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를 쓴 게이야.


원래는 2-3탄부터 써야 되지만 자료 모으기가 빡세고 질질 끌다보니 흥미를 잃어서,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예전 백제할배가 백제군 총병력 5000명설을 주장한 기억이 있길래 백제 멸망의 시점에서 글을 한번 써보면 어떨까 해서 4월 말부터 준비좀 했어.


바쁜 와중에 짬짬이 논문과 사서를 살펴보고 해서 정리를 거의 끝 마칠 무렵에 18년동안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서 한동안 손에 키보드가 잡히지 않더라..ㅋㅋ;


원래는 저번주에 글이 완성되어서 하루에 하나씩 올렸어야 됬는데 못난 일게이를 둔 밀게이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긴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길 바라면서... 주저리주저리 쓸 필요 없이 바로 들어가볼께.

 




























 

 

欲呑高麗 先誅百濟

 

고구려를 멸하고자 하면, 먼저 백제를 쳐부수어야 한다.

 

舊唐書 84上 列傳 32 劉仁軌

 

 

 

 




 

 















 

 

 

 

 



의자왕 봉토식.jpg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의자왕의 영토(塋土)를 중국에서 우리나라 부여로 모셔와 능산리 능원에 단을 만들어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1,340여년만의 귀국이였지.

 

당시 어린나이였던 필자는 이 기사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던 일이 기억나盧....

 

 

 

 

 

역사 기록에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나타나 있는 의자왕(義慈王)의 통치 및 백제의 멸망에 관해서는 그동안 여러 학자들이 연구해왔고, 그에 따라 많은 내용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으나,  그 내용을 보면 패망한 왕조의 마지막 기록이 지닐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충분한 문제의식과 진실 파악이 이루워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거 같아.


즉, 의자왕의 정치를 부정적인 것으로만 바라보고 백제의 입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기만 하는 삼국사기와 같은 원 사료의 내용이 오늘날까지도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盧?


관산성 전투 서고에서도 밝혔지만, 필자가 본 시리즈를 쓰게 된 이유는 이러한 원 사료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여 백제멸망의 진실을 주제넘지만 자세하게 밝혀보려고 하는 필요성에서부터 시작되었어.




능산리 의자왕 태자융 묘지.jpg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의 의자왕과 부여융의 묘




패망한 왕조의 마지막 임금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가혹하게 마련이야.


왕조 멸망의 근본적인 책임이 그에게 주어지며, 반대로 이때 목숨을 바쳐 최후의 항전을 한 백성이나 충성스러운 신하의 존재는 더욱 부각되지. 그리하여 패망한 군주는 실제보다 더 나쁜 이미지가 형성되거나 왜곡되어 후대인에게 기억되는 일이 왕조사에서는 흔히 나타나게 되어 있지.


다시 말해 백제 멸망의 역사와 의자왕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관계 사료의 충분한 수입과 분석은 물론이고 기왕의 선입관이나 기록내용에 대한 문제점을 진단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


의자왕의 폭정과 문란을 백제 멸망의 이유로 내세우는 태도는 역사적인 시각으로 볼 때 많은 문제가 있는것으로 판단되지 않아?


의자왕과 백제의 멸망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은 이러한 점에서도 느껴볼수 있어...ㅎ

 

 



의자왕의 항복.jpg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맥없이 무너진 백제는 의자왕의 항복으로 600여년의 왕조가 무너지면서 명목적인 멸망을 맞아.

 

의자왕의 항복 직후 이어지는 부흥운동군의 활동은 백제 뿐 아니라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공격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어.

 

기존 연구에서는 백제의 멸망 원인을 의자왕 말기의 폭정과 문란, 그리고 백제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따른 분열과 정권다툼에서 찾고 있지.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백제 내부의 정세에만 집중한 면이 없지 않아.

 

의자왕 말기에 다양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정치세력의 동향을 정권을 둘러싼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백제의 멸망 원인이 의자왕과 정치 세력의 정권을 둘러싼 이해관계에 따른 분열과 다툼에만 있다고 할 수는 없어.

 

그러기에는 의자왕이 항복한 직후 일어난 부흥운동은 분열과 다툼이 지속되고 폭군(暴君)이 다스린 국가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격렬하고 지속적이었기 때문이지.

 

 

 황산벌 전투.jpg

 


모든 왕조는 흥망성쇠를 겪었기 때문에, 왕조사에서는 어떻게 흥성했는가 못지않게 어떻게 쇠망했는가의 문제도 중요해.


의자왕과 백제 멸망에 대한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의자왕이 한 나라의 왕으로 즉위하여 20년간 그 왕조를 이끌기 위해 고뇌하며 보여준 통치능력에는 한계도 있었지만 인정받을 만한 부분 역시 많아. 그래서 의자왕의 정치와 백제 멸망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새롭게 다루워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어.


따라서 이 시리즈의 서술이 필자의 목적한 바대로 이루어진다면, 의자왕과 백제 멸망이 지닐 수 있는 역사적인 의미도 예정과 같은 비판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한 의미부여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초입부분을 써놓고 보니 개노잼이盧.....아마추어 주제에..ㅂㄷㅂㄷ

 







신채호와 조선상고사.JPG

 

 

단재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무열왕 춘추(春秋)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행위를 두고 ‘이민족을 불러들여 동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것’이라고 하고는, 이어서 ‘그(김춘추)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도 통일하며, 일본도 통일하며, 기타 동서 여러나라를 남김없이 통일하였을지라도 그 공으로 그 죄를 덮지 못하려던, 하물며 우리나라만을 통일한 공으로 그 죄를 덮으리오?’ 라고 엄중히 규탄하였어.

 

이러한 단재 선생의 민족사관주의는 신라가 당군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행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민족 행위로 규정하였지.

 



그런데 단재 선생의 말대로 신라가 당(唐)에 원병(援兵)을 요청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의 백제 침공은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였어.

 

당의 백제 침공은 당이 고구려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어서 할 수 없이 취한 방향 전환이지.

 

비록 당이 표면적으로 신라의 원병 요청에 응하는 척 했지만, 실제로 당의 백제 침략은 계속되는 대 고구려 전쟁의 실패 속에서 얻은 교훈이야.

 

 

 

구당서.jpg

 

구당서 열전 유인궤 편에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면, 우선 백제를 쳐부수어야 한다(欲呑高麗 先誅百濟)’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당의 전술변화에 의해서 나온 조치였지.

 

당(唐)은 신라를 위해서 신라의 원병 요청에 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백제를 침공했을 뿐이였어.

 

당시 당나라는 신라의 원병요청이 없더라도 고구려의 공격을 위해서 백제를 침공해야만 하는 상황이였지.

 

 




 

  

그럼 7세기 초반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를 한번 살펴보자ㅋ

 

  








唐太宗.jpg


불세출의 영웅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



수의 등장 이후 동아시아 각국이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무리하게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던 수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불세출의 영웅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중국을 천하를 움켜 쥐게 되었어.

  

당은 수나라의 멸망의 요인을 고구려와 돌궐간의 연계로 보고 이를 밑바탕으로 국가전략을 바꾸었어.



당의 동돌궐 토벌.jpg


이에 서기 630년, 동돌궐을 와해시켜버리고 북방을 안정화 하므로서 본격적으로 고구려에 대한 국가전략을 취하게 되었는데, 그 예로 서기 631년 광주사마 장손사(長孫師)를 고구려로 보내 수나라 군사들의 유골들이 묻힌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파괴하도록 한것은 이를 나타는것이라고 할 수 있지.


이에 대해 영류왕(榮留王)은 당에 유화적인 외교정책을 쓰는 한편,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대비책을 강구하였어,




당의 안서도호부 설치.jpg


하지만 당은 서기 640년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키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한 후 고구려에 대한 정벌 의도를 더욱 강화하였고 결국 세번에 걸쳐 요동 출정을 강행하였지.


※고창국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동쪽인 現 토로번(吐魯番, Turpan) 동쪽에 인접해 있던 고대 국가야.

 

 


의자왕.jpg


당시 백제는 641년 3월 제 30대 어라하인 부여장(무왕)이 하세하자 그의 뒤를 이어 태자 의자가 31대 어라하로 등극하게 되었어.

 

등극한 직후, 의자왕은 제 1차 대규모 내각편성을 단행하는데, 이를 친위정변(親衛政變)으로 향간에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

 

필자는 의자왕 치세 당시 친위정변이 두 번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인데, 이는 나중에 시간나면 백제멸망사 3탄에서 자세히 서술할게...

 



무튼, 제1차 친위정변은 백제 말기 정국을 주도하던 대성팔족(大姓八族)을 싸그리 정리하는 사건이였어.

 

무왕대 신흥세력으로 부상한 왕씨가문의 좌평 왕효린(王孝隣)과 왕변나(王辯那)라는 인물이 의자왕대에서는 찾아볼수가 없으며, 또한 내좌평 기미(岐味)가 축출되었는데, 이는 의자왕 본인이 직접 정국을 이끌어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이는 대목이지.

  

 


 

642년 제1차 친위정변이 단행 된 직후 정국을 주도하는 좌평 관직의 인물을 추정하면 상좌평(대좌평) 사택지적(砂宅智積), 좌평 부여성충(成忠), 좌평 부여흥수(興首), 좌평 의직(義直), 좌평 충상(忠常), 좌평 은상(殷相), 좌평 연복(緣福)이야.

  

이중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앞서 서술한바와 같이 대성8족에 해당되는 인물이 사택지적과 645년 왜 아스카 조정으로 파견단을 이끌고 간 좌평 연복을 빼고는 하나도 없어.

 

사택지적이야 백제 말기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던 대성 8족의 수장격인 가문이였으므로 의자왕이 함부로 내칠 수는 없었지만, 연복은 모르겠盧.....

 

하지만 제1차 친위정변에서 의자왕은 이복동생인 부여교기(扶餘翹岐)와 이복자매 4명, 내좌쳥 기미, 대성8족으로 추정되는 40명의 고위인사들을 섬으로 추방시켰던 점을 볼 때, 사택가문을 위시로 한 대성8족의 힘줄을 잘라버렸다고 할 수 있을 거 같아.


※ 이 부여교기를 사택왕후의 아들로 보고 의자왕을 신라계 공주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필자도 이렇게 생각해.

 



흥수와 성충.jpg


좌 : 성충 / 우: 흥수



무튼, 당시 좌평 중에서 성충과 흥수는 부여씨로서 왕족 출신이라는건 게이들도 눈치 챘을거야.

 

결국 제1차 친위정변을 단행하면서 의자왕은 자신의 손발이 될 신흥세력들을 대거 정계에 진출시켜 왕권을 크게 강화하였어.

 

이 6좌평을 외교적인 노선을 바탕으로 2가지 집단으로 추론 가능한데, 크게 대당,대신라 외교를 기준으로 하면 다음과 같아.

 


: 성충, 흥수

 


신라 : 사택지적, 은상, 연복, 의직

 

 

필자가 어느정도 추론하여 정리하였지만, 사실 친당파라고 해서 친신라파는 아니야.

 

단지 당시 신라와 당의 관계가 친밀하지 않았으며, 이후 당과 신라가 급속도록 가까워지면서부터 친당파 좌평들이 의자왕의 대신라전에 우려를 표명하게 되게 되지만, 이때 6좌평 전원은 반신라파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

 

 



 

 

친위정변을 단행한 직후 내실을 다진 의자왕은 친히 4만 대군을 이끌고 미후성(獼猴城)과 그 주변 40여개성, 그리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어, 


연개소문.jpg


이 공격에 선덕여왕은 김춘추(金春秋)로 하여금 고구려에 원군을 청하였지만, 당시 보장왕(寶藏王)은 신주(新州)를 고구려에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어. 사실상 정권을 잡고 있던 대막리지(大莫離支)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지.


이는 사실상의 거부의사였어.



그 다음해인 643년 11월 의자왕은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려 하였지만 이를 안 선덕여왕은 당 태종에게 구원요청을 하였고, 이 사실을 안 의자왕은 군세를 물렸어.


당 태종은 이에 고구려와 백제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조서를 보내지만 이를 연개소문은 일언지하 거절해버렸고, 의자왕은 이에 사죄하는 표문을 올리며 사태를 관망하게 돼.

 

이후 백제에게 빼앗긴 성들을 탈환하기 위해 압량주(押粱州-現 경북 경산) 군주인 김유신(金庾信)이 가혜성(加兮城-現 충북 제천시 가은산),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化城)등의 7성과 매리포성(買利浦城-現 경남 거창)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는데, 이는 남한강과 낙동강 주변의 성들을 탈환하기 위함인걸 알 수 있을거야.

 




고구려를 공격하다 멸망한 수나라를 대신하여 천하를 잡은 당나라의 고구려의 공격은 집요하였어.

 

660년 백제의 침공을 결정하기까지 큰 전투만 헤아려도 무려 6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하였지.

 



제 1차 원정은 서기 645년에 일어났는데, 이해 2월, 당나라 원정군의 일원으로서 고구려 정벌을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당태종의 조서를 받은 의자왕은 국제정세에 대해 관망하고자 거절을 하게 되었어.

 

중원을 통일하였던 수(隨) 제국이 고구려 원정으로 인한 내부 분열로 무너지는 걸 목도(目睹)했던 의자왕은 당 또한 고구려를 공격하다 지리멸절 할 것으로 생각했었나봐.

 

이러한 의자왕의 생각은 얼추 맞게 떨어졌지.

 


안시성 전투.jpg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한 당태종의 제1차 고구려 원정은 안시성(安市城) 전투의 패배로 인해 실패하였어.

 

당나라의 처절한 패배였으나 당 태종은 결코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지.

 

이는 수나라 치세 전반의 모든 분야의 붕괴를 딛고 일어서 주변 국가들을 복속하여 내,외부 안정을 꾀하려던 당나라 초기 국가전략에 반하기 때문이였어.

 



이후 647년 제 2차 고구려 원정 계획이 논의 되었는데, 이때 당의 관료들은 지구전을 채택하기로 의견을 모았어.

 

끊임없이 공격하여 고구려의 내부 붕괴를 촉진시키는 전략이였지.

 

이 전략에 따라서 이해 3월 이세적(李世勣)과 우진달(牛進達)이 이끄는 육군과 수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육군 병력 3천명 이외에 영주도독부 군사들이 참가하여 요하를 건너 5월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목저성(木底城)의 외곽을 불태우고 돌아갔으며, 수군 1만명은 해로로 고구려 국경에 침투하여 고전 끝에 7월 석성을 함락시켰어.

 

하지만 당군은 적리성 공격에 실패하면서 철수하게 되었지.

 

 

乙巳之變.jpg


을사의 변(乙巳之變)

혐짤이라 미안하다....




의자왕은 제1차 고당전쟁이 발발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격을 계시하였는데, 김춘추는 고당전쟁으로 나당동맹의 이점을 누리지 못하자 서기 647년 왜(倭) 아스카 정권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였지만, 당시 아스카 조정은 645년 을사의 변(乙巳之變)이 일어나 친백제파인 소가(蘇我)일족이 제거 되고 고토쿠(孝徳)덴노 하에 급진적인 개혁인 다이카개신(大化改新)과 아스카 천도를 추진중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거부도 동의의사도 밝히지 않고 시간만 끌었어.


이런 왜(倭)의 움직임은 내실 다지기란 이유도 있지만, 신라와 왜(倭)간의 적대적 관계에 기인한다고 봐도 좋아. 멀리는 삼한시대에서부터 가깝게는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의 원정군 사건까지 왜는 신라와의 외교전에서 항상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

 



 

 

이듬해인 648년 1월 청구도행군대총관 설만철(薛萬徹)이 수군 3만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압록강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제 3차 고구려 원정이 전개되었어.

 

당군은 6월 압록강 하류의 박작성(泊灼城)을 포위하였으나 이때 고구려 장군 고문(高文)이 오골성(봉황산성), 안지성(위치미상) 등지의 군사 3만명을 이끌고 박작성을 구원하기 출동하여 9월에 당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양군 사이에 크고 작은 격전이 벌었으며,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어.

 

이해 10월 김춘추가 태종을 만나 교섭을 벌였는데, 이때 당은 공동 출병하여 백제를 치자는 신라의 제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실제 당의 출병은 이루워지지 않았어.

 

고구려와의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태종은 백제보다는 고구려에 중점을 두었거든...




 

교착상태에 빠진 전선에 대해 이세민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칠 계획을 세웠는데, 이에 따라 강남에 명령을 내려 대선을 만들어 군량과 기계를 삼산포(現 다롄시) 와 오호도(요동반도 남쪽 섬이라 하는데 현재는 간척으로 육지)에 운반,저장하게 하였으나, 이듬해 7월 태종이 죽으면서 계획은 시행되지 못하였어.

 




진덕여왕.jpg


신라 제 28대 왕 진덕왕(眞德王)


 

백제 정벌에 대한 당나라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신라는 고유의 의관(衣冠)을 버리고 당의 의관을 채용하고 당태종이 죽자 이듬해인 650년 6월 백제 병관좌평 은상(殷相)의 석토성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밀어붙여 도살성(現 충북 증평군 도안면 이성산성)에서 백제군을 전멸시켰는데, 이에 승전보와 진덕여왕이 직접 비단에 태평송(太平頌)을 써서 김법민(金法敏) 편에 보냈으니, 당 고종(高宗)은 흡족해 하였고 이듬해인 651년 김인문(金仁問)을 당에 본애 숙위하게 하여 당 조정은 신라의 이러한 행동에 의자왕에게 조서를 보내 신라로부터 빼앗은 성과 포로들을 돌려주라고 종용하였지만 의자왕은 이에 미적지근하게 반응하였어.


 

651년 고종이 의자왕에게 내린 조서를 보더라도 당 조정은 삼한의 국가 중 잠재적 동맹국을 신라로 점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으며, 백제의 조공사절단은 당나라 고위관료들의 냉랭한 반응을 보며 외교관계가 틀어진 것으로 여겼지.

  

이에 백제 조정은 대외관계로 인한 지배층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어.


이는 후대에 일어나는 나당연합군의 침공 당시 어느 쪽을 먼저 치느냐에 따른 사서의 기록을 봐도 알만하지.

 





사비왕궁.jpg



기존 연구에서는 성충,흥수로 대표되는 좌평 세력과 상영(常永)등으로 대표되는 달솔 세력 사이에서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들 기사를 단순히 좌평세력과 달솔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야.

 

이 사료들이 백제의 정치 세력 사이에 견해차가 존재함을 보여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는 없으나, 단순히 좌평 대 달솔, 혹은 구귀족 대 신귀족의 대립으로만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해.

 

특히 좌평-흥수로 대표되는 세력과 달솔 상영으로 대표되는 세력으로 양분하여 보았으나 이 사료에서 보이는 외교적인 인식의 차이는 보다 세분하게 살펴봐야되지.

 

 



1.jpg



당시 백제 정치세력들은 외교적 노선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어.

 

관산성 전투 이후 대신라전이 격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백제에게 주변국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었지.

 

때문에 백제는 이 시기에 당(唐) 혹은 고구려,왜(倭)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어.

 


 

그러나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 따른 피로로 인해 큰 도움을 주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왜(倭) 아스카 조정은 을사의 변(乙巳之變)으로 인해 친백제파였던 소가(蘇我)일족이 멸족당한 후  대외 정책이 당(唐)을 중심으로 하는 입장과 백제를 중심으로 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어,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어.

 

때문에 백제에게 당(唐)이 한반도, 특히 백제와 신라 사이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당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했지,

 



또한 이 시기 당(唐)은 당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질서의 재편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굴복을 위해 백제, 신라, 일본까지 이용하고 있던 상황이었어.

 

백제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652년 당에 마지막 사신을 보낼 때까지 당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위에서 우리가 살펴온 것처럼 어느 땐 당의 요구에 응하기도 하고 어느 땐 애매모호한 태도로 방관하는 입장도 취하였지.

 



그러나 신라의 적극적인 대당 외교와 함께 당의 대고구려 전략이 장기전으로 바뀌면서 백제의 대당 외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어.

 

이때가 바로 651~652년의 백제 조정의 상황이었지.

 





唐高宗.jpg


고당전쟁 당시 당 태종의 원정군 참여를 거부한 백제는 당태종이 죽자 652년 조공사절단을 파견했지만, 백제에 대한 고종(高宗)과 당 조정의 인식이 매우 나쁨을 인식하게 되었어.

 

백제의 일부 정치세력들은 국내외적 상황에서 볼 때 더 이상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새로운 외교적 활로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생각 했을거야.

 

이들은 대당 외교를 포기하고 의자왕대에 들어 대신라전에 함께 했던 고구려와의 연대 혹은 의자왕 집권 이후 다소 소원해졌던 왜와의 강력한 연대를 주장했을 가능성이 커.

  

이렇게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의자왕 13년인 서기 653년 왜(倭)로 사자를 보내 우호관계를 재확인하였어.

 

 

 

 

당 태종의‘고구려 공격을 중지하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는데, 고종 6년인 서기 655년,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우위중랑장 소정방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는 제 4차 고구려 원정을 전개하였어.

 

이때 정명진과 소정방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 성과 백성들이 사는 촌락을 불태우고 돌아갔지.

 

이에 백제는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앞서 서술한 백제의 대외관계가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어.

   

이러한 당의 움직임에 백제는 같은해 대사 달솔 여의수(餘宜受), 부사 은솔 조신인(調信仁)을 비롯한 100여명의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하여 왜국과 외교관계를 군사동맹으로 격상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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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53년 당시 동북아시아 외교 관계도




고구려 또한 당나라의 전략노선이 변경되지 않은점과 동맹국 없이 당나라의 계속된 공격으로 국력이 쇠진함을 느끼자 다음해인 656년 고구려가 대사 달사(達沙)와 부사 이리지(伊利之) 등의 81명의 사신단을 왜에 파견하자 그 답례로 대사 가시와데노 오미 하스히(膳臣巴提便) 등의 대규모 사신단을 고구려에 파견하였지.

 

652년 이후 백제는 당과의 관계를 끊고 고구려, 왜와의 삼각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와 달리 여전히 대당 외교의 유효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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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당(唐)은 수(隨)를 이어 중국에 통일 제국을 형성하면서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해 가는 중이었어.

 

더욱이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해진 상황에서 당과의 관계가 소원해 질 경우 당의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당과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을 제기 하였을 가능성이 있어.

 

이와 관련하여 656년 옥사하기 직전의 성충의 말이 주목되는데, 의자왕 즉위 이후 신라와의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성충이 말한 전쟁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

 

더욱이 성충이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대비해야 하는 곳으로 추정한 기벌포(伎伐浦)는 신라와의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해.

 

결국 성충이 백제가 신라와 달리 당과의 외교가 단절된 상황에서 당과 신라와의 관계가 친밀해 질수록 그것이 백제에게는 매우 불리하게 적용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당과의 관계를 중시한 세력에는 어떤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을까?

 

 

나당연합군의 공격의 당시 흥수(興首)는 성충과 동일한 견해를 보이고 있으나 결국 흥수의 견해는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백제 조정에서는 나당연합군과 전면전을 선택하게 되었지.

 

이러한 흥수의 입장은 그가 성충과 동일한 입장에 있는 정치세력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흥수와 성충.jpg



성충,흥수 등은 의자왕 치세 초기 주요 정치세력으로써 오랫동안 의자왕을 보필했던 인물들이야.

 

성충은 의자왕 15년에 의자왕에게 간언하다 옥사한 인물인데,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에 대한 대응책에 대해 성충과 동일한 견해를 피력했던 흥수에 대해서 당시 대신들은 흥수가 오랫동안 옥중에 있었기 때문에 임금과 나라를 원망하였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의 견해를 받아들일수 없다고 주장했어.

 

이를 통해 본다면 흥수 역시 성충과 마찬가지로 성충과 유사한 시기에 투옥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의자왕 전기부터 동일한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했던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옥에 갇혀있으면서 대외 전략에 대해 견해를 같이했을 가능성이 커.

 

5년이라는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충과 흥수가 동일한 견해를 냈던 것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흥수도 성충과 마찬가지로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능성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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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어래산성에서 바라본 웅포와 금강일대

(출처: 하늘도깨비님 블로그)




흥수와 성충은 기벌포와 탄현에서 1차적인 방어를 하면서 나당연합군에 대한 대응체계를 마련할 시간을 벌고자 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는데, 이때 이들이 생각한 대응방식은 당과의 협상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지.

 

하지만 성충과 흥수의 견해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13만의 당군은 기벌포에서 백제군의 격렬한 저항을 뚫고 상륙하여 강경(江景)에 진을 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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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삼정동산성에서 바라본 탄현 

(출처 : 하늘도깨비님 블로그)



이와 함께 약 3만5천의 신라군 또한 김유신의 지휘하에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군을 격파하여 강경에 도착한 후 18만에 이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포위되었어.

 

하지만 나당연합군에 의해 포위가 된 상황에서도 일부 세력들은 당과의 교섭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이들은 성충과 흥수와 같이 의자왕 전기에 주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력으로 그 중심에는 태자 융이 있었던 것으로 필자는 생각해.

 

당시 태자였던 융은 의자왕 즉위 이전부터 이미 대당 외교를 담당하는 한축으로써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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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王遣其太子隆來朝

 

백제왕이 그 태자 융을 보내와서 조공하였다.

 

舊唐書 卷3 本紀3 太宗 下 十一年 十二月辛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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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사는 637년의 기사로서 이 시기는 무왕 36년에 해당하는데, 당시 파견되었던 이가 융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

 

그러나 그 이름을 융(隆)이라고 특기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이보다 1년 늦은 무왕 37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태자가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기록은 없어.

 

다만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융이 의자의 아들이며, 이후 의자왕 4년(644)에 태자에 책봉되고 있다는 점이지.

 



구당서.jpg


구당서는 백제가 멸망한 이후인 940~945년 사이에 찬수된 사서라는 점에서 이시기 태자의 아들인 융을 태자 융으로 오기했을 가능성도 있어.

 

이를 통해 본다면 이 시기 실제로 파견된 인물은 태자였던 의자가 아니라 융이었을 가능성이 있어.

 

당시 태자 융은 23세로 대당 외교를 수행할 수 있을 만한 나이였지.

 

이렇게 보았을 때 부여 융은 이미 할아버지인 무왕(武王) 대 부터 대당외교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

 

 

  

이에 대백제전 당시 기사를 살펴보면 친당파였을 세력들이 눈에 보이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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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王子使佐平覺伽 移書於唐將軍 哀乞退兵

 

백제의 왕자가 좌평 각가를 시켜 글을 당나라 장군에게 보내 철병할 것을 애걸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太宗王 七年

 


 

十二日 唐羅軍□□□圍義慈都城 進於所夫里之原 定方有所忌不能前

 

12일, 당나라와 신라군이(원문에서 3글자가 빠져있어) 의자왕의 도성을 포위하려고 소부리 들판으로 나아갈 즈음에

정방이 마음에 꺼리는 바가 있어 진군하지 않고 있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太宗王 七年

 



百濟王子又使上佐平致甕餼豊腆 定方却之

 

백제의 왕자가 또 상좌평을 시켜 고기로 소용할 가축과 풍부한 선물을 보냈으나 정방은 이것을 물리쳤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太宗王 七年

 

※여기서 나오는 상좌평은 아마 일본서기 제명 6년에 기록된 대좌평 사택천복일 가능성이 높아.

 



 

王庶子躬與佐平六人詣前乞罪 又揮之

 

백제왕의 서자인 궁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정방을 찾아보고 용서를 빌었으나 또 거부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太宗王 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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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첫째기사와 둘째 기사는 인과관계를 나타내고 있는데, 첫째 기사를 보면 백제의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보내 당의 장군에게 철병을 요청한 뒤, 그 뒤를 이어 두 번째 기사에서 소정방이 진격을 꺼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이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당시 소부리벌에 진을 친 백제 북방령군의 기세가 대단하고, 또한 백제가 알아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걸 보고 백제와 당 사이의 교섭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볼 수 있지.

 

그리고 이 교섭의 주체로 나오는 백제 왕자들은 오랫동안 대당관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부여융(扶餘隆)’과 의자왕의 서자인 ‘부여궁(扶餘躬)’이였을 가능성이 높아.

 

즉, 의자왕 치세 전기의 친당파 인물로는 대당외교를 담당한 부여융과 좌평 성충, 좌평 흥수이며 말기에 들어서는 부여융과 서자 부여궁. 좌평 각가등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두 번째 기사 이후에 나오는 '二軍勇敢 四道齊振'의 문구를 볼 때, 당과의 교섭이 실패한 것으로 보여.

 

나당연합군의 이러한 공격에 대해 백제, 특히 부여융을 비롯한 대당 강화를 주장하던 세력들은 지속적으로 소정방과의 교섭을 시도했지.

 



그러나 세 번째 네 번째 기사를 보면 알 듯 결국 실패하고 나당연합군에 사비성이 함락되었어.

 

당과의 교섭이 실패한 상황에서 이들은 더 이상 나당연합군에 대한 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거야.

 

※이는 사비성 함락편에서 북방령인 예식진의 항복에 대한 내용에서 자세히 다뤄볼게.

 

 

   

 

한편 당과의 교섭을 시도한 세력과 달리 나당연합군에 대한 항전을 주장한 세력도 있었어.

 

이들 세력은 당과의 교섭을 통한 강화가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나당연합군에 대한 적극적 항전을 주장했던 인물들이지.

 

이 인물들은 당과의 외교적 관계가 단절될 즈음 고구려-왜(倭)와 연대를 추진한 장본인들이였을거야.

 


1.jpg


이는 당연히 앞서 살펴본 부여융을 비롯한 대당 강화를 주장했던 세력들과는 다른 대외전략을 가진 이들일 가능성이 높아.

 

그러나 이들을 단순히 구귀족과 신귀족이라는 양분된 두 정치세력 중 하나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

 

대당 강화파가 외교적,평화적 교섭을 통한 해결을 중시한 세력이라면 왜(倭)-고구려와의 연대를 주장한 이들은 전쟁을 통한 해결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각 세력들 사이에서는 동질성을 지니나 그 안에서도 일부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진 세력들이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있어.

 

특히 후자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나당연합군과의 전면전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질적인 집단으로 파악할수 있으나, 이들 내부에서는 다시 고구려 혹은 왜와의 연대 중 어느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이러한 차이는 각 세력이 가진 경험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어.

 

반신라파였던 좌평 의직과 달솔 상영의 나당연합군의 선제공격 인식차이를 보면 의직과 상영은 백제 내부 정치상황에서 볼 때 동일한 정치 집단이라고 볼 수 없어.

 

의직은 의자왕 전기부터 활약한 대신이며, 상영은 후기에 활약한 인물로서 각기 다른 세력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신라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한 상영 등의 경우 의자왕 후기 세력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들은 의자왕 전기와 달리 대당 관계의 변화 과정에서 당이 아닌 다른 교섭의 대상으로서 왜(倭)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

 

이들은 앞서 말한 대당 강화를 주장한 세력뿐만 아니라 의직 등 전쟁의 불가피함을 주장한 이들과도 정치적 입장만이 아니라 대외인식에 있어서도 다른 경험을 가진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커.

 

이 세력들은 의자왕 전기와 달리 대당 관계의 변화 과정에서 당이 아닌 다른 교섭 대상으로서 부여풍(扶餘豊)이나 아님 일본으로 건너간 의자왕의 이복동생인 부여교기(扶餘翹岐)와 새롭게 관계를 맺었던 세력일 가능성이 있어.

 

 

 

 

더욱이 의자왕 후기에 들어서는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대신라 공략이 김유신(金庾信)의 활약으로 밀리는 양상으로 변화되면서 신라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변화를 가져왔을거야.

 

따라서 이들은 당(唐)보다 신라에 대한 선제공격을 통해 신라의 예봉을 완전히 꺾은 이후 당과의 일전을 준비하는 전략을 세웠을 것으로 보여.

 




백강구 전투.jpg


그 과정에서 왜(倭) 아스카 조정의 지원이 이루어질 경우 바다를 통해 건너온 당에 대해 내륙과 바다 양쪽에서 협공한다면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가능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하고 있어.

 

이러한 판단은 사비성이 함락되고 3년뒤인 서기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실현되었지.

 

 






 

의직(義直)의 경우 의자왕 2년 신라 대야성을 공격한 윤충(允忠),은상(殷相)과 함께 의자왕 전기 대신라 공략에서 대표적으로 활약한 인물이야

 

의직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해 당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한 것 역시 이러한 경험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의직을 위시로 한 세력들은 의자왕 전기에 이루어진 대신라 공략의 경우 대야성 함락을 비롯하여 백제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얻어진 자신감이 위와 같은 형태로 표출 되었을거야.

 

외교적 노선을 굳이 설정하자면 후기파인 상영(常永) 세력과 달리 의직(義直)은 대당 관계의 변화 과정에서 당이 아닌 다른 교섭의 대상으로서 의자왕 치세 초반부터 줄곧 군사적 동맹으로서 같이 신라를 공격한 고구려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을거야.

 

의자왕 치세 전반에 걸쳐 백제군의 공격에는 고구려의 지원군과 연합군이 있었으며, 야전군 사령관들에게는 멀리있는 왜(倭)보단 가까운 고구려가 외교적 노선으로 끌렸을 가능성이 있었겠지.

  



결국 정리를 하자면, 의자왕 치세 초중반인 642년 ~ 655년을 기점으로 백제 대신들의 정치적, 외교적 노선을 나눈다면 다음과 같아.

 

  

 

: 부여융, 좌평 성충, 좌평 흥수, 부여궁

 

: 대좌평 사택지적, 좌평 충상, 좌평 연복,부여효,부여충,달솔 귀실복신,달솔 상영

 

고구려 : 좌평 의직, 좌평 은상, 남방령 윤충

 

 

이렇게 정리를 하였지만,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하면 652년 백제의 대당외교가 단절되면서 친당파였던 부여성충과 부여흥수는 실세하게 되었으며, 결국 656년 흥수와 성충은 실각하여 하옥당하고 성충은 이때 옥사했어. 이때부터 친당파를 이끌던 부여융의 지위도 흔들리게 되었지.

 

 

또한 2년뒤인 654년 대좌평인 사택지적이 실각(사택지적비에서는 나이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기록)되면서 친왜파는 새롭게 대두된 달솔 상영의 세력과 좌평 충상이 이끌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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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복신(鬼室福信)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왕의 사촌동생

 


이러한 세력에 동조한 왕족들로는 부여효와 부여충, 달솔 귀실복신이였을거야.

부여효는 이후 실각하게 되는 태자 융을 대신하여 태자에 오르게 되는데, 부여융의 반대세력이라 할 수 있는 친왜파를 끌어들였을거라 필자는 추정했어.

※일각에서는 부여효와 부여융을 동일인물로 보고 있어.

 

 

친 고구려파는 전장에서 활약한 장군들이 주를 이루었어. 이중 좌평 은상은 김유신의 계략으로 석토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주도권은 좌평 의직이 잡았을거라 생각하는데, 앞서 서술했지만 대신라전에서 왜(倭)-고구려 두 국가 중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국가는 고구려였으며, 대신라전에서 백제와 고구려는 이인삼각으로 궁합이 잘 맞았지.

 

이러한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군을 통솔하던 장군들은 친고구려파로 귀속 될 수 밖에 없었어.

 

  

 

 

아스카 왕궁.jpg


아스카 왕궁 모형

 


백제조정이 3개의 계파로 나누어진 상황에서 바다 건너 아스카 조정은 중원의 통일제국이 한반도 정세에 개입하는걸 두려워 했어.

 

당나라와의 제 1선인 고구려가 무너지게 되면 곧바로 백제, 그다음은 왜(倭) 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마침 서기 656년, 백제에서 친당파 세력이 실각하게 되고 친왜파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왜 아스카 조정 또한 백제와의 공조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지.

그러므로 왜가 고구려에 답례로 사신을 파견한 이유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군사동맹에 자신들도 참여하여 삼각동맹을 이루기 위함이였지.

   

이러한 군사적 동맹의 움직임을 눈치 챈 신라는 다음해인 657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일을 중계해달라는 왜의 요청을 거부하였는데, 이는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하나의 동맹 세력이 된 왜에 대한 외교적 접근을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이해 백제 의자왕은 제2차 친위정변을 단행하였는데, 자신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을 주었어.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보고 정력왕 의자설을 지지하는데, 필자는 이 서자 41명을 의자왕의 서자가 아닌 부여씨의 분파에서 친왕파 인물들을 좌평으로 삼았을거라 추측하고 있어.

 

서자 41명이란 기록은 결국 낙화암이 삼천궁녀라는 희대의 조작극으로 승화하는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주듯 필자는 41명의 서자는 부여 왕족의 분파였던 방계가문의 인물들에게 좌평직을 주었다고 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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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658년에는 제 5차 고구려 원정이 전개되었는데 이때 당 고종은 정명진(程名振)과 설인귀(薛仁貴)를 시켜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659년 또한 제 6차 고구려 원정을 전개하였지.


그러나 이러한 당의 공격에 연개소문은 맞받아 쳤지.



 

이에 당 수뇌부는 고구려 공격에 대한 방향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어.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직접적인 공격으로 뚫을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당 조정은 후방으로 급습하는 전략을 깨우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앞에서 본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하면 우선 백제를 쳐부수어야 한다'는 것이였지.

 

  

 

 

당이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은 언제일까?

 

밑의 기록을 한번 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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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 不報 憂形於色 忽有人於王前 若先臣長春罷郞者 言曰 臣雖枯骨 猶有報國之心 

昨到大唐 認得皇帝命大將軍蘇定方等 領兵以來年五月 來伐百濟 以大王勤佇如此 故玆控告 言畢而滅 王大驚異之 

厚賞兩家子孫 仍命所司 創漢山州莊義寺 以資冥福

 

 임금이 당나라에 병사를 요청하였으나 보고가 오지 않기에 근심하는 모습으로 조정에 앉아있었는데, 

홀연히 어떤 사람이 임금 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이 마치 이미 죽은 신하인 장춘(長春)과 파랑(罷郞) 같았다. 


(중략)


'....어제 당나라에 가서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정벌하도록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너무나도 심히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말을 끝내고는 사라져버렸다. 


임금이 매우 놀랍고도 신기하게 여기어 두 집안의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담당관에게 명하여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太宗王 六年 十月

 

 

 


 

(생락)..事了後。勅旨。國家來年必有海東之政 汝等倭客不得東歸。遂逗西京。幽置別處。閉戶防禁。不許東西困苦經年

 

“..일을 마친 후 칙명도 ‘국가가 내년에 반드시 해동을 정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 왜의 사신들은 동쪽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드디어 서경에 숨겨 특별한 곳에 가두어 두었다. 고통을 겪은 지 한해가 지났다...”고 하였다.

 

日本書紀 薺明天皇 五年 七月 (伊吉連博德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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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당이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은 659년 10월경이란걸 알 수 있어.

 

특히 일본서기 사이메이(齊明)덴노 5년 7월조에 실린 이길련박덕서를 통해 윤곽이 잡히지.

 

이길련박덕서는 당나라에 파견되었던 견당사의 일원인 이키노무라지(伊吉連博德)가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쓴 수기로서 659년 10월에 당이 백제 정벌을 앞두고 일본의 견당사를 감금했다는 내용이 실려있어.

 

이것은 당이 백제 정벌 계획이 사전에 누설될 것을 우려해 일본 사신을 억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지.

 




이듬해인 660년 3월, 당 고종은 우무위대장군이였던 소정방에게 사지절 우이,마한,웅진,신구 등 14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백제 출병을 명하였어.

 

당 고종이 소정방을 행군대총관으로 명한 것은 백제를 반드시 멸망시키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담겼다고 필자는 생각해.

 





당의 안서도호부 설치.jpg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기 전, 소정방은 서역과 중앙아시아, 즉 안서도호부의 영역을 차근차근 넓혀 입지가 탄탄대로였던 장군이야.

 

중앙아시아의 석국(石國)공략을 살펴보면 그는 기병위주의 전략전술에 능했으며, 기,보 합동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석국의 왕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했던 전력이 있지.


※석국(石國)은 現 우즈베키스탄 수도인 타슈켄트에 위치하였다고 전하고 있어.

 




이 소정방이 이끈 당군의 규모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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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 唐高宗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金仁問爲副大摠管 

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水陸十三萬軍 以伐百濟 勅王爲嵎夷道行軍摠管 使將兵 爲之聲援

 

3월,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또 칙명으로 임금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太宗王 七年 三月





 

高宗詔 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率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左驍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 以來征

 

당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 우무위장군 풍사귀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과 함께 

병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二十年 六月

 


 


 

時入唐請師波珍飡金仁問 與唐大將軍蘇定方劉伯英 領兵十三萬 過海到德物島 先遣從者文泉來告

 

이때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갔던 파진찬 김인문이 당의 대장군 소정방,유백영과 함께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도착하여 먼저 종자 문천을 보내 왕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四十二 列傳 第二 金庾信 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다.

 

三國史記 卷第五十 列傳 第十 甄萱

 




 

太宗聞 百濟 國中多恠變五年庚申遣使 仁問 請兵 唐 髙宗 詔左虎 衛大将軍荊國公 蘇定方 爲神丘道行䇿 

揔管率左衛将軍 劉伯英 字仁逺左虎 衛将軍 馮士貴 左驍衛将軍 龎孝公 等統十三万兵來征 

[郷記云軍十二万二千七百十一人舡一千九百隻而 唐 史不詳言之]

 

태종은 백제에 괴변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5년 경신(서기 660)에 인문(仁問)을 사신으로 보내 당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중략)

...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하였다.


[우리나라 기록에는 군사가 122,711명이고 배가 1,900척이라 하였지만 『당사(唐史)』에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太宗春秋公

 

 


 

 

(顯慶五年(660) 三月) 百濟恃高麗之援, 數侵新羅, 數, 所角翻. 新羅王春秋上表求救. 

辛亥, 以左武衛大將軍蘇定方爲神丘道行軍大總管, 新書作「神兵道」. 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 帥, 讀曰率. 

驍, 堅堯翻. 水陸十萬以伐百濟. 考異曰: 舊書 定方傳·新羅傳皆云定方爲熊津道大總管. 實錄 定方傳亦同. 

今從此年實錄·新唐書 本紀. 又舊 本紀·唐曆皆云, 「四年十二月癸亥, 以定方爲神丘道大總管, 劉伯英爲嵎夷道行軍總管.」 按定方時討都曼, 

未爲神丘道總管, 舊書·唐曆皆誤. 今從實錄. 以春秋爲嵎夷道行軍總管, 因堯典「宅嵎夷曰暘谷」而命之. 將新羅之衆, 與之合勢. 將, 卽亮翻.

 

 

백제가 고려를 믿고 지원으로.....(중략)..... 신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 대 총관으로[신서에는 신병도]

좌 효 위 장군 ‘유백영’등을 장수로 수군과 육군 십만이 백제를 범하였다.

(생략)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하고,[요전에는, 우이는 양곡으로 명 내렸다.] 신라의 장수들과 무리들, 함께 합세하도록 하였다

 

 

資治通鑑 卷二百 唐紀 十六 高宗 顯慶 五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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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희안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당군의 규모에 대한 기록이 많고 중국측 기록은 신,구당서에는 안나오고 자치통감에서만 나오는걸 알 수 있어.

 

삼국사기에서는 당군의 규모를 13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자치통감에서는 10만명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특히 삼국유사의 기록은 아주 세세하게 122,711명이라고 언급하고 있지.

 

 


과연 어떤 것이 당군의 규모일까?

 



누선.jpg



짧은 생각으로 삼국사기 13만과 자치통감 10만명을 두고 3만명의 차이가 수군의 병력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

 

즉, 1900여척의 병선을 3만명이 운용을 하고 지상군 병력, 즉 육군이 10만명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삼국유사의 아주 구체적인 수치는 유심히 살펴 볼만해.

 

만약 삼국유사의 기록의 122,711명을 기준으로 소정방이 이끈 원정군의 구성을 살펴보면, 병선의 규모를 1,900척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필자의 지식이 일천하여 당시 당나라 군선의 자세한 지표를 못 찾아,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군선인 대익선을 대입해서 추산해봤어.

 




大翼船.jpg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대익선(大翼船)


 

오나라 대익선의 승무원 가운데 전투요원의 비율은 28.6%였는데, 오나라 전투요원의 승선비율을 고려했을 경우, 소정방이 이끈 122,711명의 병력 중 순수 전투병력은 35,095명으로 계산할 수 있어.


※ 오나라 대익선은 전장 12장(약 40m), 폭 1장 6척(5.3m), 승선인원 69명인데, 이중 전투요원은 26명, 노꾼은 50명, 항해사 3명, 장교 10명이 탑승해. 이런 인적구성으로 인해 배의 속도가 비교적 빨랐어.



당나라 수군의 군선 중 큰 규모를 자랑하는 누선 또한 노와 돛을 이용하여 항해하였고, 당군의 무기체계나 전술이 춘추전국시대 부터 내려온 것이라 비슷하였을거야.

 



무튼 위에서 살펴본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의 병력수 차이인 3만명과 얼추 비슷한 결과가 나왔는데, 10만명이 수군병력이고 약 3만명 정도가 육군인 수치이니 생뚱맞다고 생각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이나 고대 동아시아 수군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격군이 유사시 백병전을 할 수 있는 준병력인걸 감안하면, 당 수군 10만명 또한 비전투요원이기 보단 상황에 따라 전투병력으로 보는게 옳다고 생각해.

 

특히, 격군(格軍)의 경우에는 전투가 시작할 즈음을 기점으로 운용한다는 사실과 당군의 출항지인 산동반도 래주(來州) 성산(成山)에서 한반도까지 주로 노젓기가 아닌 돛을 이용한 항해를 한다는 점을 보면 위의 주장에 보탬이 될 거 같아.

  

차차 설명하겠지만, 신라군과 합류한 소정방이 하루 늦게 도착했다 하여 신라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을 참수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기록과 연결되는 점이 분명하다고 생각해.

 

 

 




그럼 당군의 주요 지휘관과 병력의 출처에 대해 알아보자.

 




大唐平百濟國碑銘.jpg


대당평백제국비명비(大唐平百濟國碑銘)



대당평백제국비명비(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당군의 지휘관에 대해서 아주 상세히 적어놓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구,신당서,자치통감에서 나오는 당군의 지휘관을 종합하여 대백제전 당시 당군을 이끈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아.

 

 



총사령관(14도행군대총관) : 사지절 우이,마한,웅진,신구 등 14도행군대총관 좌무위대장군 상주국 형국공 소정방(蘇定方)

 

부사령관(신구도행군부총관) : 신구도행군부총관 관문대장군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 / 신구도행군부총관 사지절 농주제군사 농주자사 상구국 안이공 동보덕(董寶德) / 신구도행군부총관 좌령군장군 김인문(金仁問)

 

참모(행군장사) : 중서사인 양행의(梁行儀) / 기주사마 두상(杜爽)

 

좌장군총관 : 우둔위낭장 상주국 축아사(祝阿師)

 

좌일군총관 : 사지절 기주자사 상주국 마연경(馬延卿)

 

우일군총관 : 사지절 치주자사 상주국 우원사(于元嗣) / 우이도행군대총관 선위장군 행좌효위낭장 상주국 유인원(劉仁願)

 

우이도부총관 : 우무후 중랑장 상주국 조계숙(曺繼叔)


함대사령관 : 사지절 청주자사 상주국 유인궤(劉仁軌)


함대부사령관 : 우무위중랑장 김양도(金良圖)

 

좌효위장군 방효공(龐孝公) / 능주장사 판병조 하수량(賀遂亮) / 우무위장군 풍사귀(馮士貴)

 

 

 


 

지휘관들의 관직을 유심히 살펴보면, 당시 당군의 병력구성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 수 있어.

 

먼저 수군의 경우에는 유인궤가 고종의 명으로 수군 함대 및 군량미 운송을 책임졌는데, 당시 관직은 청주자사인데, 청주는 現 산둥성 동북부이며, 후한 13주 중 하나인 곳이지. 수,당과 함께 역대 중국왕조의 수군기지는 산둥반도에 있어. 그중 래주(來州) 성산(成山)이 수군기지로서 활용되었어.

 

또한 좌일군총관 마연경의 당시 직책인 기주는 現 허베이성 중남부와 산둥성 서부, 그리고 허난성 북부를 아우르는 구주 중 하나인 곳이야.

 

우일군총관 우원사의 당시 직책인 치주는 現 산둥반도 성쯔보시 주변 6개 고을을 뜻하며, 신구도행군부총관 동보덕의 농주는 現 간쑤성이야.

 

 


대략적으로 대백제전 당시 당군의 병력은 간쑤성, 허베이성, 산둥성, 허난성의 당나라 병력을 착출하여 파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그러므로 3월경 백제를 정벌하도록 명한 후 3개월 뒤에 출항한 것으로 미루워 볼 때, 이러한 병력구성으로 인해 3개월이라는 병력결집시간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어.

 

 








 

來州 成山.jpg

 


660년 3월에 본격화된 당의 백제 정벌은 3개월간의 준비를 마친 후 서기 660년 6월 18일. 산동반도 래주 성산에서 당군 122,711명을 태운 군함 1,900척이 신구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의 지휘 하에 출항하기 시작했어.

 

 

7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일대 지각변동의 시작이였지.

 

 

 



 

 

 

 

다음편은 서기 660년 당시 백제의 군사제도와 당시 보유하였던 병력, 그리고 지방군 사령관인 방령들을 비정해볼게.

 

 

긴 글 읽느라 수고 많았구 좋은 밤 보내라 ^~^

 

 




5줄 요약 

 

 

  

1. 대 고구려전에 대한 연이은 실패로 당 조정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하면 우선 백제를 쳐부수어야 한다(欲呑高麗 先誅百濟)’ 란 대외전략으로 바꾸게 되는데, 이는 7세기 초중반 나당동맹을 견제하려는 고구려-백제-왜(아스카)의 삼각동맹의 연결고리인 백제를 무너트리기 위함이였음.

   

2. 서기 642~655년 백제 조정의 대신들은 크게 정치,외교적으로 3개의 부류로 나뉘었는데, 친당파의 인물은 태자 부여융, 서자 부여궁, 좌평 부여성충, 좌평 부여흥수 / 친왜파의 인물은 부여효,부여층, 대좌평 사택지적, 좌평 연복, 좌평 충상, 달솔 귀실복신 / 친고구려파의 인물은 병관좌평 은상, 좌평 의직, 남방령 부여윤충이었으며, 652년 백제의 대당외교 단절로 인해 친당파 세력이 실각하면서 외교적 관계의 대상을 왜 아스카 조정으로 정하면서 백제-고구려-왜의 삼각동맹이 이루어졌음.

  

3. 서기 660년 3월 백제정벌에 대한 사전 정보유출을 우려해 당 조정은 파견 온 왜(倭)의 견당사 사절을 억류하여 정보가 세어나가는걸 막았으며, 왜(倭) 아스카 조정은 사비성이 함락당하고 의자왕이 장안으로 압송 된지 1달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됨.

  

4. 당군의 규모는 각 사서마다 다르나 대략 10~13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가장 구체적인 수치인 병력 122,711명 군선 1,900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군선인 대익선의 승선인원 비율인 28.6%를 대입하였을 때, 당군의 순수 전투병력은 35,095명이며. 나머지 인원은 수군 함대의 비전투병력임.

  

5.당군은 3개월의 준비간을 통해 現산동성,간쑤성,허베이성,허난성의 병력들을 착출하여 산둥반도 래주 성산에 집결후 서기 660년 6월 18일 사지절 우이,마한,웅진,신구 등 14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의 지휘 하에 한반도를 향해 출항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