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제4-1탄. 欲呑高麗 先誅百濟 - 7세기 동북아시아 정세

http://www.ilbe.com/4042796083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제4-2탄. 백제의 군사제도와 5방령

[링크] http://www.ilbe.com/4045275070












개노잼이다보니 전편은 묻혀버렸盧


요즘 밀게 보면 내 글이 분위기에 안맞는거 같아서 좀 그렇盧;;


무튼 이번 시리즈를 끝으로 걍 개인블로그에다가 찍 싸야되겠다....







이번편은 태자 법민과 소정방이 만나 전략을 논의했던 덕물도 회담과 그에 따른 나당연합군의 기만전술에 대해서 알아볼게.


길지만 재미있게 읽어줘라ㅋ























兵之情主速乘人之不及 由不虞之道攻其所不戒也

 


용병의 관건은 신속함에 있다. 적이 미치지 못한 틈을 타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길을 경유하여 경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해야 한다.

 

孫子兵法 第11 九地篇

 

 

 

 

 











 

 금돌산성.jpg

금돌산성(現 백화산성 / 경북 상주시 모동면 백화산)

문화재 제131호, 시정면적 3,227,107㎡ 둘레 20km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경상북도 최대 크기의 산성




서기 6603, 당 고종이 백제 정벌을 천명하면서 당나라 곳곳에서 군사들이 산둥반도 래주로 모일때, 520(양력 79) 무열왕 춘추와 태자 법민, 상대등 김유신 등의 예하 장군들은 수도인 왕경을 떠나 대구-김천-추풍령을 거쳐 금돌성(백화산성-경북 상주)에 부대를 총 집결한 다음 진천을 거쳐 경기도 이천의 남천정까지 기동하였어.

 

신라는 당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해 경기도 이천의 남천정으로 이동하였는데, 대백제전 당시 투입된 병력은 신라군 60,620명과 당군 약 122,711명이였지.

 





 660년 당시 신라군의 교통로.jpg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건설한 군사도로는 일곱 개로 추정되며, 이 중 소백산맥의 통로와 중진을 거치는 도로망은 네 개인데 다음과 같아.

 

첫 번째는 왕경-달구화현-추풍령-상주-삼년산성-금물노군-남천정

 

두 번째는 왕경-일선주-금돌성-삼년산성-금물노군-남천정

 

세 번째는 왕경-노동멱현-상주-삼년산성-금물노군-남천정

 

네 번째는 왕경-달구화현-감문군-금돌성-삼년산성-금물노군-남천정


이중 무열왕의 신라군이 사용하였을 도로는 첫 번째 경로였을거야.

※대규모의 신라군이 빠른속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행군로가 편한 지점을 골라야 함. (사학계의 견해)

 



경주에서 남천정까지의 이동거리는 354km, 행군기간이 22일이였음을 감안하면 일일평균 이동거리는 16km정도야.

 

이는 동북아 고대국가의 행군거리인 일사(一合, 10.4km)보다 초과하는 거리로서, 강행군으로 빠르게 북상하였다고 볼 수 있어.

 

 

 



설봉산성.jpg


설봉산성(現 경기도 이천시 사음동)

사적 제423호이며, 지정면적 137,098㎡ 둘레 1,039m의 테뫼식 산성.

신라 군단인 남천정의 주둔지로 비정되고 있음



 

남천정에 도착한 신라군은 당군과 연합작전회의를 하기 위해 덕물도로 이동하였는데, 덕물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이동로가 있었어.







태자법민의 이동로.jpg

 

첫 번째 이동로는 남천정에서 이포나루를 통해 한강과 염하수로를 따라 덕물도로 이동하는 경로.

 

두 번째 이동로는 남천정에서 육로를 따라 용인-당항포로 이동 후 해로를 이용하여 제부도-대이작도-소야도-덕물도에 이르는 경로야.

 

 

이중 첫 번째 이동로인 한강을 따라 이동하여 621일 당군보다 먼저 덕물도에 도착하였지.

 

신라군이 당군과 회의를 하기 위하여 한강을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가 한반도의 중심부를 차지하려는 욕구도 있었지만 대중통교의 관문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강하여, 서기 655년인 진흥왕 14년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신주를 설치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의 협력을 차단하고, 신라는 당나라와 교류가 가능하도록 하였기 때문이야.

 

 


덕적도.jpg


덕물도(現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덕적도)

내려오는 전설로는 덕적도와 옆의 소야도에 당군이 상륙했다고 하며

소야도에는 소정방이 머물렀다는 '담안'이란 지명이 남아있다.

 


서기 660618, 산동반도 래주(來州)에서 전선 1900척과 당군 122,711명을 이끌고 출항한 소정방은 해류의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3일뒤인 621일 덕물도에 도착하였어.

 

 




 

이미 신라의 태자 법민과 신라 수군사령관인 양도가 이끄는 대선 100척이 소정방을 맞이하였고, 당군 최고 사령관인 소정방과 무열왕의 대리로 온 태자 김법민은 곧바로 회담을 가졌지.

 

덕물도에서 실시된 나당 연합작전회의에서 소정방과 김법민은 백제를 공략하기 위한 계책을 논의 하였어.

 

무왕과 의자왕 치세에 들어서 백제군은 많은 전쟁경험과 유능한 장군들, 그리고 숙련된 정규병력이 많아 연합군이 공격한다 하더라도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지.





황산벌 전투.jpg


 

당시 삼국간의 통일을 위한 대내전을 살펴보면 백제와 신라간의 전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은 백제군의 공격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의자왕 치세 초중반의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의 국운이 풍전등화에 놓였었어.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당시 상황을 보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부여)를 중심으로 주요 거점을 축성하여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략이 쉽지 않았어.

 





 

회담의 내용은 어떠했을까? 밑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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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

 

소정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蓐食而至


법민이 답하길, 대왕은 지금 대군을 무척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분명 잠자리에서 진지를 잡숫고 오실 것입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太宗王 七年 六月 二十一日

 





定方謂太子曰 吾由海路 太子登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王都泗沘之城 


나는 바닷길로, 태자는 육로로 가서 710일 백제 수도 사비성에서 만납시다.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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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회의결과 당군은 서해를 통해 백강,기벌포 등을 경유하여 사비성 남쪽으로 진출 할 수 있는 연결작전을 수립하였다는걸 알 수 있을거야.

 

, 수륙양동병진 작전이었지.

 

 

 

 설봉산성.jpg


소정방과 회담을 끝낸 법민은 곧바로 무열왕이 남천정(경기도 이천시 설봉산성)으로가 710일에 사비 남쪽에서 당군과 합세하기로 군사기일을 정하였다는 보고를 해

 

이에 무열왕은 김유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군에 접응하도록 하였지.

 

 

당시 백제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당군이 덕물도에 상륙한 사실을 알게 된 백제조정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사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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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聞之 會群臣 問戰守之宜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新羅人恃大國之援 故有輕我之心 若見唐人失利 則必疑懼 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 可也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마땅한 지를 물었다좌평 의직(義直)이 나서서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이 배를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이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미처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원조를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약 당나라 병사가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서 감히 날쌔게 진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의 병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新羅人前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其師老 

先使偏師 擊羅軍 折其銳氣 然後 伺其便而合戰 

則可得以全軍 而保國矣 

王猶豫 不知所從

 

 

달솔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병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빨리 싸우려 할 것이니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대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병사의 기세를 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나라 병사들의 길목을 막아 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대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날카로운 기세를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합세해서 싸운다면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머뭇거리며 어느 쪽 말을 따라야 할지를 몰랐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二十年 六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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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좌평 의직은 당군이 멀리서 왔고 또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은 피로하여 사기가 꺾였을 것이므로 신속히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다면 당군에 기대고 있는 신라군은 감히 진격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였어.

 

반면 상영은 멀리서 온 당군은 속전속결을 원하기 때문에 그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먼저 신라군을 쳐서 그 기세를 꺾고 당군의 진격로를 막아 그 피로함을 기다리면 승리를 거둘수 있다고 판단하였지.

 

 






위의 견해들에는 신라군과 당나라 군대 가운데 어느 편을 먼저 칠 것인가 하는 선후 문제만 언급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전략이 없어.

 

나당연합군이 이미 연합작전을 펼치고 있는 마당에 공격의 선후 문제만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따라서 의자왕은 어느 의견을 따라야 할지 결정 내리지 못한 것으로 판단돼.

 

 

 

1.jpg


하지만 의자왕과 백제대신들이 아둔하여 탁상공론하였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자왕 치세 말년에 향락과 사치에 빠져 국정을 문란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 그저 의자왕과 간신배들의 탁상공론으로 치부하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였지.

 

백제조정의 혼란의 이유에 대해서 한번 살펴봐야 앞으로의 글 전개가 수월하기 때문에 한번 살펴보자z

 

 

 

 

 

 

 

 

 

 

백제조정이 이렇게 혼란에 빠진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서기 660621일 당군이 상륙한 덕물도로 시점을 옮겨보자.

 

소정방과 김법민이 만난 덕물도. 왜 당군은 덕물도에 상륙하였을까?

 

 






덕물도의 지리적 위치.jpg


 

 

덕물도의 군사지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실마리가 잡혀.

 


덕물도는 백제와 고구려, 신라와 당나라 간의 해상교통로의 중앙에 위치한 섬으로 고구려나 백제 어디로든 기동이 가능한 위치이지.

 

이 덕물도에 당군 122,711명이 상륙함으로서 고구려와 백제 모두 긴장할 수 밖에 없었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답이 되지 않지?

 

이에 군사적 관점에서 살펴봐야 될거 같아.

 

 

 

 

 

 

 

 

다들 간접접근이론을 알아?

 

밀게이들을 무시하는건 아님요.....

 


2 .jpg


바실 H,리델하트

기습과 기동에 중점을 두는 "간접 접근 이론"을 개발했다. 



리델하트의 간접접근이론은 군사적 이론뿐만 아니라 사업,로맨스,기타 등등과 같은 다른 분야의 시도에서 유효한 이론이야.

 

리델하트의 간접접근이론은 적 배후를 지향하는 기동 등 간접접근을 통해 물리적 교란과 심리적 교란을 달성하고 그에 따라 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조성하여 적 저하으이 가능성을 감소시키는 전략을 뜻하는걸 다 알거야.

 


견제를 통해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형성하고 적 배후를 지향하여 기동하는 것을 간접접근이라 하며, 간접접근을 통해 적은 물리적 교란과 심리적 교란이 발생하게 되고 교란이 발생함으로써 아군에게 유리한 전략적 상황이 조성되며, 이때 적 저항의 가능성은 감소되고 최소 전투를 통해서 승리를 달성할 수 있게 되지.

 

이러한 건접접근의 기초가 되는 요인은 기동과 기습, 그리고 대용목표야.

 

나제전쟁 당시 나당연합군은 지상기동과 해상기동을 통해 어디로 공격해 오고자 하는지 알수 없도록 함으로써 백제로 하여금 다수의 대용목표를 선정하게 하였지.

 

 

 



진주만 공습.jpg


 

전쟁에서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적 지휘관과 국가지도자로 하여금 심리적인 마비가 발생토록 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해.

 

물리적 교란과 병행하여 심리적 교란이 발생하도록 기동과 기습을 하게 되면, 적은 대용목표 선정과 병행하여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형성하게 되고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이 중복되는 지역으로의 기동과 기습은 적의 심리적 마비를 달성하게 되지.

 

나제전쟁 당시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이 중복되는 첫 번째 지점이자 견제행동이 바로 덕물도였어.

 

최소저항선이란 물리적 측면에서 적의 준비가 가장 적은곳을 말하며, 최소예상선이란 심리적인 측면에서 적이 예상하지 못하는 곳이나 방책을 의미해.

 




손자병법.jpg



손자병법 시계편에 나오는 功其無備, 出其不意와 같은 뜻이지.

 

여기에서 견재행동이 사전에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만약 견제행동이 없이 적 배후를 지햐하는 간접접근을 시도하더라도 적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배치를 전환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정면에 대한 직접접근이 되기 때문에 진정한 간접접근을 위해서는 적이 배치를 전환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전 견제행동이 이루어져야 해.

 

이러한 견제는 주 기동부대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작전준비단계 뿐만 아니라 작전 진행간에도 지속적으로 실시되어야 하지.

 

 

이와 같이 견제행동에 의해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이 조정된 다음에는 주 기동부대가 이를 통해서 적 배후를 지향하는 간접적인 기동을 실시하여 적 부대를 분리하고, 병참선과 퇴로를 위협함으로써 적 부대의 조직과 배치를 혼란시켜 물리적 교란을 달성해.

 

이러한 물리적 교란의 결과로 적 지휘관으로 하여금 스스로 불리한 위치에 몰려 있다고 인식하게 하고, 이러한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심리적 교란을 달성하게 되지.

 

 

 

간접접근전략에서 설명하는 심리적 교란이 바로 백제조정의 혼란이였어.

 

 

 

 

 

 나당연합군의 기동로와 예상진격로.jpg

 

백제조정의 나당연합군 예상 진격로 이해



나당연합군은 백제가 고구려,신라와 전쟁을 할 때 주로 기동했던 경략지역을 이용하지 않았는데, 백제조정은 기존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주요 기동로 방향으로 당연히 기동해 올것으로 판단했으나 덕물도 회담 이후 신라군은 금물노군에서 집결하였고, 당군은 당진방향으로 기동하였어.

 

백제는 주요 병력을 이미 배치해 놓은 상태에서 신라군의 기동과 당군의 기동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지.






660년 당시 목천-사비 교통로.jpg

 

삼국시대 목천-사비간 교통로



신라군은 백제와의 국경선을 연하여 계속 남하하였는데, 금물노군에서 출발한 신라군이 초기에 지향한 기동방향은 목천방향이였어.

 

당시 대목악군(목천)은 신라의 한주와 백제의 웅주(웅진)가 접경하고 있던 경략지역으로 전략적 접근로는 남천정-금물노군-목천-전의-웅주를 잇는 통로였지.






백제 북방령군과 신라군의 기동로.jpg

 

신라군에 대응하는 백제 북방령군의 이동


신라가 목천방향으로 기동하자, 백제는 신라군이 목천-웅진-사비성 방향으로 공격해 올것으로 판단하고 이에 북방의 병력을 목천으로 결집시켜 이에 대비하였어.

 

그렇지만 신라군은 목천 방향으로 기동을 하다가 다시 동진하여 상당현 방향으로 남하하였지.

 

백제군은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지만 신라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경락지역을 벗어나 남하하였고, 신라군의 기동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어.

 




신라군의 기동로.jpg



신라군은 상당현을 지나 삼년산성에 도착하였는데, 삼년산성은 백제의 북동쪽 국경지역에 위치한 신라군의 군사요충지로서 신라 군단의 집결지에 해당되지.

 

신라군은 이 삼년산성에서 대기하면서 상대등 김유신과 장군 품일, 흠춘 등으로 하여금 응전하도록 명령을 하달한 후 금돌성으로 이동하여 머물렀어.

 

 

 

 

 

 

 

 

 

 

이에 비해 당군의 진격로는 곧바로 금강하구로 진격한걸 볼수 있어.

 

연합작전 회의가 끝나고 신라 수군의 안내를 받아 당군이 기동하기 시작했어.

 

당군이 금강하구 방향으로 기동하여 상륙하기 위해서는 백강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유리한 전략적 상황조성이 필요하였지.

 

당시 백제의 군사가 몇 명인지는 여러 사서에 정확한 수치가 나와있지 않아.

 

대략적으로 한번 살펴보고 왜?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이 이러한 기만전술을 펼쳤는지 알아보자.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의 통로 확보를 위해서는 백제의 병력이 분산되어야만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백제군의 주병력이 백제의 서북방지역으로 배치할 수 있도록 기만이 필요하였어.

 

태자 김법민과 연합작전회의를 한 소정방의 당군 13만명이 금강하구에 나타난건 76일이야.

76일이란 날짜에 대해서는 다음편인 기벌포는 어디인가?에서 자세히 다루어볼게.

 





덕물도에서 출발하여 서해안을 거슬러 내려가 기벌포에 상륙을 시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10여일이 소요되었지.

 

이 기간에 당군은 백제군의 분산배치를 위한 기만작전, 상륙 직전 휴식과 부대 재편, 식량과 물을 구하기 위해 어딘가에 정박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그 정박지는 고군산군도일 가능성이 커

 

고군산군도는 군산 앞바다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덕물도에서 군산까지 서해안을 따라 내해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지.

 

 



백제 수군기지 위치.jpg


백제 수군기지의 위치


덕물도와 지근거리에 있는 당진,서산,태안은 당시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해로의 요충지로서 백제 수군의 함선들과 전략물자가 있었으며, 모든 사신들은 서산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오갔어


※한강유역을 빼앗기기 전에는 서산-월미도-산둥반도



당군의 예상진격로.jpg


 당진/서산 방면 당군 예상진격로



당 수군함대가 내해를 통해 남쪽으로 기동하자 백제조정은 당군의 주공방향이 당진-예산-사비성(부여)/ 서산-홍성-사비성(부여)로 판단을 하였을거야.

 

그리하여 서방의 방성인 임존성으로 병력을 배치하여 대비하였지.

 

그러나 당군은 내해를 따라 남으로 기동하였어.

 


당군의 예상 상륙지점.jpg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의 예상 상륙지점




당진을 지나 계속 남하하는 당 수군함대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금강하구인 설림군(現서천군)과 시산군(現군산시), 다른하나는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인 벽골군(現 김제시)의 상륙이었지.

 

하지만 이 두 가지 목표의 최종점은 결국 사비성으로 귀결 될 수 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야.

 

문제는 당군이 어느곳으로 상륙하는지를 몰랐다는 사실이지.

 

 

 

 

 

 

위에서 살펴봤지만 좌평 의직은 당군을 달솔 상영은 신라군을 치자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전략이 없었던 것은 나당연합군의 기만전술로 주공방향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갑론을박을 벌였을거란걸 이제 알게 되었어.

 

이에 의자왕은 이때 귀양살이를 하던 흥수에게 사자를 보내 전황을 설명하고 어찌해야 될지 물었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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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佐平興首得罪 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明 况與新羅共謀掎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 

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 士卒疲 然後奮擊之 破之必矣

 

 

이때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임금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는 숫자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더불어 우리의 앞뒤에서 작전을 함께 하고 있으니

만약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싸운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한다.]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이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해낼 수 있는 곳이니, 마땅히 용감한 병사를 뽑아서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병사가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병사가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장수와 병졸들이 지칠 때를 기다린 후에 

힘을 떨쳐 공격한다면 반드시 저들을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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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평 흥수는 나당연합군의 주공방향을 백강과 탄현으로 비정하여 이에 군사를 배치하라고 조언하였다는걸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어.

 

흥수의 주장에 반대하는 기록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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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時 大臣等不信曰 

興首久在縲紲之中 怨君而不愛國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雞離網之魚也 王然之

 

 

이때 대신들이 이를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의 말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당나라 병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해서 강물을 따라 배를 나란히 가도록 할 수 없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때에 병사를 풀어 공격하면, 그것은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임금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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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으로 인해 백제조정의 무능함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치 흥수가 죄인이므로 그의 말은 믿지 않는게 좋다! 라고 하는 듯하지.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백제가 멸망하게 된 건 무능한 왕과 신하들 때문이다라는 김부식의 무의식이 작용한 것이라고 사학자들은 생각하고 있고 필자 또한 이에 어느정도는 동의해.

 

하지만 의자왕과 당시 백제 대신들이 무능한건 아니야.

 

 

 



660년 6월말 7월초 각국의 병력집결지 및 진격로.jpg


서기 660년 7월 3일 나당연합군과 백제군의 진격로



지금까지 나당연합군의 기만전술을 살펴봤으면 이해되겠지만, 백제는 당시 당군과 신라군을 막기 위해 서방과 북방의 군사를 각각 임존성, 웅진성에 집결시켜놓고 있었다는걸 알 수 있어.

 

이러한 상황에서 당군과 신라군이 남하하자, 집결시켜놓은 군사들을 다시 백강과 탄현에 재배치 시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

 

또한 나당연합군의 주공방향이 백강과 탄현이라는 확실한 보장이 없었기에 백제조정은 소수의 병력으로 혹시나 하는 백강, 탄현 공격을 막기 위해 통과 시킨 후 포위 섬멸하는 계책을 세우게 된게 감춰진 역사의 진실이라고 볼 수 있어.

 

 

다음 글인 황산벌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설명하겠지만, 백강과 탄현의 지리적 이점을 백제조정은 알고 이런 대비책을 세웠지.

 

 

 

 

 

 

 

 

 

 

 

 




 

 

신라군이 삼년산성을 떠나 황산벌로 향하기 전, 금돌산성에서도 신라군이 증원된 것으로 보여.




대체적으로 사학계에서는 태종무열왕이 금돌산성에 진을 친 이유를 금물노군과 삼년산성,금돌성에는 일부 병력을 잔류시켜 무열왕이 주둔하고 있는 금돌성에서 전쟁의 전반을 컨트롤 및 혹시나 있을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여 추가적인 병력을 충원하고, 물지자원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이에 필자는 이 주장에 동의하나, 백제 동방령의 가장 핵심적인 방어선인 식장산 능선을 김유신의 신라군이 쉽게 통과하였는지 이해가 안갔어.


하지만, 태종무열왕과 그 휘하 신라군 약 13,000명이 금돌성에 주둔하여 백제 동방령군을 분산시켰다면 김유신이 탄현을 돌파하는건 쉬웠을거야.






금돌산성에서 공격 가능한 공격로.jpg


금돌산성 신라군의 예상 진격로



금돌산성에서 백제영토로 침범하려면 금돌산성-영동-금산루트가 최단거리이지.


특히 진잉을군(現 금산)은 백제의 농업,상업의 중심지이자, 백제군의 군마 생산지였으므로, 태종무열왕이 상주와 하주에서 불러온 지원군이 금돌산성에 도착하는건 백제에겐 부담스러운 일이였지.


어짜피 탄현은 소규모의 병사들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지형적 이점이 있는데 반해 진잉을군은 대규모 침략군이 들이닥치면 방어군 또한 비슷한 규모로 맞 받아쳐야만 하는 지형적 불리점을 가지고 있어.


필자는 이에 태종무열왕의 신라군이 김유신의 신라군이 쉽게 탄현을 돌파할 수 있도록 기만전술을 펼쳤다고 생각해.



 

또한 신라군 수뇌부는 연합작전회의에서 최종목표와 연결지점을 선정하면 그 다음에 신라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최종집결지를 결정하되 이를 결정하기 전까지 전투부대들을 중간집결지에 이동시켜 놓고 전투준비를 하고, 추가적인 병력과 장비, 물자를 보충 받도록 조치함과 동시에 작전명령을 수령하는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 금돌산성에 머물렀다고 추정 할 수 있어..

 


 

이와같이 금돌성은 전쟁기간 중 무열왕이 주둔하면서 신라군의 전략적 책원지(策源地)로서 역할을 하였을 것이며, 금돌성은 백제와의 국경선 가까이에 위치해 있던 신라군의 요충지로서 나제전쟁 당시 수뇌부가 위치해 있던 행재소(行在所)로서, 신라군의 중간집결지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어.

 






7월 4일, 태종무열왕의 명을 받은 상대등 김유신은 백제군과의 격전지가 될 황산벌을 향하여 기동을 시작하였어.


이에 금돌산성의 태종 무열왕의 병력 또한 금산방향으로 공격하는 모션을 취하면서 식장산 방어선과 금산방어군은 태종무열왕의 병력을 막기위해 금산방면으로 병력을 집결시켰어.




신라군의 탄현 돌파.jpg


서기 660년 7월 6일, 김유신의 신라군 탄현 돌파



그 결과 7월 6일, 식장산 방어군의 공백으로 김유신의 신라군은 손쉽게 탄현을 돌파하였어.


 

 

 

 

 

 

 

 

 


 

결국 신라군이 탄현을 돌파하여 진격하고 있다는걸 알게 된 백제조정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어.

 

천혜의 지형인 탄현에서 신라군을 포위 섬멸하지 못하였다는 점은 백제의 방어 전략에 큰 구멍이 생겼다는 걸 뜻하게 되지.

 




황산벌.jpg


황산벌 전경

 


이에 동방령 달솔 계백과 좌평 충상과 좌평으로 진급한 상충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신라군을 요격하도록 명령하였지.

 

그곳이 바로 황산벌이였어.

 

 

 

 

 



  


시점을 돌려 남하하던 당군은 태안반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안면도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결성 방향으로 기동하였어.

 

이에 백제 서방령군은 결성방면으로 상륙할 당군을 요격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지만, 당군은 상륙하지 않고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였지.

 

당군은 해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간찰스처럼 상륙할지 안할지는 제 책에 보시면 나옵니다하면서 기만전술을 실행했어.

 

경천을 떠난 당군이 염포를 지나 계속 남하하면서 당군의 기동 목표지점이 금강 하구라는걸 백제조정은 알게 되었지.

 

 


당군의 진격로.jpg


서기 660년 7월 3~6일 나당연합군의 진격로와 백제군의 집결지




문제는 백제조정이 당군의 주공방향을 금강 이북, 즉 태안반도 일대로 판단하고 서방령의 병력을 웅진성에 집결시켜놓고 있었다는게 문제였지.

 

이에 백제 조정은 좌평 의직과 중방령 여자진으로 하여금 백강하구에서 당군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어.

  

하지만 중방령과 사비관할의 방--성에서 병력을 모으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지.

 








고대 전쟁사를 살펴보면 적의 방비나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달에서 최대 3달정도의 기간이 필요해.

  

문제는 백제에게 남은 시간은 3일정도밖에 되지 않았어.

 

3일이란 시간 안에 최대한의 병력을 기벌포에 배치시켜야 했지.






당군의 예상 상륙지점과 백제 중방령군의 대응방안 .jpg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의 예상 상륙지점과 백제 중방령군의 대응방안


 

이런 중차대한 사안이 중방령 여자진의 어깨에 달렸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었어.

 

금강하구와 김제 사이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당군의 주공방향이 어디인가에 따라 백제군의 배치를 조정해야 되는데, 너무 넓은 지역이다 보니 중방군이 분산배치 될 수 밖에 없었어.

 

이 문제가 결국 의직의 발목을 잡고 말았지.

 

 

 

 

 

 

 

 

 

 

 기벌포.jpg

 

 

 

서기 66073~4, 나당연합군의 주공방향이 확실해 진 상황에서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만명이 기벌포 앞바다에 나타나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이 탄현을 돌파하면서 국운을 건 대전투가 서기 66076일 기벌포와 79일 황산벌에서 벌어지게 되었어.

 

 

 

 

 

다음편은 당군과 백제군의 격전지였던 기벌포에 대해서 알아볼게.

 

지금까지 읽어줘서 고맙다.

 

 





3줄요약.


1. 나당연합군의 덕물도 회담의 결과, 백제조정의 혼란을 야기하기 위해 경락지역이 아닌곳으로 진격하여 백제 서방령군과 북방령군을 분산배치시킴.


2. 태종무열왕의 금돌산성 주둔군은 김유신의 병력의 탄현돌파를 위해 금산방향으로 기동하여 동방의 식장산 방어선(탄현)의 병력 일부를 금산에 묶어 김유신의 신라군이 탄현을 쉽게 돌파하게 해줌.


3.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은 서해안을 따라 당진-서산-결성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서방령군을 분산시켰으며, 백제조정은 이후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이 금강하구 or 김제쪽으로 상륙 할것을 대비하여 의직에게 중앙군 일부와 중방령 여자진에게 지역방어를 일임하나, 방어군의 핵심인 중방령군의 분산배치가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