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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백인종, 갈족에 대해 알아보자. : http://www.ilbe.com/5094237015
5호 16국 시대의 갈족의 나라, 후조(後趙)에 대해 알아보자. : http://www.ilbe.com/5123451510
5호 16국 시대 흉노족의 나라, 전조(前趙)에 대해 알아보자. : http://www.ilbe.com/5131157555
위진남북조 시대의 중무장 기병에 대해 알아보자. : http://www.ilbe.com/5159778343
게이들 안녕? 불철주야 일베 하느라 고생들 많다 ㅋㅋ일베하면서 역사글 하나 보고 가라고 하나 써봤다.
제목대로 고대 중국 (이 글에서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한정해서 말한다)에서 활동하던 중앙아시아인들에 대한 간단한 글이야.
우선 중앙아시아인의 고대 중국으로의 유입의 시초는 전한(前漢)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게이들도 잘 알다시피 당시 개척되었던 실크로드 덕분이었어.
하지만 실크로드를 개척해서 교역상들의 교류를 허용한 한 왕조라 해서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무턱대고 입국을 허용해주지는 않았어.
이것저것 까다로운 입국심사도 거쳐야 했고 일종의 위수지역을 정해두어서 정해둔 곳 외에는 무역상들의 진입을 금했었다.
하지만 한 왕조가 서서히 붕괴됨에 따라 변경에서의 관리도 소홀해지기 시작했고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으로 들어오려는 이민족들은 이제는 위(魏)나라에게 입국심사를 받아야 했지.
특히 위나라의 제일 서쪽 변경에 위치한 '돈황' 이란 곳은 중국으로 들어오려는 외국상인들로 붐비는 곳이었어.
돈황은 서쪽변경의 중심지이자 요충지로서 일종의 입국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돈황이 어딘지 모르겠는 게이들은 위 지도 참고해라.
소그드인 기마상
당시 가장 뺀질나게 드나들던게 이란계의 이 소그드인이란 놈들이었다.
당시 서역에서 오는 무역상들은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돈황을 필수로 거쳐가야 했고 여기서 통행을 허가 받아야 했기에
매번 몰려와서 현지의 태수에게 통상을 요구하며 중국 내로의 진입을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곤 했어.
소그드인 토상
근데 한두놈도 아니고 매번 떼거리로 와서 들어가게 해주세요, 장사하게 해주세요 하면서 징징대면 사람 참 피곤해진다.
당시 돈황을 다스리던 태수는 '창자' 라는 사람이었어.
저 장사덕후 양놈들을 어이할까 고심하며 골머리 썩히던 창자는 결국 통 크게 이 외국놈들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베풀어줬어.
수도 낙양으로 가서 장사하려는 놈들에게는 통행증을 발급하여 갈 수 있도록 조치해줬고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인
돈황에서 장사하고 싶어하는 놈한테는 무려 호송단까지 붙여줘서 장사하는데에 지장이 없게 해줬던 거야.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꽤나 파격적인 조치였기에 소그드인들은 창자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고
창자가 죽고난 후에도 창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며 은혜에 보답하려 했다고 해.
서진(西晉) 지도
아무튼 점차 삼국시대부터 이 소그드인들을 대표로 하는 중앙아시아인들은 점차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후 삼국시대를 통일하고 들어선 서진(西晉)시대에도 계속되었어.
아니 오히려 삼국시대보다 더 가속화 되었다봐도 무방할 정도로
서진시대부터 다양한 민족, 부족의 중앙아시아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해.
훗날 5호 16국 시대의 이민족 왕조 중 하나인 후조(後趙)를 세운 갈족도 이때 들어왔고.
이건 내가 예전에 쓴 글들인 후조, 갈족에 대한 글과도 어느정도 매치가 되는 부분인데
혹시 궁금한 게이들은 위 링크에서 찾아보길 바래.
남북조 시대 북제(北齊)의 무덤벽화에 그려진 서역인
이들 중앙아시아인들은 서진시대 이후 열린 5호 16국 시대를 겪으면서 방금 말한
갈족의 후조(後趙)처럼 때로는 시대의 주역이 되기도 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갔지만 이들이 주로 종사하고 활동했던 무대는 상업 쪽이었어.
애초에 중국으로 들어온 주요 목적도 장사하려고 했던거라 크게 이상할 건 없지만 말이지.
당시 소그드인들이 남긴 기록이 발굴되었었는데 고향에 있는 지 친구와의 안부나 근황을 물으면서 주고받은 일종의 편지였다고 해.
중국에서 장사하는 놈은 고향에 있는 친구놈한테 중국에서의 장사생활이 비교적 평탄하며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 자랑했다고 하는데,
이걸보면 당시 이들의 타지생활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듯 싶다.
서기 440년의 판도
파란색 영역이 북위(北魏)
그리고 그 혼란했던 5호 16국 시대도 백여년만에 서기 439년,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위(北魏)에 의해 막을 내렸고 화북지방에서는 남북조 시대 북조의 첫 왕조가 시작되었지.
북위에서는 주변국들과의 외교에 적극적이었고 서역의 여러나라들과도 관계를 맺은 덕택에
서역의 여러나라에서 온 중앙아시아인들의 왕래도 더욱 활발해졌다.
이주해온 소그드인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무리가 늘어나 수만명 수준의 집단으로 성장하자
북위에서도 이를 감안하여 별도의 관청을 두어 소그드인들을 관리했고 그들의 풍습과 종교를 인정해줬어.
그리고 각 부락의 지도자에게는 '살보' 라는 벼슬도 하사하여 행정관료로도 삼았었지.
좌우간 북위에서 여러모로 이 소그드인들을 신경쓰고 배려해줬다고 보면 되겠다.
서기 560년의 판도.
푸른색이 북제(北齊), 하늘색이 북주(北周)
그러던 중 북위는 정변을 일으킨 급진세력에 의해 전복되어 분열되어 잠시 동위(東魏), 서위(西魏)로
나뉘게 되었고 동위, 서위는 각각 북제(北齊), 북주(北周)로 바뀌게 돼.
앞서 북위가 동위, 서위로 갈리면서 그에 따라 소그드인들도 동위, 서위로 나뉘게 되었고
그 중 소그드인들이 제일 많이 옮겨간 나라는 동위(東魏), 즉 북제(北齊)였어.

북제(北齊)의 무덤벽화에 그려진 소그드인
내가 보기엔 별로 서역인 같지가 않은데 니들이 보기엔 어떻냐?
북제에서도 북위의 소그드인에 대한 정책은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고
소그드인들은 예전대로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었지.
하지만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왜 그토록 이 소그드인들을 잘 대우해주며 자국에 머무르게 해주었는지 말이야.
물론 이 소그드인들이 요즘같이 불체자나 외노자 같은 케이스는 아니다만 수만명씩이나 몰려와서 살면서
혜택이란 혜택은 다 받아가고는 있는데, 대체 무엇을 위한 배려이고 왜 그렇게 잘대해줬냐는 거지.
이유는 당시 북방에서 흥기하던 돌궐과 연관이 있어.
북위는 상관없고 북제에만 해당되는 애기다만, 당시 돌궐은 북제와 이웃한
북주(北周)와 손잡고 북제와 대립하고 있었어.
적국 북주가 동맹을 만들었다는 소식은 그리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을거야.
북제 입장에서도 돌궐은 북주에 대한 견제용으로는 물론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필히 우방으로 둬야 할 필요가 있었겠지.
아닌게 아니라 당시 돌궐은 통일되어서 급성장한 상황이었고 북주와 북제는 이후로도 돌궐을 두고 서로 지 편으로 만들려고 애썼었다.
그런데 돌궐은 소그드어를 공용어로 쓰기도 했었다고 해.
중국에서 발견된 6세기의 동로마 제국 금화
거기다 당시 소그드인들은 돌궐을 통해 중계무역을 하면서 서역은 물론
멀리 동로마 제국과도 무역을 하고 있었던지라 돌궐과는 교류가 두터운 사이였지.
말도 통하겠다, 어느정도 친분도 있겠다 북제는 이 소그드인들에 주목하고 십분활용하기로 한다.
물론 이것 외에도 당시 북제의 황제들이 소그드인들에 의해 전파된 서역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를 좋아했던데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북제의 황제들은 본래 자신들의 핏줄인 선비족의 전통과 풍습을 되살리려는 노력과
동시에 서역에서 전래된 서역의 종교나, 춤, 음악 같은 외래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유행을 허용해줬어.
아니 오히려 북제 황제들이 서역의 놀이나 춤을 즐기며 놀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지들이 유행에 앞섰다.
그리고 이때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터교 사원도 각지에 설립되었고 포교도 허용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이나 중앙아시아 같은 동네에서 유행하던 종교였어.
아후라마즈다
그리고 북제 황실에서도 '호천(胡天)' 이란 신을 숭배하며 제사도 거행했는데
이 호천은 조로아스터교의 주신 아후라마즈다로 추정된다고 해.
이렇듯 서역문화에 심취했던 북제처럼 아무래도 중국에 살면서 중국화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던
소그드인들도 중국문화를 받아들여 성씨나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등, 이른바 '한족화' 를 시작한다.
비단은 소그드인들의 대중국 주요 교역물품이었다.
한족화와 동시에 점점 그 무리가 늘어나자 처음에는 장사치로 시작했던 소그드인들도
점차 세력을 이루며 나중에는 북제의 조정에도 진출하여 관료로 등용되는 이도 있었어.
근데 따지고 보면 엄연한 이민자들이었건만 어떻게 북제의 조정에까지 진출했는지 좀 의문이지?
물론 우리나라에 이자스민 같은 년도 있다만 소그드인들이 북제조정에 진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생업으로 삼았던 상업과 관련이 있었다.
위에서도 얘기했던 거지만 예전부터 중국내에서 장사활동 하려는 소그드인들은
자고로 관청에서 발급된 일종의 허가증이나 통행증 같은게 필요했었어.
그런데 이걸 뒤집어 말하자면 허가받은 증서가 없으면 중국 어디서도 장사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되지?
하지만 그 통행증을 발급받기란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었고 절차도 복잡했어.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서의 무역으로 부를 쌓은 소그드인들은 점차 자신들만의 정치세력을 만들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어.
즉, 이런저런 귀찮은 절차 없이 자신들을 지지해주고 장사활동을 보장해줄 정치가들이 필요했던거야.
소그드인들의 이러한 요구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북제에서 유행하던 서역문화를 탐닉하고 심취해있던
북제황제들의 성향과도 절묘하게 맞아들어갔고, 이런 배경속에서 북제에서도 서역출신 관리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거지.
하지만 소그드인들의 정계진출은 결과적으로 북제에 있어서 썩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는 못했었다.
말그대로 장사만 하던 놈들이라 그런지 상술로는 최고였지만 정치쪽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놈들이
등용되어 황제들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전횡했던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야.
이렇게 정치적 지위는 상승했던 소그드인들이었지만 여전히 중국에서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기에
몇몇 소그드인 지도자층들은 한족 귀족들과 혼인함으로서 확실히 자신의 지위를 올리는 한편, 세력을 공고히 해두고자 했고
북제에서의 소그드인들의 세력은 무시못할 수준에 이르게 돼.
아무튼 이 위진남북조 시대, 특히 북제시대를 계기로 서역문화는 중원에 유입되었었고
이후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 당나라 때에도 계승되어 유지되었다.
재미없는 글 읽어줘서 고맙다 게이들아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