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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게이들? 불철주야 일베하느라 고생들 많다 ㅋㅋ 일베도 하면서 그냥 역사 이야기 하나 보고 가라는 의미에서 역사글 한번 써본다. 이번에 다루어 볼 역사글은 5호 16국 시대 흉노족의 나라, 전조에 대한거야.
게이들도 알다시피 흉노는 기원전 2~3세기 부터 중국의 한족왕조와 자웅을
겨루면서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를 하고 전쟁을 벌이던 유목민족이야.
흉노의 전성기는 전한(前漢) 때로, 북방에 강력한 흉노제국을 건설하고 전한을 끊임없이 압박하고
괴롭히며 이에 참다못해 원정나온 한 고조 유방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었지.
하지만 이후 한 무제(武帝)의 원정토벌로 인하여 흉노는 패권을 상실, 쫓겨났고
설상가상으로 저들끼리의 내분에 휩싸여 사실상 흉노는 이전의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조조
이후, 후한 말기 무렵에 들어서면 그 유명한 조조가 이 흉노를 약화시킬 목적으로
다섯개의 부족으로 찢어버리는데, 이를 '흉노 5부' 라고 해.
그리고 다섯개의 각 부족마다 흉노의 왕족이나 귀족을 수령으로 임명하여 관리-감독하게 했었는데,
당시 여러 성씨들 중에서도 제일 으뜸가던 성씨는 남흉노 출신의 유씨(劉氏)였던지라 그들을 수령으로 삼았었다.
여기서 이 유씨 흉노 왕족들을 기억해두길 바래.
그리고 한편 중국에서는 후한이 무너지고 삼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지도에서도 보다시피 지리상으로도 북방에 위치했었던 흉노는 위(魏)나라의 관할 하에 있었어.

<삼국지12>에서의 호주천, 유표
후한 말부터 중원에서의 혼란에 때때로 개입하기도 하고 혹은 군웅들 간의 싸움에 이용되기도 하며
흉노는 거의 중국에 종속되어 있었고 삼국시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지>를 읽어본 게이들은 호주천이나 유표같은 흉노인물들을 한번 들어봤을 것야.
모두 중원에서의 군웅들에게 고용되어 다른 군웅을 친다든지와 같은 정치싸움에 이용되곤 했었지.
그리고 삼국시대는 서기 280년, 위나라를 계승한 서진(西晉)에 의해 통일되었지.
이 서진시대에도 과거 후한이나 삼국시대처럼 흉노에 대한 대우나 취급은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흉노는 여전히 다섯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과거 묵특 선우의
전성기를 회복하기엔 세력도 미약했고 그럴 엄두도 못내고 있었지.
흉노는 그냥 그대로 한족왕조의 씨다바리로 쫑낼 운명처럼 보였다.
유연
그럴즈음 흉노 왕족 중에 묘한 이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유연.
성씨에서도 미루어 알수 있듯이 과거 조조가 흉노를 다섯부족으로 나누면서
각 부족장으로 임명했던 유씨 흉노왕족 출신의 왕족이었어.
전조 황실 가계도
위 가계도에서도 보다시피 유연은 앞서 위에서 말한 유표의 아들이자, 어부라의 손자였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물론 작은 할아버지가 되는 호주천까지 죄다 흉노의 왕족이자 지도자였으니
유연은 말그대로 정통 흉노 왕족이었다. 그리고 흉노의 선우로서 등극할 서열 1순위이기도 했지.
하지만 유연은 유년시절부터 삼국시대 위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했어야 했어.
이유는 간단해. 과거 춘추전국시대 때 열국들이 서로의 왕족들을 인질로 주고 받으며 암묵적인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것 마냥
위나라나 그 뒤를 이은 서진에서나 흉노의 왕족을 잡아다가 볼모로 두며 행여나 흉노가 다시 흥기하여 덤벼드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지.
그러나 겉으로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고 살얼음을 걷는 듯한 인질생활이었을 것 같지만,
유연은 위-진의 수도 낙양에서 그곳의 한족학자들에게 학문을 사사받기도 하고 교류하면서 유교경전을 공부하는 등,
볼모생활 동안 공부만 했나 싶을 정도로 나중에는 여느 한족학자 못지 않은 수준의 학문을 쌓게 된다.
그리고 이는 훗날 유연이 건국하는 흉노족의 나라, 전조(前趙) 혹은
한(漢) 정권이 한화(漢化)되는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지.
그러던 중 서진에서는 권력을 두고 이른바 '팔왕의 난' 이라는 황족 간의 내란이 발발하게 되고, 서진이 더는 흉노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자 그동안 한족왕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북방의 흉노는 이 틈을 타 자립할 생각을 품게 돼.
그러기 위해선 분열된 흉노족을 하나로 뭉치게 할 구심점이 될 지도자가 필요했고
흉노왕족들은 그 지도자로 서진에 인질로 가있는 유연을 점찍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는 흉노 5부, 즉 다섯개 부의 부족장들이
같은 남흉노 출신의 같은 유씨 왕족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어.
물론 이 유씨 왕족들이 다른 흉노 왕족들 중에서도 제일 지위 높고 대우를 받았기에 그런 면도 있긴 했지만
유연을 선우로 받드는 사안에 있어서 다른 성씨 부족장들이었을 경우에는 반대표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겠지.
그런 이유로 유연은 북방의 흉노 땅으로 다시 돌아왔고
서기 304년, 대선우 겸 한왕(漢王)의 자리에 올라 '한(漢)' 을 건국한다.
서기 304년의 정세도
여기서 이민족인 흉노가 자신들의 국호로 왜 한족왕조의 상징적인 국호인
'한(漢)' 을 가져다 썼는가에 대해서 내가 예전에 쓴 서진 글에서도 나와있긴 하지만,
한나라가 형, 흉노가 동생이 된다는 식의 과거에 맺은 관계에 따라 흉노가 형의 나라인 한나라의 국호를
계승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거니와 이는 한족에게는 상징적이면서 정체성을 뜻하는 국호인 '한' 을 씀으로서
정권의 정통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반진(反晉) 효과를 거두고자 벌인 정치쇼였어.
마치 훗날의 여진족이 '금(金)' 이라는 국호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벅차오르는 것처럼 한족에게도
이 '한(漢)' 이란 글자는 과거 번성했던 전한-후한시대에 대한 향수를 끌어올리는 면이 있었기에
동시에 한족의 지지도 얻을 겸해서 유연은 이것을 노렸다고 보면 되겠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유연이 한족문화에 심취해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겠고.
그리고 흉노의 한나라는 남침을 개시했고 이것을 '영가의 난' 이라고 부른다.
저들끼리의 내란으로 국력이 쇠해있던 서진은 그야말로 개박살이 났고 서기 317년, 서진은 무너졌다.
서진멸망 직후, 서기 317년 무렵의 정세도.
지도에는 흉노의 한(漢)이 전조(前趙)로 표기되어 있는데 나중에 국호를 바꿔서 그렇다.
이렇듯 서진을 멸하고 장악한 화북지방을 마치 흉노색 물씬 풍기는 유목국가로 바꿀 것처럼 보였던
한나라였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한족왕조의 기존 제도와 문물을 그대로 답습했어.
서진시대는 물론, 이전의 삼국이나 과거 후한시대의 제도나 문화 등 국가의 모든 문물을
한족왕조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이 만들고 최소한 비슷하게라도 만들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흉노에겐 독자적인 관직체계나 제도 같은게 없어서 한족왕조의 것으로 대체했느냐 하니,그것도 아니라는 거지.
물론 한족왕조의 관직체제나 제도에 비할 바는 못되긴 하지만 엄연히 흉노도 간소하게 나마 독자적인 관직제도나 작위제가 있었다.
그런데 고유의 전통을 내버리고 나라의 문물을 싸그리 한족왕조와 똑같게 했다라는 것은
그만큼 흉노가 한족왕조 문물의 우수함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심취해 있었다라는 것을 의미했지.
이때의 기록에서 나오는 지명이나 관직 같은 것들을 보면 도대체 이게 예전 후한(後漢)이나 삼국시대 위(魏)나라 것인지
아니면 5호 16국 시대 흉노의 전조 때의 기록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거의 100% 한족왕조의 문물을 그대로 계승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흉노의 한화(漢化)정책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고지배층인 흉노 왕족들이나 귀족들에게까지 적용되어
당시의 흉노 귀족들은 웬만한 한족 사대부 뺨치는 수준의 유교학문 지식과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
이게 정말 예전에는 초원에서 매나 날리면서 사냥하던 오랑캐 흉노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지.
특히 흉노정권은 이 유교를 더욱더 장려하여 국가통치의 기반이자 사상으로 삼으려 했어.
이전의 한족왕조들도 유가를 통치사상으로 삼았는데 새삼스레 웬 개소리냐고 묻는 게이들도 있을 것 같은데,
5호 16국 시대가 속한 이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후한 말부터 유교는 점차 쇠퇴하는 추세였고 난세로 복잡한 속세에서
벗어나 현실도피엔 그만인 도교 같은게 성행했었다.
그런데 이 흉노정권은 무너진 유학(儒學)를 다시 되살리고자 했었어.
기록에 따르면 전조의 역대 황제들은 유학을 적극 장려하여 곳곳에 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고 조정에는 별도로 유학교육을 담당하는 기구까지 설치하여 관리했다고 해.
그리고 여기서 우수한 자는 별도의 테스트를 통해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이들의 한화정책은 어찌나 철저했는지, 당시 전조에서는 '선우대' 라는 관청을
설치 했었는데 웃기게도 선우대는 이민족들을 관리하는 통치기구였다.
흡사 예전의 한족왕조가 변방의 이민족들을 통치, 관리하기 위해 관청을 설립했던 것처럼
흉노도 중원의 주인이 되자 이젠 자신들도 다른 이민족들을 관리하려 했던 것이었지.
흉노도 중뽕 맞았다랄까?
이와같은 흉노의 한화정책의 요인에는 첫번째로, 앞서 말했듯이 창시자인 유연부터가 유년시절의 볼모생활로 인해
한족문화에 심취했었기에 서기 304년, 한을 건국했을 때부터 나라의 모든 문물제도를 한족왕조의 것을 답습했던 것이고,
나중에는 아예 중원에 눌러앉게 되자 거의 100% 한족왕조화 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두번째로는 애초에 이 흉노라는 이민족 자체가 중국과 인접해 있었고 가장 많이 중국과 다툼을 벌이면서
중국의 문물제도에 대한 거부감도 별로 없고 이해도가 제일 높았던 부분도 상당한 부분으로 작용했었다고 볼 수 있어.
5호 16국 시대에 우후죽순 세워지는 다른 이민족들의 국가들도 한화정책을 시행했지만
이 흉노의 전조만큼 높은수준의 한화를 이룬 나라는 없을거야.
즉, 이렇게만 보면 특별히 이민족이 쳐들어와서 자신들의 왕조를 세웠다 하더라도 지배층을 구성하는
'민족' 만 바뀌었다 뿐이지, 특별히 문화나 무슨 제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이렇듯 한화정책엔 열을 올리던 전조는 서기 328년, 휘하의 장수였으나 점차
독자세력을 불려가던 갈족출신의 무장, 석륵이란 인물과 충돌하게 돼.
지도에서 보다시피 석륵이 하북에서 독자세력을 키우는 사이 전조는 잔인한 황제들과
권신들의 모반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고 내란으로 국력만 갉아먹고 있는 처지였어.
그리고 서기 329년, 석륵과의 한판 대전에서 대패한 전조는 멀리 서쪽으로 도주하여
재기를 노렸지만 곧 석륵의 추격으로 패했고 전조의 6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유희' 는
사로잡혀 곧 처형당함으로서 전조는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석륵은 후조를 건국하여 이번에는 화북지방의 주인은 갈족이 되었지.
읽어줘서 고맙다 게이들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