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 
제4-1탄. 欲呑高麗 先誅百濟 - 7세기 동북아시아 정세






노잼글인데도 열렬한 환영과 ㅁㅈㅎ에 깜짝 놀랐다...ㅋㅋ;

재미있게 읽어주니 쓴 나도 보람차盧....


이번편은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앞서, 백제의 전반적인 군사제도와 660년 당시 백제군의 병력, 그리고 지방군 사령관인 방령에 대해서 알아볼거야.

본편도 노잼일거 같아서 부담스럽지만, 재미있게 읽어줬으면 한다.


너무 길어서 텍스트 내리는 게이들은 맨 밑에 5줄 요약있으니 그거보면 다 본거랑 마찬가지이니 보고 틀린점이 있다면 댓글로 이야기 해줘ㅋ



그럼 시작할게 ^오^












































兵者, 所以禦暴誅亂, 有天下國家者, 固不可廢, 而兵制之得失, 國家之安危係焉


병(兵)이라는 것은 외침을 막고 내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으로 천하의 국가를 가진자는 진실로 폐지할 수 없으니, 
병제(兵制)의 득실(得失)에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있다.


- 高麗史 兵志,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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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국가의 존립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고, 또 군제의 좋고 나쁨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인건 현대나 고대인들은 알고 있었어.

특히 국가의 국운을 걸고 총력전을 전개하였던 삼국시대에 있어 군대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 없지.

삼국은 온 국력을 다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유지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이 군사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어.

따라서 삼국시대 역사연구에서 군제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그러나 오늘날 삼국시대 군제사 연구는 만족할 만한 수준에 있지못해.

특히 신라와 고구려의 군제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연구 성과가 있지만, 백제의 군제에 대해서는 사비시대의 군제를 다룬 논문 2편이 전부인 실정이야.



일단 아마추어인 필자가 지금까지 취합한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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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북방 출신 유이민들이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마한의 한 소국으로 출발한 나라야.

백제 건국집단은 북쪽에서 내려올 때 그곳의 우수한 철기문화와 발달된 기마전술도 함께 가지고 내려온 것으로 보여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벽제를 건국한 온조집단은 선철(무쇠)뿐만 아니라 강철을 제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한강 유역으로 이동해왔다고 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백제의 건국을 기원전 18년으로 전하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자료가 없었는데,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로 백제가 기원전 1세기경에 건국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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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유이민들이 강철기술을 가지고 내려왔다는 증거는 풍납토성 제일 아래층에서 나온 강철제 화살촉인데, 이당시 제철,제련 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어.

백제 건국집단은 이와 같이 우수한 철제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 발달된 기마전술도 지니고 있었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대 전쟁의 양상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10회이 전쟁 중 8회를 기마전으로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어.

즉, 온조왕대의 전쟁수행방법은 기마전이 주를 이루었다는 것이지.

이와같이 우수한 철기문화와 발달된 기마전술로 무장한 백제 건국세력이 한반도 중부 지역에 등장함에 따라 기존 마한 사회의 질서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어.



철제농기구.jpg

백제가 건국할 무렵 한반도에 널리 보급된 철제 농기구는 농업생산을 크게 발전시켰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철제 농기구의 보급에 대하여는 現 남,북한 사학자 간에 현저한 견해차가 보이고 있어.

북한에서는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이미 철제 농기구들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남한에서는 기원후 4~6세기에 가서야 철제 농기구와 우경이 보급되었다는 것이 통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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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국에서 기원전 5~3세기인 전국시대에 철제농기구와 우경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고, 또 대전에서 출토된 농경문청동기에도 철제 따비로 농사짓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도 적어도 기원전후에는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

이러한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능률적인 경작을 가능하게 하고, 단위 면적 및 농민 1인당 수확량을 증대시켰지.

그리하여 종래와 같이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는 집체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점차 소농 중심의 경영추세를 보이게 돼.

농경문청동기에도 한사람이 철제 따비로 가지런한 고랑과 이랑이 있는 장방형의 밭을 갈고, 다른 사람이 괭이로 땅을 파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즉, 하호에 의한 집체적인 방식이 아니라 가족노동에 의해서 농경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묘사되어 있지.

이와같은 철제 농기구에 대한 생산력 증대를 배경으로 백제는 건국초기부터 일반 백성에 대하여 개병제,징병제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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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始祖溫祚王 十三年 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한강(漢江)의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始祖溫祚王 十四年 七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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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을 보면 한산 밑이나 한강 서북쪽에 성책을 쌓고 한성민을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이것은 한성의 백성이 성책을 방어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이를 통해 백제는 온조왕 대부터 백성을 군사로 삼는 개병제를 시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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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나 고구려 등지에서 내려온 백제 건국 집단은 부여나 고구려에서 시행한 개병제를 경험하였을거야.

고구려는 건국 이래 국가 권력이 미치는 모든 민에 대하여 징병제를 실시하였으며, 부여 또한 기원전 6년 부여 대소왕이 5만의 병력을 거느렸다거나, 서기 167년 부여왕 부태가 2만의 병력으로 현도성을 공격했다는 기록 등을 미루어보아 기원전후에는 개병제가 시행된 것으로 보여.

삼국지 부여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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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敵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

적이 나타나면, 뭇 우두머리들은 자진해서 싸우러 간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모두 양식을 짊어지고 가서 병사들을 먹인다.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夫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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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보면 부여는 지배층만이 전투를 수행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어.

하지만 우리는 앞서 살펴온바와 같이 기원전후를 기점으로 부여 또한 개병제를 도입,시행한 것으로 보이지.

이러한 부여나 고구려의 개병제에 대한 경험이 백제 건국집단으로 하여금 건국 직후부터 개병제의 시행을 가능하게 하였을거야.

또한 철기는 청동기보다 성능이 우수하고 수량도 풍부하며 가격도 저렴하였지.

따라서 배겢 건국 집단이 지닌 철기 제조기술은 징발된 서민 출신의 병사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할 수 있게 하였을 것으로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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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무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비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始祖溫祚王 二年 正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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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인 온조왕 2년, 온조가 군신드에게 처음으로 한 말도 ‘繕兵積穀’을 독려하는 말이였지.

‘繕兵’ 즉, 전문적인 장인이 제작,수리한 우수한 무기를 손에 지니게 된 서민 출신의 병사들은 강병으로 거듭날 수 있었어.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백제는 우수한 철기문화와 기마전술, 그리고 개병제의 실시 등을 바탕으로 건국 직후부터 성장을 계속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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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청동제 무기 단계에 머물러있고, 단병전을 전개하며, 전사 집단이 특권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마안 연맹체의 각국은 상대가 되지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

온조왕 26년인 서기 8년, 마한의 연맹장 국가였던 어느 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온조왕 31년에 국내의 민호를 남,북부로 나누고 33년에는 다시 동,서부를 나눴어.
※ 이 연맹장 국가는 아직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후 마한의 연맹장인 진왕의 지위는 목지국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백제 전기 백제어 지명.jpg

백제 전기 백제어 지명분포도
(백제어 연구 -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님 저/ 고대삼한어와 백제어의 선구자이자 최고의 연구자라고 필자는 생각하盧... )
이 지도에서 경기도 남부권을 제외한 황해남도,경기도 중,북부지대를 서기 31~33년 백제의 영역으로 생각하면 될거 같아.



31년 33년 당시 백제의 민호를 그 거주지역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나눈 군사.행정적인 통치구획은 고이왕대에 중앙과 지방으로 영역이 구분될 때 중앙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는 영역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어.

그리고 부를 설치한 이유는 백제가 성장함에 따라 복잡해진 군사와 경제업무의 원활한 처리를 위한 것으로 판단되지.

이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살펴 볼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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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部屹于 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殺獲甚衆

동부의 흘우(屹于)가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말갈과 싸움에 이겨서 적병을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多婁王 三年 十月



命北部眞果 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명을 받은 북부 사람 진과(眞果)가 병사 1천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빼앗았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肖古王 四十九年 九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임금이 동부에 우곡성(牛谷城)을 쌓도록 명령하여 말갈을 방비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多婁王 二十九年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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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을 살펴보면 부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주로 국왕 온조가 직접 군사를 통솔하였으나, 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국왕이 직접 군사를 통솔하는 경우는 드물고 주로 타인에게 군사의 통솔을 위임하고 있어.

또한 동부나 북부의 인물들이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는 모습이 보이지.

마지막 기록도 동부나 북부의 백성은 축성과 사민(徙民)에도 동원되었다고 볼수 있지.

이를 통해 당시 백제의 주적인 낙랑,말갈과 접하고 있는 동부와 북부는 주로 군사업무를 맡아보았을 것으로 판단이 돼.

나머지 서부와 남부는 마한연맹체와 접한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으로서 식량과 어염 등 물자생산을 전담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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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양식이 없으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법.

앞서 언급한 온조왕 2년 기록에서도 온조왕이 군신들에게 ‘繕兵積穀‘ 독려한 일을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북부와 동부는 군사업무를 봤다면, 서부와 남부는 어떠했을까?

밑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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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令國南州郡 始作稻田

남쪽의 주와 군에 명을 내려 처음으로 벼 심을 논을 만들게 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多婁王 六年 二月



國南 蝗害穀 民饑 冬十一月 無氷

남쪽 지방에 메뚜기떼가 곡식을 해쳐서 백성이 굶주렸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肖古王 四十六年 八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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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國南 즉, 남부에서는 주로 식량 생산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어.

서부 역시 남부와 마찬가지로 식량,어염 생산에 주력하였을테지.

서부도 남부와 같이 군사관계 업무에는 전혀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를 통해 백제 초기 4부는 동,북부가 군사업무를, 그리고 서,남부가 식량 등 물자 생산 업무를 각각 맡아보았을 것으로 추측되지.


백제 초기 군제는 동서남북 4부 모두에 실시된 개병제를 바탕으로 동,북부에는 유이민 출신의 무사들이 집중 배치되고, 서남부는 토착세력인 마한인이 추축으로 이루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어.

이러한 형태의 백제초기 군제는 고이왕 대에 이르러 중앙군과 지방군이 형성되면서 새롭게 정비되었지.











온조왕 31년과 33년에는 당시까지 확보한 영역의 민호를 동서남북 4부로 편성하였지만, 이후에도 백제의 영역은 계속 확장되어갔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타난 부 설치 이후 고이왕대 이전까지의 영역확장 기사는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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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 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始祖溫祚王 三十六年 七月,八月





王拓地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會 不從

임금은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국경을 개척하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모임을 청하였으나 신라왕이 듣지 아니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多婁王 三十六年 十月




攻取蛙山城 留二百人 守之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2백 명의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多婁王 三十九年





築赤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적현(赤峴)과 사도(沙道)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肖古王 四十五年 二月





設二柵於沙道城側 東西相去十里 分赤峴城卒 戍之

사도성 곁에 두 목책을 설치했는데, 동쪽과 서쪽의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병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仇首王 四年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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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과 같이 백제는 끊임없이 새로이 확보된 지역에 성을 축조하여 지방 지배의 거점을 마련하고, 이곳에 성민(城民)이나 부민(部民)을 이주시키면서 영토를 확장하여 나갔어.

물론 이러한 직접적인 통치 이외에 항복하거나 타협한 재지 수장층으로 하여금 종래의 영역을 그대로 다스리게 하는 간접적인 지방통치 역역도 상당수에 달하였을거야.

영역이 확대되어가자 온조왕대에 설치한 4부 체제로는 확대된 영역 전체를 포괄하는 원활한 국정 운영이 힘들어지게 되자, 고이완대에 이르러 중앙과 지방의 통치체제를 마련한 것을 보여.

중앙과 지방 통치체제 성립과 그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 할 수 없으나, 다음 기사를 통해 백제군에 중앙군이 성립하였음은 확인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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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七年 春正月 置內臣佐平 掌宣納事內頭佐平 掌庫藏事內法佐平 掌禮儀事衛士佐平 掌宿衛兵事朝廷佐平 掌刑獄事兵官佐平 掌外兵馬事 
又置達率恩率德率扞率奈率及將德施德固德季德對德文督武督佐軍振武克虞 六佐平並一品 達率二品 恩率三品 德率四品 扞率五品 奈率六品 將德七品 
施德八品 固德九品 季德十品 對德十一品 文督十二品 武督十三品 佐軍十四品 振武十五品 克虞十六品


내신좌평(內臣佐平)을 두어 왕명출납에 관한 일을, 내두좌평(內頭佐平)을 두어 재정에 관한 일을, 
내법좌평(內法佐平)을 두어 예법에 관한 일을, 위사좌평(衛士佐平)을 두어 친위병에 관한 일을, 
조정좌평(朝廷佐平)을 두어 형벌에 관한 일을, 병관좌평(兵官佐平)에게는 지방의 병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또 달솔(達率)ㆍ은솔(恩率)ㆍ덕솔(德率)ㆍ한솔(扞率)ㆍ내솔(奈率)과 장덕(將德)ㆍ시덕(施德)ㆍ고덕(固德)
계duk(季德)ㆍ대덕(對德)ㆍ문독(文督)ㆍ무독(武督)ㆍ좌군(佐軍)ㆍ진무(振武)ㆍ극우(克虞)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내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duk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古尒王 二十七年 正月

※아놔 계 duk...



拜眞可爲內頭佐平 優豆爲內法佐平 高壽爲衛士佐平 昆奴爲朝廷佐平 惟己爲兵官佐平

진가(眞可)를 내두좌평으로 삼고, 우두(優豆)를 내법좌평으로 삼고, 고수(高壽)를 위사좌평으로 삼고, 
곤노(昆奴)를 조정좌평으로 삼고, 유기(惟己)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古尒王 二十八年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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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을 볼 때, 서기 260년 고이왕 27년 정월 내신좌평을 비롯한 6좌평이 설치되었는데, 그중 숙위병을 담당하는 위사좌평과 외병마를 관장하는 병관좌평이 설치되고, 이듬해에는 위사좌평에 진가를, 병관좌평에 유기가 각각 임명되었다는걸 볼 수 있어.



숙위(宿衛)는 군주의 최측근에서 호위하거나 궁궐을 지키는 사람을 뜻해.

위사좌평은 숙위병, 즉 군주의 근위대의 사령관으로 보면 되지.


지금까지 일반인들은 중앙 5부에 예속된 병사를 중앙군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어.

하지만 뜯어보면 이들은 전투부대와는 성격상 일정한 거리가 있는 존재들이었고, 군사력의 규모 역시 야전부대와는 차이가 있었지.


이 국왕 시위군은 국왕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놓은 친위군사력이었으며, 국왕이 거주하는 궁성을 숙위하고 왕실세력의 행차시에 호종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국왕을 보호하는 한편 국왕과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기능까지 행사하였을거야.


이를 통해 고이왕 27년의 기록으로 시위군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지.












중앙군과 지방군이 성립되었다면 중앙과 지방의 통치체제 역시 성립되었을거야.

이때의 중앙과 지방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동서남북 4부는 중앙으로 확정되고, 부(部) 이외의 지역은 지방으로 편제 되었을거야.

비유왕 2년인 서기 428년 ‘王巡撫四部(왕이 5부를 순시하다)’이라 하여 5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4부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중앙 4부 체제는 한성시대 내내 지속된 것으로 보여.


한편 지방은 점차 몇 개의 성이 모여 하나의 지방통치구역을 이루고, 그중에서 가장 중심 되는 성이 치소가 되어 여기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방통치에 임하였어.

이때 중심 되는 성, 즉 치소를 담로(擔魯)라 한 것으로 보여.

4부와 담로로 구성된 중앙과 지방의 방-군-성 체제로 정착되었지.




사비성 모델링 복원도.jpg 


통치체제가 초기의 4부체제에서 고이왕대 이후 중앙의 4부와 지방의 22 담로제로, 그리고 웅진시대를 거쳐 사비시대에 이르러 중앙의 5부제와 지방으 방-군-성 체제로 발전하는 것과 함께 군사조직도 정비되어갔어.

즉, 초기 5부체제에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구별없이 동,북부와 서,남부로 나뉘어 운영되었던 것이, 고이왕대 이후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분화되었고, 사비시대에 이르면 주서(周書)의 기록과 같이 중앙군은 5부제로, 지방군은 방-군-성제로 정비되었지.







사비시대 백제 행정구역도.jpg

사비시대 백제 행정구역도



백제의 군사조직은 통치체제와 더불어 정비되어 갔으나, 이러한 군사조직은 백제초기부터 말기까지 대체로 두가지 계통의 군인으로 구성되어 운영되었어.

즉 백제의 군사조직은 개병제에 입각한 농민병과 대대로 군역을 계승하는 세병제로 충원되는 무사로 구성된 것으로 보여.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온조왕대 부터 백성을 군인으로 삼는 개병제가 시행되었는데, 이는 다음의 기록에서 유추할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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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近肖古王 二十六年 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十一月 高句麗來侵

임금이 병사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침범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近仇首王 三年 十月



王欲侵高句麗 大徵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衰滅減

임금이 고구려를 침범하고자 병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였다. 
백성들이 병역을 고통스럽게 여겨 신라로 많이 달아나서 가구 수가 줄어들었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八年 八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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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사를 모두 백제가 개병제를 통해 병마를 대량으로 징발한 걸 알 수 있어.

특히 아신왕대의 기록은 개병제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이지.

3만명이나 되는 병사들은 개병제가 아니면 조달하기 힘든 것이고, 또 백성들이 신라로 도망한 것도 개병제에 따른 징발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지.


농민병과 더불어 중앙군을 담당하던 무사계층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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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平解仇與恩率燕信聚衆 據大豆城叛 王命佐平眞男以兵二千討之 
不克 更命德率眞老 帥精兵五百 擊殺解仇 燕信奔高句麗 收其妻子 斬於熊津市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大豆城)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좌평 진남(眞男)에게 명령하여 병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덕솔 진로(眞老)에게 명령하여 정예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치게 하여 해구를 죽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잡아 웅진(熊津)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三斤王 二年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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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에서 좌평 진남이 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도 이기지 못한 반군을 덕솔 진로는 그의 1/4 수준에 불과한 정병 5백명을 거느리고 격살하였어.

여기서 정병 5백은 군사 2천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군사로 판단되어지고 있는데, 2천의 군사는 농민병으로 구성된 군대임에 반해 군사 5백명은 전문적인 무사집단으로 추정되고 있지.

2천의 군사를 가지고도 이기지 못하였다면 더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야 했는데, 오히려 5백의 군사만을 동원하여 반군을 격살케 한 것은 이들이 전문적인 무사집단이기 때문으로 추측되고 있지.

※무사집단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의 직업군인.

이에 사학계에서는 진로가 이끈 500명의 병사를 국왕의 시위군으로 추정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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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북방 유이민 출신의 무사집단과 농사를 짓는 토착 마한인의 결합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왕조 내내 무사와 농민병의 이원적 형태는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여.

흑치상지 묘지명에 ‘其家世相承爲達率’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 뜻은 흑치상지 집안이 대대로 달솔을 역임 했다는 말이야.

이와 같이 달솔의 관등을 계승하는 가문이 있는 것은 신라의 관등제가 골품제에 의해 규제되듯이, 백제에도 관등제를 규제하는 신분제가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지.

이러한 예는 신라 중기의 군제를 살펴보면 알수 있어.




무사2.jpg

신라는 4,5,6두품과 진골 등의 신분적 자격을 갖추고 천거나 문음(父功), 궁술의 시험등을 통하여 무관의 지위에 오르는 군인이 있었는데, 이 군인들은 국가로부터 일정한 보수를 받으면서 군무를 수행하였어. - (삼국사기 열전 관창,찬덕 신라본기 원성왕 4년 기록)

이에 백제도 신분에 따라 일정한 관등에 올라 군역에 종사하는 무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

이와 같은 무사 계층의 존재로 인해 백제는 안정적인 정예병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무사들도 관등에 따라 전녹(田錄)을 받았기 때문에 생산 노동에는 참가하지 않고, 평시에는 무예 훈련에 전념하고, 전시에는 가족을 두고 전장으로 떠날 수 있었지.

또한 이 무사들은 시위군으로서 왕경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수도에 거주함으로써 왕경은 지방 어느 곳보다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또 무사들의 가족들이 수도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인질의 효과도 있었지.


위 삼근왕 2년의 해구의 난을 보면, 해구를 따라 반역을 꾀한 은솔 연신의 부자처럼 만약 시위군들이 반란을 꾀할 경우 그 가족들은 처형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보여.



사비성 모델링 복원도.jpg

이처럼 무사들은 왕경에 거주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본 수도 5부에 각각 500명씩 배치된 2,500명의 군사는 바로 이러한 무사들로 보여.



고구려의 수도에 거주하는 무사들이 2천여 명(3세기-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이며, 신라의 왕경에 거주하는 무사가 2,368명임을 감안할 때 백제 왕경에 배치된 2,500명의 군사들 역시 무사로 판단되지.

백제 초기 4부 체제에서는 주로 동북부에 거주했던 시위군 무사들이 사배시대 5부체제에 이르러서는 각부에 고르게 배치되어 거주했던 것으로 보여.



 
백제 시위군 조직도jpg.jpg
백제 왕성 5부 시위군 조직도



 사비시대 군사조직은 중앙군은 수도 5부에 각각 500명의 군사가 배치되는 형태로 총 2,500명이 배치되어 있는데, 막연하게 이를 중앙군으로 보는것은 잘못된 시각이야.

첫째. 이들이 왕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중앙 군사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임무가 외적의 방어와 공격전의 수행 등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부대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점에서 범주를 달리하는 군사력으로 봐야 해.

출정 상황에서 백제의 군사력 가운데는 좌장 혹은 장군에 의해 통솔되는 핵심적인 군사력으로서의 중앙군의 존재가 상정되기 때문이지.

둘째. 이들의 지휘체계가 괄지지의 기록을 중시하면 5명의 달솔이 각각 500명의 병사를 통솔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조직체계 역시 앞에서 살펴봤지만 중앙군의 성격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지.

동성왕때 위사좌평 백가가 이 시위군을 이끌고 동성왕을 주살한 것으로 볼때, 후대에 들어서 위사좌평이 아닌 달솔이 시위군을 지휘하게 되었어.

시위군에 대한 유력귀족들의 영향력이 배제되면서, 국왕의 시위군에 대한 장악력이 높아졌을 것이고, 말 그대로 국왕의 친위 군사력으로 기능하게 되었지.










지금까지 필자는 왕도 5부에 주둔하고 있는 각부 500명, 도합 2,500명의 군사력을 중앙군이기 보다는 국왕의 시위군으로 비정했어.

이는 국왕 시위군 역시 넓은 의미에서 중앙군에 포함되지만, 그 임무가 유사시에 전장에 출전하는 전투를 주목적으로 하는 군사력과는 구별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군사활동의 사례를 분석해 볼때, 전쟁에 동원되어 군사활동을 전개한 군사력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대별되는데, 이 가운데서 핵심적인 군사력으로 기능했던 것은 중앙군으로 추정되는 되고 있어.

그럼 백제 중앙군의 종재양태나 지휘체계를 비롯한 운용실태에 대해 검토해 볼게.









사실 백제 중앙군의 존재양태나 지휘체계를 보여주는 명확한 사료는 없어.

다만 단편적이고 간접적인 기록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한계가 엄연하지만, 이들을 분석하기에 따라서는 중앙군의 존재양태와 운용문제에 접근할 실마리를 찾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 같아.

우선 검토대상으로 뽑자면, 전시의 출전 상황에서의 지휘관의 병력에 대한 기록들이야.

여기에는 중앙군의 지휘관으로 비정될 수 있는 관직명이 보이고 있기 때문인데, 사비시대를 중심으로 출전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아.






사비시대 출전 기록과 지휘관 병력 규모.jpg


위의 표는 서술의 편의상 성왕 즉위 이후 멸망에 이르기까지 백제가 군대를 출동시킨 기록을 정리한거야.

여기서 주목할 것은 출전 지휘관의 직명이지.

출전지휘관이 군주이나 태자인 친솔형(親率形)인 경우 , 좌장인 경우(2명), 장군인 경우(14명), 방령의 경우(1명), 관등 소지자인 경우(좌평 2명, 연솔 1명) 등 다섯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어.

이중 지방장관인 방령이 거느린 군사는 지방군이 분명하므로, 중앙군과는 명백하게 구별되는 군사력이야.



이를 제외한 나머지의 경우는 지휘 군사력이 중앙군인지 지방군인지 여부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아.

일단 이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보자.




국왕이나 태자가 최고 지휘관으로 출전한 친솔형은 휘하 군사력으로는 일단 중앙군을 상정하는 것이 무난해.

물론 거기에는 국왕이나 태자를 호위하는 국왕 시위군도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주력은 역시 중앙군이었을 거야.

이 중앙군은 중앙군 가운데서도 특히 정예인 부대가 아니었을까 해.

다만 성왕 32년 관산성 전투의 경우 중앙군은 물론 지방군까지 동원한 총력전이었으므로, 중앙군만을 분별해 내기가 어렵고, 의자왕 2년의 경우 병력에 대한 기록이 빠져있어 지휘병력의 실태 파악이 불가능해.





다음으로 좌장이 최고 지휘권자로 출전한 경우를 보자.

좌장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자주 보이는데, 사로에 의하면 좌장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치된 관직으로, 설치 초기의 경우에는 병마권을 장악하고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관직이었어.

실제로 전쟁에 최고 지휘관으로 출전했으며, 이를 역임한 후 백제 초 수상격인 우보(右輔)로 승진하기도 했던 요직이었지.

하지만 병관좌평이 설치되되면서 좌장의 위상이 변화한 것으로 보여.

병관좌평은 병마관계 업무를 맡은 관직이었으며, 이들의 관계는 병관좌평을 최고 군정권자로, 좌장을 국왕으로부터 군령관을 위임받는 최고 군령권자, 즉 총사령관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


표에서 보이는 좌평 2명은 모두 직접적인 군사활동을 지휘하고 있는 점에서 아신왕대 이래의 좌장의 성격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어.

따라서 이들은 친솔의 경우를 제외하면 최고의 군령권자였지.


이러한 최고의 군령권자가 지휘한 군사력은 중앙군으로 보는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특히 의자왕 9년 은상이 석토성 공략전을 펼칠때의 기록에는 거느린 병력을 '정병(精兵)'으로 표기하고 있느넫, 이 정병이라는 표현이 정예병사의 의미임은 재언할 필요도 없지.





이와 같이 좌장이 지휘한 군사력은 중앙군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어 보여.

그래서 일단 좌장이 거느린 병력의 규모를 통하여 중앙군의 규모를 추정해보자.



아신왕 2년 좌장 진무는 1만의 병력을 거느렸으며, 4년에는 병력규모가 기록에는 없지만 8,000명의 전사자가 나왔다는 대패 기록이 있어. 일반적으로 '패'하였다는 병력사상비율은 1/4이며, 전멸의 비율은 1/3, 궤멸적 타격이자 대패의 비율은 1/2이야. 

그러므로 당시 병력을 추산하면 대략적으로 10,000~15,000명으로 추산 할 수 있지.


한편 의자왕 원년의 좌장 윤충 역시 1만의 병력을 거느렸으며, 의자왕 9년에는 은상이 7,000명의 직속부대를 거느렸어.

이러한 자료를 따른다면 백제 중앙군의 규모는 최소 7,000명에서 최대 15,000명으로 추산 할 수 있지.



중앙군을 구성하는 병졸집단의 출자에 대해서는 아마 사비성과 사비성 직할지의 백성들, 그리고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내지(內地)의 백성들로 이뤄졌을거야.

백제 멸망 당시 사비성의 인구는 5만여명, 1만 가(家)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중 국왕 시위군인 왕도 5부의 백성들을 빼면 사비성 인근의 직할지에 사는 백성들을 징병해서 중앙군으로 편재하였을거야.

백제 중앙군 조직도.jpg

이 백제 중앙군의 주둔지로는 사비도성 주위에 구축된 많은 산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볼수 있어.

가림성(現 성흥산성)은 동성왕때 이미 위사좌평이 머물면서 왕도 5부 시위군을 컨트롤 하는 곳이였기 때문에 제외하면, 왕도를 보호하는 산성 중 논산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 상에 위치한 청마산성이었을거라 필자는 추측하고 있어.



청마산성.jpg

청마산성(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
사적 제34호이며, 지정면적 416,621㎡ 둘레 6,500m의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백제계 산성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특이한점은 순수한 포곡형 산성이다.


둘레 6.5km에 달하는 석축 포곡식 산성인 청마산성은 사비성의 성곽과 연결되어 있으며, 논산에서 넘어오는 적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의 역활을 하고 있어.

사비성 함락 전, 백제의 마지막 결전지였던 소부리벌과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필자의 추측으로는 청마산성이 백제 중앙군의 거점성이였을거라 생각해.













한편 지방군은 주로 농민병으로 이루어졌는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방은 方-郡-城 체제로 이루어 졌어.

이들 각각에 농민병들이 주둔,배치되었는데 사비시대에 5방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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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有十郡 
(북사 백제전)

每方管郡 多者至十 少者六七
(한원 동이전 백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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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을 볼 때 각 방에는 각각 10개 내지 6~7개의 군으로 구성되었고, 군에는 평균 5~6개의 성(현)이 통속되어 있었으며, 성(현)의 총수는 200~250개에 달해.

즉 방의 총수는 5개, 군의 총수는 30~50개, 성의 총수는 200~250개인 셈이지.
※ 백제 멸망 직후 당이 편제한 군의 숫자는 37개이나 이것은 당이 축소편제한 개연성이 있으므로 이것을 백제 당시 군의 수치로 인정하기는 어려워.


방성에 주둔한 군사가 700~1200명이였던 반면, 성에 주둔한 군사는 대략 200~300명으로 보여. 이 추론을 뒷받침할만한 기록은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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攻取蛙山城 留二百人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200명의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多婁王 三十九年



城主直宣率壯士二百人 

성주 직선(直宣)이 장사 200명을 거느리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古尒王 三十三年 八月



禿山城主率三百人 奔新羅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주민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갔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近肖古王 二十八年 七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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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을 통해 성의 군사가 200~300명이라 추측할 수 있으며, 비록 백제 초기의 기록이지만 후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여.
※ 평균적으로 200~300명이며, 성의 규모나 현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심해.


이와 같이 성에 주둔한 군사가 200~300명이라면, 성의 총수가 200~250개에 달하므로 성에 주둔하는 지방군의 총수는 40,000~7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어.
※이 수치는 향시 대기 중인 상비군의 숫자라고 보아야 하며, 전시상황이 발생할 시 주변 고을에서 건장한 장정들을 징병하여 짧은 시간(대략 1달)내로 병력을 증강시키는 시스템이라고 보면 좋을 거 같아.


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5방의 방성에 각각 700~1,200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있으므로 방성에 주둔하는 지방군의 총수는 3,500~6,000명에 달해.



그런데 군에 주둔한 군사의 수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

그래서 군은 방과 성의 중간 단계이므로 군에 주둔한 군사의 수를 방과 성의 중간으로 계산하여 대략 500명 정도라고 보면, 군에 주둔하는 지방군의 총수는 15,000~2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 할 수 있지.
※ 백제의 행정구역 단위 중 하나인 군(郡)은 평균적으로 3개의 현(성)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따지면 대략적으로 200~300명인 현(성)의 병력의 곱인 600~900명과 얼추 비슷하게 수치가 나와. 각 방성에 비해 적은 수의 병력을 상비군으로 보유 하였을거란 판단 하에 사학자들과 전사학자들은 군(郡)에 배치된 상비군의 숫자를 500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필자 또한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한 거 같아.


백제 지방군 조직도.jpg


이와 같이 성에 주둔하는 군사 40,000~75,000명, 군에 주둔하는 군사 15,000~25,000명, 방에 주둔하는 군사 3,500~6,000명을 모두 합하면, 백제 말기 보유하던 지방 상비군의 숫자는 58,500~106,000명에 이르지.

즉, 백제는 사비시대에 지방군으로 최하 약 6만 명에서 최대 10만 명 정도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게 백제의 총병력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

고려사 악지에는 백제 시대의 노래인 선운산가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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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沙人 征役 過期 不至基 妻 思之 登 禪雲山 望而 歌之

高麗史 71, 志 25, 樂 2, 百濟俗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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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을 해석하면 장사 사람이 정역에 나갔는데,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 사람의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며 선운산에 올라가 부른 노래야.


이를 통해 지방민의 정역, 즉 군역에는 기한이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어. 

군역에 기한이 있다는 것은 지방군이 교대로 근무하는 체제였음을 의미하지.

그런데 현재 지방군의 교대와 관련된 사료는 발견할 수 없어;;

필자가 고민하다가 당시 백제의 호수(戶數)를 통해 지방군의 교대 수를 추정해봤어.




정림사지 5층석탑과 당평제비.jpg


우선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당평제비(唐平濟碑)를 살펴보자.

당평제비에는 660년 백제 멸망 당시의 인구수에 대해 자세한 수치를 적어놨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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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置五都督 卅七州 二百五十縣 戶卄四萬 口六百卄萬 各承編戶

唐平濟碑 中 一部 拔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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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당평제비 기록은 당이 백제를 정복한 이후 5도독 37주 24만호 250현 620만구를 각각 편호(編戶)로 정리하였다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

여기에서 편호의 수를 24만호라 하고 있는데, 구당서 백제전에서는 약간 다른 수치가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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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國舊分爲五部 統郡三十七 城二百 戶七十六萬

백제는 5부로 나뉘어 있으며 37개현과 성 200, 76만호를 거느리고 있다.

舊唐書 百濟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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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에는 백제의 호수가 76만호로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당평제비에는 24만호로 기록되어 있어. 당시 호적은 군역의 징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작성,운영 되었으므로 당평제비나 구당서에 실려있는 호수는 모두 군역과 관련된 수치일거야.

우선 당평제비에 있는 호수는 편호(編戶)라는 점이 주목이 돼.

편호, 즉 자연호를 몇 개 묵여서 군호(軍戶)를 편성한 호가 24만호라는 것이지.

구당서에 실려 있는 호수는 편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자연호의 호수 일거야.

이를 통해 백제 말기에는 76만의 자연호로서 24만의 군호를 편제하였다고 추론 할 수 있지.






대략 3개의 자연호로 1개의 군호를 구성하였으며, 앞서 지방 상비군의 수가 6~10만이라고 추정한 바가 있어.

이를 그 중간을 취하여 8만으로 본다면, 백제의 지방군 체제는 24만호의 군호를 가지고 8만의 상비군을 운용하였던 셈이지.

이러한 분석을 통해 백제 지방군은 3교대제로 운영되었음을 알수 있어.

※참고로 조선 전기에 양인농민의 의무병역이였던 정병은 2~3명의 보인을 받고 8교대 혹은 4교대로 근무하였는데, 이에 비해 백제는 2명의 자연호의 도움을 받은 군인 1丁이 3교대로 근무한 셈이되니... 백제의 군역이 조선전기에 비해 훨씬 고되었음을 알 수 있어. 
이를 통해 치열했던 삼국시대를 살았던 백제인들의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짠하盧....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의 4부체제로 출발한 백제의 군제는 고이왕대에 이르러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분화되었고, 웅진시대를 거쳐 사비시대에 이르러 중앙의 5부, 지방의 방-군-성 체제로 발전하였어.

이러한 군제는 무사(직업군인)와 농민병으로 구성,운영되었는데, 무사들은 평상시 왕경 5부에 상비병으로 상주 근무하였고, 농민병은 방-군-성에 교대로 근무하였지.

또한 이는 평시체제이며 전시에는 무사들을 골간으로 농민병을 재편성한 별도의 전시체제를 마련하여 전투에 임하였을거야.



지금까지 정리한 내용을 조직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아.


백제 말기 백제군제.jpg





이로서 백제의 군사제도와 660년 당시 백제의 군 병력에 대해서 살펴봤어. 


그럼 사비시대, 즉 660년 당시 백제 5방과 군사배치에 대해 알아보자ㅋ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백제군은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화 구조였어.

특히, 백제의 주 병력은 농민병으로 이루워진 지방군이였지.




이러한 지방군은 앞서 방-군-성 체제로 배치되었다고 설명했을거야.

사서에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백제 인물들 대부분이 인명 혹은 관등+인명만 기록되어 있을 뿐 관직이 함께 병기되어 있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현존하는 사료의 한계 상 방령의 구체적인 인물을 확인하기 어려워.

그런데 백제 멸망기와 부흥운동기에 활약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분석해보면, 당시 5방체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5방성에 파견되었던 방령의 구체적인 인물들을 추론해 낼 수 있어.


왜냐하면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백제 지방통치체제의 중심 거점인 방성을 통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지.

따라서 백제부흥운동기에 활약한 인물들을 분석해본다면 당시 방령으로 파견되었던 지방관의 확인과 나제전쟁 당시 전투에 참가하였던 장수들의 파악에 도움이 될거야.

사서에는 각 방령의 이름이나 위치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선 각 방의 구체적인 위치를 확정 한 후 그 지역과 관련되는 인물들을 추출하여 그들이 방령일 가능성을 검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해 볼게.







동방령(東方領)



백제 멸망기를 전후로 하여 동방령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과 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어.

단지 삼국사기에 기록된 성왕 32년에 일어난 관산성 전투에서 인물은 기록되지 않고 관직명만 기록된 동방령의 존재만이 확인될 뿐이야.

※삼국사기에는 단지 동방령이나는 관직명만이 적기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인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면이 기년상 서기 554년이므로 이 기록에 나오고 있는 동방령 물기막기무련이라는 구체적인 인명을 확인 할 수이 있어.


관산성 전투.jpg

이러한 물기막기무련의 출자를 왜계백제관료로 추정하며, 이때 동원된 군사를 대반씨(大伴氏)의 토벌 이후 축자(築紫)를 지배하고 있던 물부(物部)씨의 계통으로 이해하고 있어.

당시 백제 조정에 왜계 백제관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정되나, 이는 중앙관직에 한정될 가능성이 높아. 

따라서 중앙관직이 아닌 지방관을 왜인이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좀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며 후술하겠지만 멸망기에 파견되었던 방령들 대다수가 왕족 혹은 종족 출신이었다는 사실에서 역으로 물부씨에 대한 출자를 검토해 볼수 있지 않을까 해.

최근 흑치상지의 사위인 순장군의 성이 물부씨로 확인됨에 따라 흑치상지와의 관계를 통해 물부씨의 출자에 대한 접근도 가능할 수 있을거 같아.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기록만을 가지고 백제 멸망기에 동방령의 구체적인 인물을 찾기란 불가능하다고 밖에 할 수 없어.

그런데 이점과 관련하여 백제 멸망기에 활동한 계백과 신라와의 전투가 벌어진 황산벌 전투의 지리적인 위치에 대해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

우선 황산벌에 대한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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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城郡 本百濟任存城 景德王改名 今大興郡 領縣二 靑正縣 本百濟古良夫里縣 景德王改名 
今靑陽縣 孤山縣 本百濟烏山縣 景德王改名 今禮山縣

​황산군은 본래 백제의 황등야산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고려) 연산현이다. 
속현은 2개이다. 진령현은 본래 백제의 진량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금산현이다. 
영동현은 본래 백제의 현이였는데, 경덕욍이 주군의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모두 그대로 따른다.

三國史記 券第36 雜志 第5 地理 三 新羅 黃山郡





連山郡 本百濟黃等也山郡 新羅景德王改爲黃山郡 高麗初更今名

연산군은 본래 백제 황등야산군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산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까지 불리었다.

高麗史 券 10 地理 1




連山郡 本百濟黃等也山郡 新羅改黃山郡 高麗初更今名 顯宗九年






黃山 一云 天護 在縣東五里 新羅金庾信將兵興唐蘇定方攻百濟 百濟將軍階伯 羅兵千黃山之野設三營 四戰皆勝 兵寡力屈而死

황산은 서쪽으로 5리 떨어져 있는데, 신라 김유신이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공격할 때, 
백제장군 계백이 신라군에 맞서 삼영을 설치하여 4번 싸워 이겼지만 병력차로 전사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券 18 忠淸道 連山縣 山川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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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지역은 본래 백제의 황등야산군이였는데, 신라 경덕왕대에 황산군으로 개명되었어.

고려 때에는 연산현으로 읍격이 낮아졌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연산현으로 지속된 연혁을 알수 있지.

이 중 마지막 기록이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황산벌은 황산에 인접해 있는 평야지대로 이해되지.

현재까지 황산벌의 구체적인 위치 비정에 있어서는 다소 이견들이 존재하나,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연산지역을 중심으로 비정되고 있는 점은 동일해.

그러므로 사서에 기록된 연혁을 바탕으로 해서 황산은 지금의 연산지역을 가리키고 있다는건 명확한 사실이지.

※황산과 황산벌 전투의 장소에 대해서는 황산벌 전투편에서 자세히 서술해볼게.





매화산성.jpg

득안성 전경 (現 논산시 은진면 매화산)


이와 관련하여 당시 백제의 5방중 하나인 동방의 치소인 득안성이 現 논산시 은진면 일대에 비정되고 있어.

동방은 주서(周書)와 한원(翰苑)에 득안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당이 설치한 5도독부에서는 덕안(德安)으로 표기되어 있어. 득안과 덕안은 비록 표기상 차이는 있으나 같은 성의 다른 이칭으로 파악 할 수 있어.

덕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德殷郡 本百濟德近郡 景德王改名 今德恩郡)의 기록이나 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연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덕근군으로 표기되어 있기는 하나 덕근은 바로 덕안과 통하며, 이를 통해 지금의 은진지역임이 확인되지.




은진과 연산.jpg


現 은진과 연산지역은 지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도 행정구역 상 논산지역에 같이 포함되고 있어 은진과 연산지역 모두 동방성의 관할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또한 황산벌 전투가 있었던 곳이 연산지역에 해당하므로 황산벌 지역도 당연히 동방의 관할 하에 있다는 점은 이 지역이 사비도성의 방어에 아주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음을 반영하지.


황산벌 전투.jpg

이렇듯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동방의 소속이었다면, 이 전투에 참여하게 된 병력 중 동방에 소속된 지방군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이 점은 관산성 전투 당시 동방령이 특기되어 있어 동방군을 이끌고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도 뒷받침 되지.

비록 관산성 지역이 동방의 관할 지역이었는지 확정하기는 어려우나, 나당연합군의 대처방법을 논할 때 백제의 요새로 지적되고 있는 탄현이 옥천-대전-논산을 잇는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교통로상 동방지역과 연결될 가능성은 매우 높아.




또한 백제의 대외전쟁에 있어서 병력 동원이 지방통치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도 이유이지.

더구나 5방체제에서는 지방통치제도의 정점에 있던 5방에서 병력동원을 총괄하고 있었으며, 방령이 중앙정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었을 개연성이 높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





우린 위에서 방성에 700~1,200명의 군사가 배치되었단 사실을 알고 있어.

이는 각 방의 방어를 위해 배치되었단 사실인데, 그러면 당연히 동방의 관할 하에 있던 황산의 황산벌 전투에서 동방에 배속되어 있던  지방군이 동원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지.



그런데,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보다 상위 관등인 좌평직을 보유한 충상과 상영이 참전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

관등상으로 볼 때 백제의 총지휘를 맡아야 될 사람은 계백이 아닌 오히려 충상이나 상영이 되어야 한다는 모순이 생기지. 더구나 상영은 나당연합군의 대처방법에 대해서 의논했던 회의 자리에 있었고, 그의 대처방법이 채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에서 그의 입지가 높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어.

이처럼 수도에 있던 충상과 상영이 직접 황산벌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황산벌 전투에 동방 소속 군사들만이 전투에 참여하였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러면 당시 동방의 군사를 포함해서 황산벌 전투에는 백제 중앙군 또한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지.




이 점과 관련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가 삼영을 설치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볼수 있어.

삼영을 설치 했다는 것은 3개의 부대가 각각 별도의 군영을 세운 표현이기 때문이지.
(or 좌군,중군,우군으로 배치되었기 때문)

결국 삼영의 설치를 통해 충상,상영,계백 등은 각자 자신의 군사를 중심으로 해 전투를 전개해 나갔던 것으로 파악 할 수 있어
※ 황산벌 전투에서 자세히 서술할게



계백.jpg


따라서 당시 백제군이 이끄는 군사에는 중앙군과 지방군인 동방군이 혼재되어 편성되었고, 삼영에 대한 지휘권자가 달랐던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지.

즉, 충상,상영 등과 같이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권자는 중앙군을 이끌었던 반면, 계백이 이끄는 군대는 중앙군이기보다는 동방에 소속된 지방의 군사를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아.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거느리고 출전한 5천 결사대는 동방이 보유하고 있는 군사와 동방성과 가까운 군,현(성)의 군사들까지 포함한 수치로 이해하면 돼.

※ 결사대란 이미지 때문에 이들을 꼭 특별히 선발된 군사(정예부대)의 성격으로만 이해하는건 멍청한 짓이야.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 참전할 당시 이미 백제의 멸망을 예견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동방성 인근 동방군이 총동원되었다고 해서 이들에게 결사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5천 결사대.jpg


이처럼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동방에 배속되어 있는 지방군일 가능성이 높다면, 이를 이끈 계백은 당연히 동방의 책임자인 동방령이 될 수 밖에 없어.

동방 소속 군사의 지휘를 동방령이 하지 않고 다른 인물이 했다는 점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기 때문이지.

특히 동방 지역에 속해있는 황산벌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곳의 사령관인 동방령이 그 전투에 배제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

계백을 제외한 충상과 상영은 중앙에서 파견된 인물이 확실하기 때문에 동방령으로 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워.



더구나 주서와 한원에는 방령에 달솔이 임명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계백이 가지고 있던 관등은 달솔이었지.

결국 계백은 동방의 방령으로서 동방에 소속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군의 진격을 황산벌에서 저지하려고 했던 것으로 정리 할 수 있어.






황산벌 전투에 참가한 계백을 이처럼 동방의 방령으로 추정 할 수 있으므로 백제 멸망기에 활동한 동방령의 구체적인 인물을 확인하였어.












서방령(西方領)



서방에 파견된 방령과 관련하여 동방령처럼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자료 또한 없어.

따라서 우선은 서방의 위치를 확정하고, 그 후 서방과 관련된 인물을 뽑아내어 서방령을 추정해 내는 것이 순리일거 같아.

그동안 서방과 관련해서는 동방과 달리 다양하게 위치비정이 이루어져 있어.

그동안 서방의 후보지로 거론된 곳으로는 서산,당진 방면 또는 예산,대흥 지역과 영암,나주 지역, 그리고 보령지역으로 보거나 서산의 북주산성, 예산,대흥의 임존성으로 특정해서 봤어.

이처럼 서방지역이 다양하게 비정되어 온 이유는 한원의 사비에서 서쪽으로 350리에 위치해 있다는 기록을 너무 의식했기 때문이지.

한원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면 서방은 결국 서해바다 위에서 찾아야 한다는 모순점이 생기 되지.

※이에 환빠들은 백제는 중원에 있었다는 망상을 하게 되고......



그러나 서쪽이라는 정확한 방위관념에 따라서 5방성이 편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쪽의 방위관념을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어.

이렇게 논란이 되고 있는 서방의 위치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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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琛等乃釋府城之圍 退保任存城 任存城在百濟西部任存山

도침의 무리가 성을 포위하다 쫒겨, 임존성으로 물러났다. 임존성은 백제 서부의 임존산에 있다.

資治通鑑 卷200 唐紀 16 高宗龍朔 元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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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존성은 백제부흥운동기 주류성과 함께 대표적인 거점성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위 사료에서 임존성이 있던 임존산이 서부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해.

임존산은 왕도인 부여에 있지 않는 것이 확실하므로 이곳에 표기되어 있는 서부는 서방임이 분명하지.



임존성은 서방의 관할 하에 있던 성으로 임존성 주변 또한 서방의 관할영역으로 편제되었어.

그런데 임존성이 백제부흥운동기 서방지역에서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서방에서 치소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것은 방성이 험산에 위치하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는 이점과 부흥운동기에 모여든 대규모의 군사를 수용해야 하는 성의 규모를 대비할 때 방성이 제외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임존성 구글 지도.jpg

서방으로 추정되는 지역(태안반도,충청남도)의 백제계 산성 중 대규모 군사를 수용할 수 있는 성은 여러곳 있지만 그중 규모가 가장 큰 산성인 봉수산성(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봉수산 정상부)를 임존성으로 추정하고 있어.



이처럼 백제 부흥운동기 중심지의 역활을 하고 있던 임존성 지역이 서방의 치소로 비정되고 있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당시 임존성 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 인물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서방의 방령에 대해 접근해 볼수 있지 않을까?





서방의 치소에서 처음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킨 인물이라면 서방의 방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지.

더구나 서방의 치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부흥운동에서 그곳의 최고 책임자인 서방령을 배제하기 힘들어.

그럼 서방의 방령을 추출해 내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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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齒常之 百濟西部人 長七尺餘 驍毅有謀略 爲百濟達率兼風達郡將 猶唐刺史云 蘇定方平百濟 常之以所部降 
而定方囚老王 縱兵大掠 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 嘯合逋亡 依任存山自固 不旬日 歸者三萬 定方勒兵攻之 不克 
遂復二百餘城 龍朔中 高宗遣使招諭 乃詣劉仁軌降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 서부 사람으로서 키가 7척이 넘었으며, 날래고 용감하며 지략이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達率)로서 풍달군(風達郡)의 장수를 겸했는데, 이는 당나라의 자사(刺史) 벼슬과 같다고 한다.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했을 때에 자기 부하와 함께 항복했다가 정방이 늙은 국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함부로 노략질하매 
상지가 성을 내어 좌우 추장 10여명을 데리고 탈출했다. 그리하여 도망쳤던 백제 군사들을 모아 
임존성(任存城)으로 가서 굳게 지키니 열흘 안팎에 상지에게 모여든 자가 3만명이었다.

정방이 군사를 정비하여 그를 쳤으나 이기지 못했고, 상지는 마침내 2백여성을 회복했다. 
용삭(龍朔) 연간에 당(唐) 고종(高宗)이 사신을 파견하여 상지를 불러 타이르매 그만 유인궤(劉仁軌)한테 가서 항복했다.

舊唐書 卷 111 列傳 第35 黑齒常之傳





百濟故將福信及浮圖道琛迎故王子扶餘豊 立之 圍留鎭郞將劉仁願於熊津城 唐皇帝詔仁軌檢校帶方州刺史 
統前都督王文度之衆 與我兵向百濟營 轉鬪陷陳 所向無前 信等釋仁願圍 退保任存城 
旣而福信殺道琛 幷其衆 招還叛亡 勢甚張 仁軌與仁願合 解甲休士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낭장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熊津城, 충남 공주)에서 포위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하게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통솔하고 
우리 병사와 함께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 군대는 매번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키니 가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인 다음 그의 무리를 자기 군대에 합치고, 아울러 배반하고 도망쳤던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커다란 세력을 이루었다. 
유인궤는 유인원과 병사를 합하여 잠시 무장을 풀고 군대를 쉬게 하면서 병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文武王 三年 五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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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 외에도 임존성 지역과 관계되는 인물들에 대한 사료는 삼국사기에서 산재되어 확인되고 있으나, 관련 인물이 모두 흑치상지, 복신,도침으로 집약되고 있는 점에서는 동일해.

삼국사기와 신당서 기록 외에도 구당서,일본서기등의 기록에서도 세 인물들만이 임존성 지역과 관련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러나 이 중 도침은 승려신분이 분명하기에 지방관인 서방의 방령이 될 가능성은 없으므로 배제시키면 흑치상지,복신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서방의 방령이 누구인가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


그러면 일단 흑치상지라는 인물에 대한 검토를 해보자.



흑치상지.jpg



위의 사료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서부인이야. 여기서 서부를 왕도 5부제 하의 서부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기도 하나, 그보다는 오히려 5방의 하나인 서방에 대한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일거 같아.

앞서 임존산이 서부로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 좋은 예이지.

이 기록만을 통해 본다면 흑치상지와 서방과의 관련성이 매우 높아져.

더구나 그가 달솔이라는 관등을 역임했으며, 풍달군장직을 겸임했다는 사실에서 지방관의 색채를 분명하게 해주지.

특히 그가 달솔의 관등을 역임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달솔이 5방의 방령에 취임하고 있었던 관등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가 좌우 추장 10여인과 임존성으로 달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추장을 서방에 소속된 군장들로 파악한다면, 이를 이끄는 흑치상지가 서방의 방령일 가능성은 더 높아져.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 흑치상지를 서방의 방령으로 추정하고 있어.


하지만, 필자는 흑치상지를 서부의 방령으로 보는 데에는 몇가지 주저되는 바가 있어;;





첫째. 그의 관직 중 적기되어 있는 풍달군장직의 문제.

만약 그가 서부의 방령을 역임하고 있었다면 달솔로서 풍달군장직을 겸임했다고 하기 보다는 그보다 상위관직인 서부의 방령을 사료상에 분명히 적기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더구나 달솔은 관등으로서 여러 가지 관직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해당 관직을 서술하는 것이 더 적합해.

그것은 달솔이 5방에 파견된 방령직을 역임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달솔이 방령을 가리키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달군장직을 겸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풍달군장직 보다 상위 관직을 역임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풀이되지 않아?

이러한 관직에 대한 의미는 백제의 관등과 관직을 구분하지 않은 채 사용한 것으로 중국인 찬자의 이해도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판단이 돼.

이러한 사례가 고구려 유민 천남생(泉男生)과 고자(高慈)의 묘지명에서도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지.

이들 묘지명에서도 관등과 관직을 병렬로 기록해 놓고 겸임했다고 표현하고 있어.



따라서 겸임이라는 의미에 집착함으로서 흑치상지의 달솔이라는 관등을 바로 방령이라는 관직으로 치환하여 이해할 필요성은 없지.

단지 달솔이라는 관등을 가지고 덕솔이 맡는 군장직을 담당함으로써 오는 계고직비(階高職卑-품계는 높고 관직은 낮음)의 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해 두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지.

따라서 흑치상지는 관등이 비록 달솔이기는 하지만 서방의 방령이 아닌 풍달군장직만을 역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되지.







둘째. 흑치상지를 서방령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인 항복할 때 함께한 좌우추장십여인(左右酋長十餘人)을 군장으로 해석


필자는 이런 해석 자체를 부정하는데, 추장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어적 의미를 상기해 본다면 지방관인 군장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재지세력으로 파악하는게 옳아.

재지세력의 정확한 성격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이러한 재지세력의 성격은 비록 중아에서 파견된 지방관은 아니라고 해도 하급관리층으로 편입되어 있어, 군장직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

그렇다면 흑치상지가 서방의 방령으로서 이렇게 군장세력을 이끌고 항복해왔다고 보는 것은 어색하지.

서방의 방령이였다면 기존의 논의대로 흑치상지가 이끌고 항복한 인물들은 군장으로 표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추장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은 흑치상지가 서방의 방령이 아니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야.








샛째. 임존성에서 처음으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 것은 흑치상지보다는 복신이었을 가능성

이는 일본서기와 당유인원기공비의 기록에서 찾아 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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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己亥朔癸卯。百濟遣達率。〈闕名。〉沙彌覺從等來奏曰。〈或本云。逃來告難。〉
今年七月。新羅恃力作勢不親於隣。引搆唐人。傾覆百濟。君臣總俘、略無■類。

〈或本云。今年七月十日。大唐蘇定方率船師軍于尾資之津。新羅王春秋智率兵馬軍于怒受利之山。
夾擊百濟。相戰三日。陷我王城。同月十三日。始破王城。怒受利山。百濟之東境也。〉

於是西部恩率鬼室福信赫然發憤據任射岐山。〈或本云。北任叙利山〉
達率餘自進據中部久麻怒利城。〈或本云。都々岐留山。〉各營一所誘聚散卒。兵盡前役。故以■戰。
新羅軍破。百濟奪其兵。旣而百濟兵翻銳。唐不敢入。福信等遂鳩集同國

백제가 達率[이름은 빠져 있다]·沙彌 覺從 등을 보내었는데, 와서[어떤 책에는 도망해 와서 어려움을 고했다고 하였다] 
“금년 7월에 신라가 힘을 믿고 勢를 이루어서 이웃나라를 친하게 여기지 않고, 당나라 사람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포로가 되고 백성들도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어떤 책에는 ”금년 7월 10일에 唐의 蘇定方이 수군을 거느리고 尾資津에 주둔하였다.
新羅王 春秋智가 兵馬를 거느리고 怒受利山에 주둔하여 백제를 협공하여 서로 3일을 싸워 우리 왕성(부여)이 함락되었다.
같은 달 13일에 처음으로 왕성을 깨트렸다. 怒受利山은 百濟의 동쪽 경계이다].

이에 西部 恩率 鬼室福信이 매우 화가 나서 任射岐山[어떤 책에는 北任敍利山이라 하였다]에 웅거하고, 
達率 餘自進은 中部 久麻怒利城[어떤 책에는 都都岐留山이라 하였다]에 웅거하여 각각 한 곳에 진을 치고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았다. 
무기가 전의 싸움에서 다 없어졌으므로 막대기를 들고 싸워 신라군을 물리쳤다. 
백제군이 그 무기를 빼앗았으므로 얼마 후 백제군사들이 다시 날쌔져, 唐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福信 등이 드디어 같은 나라사람들을 모아 함께 왕성을 지켰다. 

日本書紀 齊明天皇 六年 九月




仍圖反逆 卽有僞僧道琛 僞扞率鬼室福信 出自閭巷 爲其魁首 招集狂狡 堡據任存 蜂屯蝟起 彌山滿谷

이내 반역을 도모하니 곧 가짜 승려 도침(道琛), 가짜 한솔(扞率) 귀실복신(鬼室福信)이 그들이다. 
민간에서 나와 그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사납고 교활한 사람을 불러모아 임존성(任存城)에 성채를 쌓고 웅거하여,
벌떼처럼 모여 있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서 산곡에 가득차 있다.

唐劉仁願紀功碑 中 拔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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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기록은 660년 9월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백제 달솔과 사미,교종 등이 일본에 가서 백제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이때 귀실복신과 여자진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함께 알리고 있는 내용이야.

이 기사를 통해서 당시 백제 부흥운동이 복신과 여자진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과 복신의 거병장소가 임사기산 즉, 임존성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지.

복신의 거병장소가 임존성이었다는 사실은 밑의 당유인원기공비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어.


문제는 복신과 흑치상지 중 누가 먼저 임존성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느냐 하는 점이야.

그것은 서방인 임존성에서 최초로 부흥운동을 전개한 인물이 서방령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




귀실복신.jpg

복신의 임존성에서의 거병은 대체적으로 의자왕이 항복한 8월 2일부터 소정방이 임존성을 공격한 8월 26일 사이로 생각되고 있어.

반면 흑치상지의 경우 부흥운동의 거병시점이 의자왕이 항복한 이후라는 점은 분명하나 구체적인 시기를 확정하기 어려워.

단지 당군에 항복했다가 임존산으로 달아나 부흥운동을 전개한 흑치상지를 소정방이 공격한 시점이 8월 26이므로 흑치상지의 거병도 그 이전임은 분명해.

現 자료상으로는 누가 먼저 임존성에서 거병했는지의 여부는 가늠하기는 쉽지 않아.

하지만 첫 번째 기록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듯이 임존성의 중심인물로 흑치상지가 아닌 복신이 거론된다는 사실이 주목할만해.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임존성에서의 부흥운동을 전개한 부흥군의 중심에는 흑치상지가 아닌 복신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거든.



임존성.jpg

임존성(봉수산성/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봉수산 정상부)
사적 제 90호이며, 지정면적 1,111,537㎡ 둘레 2,450m(남아있는 부분) 퇴뫼식 2중 석축산성
백제시대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는 최대 규모


나아가 이 점은 복신이 흑치상지보다는 임존성에서의 거병시점이 더 빨랐음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

대부분의 기록에서 임존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라는 거명하고 있는 것은 당이 임존성을 함락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당으로 이주하여 장군으로서 쌓은 그의 업적 때문에 그렇게 기록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또한 복신은 임존성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대부분을 주류성으로 옮겨 활동을 한 반면, 흑치상지는 임존성에서만 부흥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당에서는 흑치상지와 임존성의 관계를 부각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

이렇게 임존성에서는 복신과 흑치상지가 같이 거병을 하고 있는데, 중심인물은 흑치상지이기보다는 복신임을 알수 있었어.

즉, 복신을 중심으로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에 합류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지.

밑의 자료는 이러한 두명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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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之與別部將沙吒相如 據嶮以應福信

흑치상지는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吒相如)와 함께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과 호응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條 (서기 662년,新羅 文武王 2년, 唐 高宗 용삭 2년)




常之與別部將沙吒相如 各據險以應福信

흑치상지는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吒相如)와 각각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과 호응하였다. 

資治通鑑 卷201 唐紀 17 高宗 中之下




先是,百濟首領沙吒相如、黑齒常之自蘇定方軍回後,鳩集亡散,各據險以應福信

먼저 백제수령 사타상여와 흑치상지가 소정방에게 항복하였지만, 도망쳐 각기 험준한 산에 의거하여 복신과 호응하였다.

舊唐書 卷84 列傳 弟 34 劉仁軌傳




定方破百濟,酋領沙吒相如、黑齒常之嘯亡散,據險以應福信

백제를 무너트린 후 수령 사타상여와 흑치상지가 흩어져 험준한 산에 모여 복신과 호응하였다.

新唐書 卷108 列傳 弟33 劉仁軌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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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보다는 복신과 호응하는 관계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어.

앞서 임존성의 중심인물이 복신임을 알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호응관계는 지휘체계 속에서 이루어졌던 점을 반영하지.

이와 같이 임존성에서 초기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 중심인물은 복신이며, 흑치상지는 그의 휘하에서 활동을 했으므로 서부의 방령으로서 추정할 수 있는 인물은 흑치상지보다는 복신으로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워.

따라서 흑치상지는 사료나 그의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서방에 소속되어 있던 풍달군장직만을 역임했던 것이라 필자는 추정하고 있어.



흑치상지 묘지명.jpg

흑치상지 묘지명
1929년 중국 낙양시에서 출토됨.


여기서 딱 결론나면 좋겠지만.... 이렇게 복신을 서부의 방령으로 추정한다면 그의 관등 상에 문제가 생겨..;;;

즉, 흑치상지의 관등은 달솔로 묘지명과 각종 사서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반면, 복신의 관등은 백제 멸망기에 그보다 낮은 은솔이나 한솔로 나타나고 있거나 백제의 옛장수라는 막연한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이렇게 관등상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어.


복신의 관등이 기록에 따라 은솔이나 한솔로 기록되고 있는 등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는 점은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인 복신을 당의 입장에서 비하시켜보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풀이 할 수 있어.

이점은 당유인원기공비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데, 그의 출자를 향려(巷閭-사생아)라고 한 점이나, 괴수(魁首-무리의 우두머리),광교(狂狡-미친 듯이 날뛰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단적으로 드러나지.

복신은 삼국사기 기록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듯이 왕족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은 복신을 폄하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해.
※모르는 게이들을 위해... 귀실복신은 무왕의 조카, 즉 의자왕과 사촌지간이야.
흑치상지 또한 왕족출신이지만 따지고 보면 귀실복신이 왕조의 방계집안으로 볼 때, 서열이 높기 때문에 위에서 설명한 덕솔,한솔의 관등이지만 서방령의 지위에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어. 사비시대의 방령들은 대부분 왕족출신들이 담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에 신빙성이 배가 되지.

이렇게 당의 입장에서 복신을 비하시킨 점은 역으로 그가 백제부흥운동의 가장 큰 축이였기 때문이야.



흑치상지.jpg


반면 흑치상지의 경우는 비록 부흥운동을 일으킨 장본이기는 하지만 당에 들어가 많은 군공을 세워 복신과는 다른 입장 차이를 반영하고 있어.

즉, 복신과 흑치상지의 관등 상의 차이는 당의 시각에서 재정리되다 보니 복신을 흑치상지보다 하위관등으로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또한 복신의 정확한 관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수 없으나, 그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서방의 방령직을 역임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달솔직 이상의 관등은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그가 무왕 28년에 중국의 사신으로 가는 등의 활약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러하지.

또한 복신은 부흥운동기에 좌평으로 관등이 승진되고 있지만, 흑치상지의 경우는 달솔이라는 관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이를 통해서도 복신의 관등이 흑치상지보다는 낮지 않았던 점을 반영한다고 볼수 있어.






위의 주석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 기록되어 있는 바, 왕족이었음은 분명해.

또한 그가 이미 무왕 때부터 중국의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의 정치적 지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짐작 할 수 있지.

그런데 이렇게 정치권에 일찍부터 등장한 복신이 의자왕대의 기록에서는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가 백제가 멸망한 후인 백제 부흥운동기에 들어와서 다시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점은 복신이 의자왕 재위 이후 서방의 방령으로 파견되어 중앙정계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던 점과 관계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복신이 이미 무왕대에 서방령의 자격조건으로서 중국의 사진으로 파견되었을 가능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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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마애삼존불
국보 제 84호이며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위치해 있음.



서방으로 비정되는 예산지역과 서해안으로 연결되는 서산지역에는 현재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 서산 마애삼존불, 태안 마애삼존불이 남아있어 대중국 교통로서 이 지역이 중요시 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 이 지역의 지방관이 중국의 사진으로 파견되었을 가능성도 상정이 돼.

이러한 사례를 비록 백제 사회에서 찾을순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경우 지금의 서산(부성군)과 당진(혜성군)의 태수가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 백제의 경우에도 적용해 볼수 있을거 같아.

두가지 가능성 중 확실하게 알수는 없지만, 흑치상지 가문이 대대로 지방관을 역임하고 있는 예를 통해 볼 때 후자의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어.


결국 복신이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은 그가 서방의 방령이었었다는 사실과 그의 출신성분이 왕족이었다는 점에서 이해 될 수 있어.

즉, 복신은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에서 분지된 왕족으로서 서방의 방령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서방에 편제된 지방군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지.








중방령(中方領)



중방 또한 앞서의 동방이나 서방의 예처럼 방령의 구체적인 인물에 대한 기록은 전혀 발견할 수 없어,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앞의 사료에서 복신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여자진이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어.

이 기록에 따르면 여자진은 복신과 초기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인물로 서술되고 있어 그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쉽게 짐작 할 수 있어.

그러나 그와 관련된 자료는 우리나라나 중국의 기록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단지 앞서 인용한 일본서기에서만 단편적으로 보여.


백강구 전투.jpg


물론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여자신이라는 인물과 동일 인물로 볼수 있지만, 이 또한 기록이 단편적이야.

따라서 현재 남겨진 기록만을 가지고 여자진이라는 인물의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워.




그런데 그가 부흥운동을 일으킨 중부 구마노리성과의 연관성을 통해서 여자진이라는 인물의 일단을 파악해 볼수 있는 단서를 확보할 수 있어.

중부 구마노리성에 대한 위치나 성격을 파악 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하여 이곳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 여자진이라는 인물의 성격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

즉, 구마노리성을 중방으로 볼 수 있다면 그곳에서 백제 멸망 후 처음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한 여자진이라는 인물이 중방령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앞서의 논의처럼 중방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킨 인물 중 중방령을 배제하기는 힘들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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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으로 비정되는 부안 우금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이며, 지정면적 198,875㎡, 둘레 3,960m의 석축 대성(大成)이다.
축조시기는 사서마다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마한시대에 축조되었던걸 백제에 들어서 증축한듯 하다.
주류성 왕궁은 이 우금산성 아래에 자리잡고 있었을거라 추정하고 있음.


백제시대 중방의 위치에 대해서는 임존성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의 대표적인 거점이였던 주류성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구마노리성의 위치비정에 대해서는 네 가지 견해가 있어.

첫째. 북방의 치소였던 웅진의 이칭으로 파악하고 있는 견해로 이를 백제의 웅진성과 동일한 성명으로 보거나 웅진성 관할 아래에 있는 웅진 부근의 성으로 보는 견해.

둘째.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 거점인 주류성의 다양한 이명을 바탕으로 동일한 성명으로 보는 견해 (이명으로서 두량윤성,두솔성,고사부리성,고사비성,두곶성,고사성)

셋째. 정읍 고사부리성을 중방의 치소로 보는 견해.

넷째. 음율의 유사성으로 전북 고부군을 중방으로 보는 견해야.



필자는 정읍 고사부리성이 중방의 치소로 보는 설에 동의해.

물론 구마노리성과 웅진성의 이칭들 사이에는 음의 유사성이 인정이 되고 있어.

고대 지명은 사료가 제한된 관계로 언어학적인 접근이 주요한 방법론이 될 수 있으나 음의 형태만을 가지고 동일한 성으로 보기에는 미흡한 감이 없지 않아.

특히 일본서기에는 구마노리성의 이칭으로 도도기류성(都都岐留城)이라는 명칭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음의 유사성만으로 볼 때 주류성과 동일한 성명으로 파악 될 수 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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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성(現공주 공산성)
사적 제12호이며, 지정면적 218,717㎡ 둘레 2660m 토축혼합 테뫼식 포곡산성이다.



따라서 음의 유사성만을 가지고 성명을 파악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

또한 웅진의 이칭으로 나와있는 고마유(固麻類)의 성명들이 과연 웅진에 대한 고유명사로만 쓰일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의심스러워.

양서(梁書)에 기록되어 있는 고마성은 웅진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볼 수도 있으나, 이를 대성(大城)의 의미를 가지는 수도에 대한 일반적인 지칭으로도 볼수 있기 때문이지.

더구나 이 대성의 이미를 수도로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당시 지방의 거점이었던 5방에 대한 의미로도 확대 이해가 가능해.



이뿐만 아니라 구마노리성을 북방인 웅진성과 주류성으로 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내제되어 있어.


첫째. 구마노리성 앞에 중부명이 관칭 되고 있듯이 이 중부명을 왕도 5부제의 중부명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5방의 하나인 중방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이 중부를 왕도 5부명의 하나인 중보로 볼 수도 있으나 흑치상지의 경우 묘지명에 서부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를 왕도의 5부가 아닌 5방의 하나인 서방으로 보듯이 구마노리성 또한 중방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야.

이는 지방의 성에 왕도의 행정구역명을 관칭 한다는 사실이 어색하다는 점에서도 방증되지.

그렇다면 구마노리성이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 중방의 거성, 즉 치성으로 볼 수 있어.

이처럼 구마노리성을 주류성과 고사부리성, 웅진성으로 치원해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웅진성을 구마노리성으로 비정한다면 가장 큰 문제가 생기는데... 그 문제는 바로 두 번째 문제점이야.



둘째. 만약 구마노리성이 웅진성이었다면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으로 활용 될 수 없다.

웅진성은 이미 의자왕이 사비도성을 버리고 피난 간 성으로서 이 성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을 한 백제 멸망의 현장이야.

이후 웅진성은 당군에 의해 웅진도독부가 설치되고 백제 고지(故地)에 대한 지배를 실시하는 중심지의 역할을 한 장소로 활용되었어.
 
그러므로 웅진성이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 할 수 없는 건 당연하지.

따라서 이곳의 구마노리성은 웅진성이 아닌 다른 성에서 찾아야해.




셋째, 주류성에 대한 이칭이 많이 존재하고 있지만 두량윤성,고사부리성,고사비성,고사성등의 명칭은 주류성을 뜻하지 않아.

특히 고사비성과 고사성은 전북 정읍의 금사동산성을 지칭하는 이명이며, 두량윤성의 이명인 두릉윤성,두곶성,윤성은 모두 열기현이라 삼국사기 지리 백제군현조에 기록되있어. 이 열기현은 신라 경덕왕대에 열성현으로 개명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정산현으로 개칭되었는데, 現 충남 청양군 정산면이야.

또한 이 두릉윤성에 대해서 대동지지 충청도 정산 성지조에서는 계봉산고성(즉 옛 읍성이다 둘레는 1천 2백척이고 우물이 하나이다), 고성(칠갑산에 있다. 본래 두율성인데 혹은 자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넷째. 주류성이 두량윤성이 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김유신의 공격 떄문이다.

서기 663년 김유신이 부흥백제군을 향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할 때, 공격대상이 된 성으로 두릉윤성과 주류성이 모두 같이 기록되있으므로 주류성과 두량윤성은 별개의 성으로 보아야 정상이야.



 

그러므로 웅진성과 주류성 모두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

다른 견해로 백강의 의미를 왕도 서쪽을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왕도 옆을 흐르는 강’이라는 보통명사로 보는 견해가 있어.

이는 주류성을 중방의 치소로 보는 견해에 보탬이 되지만, 또한 정읍 금사동산성(고사부리성)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이유가 되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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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의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기존의 제설을 재검토하게 되었는데, 인근 정읍 고사부리성과 부안 백산성의 조사 성과와 연계하여 정읍 고사부리성을 중방의 치소로 학계에서는 거의 통설로 굳어지게 되었지.

백강은 現 금강을 지칭하기도 하나, 과거 백제시대에는 금강과 동진강을 합쳐 백강으로 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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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성(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백산)
사적 408호이며, 지정면적 81,518㎡  외성둘레 1,064m 외성,내성,중성의 4중구조로 되어 있으며, 퇴뫼식 토축산성이다.


동진강 유역은 벽골제 중수비에 보이는 몽리 지역을 통해 정치, 경제 영역의 설정이 가능한데, 이곳에 벽골제와 백산성, 고사부리성이 배치되어 있어.

벽골제는 생산유적으로서 백산성은 유통의 거점으로서 정치 중심은 고사부리성으로 비정되는데, 벽골제는 문헌기록이나 1975년 발굴조사 결과 초축이 330년에 해당된다는 결론이 나왔어.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연구에서서는 풍납토성의 축조연대나 축조공법의 비교를 통해 백제중앙세력이 벽골제 축조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었으나. 발굴조사 결과 제방의 축조법이나 풍납토성의 축조공법보다는 마한 분구묘의 축조공법과 매우 유사함이 밝혀졌지.

따라서 벽골제 축조 집단의 중심은 마한 분구묘 축조공법을 가진 세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지.



특히 벽골제의 축조는 3~4세기 호남 서해안 일대에 급증하는 대규모 취락과 깊은 관련성이 있어.

벽골제와 가까운 백산성에서는 4중 환호로 둘러싸인 유구로 정상에서 많은 곡물과 3~4세기 마한계 토기가 출토되었지. 또한 고사부리성 근처에 지사리나 운학리의 마한분구묘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점을 볼 때, 고사부리성은 옛 마한 국가의 도읍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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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부리성(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사적 제494호이며, 지정면적 92,127㎡ 둘레 1,050m의 퇴뫼식 석축산성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토성으로 개축되었음.


결과적으로 백강을 ‘왕도 옆을 흐르는 강‘이란 보통명사로 볼 때, 고사부리성이 주류성보단 동진강에 가깝고 마한계 유적지가 발달되있는걸 볼 때, 중방성의 치소는 정읍 고사부리성이란 추론이 가능해.

결국 중방 구마노리성(고사부리성)에서 거병한 여자진이 660년 당시 중방령의 직함을 가지고 있을거란 추론이 나오며, 동방령 계백이 직접 황산벌 전투를 지휘하였듯이 중방령 관할이였던 시산군(現 군산일대)에서 벌어진 기벌포 전투 또한 중방령인 여자진이 지휘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남방령(南方領)



백제 멸망기 남방에 대해서는 구지하성이라는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을뿐, 이와 관련된 인물이 전혀 확인되고 있지 않아.

또한 위치비정에 있어서도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지.

지금까지 나온 구지하성의 위치 주장은 크게 전남 장성, 전남 나주,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광주광역시 등으로 나뉘는데, 이중 3곳인 장성,구례, 남원이 비정되고 있어.

그런데 한원에서는 변성(卞城)이란 이칭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를 변한(弁韓)지역과 관련시켜 볼수 있지 않을까 해.

자의 상에 유사성이 간취되기 때문이지....;;



비록 표기상에 차이는 있으나 일본서기에서는 변한지역을 표기하면서 ‘弁’ 보다는 ‘卞’을 쏘고 있어 이 점은 크게 상관되지 않아.

특히 백제가 무령왕대 이후부터 가야 지역으로 영역확장을 시도하고 있는데, 5방 체제의 확립과정을 가야 지역에 대한 영역확장과 결부시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
※ 이와 관련하여 언어학적으로 구지라는 지역명이 백제어에서 매에 대한 의미로 해석되고 잇는 점은 음미해 볼만해




사비시대 백제 행정구역도.jpg



또한 백제 부흥운동시 두량윤성 전투에서 백제 부흥운동군이 승리하자 남방 지역의 여러 성들이 새로 부흥운동에 가담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이때 남방은 남방성과 남방성의 관할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후 신라의 백제부흥운동군의 진압과정과 관련하여 남방성의 위치를 생각하는데 시사점이 커

즉, 신라는 그후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등을 항복시키고 백제의 동방성인 덕안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 항복한 성들은 바로 두량윤성 전투에 승리하자 호응한 남방의 어러 성들과 관련되지.


이 남방의 여러성들은 지금의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지점에 해당되는 곳으로 백제 부흥운동군을 진압하기 위해 활용된 루트는 지금의 남원을 중심으로 해서 그 주변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남원 가야계-백제계 고분군 분포도.jpg

남원지역의 가야계-백제계 고분군 분포도



이와 관련하여 남방성을 남원지역으로 비정하는 설이 주목되는데, 남원지역으로 보는 이유는 가야와의 접경지역으로서 교통로가 발달된 지역이라는 점과 군사적 측면에서 삼국시대의 산성이 매우 많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왕 초기 아막성 전투, 그리고 은화관식이 출토된 횡열식 석실분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야.




그렇다면 당시 남방의 거점성이었을 구지하성을 중심으로 진압과정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이처럼 지금 남원지역이 남방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라고 비정할 수 있지.

더구나 남방성의 설치는 가야지역으로의 영토확장과도 긴밀히 연관도는 거점성으로 파악이 돼.





문제는 이 지역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인물이 사서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어 지방관의 분석은 어려운 형편이야.

그런데 남방을 지금의 남원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면, 의자왕대 대야성 침공을 주도하였던 장군 윤충이라는 인물이 주목되지.

이는 백제에서 대야성을 공격할때의 루트로 볼 때 그 선상이 남원지역을 거쳐서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과 관련되는데, 관산성 전투나 황산벌 전투에서 알수 있듯이 공격전이든 방어전이든 그 지역의 방령군들이 중심이 되어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남방지역의 방령군들이 대야성 전투에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더구나 백제의 병력동원은 지방통치조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지적을 생각 할 때 더욱 그렇지.





기록에 나타난 병력수를 본다고 하더라도 남방에서 총동원할 수 있는 병력수와도 비슷해.

또한 전쟁에 참여한 장군,좌장,달솔 등이 방령을 역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이 점은 뒷받침 될 수 있으며, 이렇게 볼 수 있다면 당시 대야성 전투를 지휘했던 백제의 윤충이라는 인물이 남방령으로 추정 할 수 있어.





그럼 과연 660년 당시 윤충이 남방성의 방령이였을까?


대야성 전투 이후 윤충이란 이름은 사서에 기록되어있지 않아. 의자왕의 대신라전의 선두타자로서 윤충이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 입지가 높았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고 생각해.

관산성 패전 이후 신라와는 대립관계가 지속되었는데, 이후 대외전쟁 기록에서도 상대국이 대부분 신라였다는 점과 의자왕대에 들어와서도 대신라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뒷받침 되지.

이렇게 윤충이 의자왕대에 가장 중시된 대신라전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볼 때 그의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높았으며, 조선상고사에서는 윤충을 성충의 동생으로 소개하는데 그가 남방령으로 임명 될 수 있었던 배경도 이점에서 찾아 질 수 있어.

또한 대야성 전투 이후 사로잡은 백성을 서방으로 옮겨 거주시키고 군사를 머물게 하여 대야성을 지키게 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윤충은 당시 남방령이였을 가능성이 높아.

만약, 윤충이 660년 당시 살아있다고 가정을 하면 그는 60~70대의 나이였을 가능성인 높아.






북방령(北方領)


백제 5방중 유일하게 방령의 기록이 남아있는 북방령은 삼국사기에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신한 후 소정방에게 항복할 때 같이 항복한 인물 중에 나와 있어.

웅진방령은 북방의 방령이 확실하지만 북방의 방령에 대해서는 관직만이 제시되어 있을 뿐 인명이 전혀 언급되지 않아.

이와 관련한 기록은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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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太子隆並與諸城主皆同送款

대장 예식이 의자를 끌고 항복하러 나왔다. 태자 융과 신하들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舊唐書 卷83 列傳 蘇定方傳




其大將禰植 輿義慈降

대장 예식이 의자를 수레에 태워 항복하였다.

新唐書 卷100 蘇定方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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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에서 확인되는 예식이라는 인물을 북방의 방령으로 비정 할 수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항복할 때 웅진방령군(熊津方領軍)이라고 특기되고 있는 점과 관련하여 볼 때 구당서와 신당서에 의자왕의 항복과 관련하여 기록되어 잇는 예식(예식진)이라는 인물의 존재는 충분히 북방의 방령으로 추정 가능하리라고 생각이 돼.

그러나 예식이라는 인물과 관련해서는 더 이상 다른 사료상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지 않아.


예식진 묘지명.jpg


하지만 최근에 들어 이 예식(진)의 묘지명을 2006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에서 발견하여 그의 일생이 자세하게 들어났어.

예식진은 웅천(공주) 출신으로 615년에 태어났으며, 조부는 좌평 예다(譽多)이며, 부친은 좌평 사선(思善)으로 2대에 걸쳐 좌평을 역임한 명문 가문 출신이야.

예식진 본인 또한 당시 달솔 관직의 웅진방령(북방령)이였으므로 명문중의 명문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예(譽,祢)씨 가문은 대성 팔족이 아니야. 

이를 통해 볼 때, 예씨 가문은 무왕 치세 or 위덕왕 말기에 들어 정계에 진출한 신흥가문으로 볼 수 있으며, 2대에 걸쳐 좌평과 3대인 예식진이 5방령 중 제일 중요했던 북방령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볼 때, 예씨 가문은 친왕파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 필자의 추측으로는 관산성 전투 당시 참전한 귀족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목씨 가문의 사람인 중좌평 목례마나, 하좌평 목윤귀, 덕솔 목례미순이 전사하였을거란 추측할 수 있어. 왜냐하면 6명의 좌평 중 4명이 전사하였다는 기록은 우린 이미 관산성 전투에서 봐왔어. 그러므로 성왕과 태자 여창이 주도적으로 이끈 전투를 보좌하기 위해 친왕파 귀족들이 대거 참전하였을 당시 상황을 볼 때, 백골산 전투에서의 괴멸적 타격은 목씨가문의 몰락을 초래하였을 거라고 필자는 생각해. 이러한 친왕파 귀족 중 한 축을 담당한 목씨가문의 몰락으로 북방에서의 친왕파 세력이 없어지자 웅진을 거점으로 하던 예씨 가문의 예다를 좌평으로 임명하여 북방에 대한 왕권의 강화를 노렸을 거라고 필자는 추측하고 있어.

관산성 전투.jpg

※※ 최근에 들어 필자가 관산성 전투에 참전한 동방령 물부막가부련이 아마 막씨 가문 사람이였을거라 추론하고 있어. 위에서 흑치상지의 사위인 순장군의 성씨가 물부씨인것으로 밝혀져서 물부란 명칭은 성씨를 뜻하지만, 필자가 생각해 볼때 물부막가부련을 나눠보면 물부는 아마 동방의 다른 이칭이였을 가능성이 있으며(백제의 행정기구인 22부에는 물부란 명칭이 없음), 막가부련은 막씨가문의 부련이라고 추론해. 

문제는 이 추론이 맞는가야... 

지금까지 물부막가부련을 백제계 왜계관료로서 보는 시각이 꽤나 우세하였는데, 그 이유는 신찬성씨록에서 물부(모노노베)씨를 도래인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일본의 유력 호족이라는 이유때문이야.(일본에서는 그리보는 소위 아마추어 사학자들이 많고, 한국 사학계에서도 조심스레 인정하고 있어.)

그래서 필자는 관산성 시리즈에서 물부막가부련을 야맛토 조정에서 파견한 지원군의 수장으로 인식한 큰 실수를 범하였지.(사실은 왜계백제관료였지만..)

하지만 이 물부막가부련을 다르게 판단해서, 막가(莫哥-哥는 성씨란 뜻)란 단어를 막씨가문으로 해석하면 당시 물부는 동방령의 이칭이며, 막씨가문의 부련이 선봉에 서서 신라 함산성을 함락시켰다고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 될거 같아.

무튼 임나재건회의에 참여한 인물들 대다수가 관산성 전투에서 태자 여창을 보필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당시 회의에 참가한 인물은 다음과 같아.

상좌평 사택기루, 중좌평 목례마나, 하좌평 목윤귀, 덕솔 비리막고, 덕솔 동성도천, 덕솔 목례미순, 덕솔 국수다, 나솔 연비선나

이중 비리막고는 일본서기에서 백제의 對가야 외교의 핵심 인물로서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태자 여창이 아닌 성왕이 이끈 연합군의 대다수를 차지한 월광태자(추론)의 대가야군과의 소통을 위해 연합군에 종군하였을 가능성이 있어. 또한 이 비리막고를 막씨가문의 사람으로 필자는 생각하는데, 근초고왕 치세 당시 등용되어 활약한 막고해를 볼 때, 막씨는 막고씨의 준말로 볼 수 있으며, 비리막고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인물명이므로 아마 우리나라 성씨로 표현하면 막고비리일 가능성도 쬐끔은 있다고 봐.

결국 이러한 필자의 하찮은 추측으로 볼 때, 당시 관산성 전투에 참전한 백제 오방성은 북방령 목씨가문과 동방령 막씨가문, 그리고 사비의 중앙군과 사비인근의 대성팔족의 병사들로 이루어졌을거라 생각해.

......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盧










웅진성1.jpg




그러므로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신한 정황을 볼 때, 웅진방령과의 친밀적인 관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도주지를 웅진성으로 선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어.

이러한 친밀성이 혈연적인 관계에서 오는것인지 아니면 정치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인지는 자료가 없어 확실치 않아.

흑치상지나 계백과 같이 부여씨의 분파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묘비명에서는 그러한 정황이 나타나있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아마 정치적인 관계에서 친밀성이 나타 났을거라 생각해.










이로서 백제의 군사제도와 660년 당시 백제의 병력, 그리고 방성과 방령에 대해서 알아봤어.


스압의 글이 되었지만, 이로서 660년 6월, 나제전쟁에 대한 기본적인 병력 배경을 알았을거라 생각해.


내일은 본격적으로 대백제전의 시발점(始發點)이였던 당군의 덕물도 상륙과 나당연합군의 기만전술에 대해 살펴볼게.



지금까지 지루하고 노잼인 필자의 글을 읽어줘서 고맙다ㅋ

좋은 밤 보내.














5줄 요약.

1. 백제의 군사제도는 한성, 웅진시대를 거쳐 사비시대에 중앙군 5부 지방군 방-군-성(현) 체제로 완성되었으며, 초기 한성시대에는 기병을 이용한 기마전을 주로 수행 하였다는걸 생각해보면, 백제 또한 다수의 중장기병과 경기병, 중장보병을 이용한 보기합동전술을 구사하였을거라 판단됨. 

2. 서기 660년 당시 백제 중앙군은 크게 왕도 5부 시위군과 중앙군으로 나뉘며, 시위군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무사계급(부여계 출신)이 맡았고, 중앙군의 병력구성은 사비성 인근 직할지와 일부는 지방에서 올라와 교대로 근무하는 번상병으로 구성되었다. 백제 중앙군의 병력은  시위군 각부 당 500명씩 총 2,500명 규모, 중앙군 7,000~15,000명임.

3. 서기 660년 대백제전 당시 백제의 상비군은 시위군 2,500명 중앙군 7,000~15,000명 지방군 58,500~106,000명이었으므로 최소 68,000 최대 123,500명이며, 이에 당평제비와 구당서에 나온 백제 멸망 당시 호구조사 기록을 기준으로 자연호와 군호를 분석하면 660년 당시 백제 지방군은 대략적으로 8만 명 정도로 추산 할 수 있다. 백제의 가용 가능한 총병력은 3교대제를 바탕으로 최소 204,000명 최대 363,000명으로 추산 할 수 있다. 

4. 백제 지방행정제도인 오방의 각 방성은 서방: 임존성(도선성) / 북방: 웅진성 / 동방: 매화산성(득안성) / 중방: 고사부리성(고사성) / 남방: 남원(구지하성)이다.

5. 서기 660년 대백제전 당시 각 방령들은 서방: 귀실복신 / 북방: 예식진 / 동방: 계백 / 중방: 여자진 / 남방: 윤충(?) 이며, 대백제전에 참전한 방령은 필자가 추측하면 서방령 귀실복신,북방령 예식진, 동방령 계백, 중방령 여자진이였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