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만에 올리는거 같盧.....
어제 간만에 접속해서 일베글 보고있다가 필자의 졸작시리즈에 대한 댓글을 보고 죄책감에 적어도 마무리는 해야되겠구나 싶어서
만사(?)를 제쳐두고 글써본다 이기야...
어짜피 연말연초가 가장 바쁜 직업상의 특징으로 인해 다음글인 제1차 기벌포전투는 기약이 없盧..... 2년전에 임시저장된 내용들도 어떻게 된게 사라졌고...;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제4-1탄. 欲呑高麗 先誅百濟 - 7세기 동북아시아 정세
https://www.ilbe.com/4042796083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제4-2탄. 백제의 군사제도와 5방령
https://www.ilbe.com/4045275070
이번편은 기벌포의 위치 비정과 그에 따른 백제군의 대략적인 배치상황에 대해 알아볼게.
원래는 한번에 기벌포전투의 내용을 쓸라고 했지만, 태그가 많다고 글이 등록이 안되어 부득이하게 2개로 나눴어.
황산벌전투도 비슷할듯.....;;;
또한 필자의 글은 사학계에서 밝혀진 내용이 아니며, 전승설화와 단편적인 논문들을 바탕으로 순전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과 추리로 약 1350여년전의 사건을 유추하는 글인걸 감안해주길 바래.
그럼 시작해볼게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常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沈峴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十六年
기벌포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일부 사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기벌포라는 단어의 생소함에서 오는 의문을 가지고 있어.
그러나 백제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과 고대 한반도 전사(戰史)를 연구하는 전사학자들 있어 탄현, 주류성과 함께 기벌포(백강)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지명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노력이 오래도록 있어 왔지.
백제의 마지막 전쟁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자치통감,일본서기(日本書紀)등 한·중·일의 대표적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 중요 전투나 전투장소 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13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백제 멸망 당시의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그 지명에 대한 기록조차도 역사책들마다 차이가 심해.
기벌포(백강)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서 그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現 사학자들이 추측과 가정으로 그 현장을 단정하는 바람에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어.
그렇다면 기벌포라는 곳이 어떤 곳이기에 수많은 주장과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지금으로부터 1357년 전, 백제 국운이 달렸던 전투의 현장으로 우리 함께 떠나보자.
기벌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기벌포는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 때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최초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인 지역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해.
부실한 교과서와 사료로 인해 기벌포전투는 당군의 압승으로 끝났다고 보는 견해가 대다수이지만, 실상 자세히 살펴보면 당군은 백제 수비군의 저항이 거세어 고전 끝에 겨우 승리했어.
사료에도 명백히 전해 내려오는 바, 백제의 충신인 좌평 성충과 흥수가 똑같은 내용으로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기필코 지켜내야만 하는 백제의 중요 장소로 꼽은 지역이 기벌포인데 이곳을 백제조정이 가만히 놔두었다는건 어불성설이지.
기벌포는 당나라 13만 대군의 상륙작전 이외에도 백제·왜 연합군과 나당연합군이 백제 부흥운동의 성패가 달렸던 백강(백강구,백촌강) 전투가 벌어진 곳이며 고구려, 백제 멸망 후 신라군이 한반도 지배를 고착화하려던 당나라군을 이 땅에서 축출하여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기벌포 해전이 일어났던 역사의 획을 긋는 고대 한국사의 핵심 장소였지.
이와 같이 우리민족 역사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기벌포가 이렇듯 그 장소를 못 찾아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전쟁에서 패망한 나라인 백제와 연관된 땅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돼.
거의 모든 유물유적이 파괴되고 사실이 왜곡된 백제의 비극이 그 원인일 테지....
백제 멸망 후 1300여 년이 지나 산천과 언어가 바뀐 상황에서 더욱이 학계의 논쟁이 끊이지 않는 기벌포의 위치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밝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이미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 알고 있는 게이들은 위치 비정에 대한 부분을 건너 뛰고 싶다면 점선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끝나는 부분은 스킵해도 되고, 확실히 어디인지 알고자 하는 게이라면 시간날때마다 스킵하면서 읽어줘라....ㅎ
----------------------------기벌포 관련 내용 시작----------------------------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백강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다양한 주장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백강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논쟁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아.
당시 이케우치 히로시가 조사했던 장군총의 모습
첫째. 금강하구지역이 백강이라는 주장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에 의해 제기된 후 이병도 박사가 「한국사」 고대편에서 주장함으로써 통설처럼 되었어. 그 외에도 민세 안재홍과 전영래 교수의 동진강 백강설과 충남 연기군의 향토사학자 김재붕 선생의 안성천 하구에 있는 백석포 백강설 등이 백강 위치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지.
※ 이케우치 히로시는 세키노, 야쓰이와 함께 지금 우리가 배우는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반도 고대사를 체계적으로 만든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임.
식민사학이다 어쩌구 하면서 소위 재야사학자와 환빠들이 매도하지만 일본 사학자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고대 한반도사를 체계적으로 잡기에는 어려웠을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백강의 위치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유는 아마도 주류성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으로 보여.
백제부흥군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은 아직 그 위치가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역사의 수수께끼인데 바로 이 주류성의 근처에 백강이 흘렀다는 옛 기록들 때문에 주류성과 백강의 위치는 서로에 의해서 그 정당성의 증거로 제시되어지는 양상을 띠어왔어.
즉 충남 연기군이 주류성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면 그 주장의 마지막을 연기군의 주변에 있는 안성천 하구의 백석포가 백강이라는 물증을 찾아냄으로써 연기군이 주류성이라는 확실한 이론적 보완을 하는 형태이지.
이러한 예는 부안 주류성설과 연결된 동진강 백강설도 같은 경우야.
서천 건지산성(乾芝山城)
사적 제 60호 둘레 1,300m, 면적 16만4128㎡. 현재 동서문지(東西門址)가 남아 있다.
축성시기는 대개 백제 후기에서 통일신라 초기로 보고 있는데, 이 산성은 주봉에 위치한 긴 타원형의 산정식(테뫼식)산성과
이 성을 거점으로 서북쪽의 작은 계곡을 두른 포곡형(包谷形)산성, 그리고 서문지의 남서쪽에 두 개의 소규모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는 반대로 서천 한산설(한산모시 할 때 그 한산이 여기야) 같은 경우는 먼저 웅진강구인 금강하구를 백강으로 규정한 후 이미 정해진 금강하구 근처에서 주류성을 찾으려다보니 서천군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단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지.
이렇듯 특정지역이 주류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근처에 백강이 필요하고 반대로 어떤 강이 백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주위에 주류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수많은 반론과 주장이 있어왔다고 봐.
과연 주류성과 백강은 서로 증거로 제시될 만큼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을까? 결국 문제의 숨겨진 답은 주류성과 백강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존재했느냐 하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명확해질 수 있어.
다음의 기사를 한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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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船千艘 停在白江 百濟精騎 岸上守船
왜선 일천 척이 백강에 머물러 있었고, 백제 정예기병들이 강가에서 왜선을 지키고 있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文武王 十一年
仁軌遇扶余豐之衆于白江之口
인궤가 백강구에서 부여풍의 무리를 만났다.
舊唐書 列傳 199 百濟專
自熊津江往白江,會陸軍同趣周留城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
舊唐書 列傳 84 劉仁軌
賊將至於州柔繞其王城。大唐軍將率戰船一百七十艘。陣烈於白村江
적의 장수(신라군)가 주류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당의 군장(손인사)이 군선 170척을 거느리고 백촌강에 늘어섰다.
日本書紀 天知天皇 二年 八月 一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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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들로 인하여 사학자들은 백강과 주류성이 적어도 서울과 한강처럼 근거리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여.
위의 예문을 보는 사람의 견해차가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위의 백강과 주류성의 위치에 대한 예문들과 그 외의 예문들을 볼 때 백강에서의 해전을 포함한 신라 백제 기병대의 전투와 주류성에서의 전투는 내용상으로는 백제부흥군의 사활을 건 전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나 거리상으로는 어느 정도 떨어져서 벌어진 전혀 별개의 전투로 생각하고 있어.
때문에 필자는 백강에서 주류성까지의 거리가 금강에서 전주처럼 멀리 떨어진 거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군산에서 부안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 이러한 필자의 주장은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백강 동진강설과 백석포 백강설의 주 내용을 먼저 알아보자.
기벌포 동진강설
오다쇼코(小田省吾)에 의해 부안 주류성설이 예견된 후에 민세 안재홍과 이마니 시류(今西龍)가 부안 주류성을 주장하였고 현재는 전영래 교수가 우금산성 주류성설과 동진강 백강설을 주장하여 학계의 관심과 함께 정설로서의 인정을 가장 많이 받고 있어.
먼저 우금산성 주류성의 경우 필자도 우금산성 성곽의 총 둘레가 3960m로서 그 크기로 보아 왕성의 규모이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밝힌 주류성의 지세에 맞게 논밭과는 떨어져있고 메마른 자갈밭으로 농사에는 적당치 않고 전쟁에 적당한 터전이라는 내용과 복신이 죽음을 당한 굴신의 존재 그리고 피성(避城)으로 전해지는 김제와의 지리적 관계 등으로 볼 때 부안 주류성설이 인정을 받는 이유는 타당성이 있어.
그렇다면 동진강 백강설은 어떠할까?
우금산성 주류산성설과, 동진강 백강설을 주장하는 전영래 교수는 동진강이 백강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몇 가지 예를 들고 있는데 다음과 같아.
첫째. 구당서(舊唐書) 열전 소정방전의 '정방은 동쪽 강기슭에 올라(定方陞東岸)‘라는 내용을 당군 상륙지의 지리적 특징으로 규정하였어.
즉 소정방군이 동쪽강 기슭에 오르려면 기벌포는 방위상 정동쪽이 육지여야 하는데 금강하류의 물줄기가 거의 동에서 서로 흐르기 때문에 금강은 백강이 될 수 없으며 동진강은 강의 입구가 남에서 북으로 트여 있기 때문에 방위상 동쪽이 육지이므로 당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지명으로써 동진강이 소정방군의 첫 상륙지인 기벌포이며 당 수군과 일본 수군의 격전지인 백촌강이라 주장하지.
둘째. 동진강은 본래 백제의 요로이며 험애한 지형이였다고 주장.
셋째. 6월 21일 덕물도에 도착하여 신라 태자 김법민과 만나 7월 10일 백제 남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당나라군이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하는데 6월 21일에서 7월 9일까지 약 20 여일 간의 공백기간에 13만 대군을 실은 당나라 전함들이 바다에 계속 떠있기에는 식수 및 식량의 부족과 함께 6∼7월이 태풍이 부는 계절이므로 분명히 웅진강구 이전의 어느 지역에 상륙하여 휴식을 취했을 것인데 그곳이 바로 동진강구라는 것이야.
넷째.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내용 중 백촌강 해전의 패전 이유로 "불관기상(不觀氣象)"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뜻을 동진강의 지리적 환경과 연관시켜서 일본 수군이 동진강의 조수간만의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공격하다가 갑자기 조수가 빠지자 동진강의 망망대해가 진흙 바닥의 갯벌로 변하여 배가 빠지는 바람에 뱃머리를 돌릴 겨를도 없이 배는 불타고 물에 익사하는 자가 많았다고 주장하지.
마지막으로 구당서(舊唐書)의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自熊津 往白江 會陸軍 同趨周留城)'라는 기록을 동진강 백강설의 근거로 삼고 있어.
이 문장을 증거로 전영래 교수는 백강이 금강하류지역이 아닌 웅진강 즉 금강을 벗어난 다른 지역에 있고 그곳이 바로 동진강이라 주장하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필자의 생각은 뒤에서 밝히겠지만 먼저 짧게 적어보자면
첫째, 동진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백강이고 금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기 때문에 백강이 아니라는 내용은 너무 단순한 발상인거 같아. 금강은 굽이굽이 천리길을 흐르는 큰 강으로 금강하구의 군산지역만 보더라도 흐르는 굽이 때문에 방위상 동쪽으로 상륙할 곳은 너무도 많기 때문이지.
둘째, 동진강이 백제의 요로이며 험애한 지형이기 때문에 백제의 성충 흥수가 꼭 지켜야 하는 백강이라 주장하는데 '백제의 요로'라면 과연 백제의 도성이며 중심지인 사비성과 웅진성에 이르는 강인 금강과 동진강 중에서 어느 강이 군사전략적으로 중요한 강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동진강보다는 금강이 백제의 요로라 볼 수 있어.
셋째, 당군이 20여 일간 바다에 떠있을 수 없으므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동진강에 들어서서 변산반도에 상륙했을 것이라는 내용인데 전영래 교수는 왜! 소정방의 첫 도착지인 덕물도가 섬의 크기로 보아 13만 대군이 휴식을 취하기에 적당한 곳이며 또한 덕물도는 당의 연합군인 신라의 지역으로 신라군으로부터 군수보급이 원활한데, 언제 기습을 당할지 모르는 백제지역의 변산반도에 들어서서 휴식을 취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아마도 당나라군은 6월 21일 덕물도에서 신라 태자와 만난 뒤 백제군의 분산배치를 노리고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덕물도와 제일 비슷한 크기인 고군산군도에 상륙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당군이 덕물도에서 15~17일간 머물렀다는 주장 또한 말이 안되는 것이, 신라군의 보급이 원활한 덕물도에서 시간을 허비한 후 3일만에 기벌포에 상륙작전을 하였다고 한다면,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당 수군함대의 이동을 백제가 전혀 몰랐을까?
※3일만에 서해 내해로 내려와 기벌포에 도착하기에는 함대 이동속도와 시간상 불가능함.
내해가 아닌 외해로 돌아서 기벌포를 급습했다고 하기에는 음력6월은 태풍이 일어나는 시기이므로 소위 자살행위로 밖에 안보여.
그러므로 당 수군함대는 전글에서 서술했듯이 백제군의 분산배치를 노려 서해안 내해로 상륙할 듯 안할 듯 간보며 내려왔을거야.
넷째 백촌강 전투의 해전 내용에서의 '불관기상(기상을 살피지 않았다)'이란 뜻은 일본수군이 동진강의 갯벌에 빠졌다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썰물 때의 물살 때문으로 이해하면 적당해.
서해안에서 바다에 합류되는 강(舊唐書-조수를 만나 배들이 연이어 강에 들어섰다.)들은 거의 모두 동진강과 비슷한 갯벌의 환경조건을 지니고 있었지.
마지막으로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나아갔다"는 이야기는 과거에는 웅진성(공주) 지역인 금강의 상류를 웅진강으로 불렀고 사비성(부여) 이하의 금강하류는 기벌포, 사비하, 백강 등으로 불리웠음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웅진강과 백강을 별개의 다른 지역에 있는 강으로 보는 시각은 강이 금강처럼 클(大) 때에는 강의 명칭도 강이 지나는 곳에 따라 여러 가지임을 이해하지 못한 내용으로 보여.
때문에 필자는 동진강 백강설은 변산반도에 있는 우금산성 주류성설 때문에 존재하는 내용으로 생각하며 그 사실성에 의문을 갖고 있어.
기벌포 안성천 백석포설
충남 연기군의 향토사학자인 김재붕 선생은 주류성은 충남 연기군이고 백강은 안성천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백촌강(白村江)은 안성천 하구에 위치한 백석포라고 주장해.
김재붕 선생은 백석포는 일본서기에 백촌강으로 표기하고 <하쿠스키노에-ハクスキのエ>로 읽는데 이것은 백석포를 일본어의 음으로 읽고 뜻을 붙인 것이라 생각해.
즉 백석에 대한 일본인들의 발음은 <하쿠스키ハクスキ>이지만 <스키スキ>는 일본고어에서 <村>이었으며 <エ>은 江이나 浦를 의미하는 말이었으므로 일본어 <ハクスキのエ>가 백석포라는 뜻으로 생각해.
또한 오늘날에도 백석포 근처를 ‘흰들‘이라 하고 안성천을 ’흰들강‘이라고 불러 백강이 분명하다고 주장해.
그러나 이 내용 또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주류성을 연기군으로 비정한 후 연기군 주류성설에 대한 증거로써 만들어진 백석포 백강설이 아닌가 생각해.
백석포가 백촌강이라는 주장에 대해 전영래 교수의 반론의 글을 옮겨보면 백석포라는 지명은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誌)에 처음 등장하는 포구명이야.
이전 고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나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름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백촌강을 <ハクスキのエ>라고 훈독한 것을 백석포의 백석을 일본말로 음독하여 <ハクスキ>라고 읽고 거기에 浦(개 포)의 일본말 새김 <エ>를 합성한 모양이나 白村의 원뜻과는 거리가 먼 착상이지.
백촌이란 적어도 삼국사기 지리지에 등장하는 이름이기 때문이야.
또한 663년 주류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나당연합군이 7월 17일 웅진을 출발하였는데 당군과 신라군의 육군은 8월 13일 주류성 아래 도착하였고 유인궤의 수군은 웅진강을 나아가 백강에 가서 육군과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 하였어.
주류성을 연기군으로 비정하였을 경우의 서기 663년 당군의 진격로
이때 만약 연기군이 주류성이고 백석포가 백강이라면 웅진을 출발한 육군은 웅진에서 북방 12㎞지점에 있는 연기군의 주류성까지 27일이나 걸려서 도착한 것이고 수군은 웅진강을 빠져 나와서 충남 해안지방을 북상하여 아산만에 들어가서 안성천 즉 백강에 도착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된다고 말하며 반론을 펴고 있어.
이러한 전영래 교수의 반론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
마지막으로 웅진강구 즉 금강하구 백강설이 남아있는데 이 내용은 좀따 서술해볼게.
역사서에는 나당연합군의 백제침략 시 당나라군의 첫 상륙지점에 대하여 그 지명의 명칭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어.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자치통감 등 중국 역사서에는 첫 상륙지점을 한결같이 '웅진구' '웅진강구'라고 적고 있어.
이에 반하여 우리측 사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구당서(舊唐書) 소정방 열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의 '웅진구'라는 명칭을 사용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첫 상륙지점을 전부 '기벌포'와 '백강'이라 표기하고 있지.
또한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자신들이 참가한 전투인 나당연합군과 백제 왜 연합군의 백강 해전을 기록하며 백강을 '백촌강'이라고 적고 있어.
현재까지의 웅진구,백강,기벌포의 위치 비정 지역
필자는 이러한 삼국역사서의 서로 다른 표기를 한,중,일 삼국이 서로 자신들과 관련한 동일사건이 발생한 동일 지역에 대한 표기를 서로 명칭만 다르게 표기한 것이 분명함을 삼국의 역사서를 비교 검토해 봄으로써 알 수 있다고 생각해.
이러한 확인의 결과 웅진강구 혹은 웅진구와 기벌포, 백강 혹은 백촌강이 명칭만 다른 동일지역임이 확인되면 적어도 웅진강구 혹은 웅진구가 금강의 옛 지명임은 확실하므로 기벌포에 대한 위치 확인은 쉽게 할 수 있어.
또한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백강은 백마강의 준말이고 일본사에서는 백촌강(白村江)이라 일컬었는데 촌(村)은 뜻이 "말"이니 백촌강은 곧 백마강(금강)의 별역(別譯)이다'라고 하였어.
그러나 이러한 견해 또한 학계에서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실이야.
웅진강구와 백강은 금강입구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면 기벌포(지화포, 장암, 손량) 등의 명칭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필자는 이러한 동일장소에 대한 삼국의 서로 다른 지명표기는 아마도 세 가지 이유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해
첫째, 백제멸망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후 삼국(신라, 중국, 일본)이 역사를 정리한 연대가 서로 다른 까닭에 시간의 흐름에 의한 지명의 변화와 언어, 기록상의 차이점 때문이며
둘째, 우리가 중국식 한자문화에 깊이 빠질수록 우리 고유의 지명에 대한 우리식 표현을 한자식으로 기록하다보니(그 예로 통일신라 경덕왕 6년 757년의 고유지명의 한자식 개명이 있다)나타난 결과이며
셋째로 하나의 큰 강을 외국인들은 그들이 그 강을 처음 알게 되었던 명칭으로 고유명사화 하여 부르지만 그 강과 같이 살아가는 내국인들은 편의에 따라 혹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의 이름이 다르며 또한 그 강이 큰(大) 경우 강이 지나는 지역에 따라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데서 오는 문제들이라고 생각해.
이러한 기벌포의 복잡한 명칭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방법으로 먼저 각각의 명칭에 대한 어학적 확인과 다음으로 옛 역사서에 등장하는 기벌포, 백강, 웅진강구에 대한 내용 확인을 통하여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보자.
기벌포, 백강, 웅진강구, 백촌강 등의 각기 다른 명칭들이 어떤 관계에 의하여 동일사건이 일어난 하나의 지명으로 사용되었나 하는 의문은 먼저 고대 백제어에 대한 어학적 접근 방법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확인하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봐.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좌)
백제 고대어 연구는 충남대 도수희 명예 교수님의 학설을 주내용으로 서술해볼게.
도수희 교수님는 백강(白江)의 백(白)에 대한 고대 백제어의 뜻이 백(伯)자와 같이 통용되었다고 추정하였어.
때문에 백(伯)자는 그 속뜻이 장(長)자와 대(大)자이므로 백강의 다른 명칭인 기벌포, 장암에 결부시켜 긴∼긴벌개로 해석했지.
그 증거로 백강의 백(白)자를 풀어보면 《강희자전(康熙字典)》에 白=伯=長으로 나오는데 이 뜻은 백이 크거나 길다는 伯, 長, 大와 그 뜻을 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이야.
여기에 덛붙여 백강의 옛 명칭인 웅진강이 고마( ?)>곰(나루)>금(강)으로 변화한 것은 웅진강 즉 곰(熊)의 본래 의미가 무엇이든 그것이 현실적으로 곰이라 불리우고 그 강이 大江이고 보니 큰 강이라는 의미로 금강이라 음을 빌린 한자어 표기일 것으로 보고있어.
즉 금강을 깁~긴벌=긴(長江)의 크고 긴 강의 뜻으로 설명하며 백강의 백(白)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뜻은 熊=白=伯=錦=長(大) 등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
이 말은 결국 웅진강과 백강과, 금강은 그 명칭은 다르지만 그 뜻은 모두 고대어의 큰(大)강 긴(長)강이라는 뜻으로 같은 하나의 강(江)임을 확인해주고 있어.
위와 같이 白을 伯, 長, 大로 해석하여 이것을 기벌포(伎伐浦)에 대응시켜보면 기벌은 기블-긴벌로 나오며 지벌포(只伐浦) 또한 지불-진벌로서 모두 장(長)의 길다는 뜻이 나와.
이 내용은 삼국유사에서 기벌포의 위치를 적음에 있어 '기벌포는 즉 장암 혹은 손량 또는 지벌포 또는 백강이라 한다.(卽長岩, 又孫梁一作只伐浦又白江)'는 기벌포에 대한 명칭 중에서 손량을 제외한 나머지 명칭이 긴 강 혹은 큰 강이라는 동일한 뜻임을 확인할 수 있지.
또한 도수희 교수는 강(江)의 명칭을 백촌강과 백마강은 백강에서 파생된 후대의 명칭으로 보며 지리적으로는 현재의 금강 중에서 공주를 중심으로 하는 상류지역의 호칭이 예전에 웅진강이었다면 그 하류인 부여에서 서해까지는 백강으로 보았다. 이러한 웅진강과 백강의 명칭구분은 사료를 통하면 더욱 확연해 짐을 알 수 있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수희 교수님는 백강을 금강하류로 보고 백강의 의미를 큰 강, 긴 강으로 해석하였지.
이 글에서는 기벌포의 위치를 확인 방법으로 역사서에 기벌포, 웅진강구, 백강, 백촌강이 어떤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는지를 확인해보면 그 지명이 갖는 지리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그 위치를 가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아래 역사서에 등장하는 기벌포 기술 내용을 알아볼게.
지루하겠지만... 너무 길면 킵해놓고 읽어줘라...
백제 의자왕 16년 3월 왕의 실정을 직언하다가 간신 임자의 무고로 옥에 가두어진 후 단식 28일만에 죽은 백제의 지략가이며 당대의 영웅(英雄)인 좌평 성충은 옥중에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을지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니 신이 한 말씀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천시와 인사를 살피건대 오래지 않아 전화가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지세를 택하여 위쪽에 처해서 적에게 대응해야한 만전(萬全) 합니다. 만일 적병이 침입하거든 육로로는 탄현에서 막고 수로로는 기벌포지안에서 막아 험한 곳에 웅거해 싸워야 합니다"라고 말했어, (三國史記 百濟本紀 의자왕 16년조)
이후 백제 의자왕 20년 나당 연합군의 침략소식에 작전회의를 하였으나 결론이 나지 않자 일찍이 성충의 무리로 지목되어 고마미지현에 유배된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계책을 물으니 흥수는 "백강(白江 或云伎伐浦), 炭峴(或云沈峴)은 국가의 요충이라 한 사람이 칼을 들고 막으면 만 사람이 덤비지 못할 곳이니 수륙의 정예 병력을 뽑아 당의 군사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왕성을 지키다가 저네들이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곤해진 다음에 맹렬히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三國史記 百濟本紀 의자왕 20년조)
위의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서 좌평 성충과 흥수의 내용은 기벌포 혹은 백강을 찾는데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어.
성충과 흥수의 내용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다음과 같아.
첫째. 위의 두 사람은 모두 백제 최고의 전략가들로서 적의 침입시 그 공격로를 두 사람이 일관되게 육로로는 탄현을 해로로는 기벌포 혹은 백강을 들고 있어.
이로 인해 우리는 위치를 알 수 없지만 기벌포 혹은 백강의 군사적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지.
부여 사비를 중심으로한 외각 방어선과 금강의 지리적 위치
이 말은 역으로 생각하면 백제에 있어서 해로로서 가장 중요한 방어지역을 찾으면 기벌포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 되는데, 이러한 뜻에서 본다면 금강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에 이르는 단 하나의 해로(海路)이므로 성충과 흥수가 강조한 수로를 통한 적의 침입시 핵심방어시설이 되므로 성충과 흥수의 내용을 보면 당연히 기벌포와 백강은 금강임을 확인할 수 있어.
둘째. 성충의 기벌포지안(伎伐浦之岸)과 흥수의 백강(白江) 혹은 기벌포(或云伎伐浦)의 표기로 인하여 두 지명이 명칭만 다른 동일한 지역임을 확인 할 수 있지.
또한 앞장의 어학적 확인내용을 볼 때 성충의 기벌포와 흥수의 백강은 모두 긴 강(長,) 큰 강(大)이란 뜻을 내포한 현재의 금강을 나타낸 서로 다른 명칭이라고 볼 수 있어.
당의 역사서 내용을 보면 백제 침입시 당군의 첫 상륙지를 우리의 기벌포, 백강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고 웅진강구 혹은 웅진구라는 명칭만 사용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단어만 다를 뿐 내용을 보면 기벌포나 웅진강구나 같은 장소임은 앞에서 이미 확인하였어.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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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慶五年,從幸太原,製授熊津道大總管,率師討百濟。定方自城山濟海,至熊津江口,
賊屯兵據江。定方升東岸,乘山而陣,與之大戰,揚帆蓋海,相續而至。賊師敗績,死者數千人,自餘奔散。
遇潮且上,連舳入江,定方於岸上擁陣,水陸齊進,飛楫鼓噪,直趣真都。去城二十許裏,賊傾國來拒,大戰破之,殺虜萬餘人
현경 5년 백제를 정벌하려고 정방은 성산(城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웅진강구에 이르렀다.
적병이 강을 따라 진을 치고 있으니 정방은 동쪽 강기슭으로 올라(定方升東岸) 산위에 진을 치고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돛을 달고 바다를 덮으며 들이닥치니 적병은 무너지고 수천이 죽고 흩어졌다.
조수를 만나 배들은 연이어 강에 들어섰고 정방은 안산(岸山)에서 이를 감싸면서 수륙이 함께 진격하였다.
백제의 도성 밖 20여 리를 남기고 적은 온힘을 기울여 막았으나 크게 이겨 만여 명을 사로잡았다.
舊唐書 列傳 83 蘇定方專
神丘道大總管,率師討百濟。自城山濟海至熊津口,賊瀕江屯兵,定方出左涯,乘山而陣,與之戰,賊敗,死者數千
신구도대총관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려고 성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웅진구에 이르러
적이 강에 둔병하고 있어 정방은 그 좌측 벼랑에 나아가 산위에 진을 쳐 공격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수천이 죽었다.
新唐書 列傳 36 蘇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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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기벌포에서의 첫 상륙작전을 묘사한 내용으로 두 내용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의 우리측 기록을 보면 기록을 보면 '기벌포에 이르러 백제군을 만나 뒤로 돌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와 이외에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을 보면 당의 기록인 웅진강구, 웅진구와 우리의 기록인 기벌포, 백강이 지명만 다른 동일한 내용의 사건임을 확인 할 수 있어.
또한 구당서의 내용 중 '돛을 달고 바다를 덮으며 들이닥치니 적병은 무너지고 수천이 죽고 흩어졌다. 조수를 만나 배들은 연이어 들어섰다.'라는 표현은 첫 전투지역인 웅진강구가 웅진강과 서해 바다가 만나는 현재의 금강하구지역임을 나타내는 문장이야.
그러하기에 바다로부터 강으로 공격할 수 있으며 조수를 만나 강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지.
여기에 등장하는 웅진강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금강에 대한 기록 중 "공주를 금강 또는 웅진강이라 한다.(至公州爲錦江爲熊津江云云)"한 것으로 보아 현재 금강의 옛 표기임이 분명하나 이렇게 역사서에 나오는 지명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찾음으로서 우리는 성충과 흥수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강조한 기벌포와 백강 그리고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웅진강구와 웅진구가 금강하구의 군산지역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어.
앞에서 기벌포가 백강, 웅진강구, 웅진구 등으로 표현되지만 그 장소는 동일한 지역임을 확인했으며. 또한 이러한 확인 아래 기벌포가 금강의 하구일대임을 알 수 있었어.
이번에는 삼국유사(三國遺事) 태종춘추공조에 나와있는 기벌포 명칭에 대하여 알아보자.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에서 저자인 일연은 기벌포에 대한 후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기벌포의 또 다른 명칭을 네 곳이나 기록하고 있어.
'기벌포는 장암 또는 손량 한편 지벌포 또는 백강(伎伐浦 卽長岩又孫梁一作只伐浦又白江)'이라고 여기에서는 중국에서 부르는 웅진강구와 일본의 백촌강이라는 명칭을 제외한 기벌포와 관련된 모든 지명이 나오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기벌포에 대한 명칭의 혼재로 인하여 두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어
하나는 기벌포가 하나의 강이 아닌 다섯 개의 지명이 혼재하는 넓은 곳인가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기벌포라는 한 지명에 대한 세월의 흐름에 따른 명칭의 변화인가 하는 문제이지.
우리는 이미 앞에서 白이 고대어에서 길거나 크다는 뜻의 伯, 大, 長의 의미로 사용되면 백강은 긴 강이라는 뜻임을 확인했으며, 또한 기벌포는 기블-긴벌로 지벌포는 지블-진벌로 장암은 긴-의 뜻으로 모두 긴(長)의 뜻이 내포된 기벌포(지벌포)>백강>장암의 순서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어가 변천한 것으로 확인했어.
그러나 이것은 국어학적 해석으로 필자의 생각으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로 다른 단어일지라도 과거의 지명은 사라지지 않고 과거의 지명과 새로운 현재의 지명이 같이 공존하며 이용된 것으로 보여.
즉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고려시대에 동시대의 고려인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주고자 노력한 기벌포는 하나의 포구가 아닌 본래 웅진강으로 불리우던 곳으로 고려시대 당시에도 백강 혹은 기벌포로 고서에 나와있으나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거나 혹시 백강, 기벌포가 당시 사용되는 지명이었다 할지라도 기벌포를 정확히 규정 하는데는 부족하다 느껴 기벌포라는 의미를 지닌 주변 강가의 지명을 적어 이해를 돕고자 한 것으로 보여.
이 명칭 중 손량은 속칭 강변이라는 뜻과 겨울에는 몹시 춥다는 뜻이 있으며 장암은 현재 금강의 하구인 서천군 장항읍 장암동의 명칭으로 길고 큰 바위가 있다고 해서 장암이라 불렀으며 고려시대부터 부른 명칭으로 백제 때부터 마을이 형성된 곳이라고 해.
서천군 장항읍은 백제시대에는 설림군 관할이였으며, 장항읍은 설림군 직속 관할이였어.
장항읍 일대에 있는 백제계 산성은 위에서 서술한 큰 바위, 장암에 있는 장암산성, 장항읍 송내리에 있는 송내리 산성. 긜고 북쪽에 위치해있는 중태산성으로서 삼각형 배치를 이루고 있어.
백제계 산성의 위치를 통해서라도 現 서천군 장항읍 일대는 백제의 군사적 요충지였다는걸 알수 있지.
이러한 명칭 조사를 통하여 우리는 기벌포, 백강, 지벌포, 장암, 손량이 모두 금강의 지류 중 부여지역 아래인 하류지역을 나타내는 단어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어.
기벌포(긴벌개), 즉 긴갯벌이 있는 강가와 장암 등의 명칭으로 인하여 금강의 하류 중에서도 금강이 서해와 합류하는 서천과 군산 인근지역이 그 현장이였음을 우린 추론 할 수 있게 되었어.
----------------------------기벌포 관련 내용 끝----------------------------
지금까지 기벌포에 대한 위치비정을 읽어온 게이들아
수고 많았다.
이제 군사,전략적 시각에서 기벌포에 대한 당군의 상륙작전의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는 앞에서 기벌포를 찾는 방법으로 주로 옛 지명연구 및 역사서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기벌포의 위치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어.
전쟁의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의 상황을 알면 나당연합군이 어떤 방법으로 백제를 침공했는가 하는 내용을 알 수 있으며. 그리하여 나당연합군의 전략을 파악하면 당나라군대의 공격루트 또한 확인이 가능하리라 생각해.
당군이 백제전쟁에 임하는 본심을 알기 위해 당나라 장군 유인궤의 말을 빌리면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면 먼저 백제를 공략하고 힘을 남겨 군대를 주둔시켜 그 심장부를 제압해야한다."고 했어.
이 말로써 우리는 당나라가 수세에 몰린 신라를 도와주려고 전쟁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세계제국을 만들려 하는 중국의 자존심을 번번이 꺾은 동북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참전한 것임을 알 수 있지.
당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침입과 패배의 교훈은 당 고종의 백제공략을 위한 기본전략을 세우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걸 전편에서 알고 있을거야.
특히 고구려 공략에 출전한 적이 있는 대장군 소정방은 고구려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백제공격의 작전을 철저히 세웠을 테지.
이러한 준비 끝에 만들어진 백제를 공격하는 당의 기본전략은 한마디로 육지와 바다를 이용한 수륙양동작전을 통한 백제 도성인 사비성에 대한 '기습작전'이라 할 수 있어.
한나라의 기자조선 공격 상황도
이러한 작전은 옛 부터 한민족과 중국의 전쟁사에 자주 등장해.
중국이 우리민족을 공격할 때에는 육군과 해군이 함께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육군은 국경을 정면 돌파하여 우리민족의 도성으로 향하고 수군은 고조선, 고구려, 백제 등의 우리고대 국가들이 도성 옆에 큰 강을 끼고 있는 점을 노려 수로로 단번에 왕이 있는 도성을 기습 점령하려 했지.
이렇게 수군의 기습으로 도성을 점령한 후에는 국가의 지휘체계를 무력화시켜 투항자를 극대화시키고 잔존한 저항세력은 육군을 이용하여 토벌하는 전술을 사용하였어.
이러한 예는 한과 위만조선의 전쟁, 수양제의 고구려 침입 등에서 살펴볼 수 있지.
대표적인 청야작전의 예인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이에 대해 중국왕조의 수륙군을 이용한 기습 양동작전에 대항하여 한반도 고대왕조들은 험한 지형을 이용한 산성에 의지하여 장기전을 펼쳐 적의 사기저하와 식량 및 부기의 보급 중단으로 적의 전투력이 떨어지면 나아가 공격하여 중국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 대승을 거두었어.
이러한 작전을 "청야작전"이라 했지.
백제도 흥수의 계책대로 "당병은 백강을 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한후 대왕은 성을 굳게 지켜 적군의 식량이 떨어져 병사들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라는 "청야작전"만 썼다면 나라의 멸망은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아.
어쨌든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때 그 지휘권은 수적으로 병력이 많은 소정방에게 있었고 그에 의하여 기본 작전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볼 때 나당연합군의 작전은 중국왕조와 고대 한반도 왕조와의 전쟁 때 중국이 주로 사용한 육군은 국경을 돌파하여 도성으로 향하고 수군은 강(江)을 이용하여 상대의 도성을 불시에 공격하는 수륙양동 기습작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어.
다만 육군이 당나라군이 아닌 신라군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지.
이러한 기습작전에 의하여 나당연합군이 거쳐간 기벌포와 탄현이 백제좌평 성충과 흥수가 적의 침입시 굳게 방비해야 할 곳으로 지적한곳과 일치함은 의미하는 바가 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을 함에 있어서 적의 약한 곳을 공격하는 것은 병법의 기초이며, 특히나 기습공격의 경우 더욱 그러하지.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그 위치를 군산지역이라고만 추정한 기벌포라는 지역이 갖고 있는 전략적 성격을 알 수 있어.
즉 기벌포는 나당 연합군측이나 백제측이나 양측의 전략가들은 모두다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곳이며 또한 당시 전략적 중요성에 비하여 국가기강이 해이(?)해진 백제의 수비가 약화된 곳이라는 것이지.
더구나 수로인 웅진강구는 중국의 한민족과의 전쟁시 기본작전대로 라면 수륙양동 작전 중 수군이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에 이를 수 있는 강의 입구이기 때문이지.
결과적으로 기벌포와 탄현은 나당연합군이 이 백제의 도성을 향하여 기습작전을 하는데 요구되는 모든 것을 갖춘 곳이였어.
왜냐하면 신라와 당군이 덕물도에서 작전을 세운 후(6월 21일) 한 달여 만인 7월 18일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으니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문무왕 11년에 당나라 장군 행군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들은(신라와 당) 기일을 달리하여 서로 응원하기로 하고 하루아침에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하루아침에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였다는 말은 나당연합군이 한날 한시에 동시 기습공격을 했음을 뜻하지.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에 보면 7월 9일에는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와 당나라군의 기벌포 전투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7월 9일에 이러한 전투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신라와 당군의 치밀한 기습작전이었다는 반증이지.
당군은 7월 9일 기벌포를 통과하여 10일 계획대로 백제 남에 도착하였는데 신라군이 약속날짜보다 하루 늦은 11일 도착하자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목베려고 한 것도 당군이 기습작전에 있어 신속한 기동력을 중요시했다는 증거야.
※이에 대해 신라군이 늦었다는 걸 이유로 김문영의 목을 베려고 한 행동이 기동력이 아닌 기벌포 전투와 태봉산 전투(가정)에서 당군의 피해가 막심하여 신라군의 늦은 합류를 문제삼아 그랬다는 주장도 있어
이후 12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니 백제는 그야말로 당황하여 보유한 군사의 대부분을 쓰지 못하였던 것이었지.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하지만 7월 18일 항복함으로써 나당연합군의 속전속결의 기습작전은 성공적으로 끝이 나버렸어.
동진강 기벌포설을 주장하는 전영래 교수는 당군은 웅진강에 들어서기 전에 웅진강의 밖에 있는 동진강의 변산반도에 먼저 상륙하였다고 주장했어. 그 이유로 전교수는 소정방이 태풍이 오는 시기인 6∼7월에 13만 대군을 배에 태워 20여 일간 바다에 띄어 놨을 리는 없다는 점과 20여 일간 13만 대군을 배에 태운 채 있을 정도로 전함의 비축식량과 식수가 충분치 못하며 군사들의 충분한 휴식을 위하여 7월 9일 기벌포 전투를 치르기 이전에 이미 동진강의 부안지역에 상륙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지.
이 주장대로라면 당군은 7월 9일 기벌포 전투 후 7월 10일의 신라군과의 약속 날짜를 맞추기 위하여 웅진강에 들어와 수륙이 병진했다는 뜻이나, 이 주장에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어.
전교수의 주장은 6월 21일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태자 법민이 만난 후 당나라군에 대한 환영행사만 하고 바로 헤어져 작전에 임했다는 뜻이야. 그래서 덕물도를 출발한 당나라군이 13만 대군을 20일 동안 바다에 방치할 수 없으므로 동진강변인 부안 즉 기벌포에 상륙하여 휴식을 취했다는 뜻이지.
덕물도에서 신라의 전선 100척과 병력을 지원 받아 10만 대군에 대한 병참함이 대략 400척이 필요하니 지원함의 도착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사서에는 병참 목적이나 지원등의 후발부대의 출항에 대한 기록과 언급*이 전혀 없으므로 이 주장은 신빙성이 낮아.
* 구당서에 유인궤가 고종의 명으로 수군 함대 및 군량미 운송을 책임진 내용과 군량미운송의 실패로 인해 처벌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 짤막하게 나오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기가 맞지 않고 신당서나 다른 사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일체 언급되어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후발부대의 출항이나 병참목적의 수군함대는 대백제전이 끝난 후에 시행되었다고 보는편이 옳다고 필자는 생각해.
전교수의 주장대로 당나라군이 동진강의 변산반도에 상륙하여 사비성 공략을 위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백제는 사비성 남쪽 소부리벌에서 마지막 총력전을 펴기 이전에 백제의 주요 거점인 익산과 한산(설림군) 등의 병력과 중앙군의 병력을 동원하여 부안에 상륙한 당나라군을 공격하였을거야.
이러한 추측은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소식에 백제조정이 작전계획을 짜던 중 좌평 의직의 "당나라군은 오랜 항해로 지쳐있으니 배에서 내리자마자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짐작할 수 있지.
그러나 중국측 기록이나 우리기록 어디에도 당군의 상륙지인 기벌포 전투 이후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공격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사비성 이십 리 밖 백제군과의 전투(이하 소부리벌 전투)까지 어떠한 전투기록도 남아있지 않아.
이러한 결과들은 당군이 기습공격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습작전의 첫째 조건은 빠른 기동력이므로 사비성에 들어설 수 있는 웅진강구 즉 군산을 놔두고 부안의 변산반도에 상륙하여 백제군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낸 채 휴식을 취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란 주장도 있어.
*당군의 기습공격에 대한 내용은 다음편에서 자세히 살펴볼께.

필자는 이에 대해 전교수의 부안 상륙설보단 부안과 군산 앞바다에 있는 고군산군도에 당군이 상륙하였다고 보고 있어.
상륙작전을 한다 하더라도 위의 주장대로 5일동안의 항해 직후 바로 상륙작전을 벌였다고는 생각 하지 않아.
육군을 대동한 수군함대가 5일간 바다항해 직후 상륙작전을 벌였다면, 바다에 익숙치 않은 육군의 입장에서는 힘든 작전이였을거라 생각해.
이에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앞선 글에서 서술했듯이 백제군의 분산배치를 위해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상륙작전 직전, 부대의 전열을 가다듬는 차원에서 기벌포와 가까운 지역에 상륙하여 휴식을 취한 후 공격하였을거라 생각해.
그곳이 바로 고군산군도이지.
덕물도(現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덕적도)
대백제전 당시 서해를 건너온 당군이 머무른 곳으로
'소야리(蘇爺里)'와 '담안'이란 지명으로 아직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준비 끝에 산둥반도의 성산을 출발하여 덕물도에 도착한 소정방의 당군은 마중 나온 신라태자 법민과 만나 양군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전편에서 보았을거야.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태자 법민이 전선 100척을 거느리고 갔다는 내용이지.
여기서 등장하는 100척의 신라 군선은 단순히 당군에 대한 환영식을 위한 의전행사용 부대가 아닌 당군에게 필요한 보급물자 수송과 함께 백제 지리에 어두운 당군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신라태자 법민의 양군이 만나 세워진 작전계획은 태자 법민에 의해 태종무열왕과 상대등 김유신에게 전달되었을테지.
전쟁의 과정을 볼 때 그 작전 내용은 7월 10일 백제 남에서 나당연합군이 만나 함께 의자왕이 있는 사비성을 공략한다는 내용이었어.
이러한 계획대로 양군이 백제 남에서 만나 사비성 공략을 목전에 둔다면 이러한 전격전은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 기록에는 6월 21일 덕물도에서 법민과 소정방이 만난 이후 7월 10일 백제 남에서 만나기로만 되어있을 뿐 실질적인 최초의 공격날짜는 빠져있어.
여기에서 최초의 공격일자는 당군의 기벌포 통과와 신라군의 탄현 통과를 말하는 것인데 양군이 기습의 효과를 누리고자 한다면 분명히 같은 날짜에 동시에 행동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최초의 공격 개시일이 중요해.
즉, 탄현과 기벌포에 나당연합군이 들이 닥친 날짜이지.
이른바 D-day인 공격 개시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6월 21일 덕물도 작전 회의 후 7월 11일 나당연합군이 만난 날까지의 양군의 공격루트를 알아보면 알 수 있을거야.
당시 양군의 상황이 신라군은 나와 있는데 당군은 확실히 나와 있지가 않아.
당군의 공격 개시일까지의 일정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래와 같아.
6월 21일 신라 태자 법민과 만난 소정방군은 양군의 연합작전을 수립하였어.
그러나 이후 7월 9일 기벌포 상륙전투 때까지 20여 일간의 거취가 알 수 없는데, 7월 8일 저녁즈음 or 9일 새벽 기벌포 전투가 끝났다는걸 기준으로 설명해 볼게.
삼년산성(三年山城)
사적 제236호, 지정면적 226,866㎡,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위치
신라식 포곡형 산성의 대표적 산성임.
신라군의 진격로는 現 충청북도 보은군에 위치한 삼년산성에서 출발하여, 충북 영동군 심천면을 경유하여 옥천군을 지나 대전-옥천 경계에 있는 탄현을 돌파하였을거야.
즉, 삼년산성에서 탄현까지의 거리는 조선시대의 도로망을 대입해 볼 때, 약 62km정도야.
고대시대에 부대가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일사(一舍)라고 했어.
일사(一舍)는 약 30里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중국의 행군거리를 뜻하는 말이야.
시대마다 약간씩 틀린데, 일사(一舍)는 이정법과 기준지척을 기준으로 한다면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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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一舍의 차이
주-춘추전국시대-진 효공 : 주(周)의 1리(里) = 주척 8척 * 300보 = 19.495~20.107cm*8척*300보 = 468m
진 상앙 - 진시황 26년 = 진(蓁)의 1리(里) = 주척6척4촌 * 300보 = 19.495~20.107cm * 6.4척 * 300보 = 374~386m
진시황 26년 ~ 한나라 = 진(蓁) ~ 한(漢)의 1리(里) = 주척6척 * 300보 = 19.495~20.107cm * 300보 = 352~363m
한(漢) ~ 당(唐)초기 = 한(漢),당(唐)의 1리(里) = 주척5척 * 360보 = 19.495~20.107cm * 5척 * 360보 = 352~363m
당(唐) 중기 이후 = 당(唐 )의 1리(里) = 당대척5척 * 360보 = 19.495~20.107cm * 5척 5 360보 = 53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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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당시는 당 초기이며, 신라 또한 중국의 군제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신라군의 당시 일사(一舍)는 1里 = 362~363m / 30里 = 10,680 ~ 10,890m, 즉 약 10.8km야.
그러므로 삼년산성에서 옥천까지의 신라군의 행군기간은 5일하고 반나절정도가 소요되었다고 보는게 옳지.
황산벌 전투 당시 신라군의 진격로
탄현에 대한 위치비정은 다음편에서 상세히 서술할게
또한 황산벌 전투편에서 신라군의 이동경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계산을 위해 서술해보자면, 탄현을 지나 대전-진잠-두계-개태사-황산벌이므로 대략 50km 정도야.
또한 4일하고도 반나절이면 당도하는 거리이지.
그러므로 신라군은 진천에서 기동을 시작한 후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에서 황산벌까지 대략 20일 정도의 기동기간을 보이고 있어.
신라군이 탄현을 돌파한 시점을 잡자면, 덕물도 회담이 끝난 6월 21일에서 16일뒤인 7월 6일 정오쯤, 탄현을 돌파하였다고 추론이 가능해.
삼국사기에서는 기벌포와 탄현이 뚫렸다는 걸 백제조정이 알고 있어.
이는, 기벌포와 탄현에 나당연합군이 출몰하였다는 것으로 추론이 가능하지.
그러므로 기벌포 앞바다에 당군이 나타난 것은 7월 6일이였을거라 필자는 감히 비정해본다.
또한 당군의 덕물도 출발일은 덕물도에서 기벌포까지의 거리와 워낙 대군이 이동하는 것이므로 5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고, 또한 전투 직전 휴식을 위해 하루를 고군산군도에 정박하였다면, 대략적으로 당군이 덕물도에서 출항한 시점은 7월 1일이였을거야.
*조선시대 조운제도를 바탕으로 당나라 수군함대의 규모를 대입해 추산
서기 660년 7월 1일~ 7월 6일까지의 나당연합군의 진격로
7월 1일 나당연합군이 기벌포와 탄현을 향해 출발하여 대략 7월 6일 첫 전투가 기벌포에서 있었으나 , 개펄로 인한 상륙작전의 실패와 백제 해안방어선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후퇴하였다가 신라 수군사령관인 양도의 재치있는 발상으로 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백제군 수천을 죽이고 7월 9일 조수를 만나 웅진강을 따라 수륙이 병진하여 백제 남에 7월 10일 도착하였다고 추론이 가능할거 같아.
이제, 당시 백제군의 규모를 살펴보면 대략적인 기벌포 전투의 윤곽을 알거야.
축노천리(舳艣千里), 즉 배와 배가 연결된 것이 천리에 뻗쳤다고 할 만큼 대규모 함대였던 당군이였으므로, 당시 기벌포라는 지명은 現 충남 서천군 장항읍 일대를 지칭하는게 아닌 군산까지 포함하는 백강(現 금강) 하구 전체를 지칭하는 것을 위에서 추측했어.
다시한번 복습하는 차원에서 설명하자면, 기벌포, 즉 백강(白江)은 장암·손량 등으로도 불렸으며 지화포(只火浦)로도 불렸는데, 장암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9에 서천포영(舒川浦營)은 고려시대에 장암진성(長巖津城)이라 한 것으로 보아 금강 하구의 서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어.
그리고 지화포(只火浦)역시 기벌포의 한자식(漢字式)표기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즉 기벌포·지화포·백강·장암 등은 모두 동일한 지명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볼 수 있으며 금강하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해.
이는 서천군 장항읍 일대의 의직 장군 설화와 군산시 성산면의 오성산 전설이 나타내는바와 같이, 백제군의 병력배치가 금강을 중심으로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있었다는걸 뜻할 수 있어.
그럼 일단 북부를 맡았던 의직의 백제군의 병력배치를 살펴보자.
삼국사기와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벌포에 주둔한 백제군의 현황에 대해 짤막하게 기록을 남기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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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군사를 합하여 웅진 어귀를 막고 강을 따라 주둔시켰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二十年 六月
賊濱江屯兵
적이 군대를 강가에 주둔시켰다.
新唐書 卷111 列傳 蘇定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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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에서 군대를 합하였다는 합병과 강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빈강둔병(瀕江屯兵)은 백제군이 여러지역에 분산 배치시켰던 병력을 합하여 백강 어귀에 주둔시켰다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어.
또한 전투경과에 대한 기록보다 먼저 나와 있기 때문에 당군이 상륙작전을 펼치기 이전에 백제군의 병력들이 모여 주둔했다는 의미로도 해석 할 수 있지.
사비시대 백제의 군사제도에 대해 전편에서 살펴봤지만, 백제군은 국왕의 친위군과 더불어 중앙군, 지방군으로 이루어져 있었어.
특히 지방군은 방-군-성 제도로서 각 방에 700~1200명 군에 500명, 성에 200~300명의 군사가 주둔했지.
미리 각 지방의 군인을 징발하여 전시체제를 편성하거나 국지적인 전쟁에 대처하기에는 적합한 제도였지만, 13만에 달하는 당군과 신라군5만이 일시에 수도를 향해 기습하는 전쟁에서는 속수무책이였지.
고대국가들의 전시총동원령의 발현 기간은 최소 3개월인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기벌포와 군산일대에 배치된 백제의 병력수는 최소 18,000명에서 최대 25,000명으로 추산 가능해.
이는 기벌포의 지리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인데, 現 서천군 장항읍 일대는 백제의 설림군 관할이였으며, 군산은 시산군 관할로 각기 사비와 중방의 관할이였어.
특히 설림군은 수도로 향하는 길목의 첫 관문이기에 가림군과 더불어 사비의 통제를 강하게 받던 지역이지.
그러므로 의직이 이끄는 백제군은 가림군,설림군,대산군의 병력들과 각 성(현)의 병사들, 그리고 백제 중앙군의 일부를 대동 하였을거라 추측한다면 6,500~8,000명의 군사를 서천군 장항읍 장암산성-송내리산성 라인에 배치 하였을거야.
※이중 가림군 병력은 일부 착출 되었을거라 판단.
가림성(現 부여 성흥산성)
사적 제4호, 테뫼식 산성, 지정면적 120,916㎡
501년(동성왕 23) 8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축조하였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加林郡)이었으므로 가림성(加林城)이라고도 해
특히 가림군의 치소인 가림성(성흥산성)은 동성왕 시절부터 위사좌평이 직접 관할하던 성으로서 백제 사비도성 방어의 핵심 기지였으며, 가림군의 지방군은 백제 지방군 중 최정예 병력으로 손꼽혔지.
서천의 전승설화를 살펴보면, 의직의 군대가 장항읍의 장암산성에 지휘부를 설치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장암산성은 본래 조선시대 성곽유적으로 알고 있지만, 백제계 토기와 유물들도 나왔기 때문에, 백제시대의 산성을 조선시대에 대대적으로 보수한 것으로 보여. 또한 현재 장암산성 유적이 전부가 아닌, 대규모의 산성 유적이였다는 고고학 보고가 최근에 나오기도 했지.
이는 의직 본인이 직접 당군의 상륙작전을 전선에서 통제하기 위함이였지.
의직이 이끈 백제군의 지휘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아.
백제 서천방면군
총사령관 : 좌평 의직
설림군장,대산군장 (4명)/ 마산현장,대산현장,비상현장,사포현장,비인현장
총병력 : 4,500~8,000명 (군,성(현)의 배치군사의 80%를 계산 + 백제 중앙군)
한편 백제는 수군도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시기에 수군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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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時 置倉石頭東 卽加里渚 積粟爲水軍之 後唐兵渡海 因亂 倉廢 新羅平百濟 復置倉於古圵
백제 때에 석두 동쪽(즉 가리저이다)에 창고를 설치하고 곡식을 쌓아 수군의 군량으로 하였다.
후에 당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너와서 전란 때문에 창고는 폐지되었다.
大東地志 卷5 忠淸道 沔川郡 條典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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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의 사료인 대동지지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위 기사는 백제시대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어.
백제 때 면천군 석두의 창고에 곡식을 저장한 후 수군의 군량으로 사용하였다는 위 기사를 통해 백제시기에 수군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
또 의자왕 16년에 올린 좌평 성충의 상서에 나오는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 즉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 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라는 구절에서의 수군은 백제 수군으로 해석 할 수 있어.
이와같이 백제 수군의 존재가 확인됨에 따라, 위에서 거론한 백제군의 합병을 각 지역에 분산 배치된 군대를 합친 것 뿐만 아니라 육군과 수군의 합병으로도 볼 수 있어.
실제 백제의 수군이 백강 어귀에 진치고 있었기 때문에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의 선두부대는 배를 탄채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기벌포 상륙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여.
수는 확인 할 수 없지만. 현재 금강 하구의 크기를 볼 때 적어도 최소 100여척의 군선이 있어야지만 금강 하구를 막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기벌포 전투에서 백제의 수군병력은 당시 신라수군의 군세와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최소 8,000~10,000명으로 계산이 가능해.
군산 오성산의 전경
마지막으로 오성산 인근에 배치되었던 백제 군산방면군의 병력에 대해 알아보자.
당군이 서해안을 따라 내려왔다면, 이미 백제군은 당군의 예상경로에 대해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을테고, 중방성인 고사부리성에서 군산까지 직선거리는 40km이므로, 빠른 행군속도라도 3일 걸리는 거리일테지.
덕물도에서 기벌포 전투까지 10일여동안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적어도 중방 관할인 시산군, 벽골군,고사부리군의 병력들은 군산방면에 배치되었을거야.
군산지역이 당시 시산군 관할이였으며, 시산군은 중방의 관할이였기 때문에 중방령 또한 참가했을거야.
결국 백제 군산방면군의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지.
백제 군산방면군
총사령관 : 중방령 달솔 여자진
시산군장,벽골군장,고사부리군장,금마저군장
마서량현장,부부리현장,소력지현장,내리아현장,수동산현장,두내지현장,무군촌현장,구지지산현장,야서이현장,대시산현장,흔량매현장
총병력 : 8,000~15,000명 (군산 근처 군-현(성)의 배치병사 60%를 추산)
다음편에서 아주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번편에서는 크게 2개의 방면군으로서 백제군을 추정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종합해봤어.
사령관 : 좌평 의직, 중방령 달솔 여자진
서천방면군 지휘관
설림군장,대산군장 (4명)/ 마산현장,대산현장,비상현장,사포현장,비인현장
군산방면군 지휘관
시산군장,벽골군장,고사부리군장,금마저군장,완산군장
마서량현장,부부리현장,소력지현장,내리아현장,수동산현장,두내지현장,무군촌현장,구지지산현장,야서이현장,대시산현장,흔량매현장,두이현장,우소저현장,구지지산현장,야서이현장
금강하구 백제 수군
군선 약 100여척
병력 : 육군 14,500~ 23,000명 / 수군 8,000~10,000명
총병력 22,500~33,000명
고작 수천~1만명의 백제군을 상대로 약 13만에 달하는 나당연합군이 3일에 걸친 상륙작전을 하였다고 생각 할 수가 없어. 당시 기관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륙작전을 막으려면 어느 정도 방어병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위의 수치는 가정이지만 결코 과장되었다고 필자는 감히 말해본다...
나당연합군의 기만전술로 인해 침공에 대한 방비가 워낙 급작스럽게 이루어졌지만
백제군 입장에서는 최대한 쥐어 짤 수 있는 병력을 지금의 금강하구, 동진강 연안에 배치했어.
이제 귀실 복신의 서방군 2만 병력을 이끌고 지원 오기 전 까지 최대한 나당연합군을 지연시킬 일만 남았지.
수평선 너머로 뜨는 여명을 배경으로 나당연합군 131,811명을 태운 전선 2000척이 나타나자 백제군 진지에서 호각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양국의 두 명장인 사지절 우이,마한,신구 등 14도행군대총관 소정방(蘇定方)과 백발의 노련한 야전 사령관인 좌평 의직(義直)의 국운을 건 건곤일척의 일대 결전이 금강과 동진강 하구에서 벌어지게 되었어.
서기 660년 7월 6일. 고대 동아시아 최대의 상륙작전이자 대백제전 최초의 전투인 제1차 기벌포 전투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지.
*근세이전 동아시아 최대 상륙작전은 1281년 2차 여몽연합군의 147,000명.
다음편은 백제의 군산방면군의 배치와 제1차 기벌포전투의 양상에 대해 써볼게.
('백제의 군산방면군의 배치와 제1차 기벌포전투'->'신라군의 진격로와 백제군의 황산벌 배치'->'황산벌전투'->'소부리벌 전투'->'사비성 함락과 의자왕의 항복'-> 정리글 순으로 업데이트 될거야. )
밀게이들아 늦었지만 새해복 많이 받아라ㅎ
5줄요약.
1. 기벌포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많지만, 사실상 기벌포는 現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항산성 일대이며, 백강의 위치는 기벌포 전투, 백촌강(백강구) 전투, 기벌포 해전마다 각기 다르나, 660년 당시 기벌포 전투의 백강의 위치는 現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와 전라북도 군산시(서군산) 앞바다임.
2. 당나라 함대가 덕물도에서 출발한 시점은 6월 31일~7월 1일 즈음이며 5일간의 항해 끝에 상륙작전 디데이 전날 고군산군도에 도착하여 전열을 정비하였을거라 추론 할 수 있다.
3. 당시 탄현과 기벌포가 돌파 당했다는걸 알았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6년조의 기사를 살펴볼 때, 당군과 신라군이 동시에 같은날 탄현과 기벌포를 공격하였다는걸 유추 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비정해볼 때, 당시 동북아시아 국가의 군 일일 행군거리인 일사(10.8km)를 기준으로 탄현이 돌파한 시점은 서기 660년 7월 6일이며, 마찬가지로 당군이 기벌포 상륙작전을 펼친 시점 또한 같다.
4. 당시 기벌포에 주둔한 백제군은 現 서천군 장항읍 장암산성 일대의 좌평 의직군, 現 군산시 일대에 넓게 배치되어 있던 중방령 여자진군, 그리고 금강하구를 막고 있던 백제 수군 약 100여척으로 나눌 수 있으며, 최소 22,500에서 최대 33,000명의 병력이 배치 되었을거라 판단됌.
5. 너무 늦게 올려 미안하다 이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