옥구읍성 즉 마서량현의 중심지이지.
 
여기에서 마서량(馬西良)이라는 명칭은 마(馬)가 서풍을 뜻하며 서(西)는 새 즉 억새를 뜻하고 량(良)은 나리(川)-(津)을 뜻하므로 바람이 심한 억새가 있는 강가라는 뜻이야.
 
 
 
 
 
 마서량현 공략.jpg

상륙후 당군의 마서량현 공격도
발퀼이라 미안하다 이기야...


결국 간조시간에 이르러 갯벌이 된 강가를 건너 마서량현 후방을 공격하던 나당연합군은 외류,내류,평유마을의 버드나무를 잘라 뻘밭 위에 던져 발이 깊숙히 빠지지 않게 한 후 공격을 감행하여 마서량현에 주둔하던 백제 방어군을 크게 격파하였지.
  
이로서 나당연합군은 당나라 수군함대의 거센 공격을 가까스로 막고있던 기벌포의 백제수군을 압박 할 수 있게 되었어.

기벌포의 백제수군이 무너지게 된다면 의직의 서천 방면군과 시산군(現군산)의 백제군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 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펼쳐지게 되지.


 













소정방은 마서량현이 함락되므로서 당군이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였지만, 당군의 공격을 기점으로 주공방향을 알게 된 중방령 여자진(余自進)은 마서량현을 지원하기 위해 금마군,시산군,두내지현에 있던 병력을 합쳐 북상시키면서 기벌포 전투의 2라운드가 시작되었어. 
  




오성산.jpg


대백제전 당시 소정방과 나당연합군의 최대 고비이자, 백제의 마지막 탈출구(?)였던 오성산 전투의 시발점이였지.
 
 
 



 
 
 
 
 
 
 



 
 
 
 
 
 
다음편은 소정방의 목이 날라갈뻔한 오성산 전투와 기벌포전투의 종반부에 대해 알아볼께. 

지금까지 시간내서 읽어준 밀게이들에게 고맙다 이기야..

 
 
 



5줄요약.
 
 
1. 現 군산시의 해안선은 과거 간척사업에 의해 옛날과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1356년전의 군산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며, 일제시대 간척사업과 조선시대 고지도를 분석하면 구암동산 근처에서 금강의 지류가 두갈래로 하나는 현재 도선장 앞으로 지나는 금강과  나뉘어 경장동-미장들-평사들-석교-당북리 돛대산-박지산-만경강 하구둑으로 이어저 만경강 하류와 만나는 지류가 있었을것으로 추론 된다.
 

2. 660년 당시 옥구읍의 마서량현은 금강과 만경강 하구를 지키는 기벌포의 관문으로서 백제군 방어선의 최전방이였으며, 해안 방어선은 현재의 옥구읍성과 대산산성 그리고 사자암 봉수대(백제-사자봉 보루)까지의 월병산 줄기를 포함한 섬 전체 둘레에 해안 방책이 설치되고 당시 섬이었을 성산토성이 최전선이었으며 그 안쪽인 군산대 뒤 지역인 개삼마을, 신관마을로 이어지는 월명산의 줄기들에도 해안 방책이 있었을 것으로 필자는 추론함.
 

3. 나당연합군의 최초 공격일시는 서기 660년 7월 6일 일출때이며, 마서량현의 백제군의 강력한 저항에 수차례 상륙작전이 실패한 연합군은 이에 박지산(現 회현면) 일대에 상륙하여 마서량현의 후방을 공격하였음.
 

4. 당시 서해안의 간조시간대였으므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진수렁(갯벌)으로 인해 마서량현의 후방을 공격하는데 애로가 있던 연합군은 박지산(現금성산) 산자락의 내류,외류,평유마을의 버드나무가지를 잘라(일설에 의하면 신라 수군사령관인 김양도의 재치라고 전해지고 있다.) 뻘밭에 깔고 진격하여 마서량현을 함락시키면서 금강하구의 백제수군을 압박하였음.


5. 나당연합군의 상륙지점이 명확히 밝혀지면서 여자진의 중방령군이 시산군과 마서량현을 지원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오성산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