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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lbe.com/2596055456 -[정보/역사] 명나라 최대 암군 4명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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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lbe.com/2590404789 - [재업/역사/정보] 북송의 멸망과 휘종과 흠종의 비참한 말로



하이 북송 말 글 잘봐줘서 ㄳㄳ하다 이번에 어떤 게이가 남송의 효종과 금의 세종에 대해서 써달라고 해서 써본다 많이 부족해도 이해 부탁한다. 

나도 이 부분 오랜만에 보는 부분이고 다시 공부하고 있으면서 글을 쓰고 있는거라서 쨋든 시작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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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 세종(世宗) 완안옹(完顔雍) 광천흥운문덕무공성명인효황제(光天興運文德武功聖明仁孝皇帝)


 

금 왕조의 최대영역

 

금나라는 생여진(生女眞)의 한 부락이었던 완안(完顔)부에서 영명했던 아골타가 등장하여 여진족을 통일하였다. 

아골타는 금의 태조(太祖)가 되고 자신들을 억압했던 거란의 요(遼)를 정복한다. 

그리고 태종(太宗)은 북송(北宋)의 수도였던 개봉(開封)까지 점령한 한 뒤에 황제였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까지 생포하여 오국성으로 억류 시켰다. 

태종은 송나라를 완벽하게 정복하려 했지만 갑자기 위독한 병이 걸려 59살의 나이에 죽었다. 

태종은 태조의 동생이었는데, 태종은 자신의 아들을 즉위시키지 않고 태조의 아들인 종준(宗峻)의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된다. 

이가 바로 금 희종(熙宗)이다. 

 

 

 

 

희종은 폭군이었다. 그는 주변의 황족, 신하, 황후와 비까지 마음대로 죽여댔다. 

희종의 즉위를 후견하였던 종간의 아들이었던 완안량(完顔亮)은 희종을 죽이고 해릉왕(海陵王)으로 즉위하였다.

해릉왕은 희종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동혼왕(東昏王)으로 격하시키고 폭정을 일삼았다. 

해릉왕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예쁘다고 하면 남과 결혼한 여자도 상관하지 않고 전부 빼앗았다. 

그리고 남송을 정벌하여 천하 통일할 꿈을 꿧지만, 사촌동생이었던 완안옹(完顔雍)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금 세종

 

이리하여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을 죽이고 황제의 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금 세종(世宗)이다. 

세종은 일단 해릉왕이 벌여놓은 남송과의 싸움과 동시에 거란의 반란을 마무리 지어야했다. 

당시 거란은 금에게 요를 빼앗기고 중앙아시아로 가서 서요(西遼)를 세운 세력과 고향 땅을 떠날 수 없다며 금과의 유격전을 하는 세력이 있었다.

세종은 강온 양면책을 사용하여 토벌군을 파견하면서 동시에 거란의 황족 출신인 

야율원의(해릉왕 토벌의 공으로 완안의 성씨를 받았다)를 파견하여 거란의 지도자들을 설득하였다. 

세종은 투항하는 거란족에게 관대하게 대하며 빠르게 반란을 토벌하였다.

 

12c 말 동북아 국가의 영역

 

거란의 반란을 토벌한 세종은 해릉왕이 벌여놓은 송과의 전쟁도 마무리해야했다. 

송은 금나라의 반란을 틈타서 숙주 등을 회복하였는데, 거란의 반란을 평정하고 금 세종은 금군을 직접 지휘하여 송이 빼앗을 땅을 바로 회복하였다.

그리고 송과의 평화 협약을 맺고 국경에서는 약 50년간 송과의 전쟁없이 평화로운 시기를 만들었다. 

 

금군(金軍)의 모습

 

세종은 송을 정벌하겠다는 선황제들의 뜻을 버리고 안정된 내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금나라는 해릉왕의 한화(漢化)정책으로 여진족의 기상이 많이 쇠퇴해 있었다. 

남북조시대의 북위는 한족을 동경하여 선비족의 기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나라가 크게 흔들린 일이 있었다. 

세종은 여진족의 기풍을 회복하기 위하여 여진어를 사용하고 여진문자로 중국 고전들을 번역하였다. 

과거는 여진어로 치뤘고 시험에 급제하면 높은 관직에 올랐다. 

여진문자는 단순히 만주뿐 아니라 화북지방까지 퍼뜨리고 한족들까지 여진언어를 배울 정도였다. 

그는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위해 노력했고 그에 따라 여진족의 가난을 구제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세종은 관유지에다 농사를 짓는 한족들의 땅을 몰수하고 그 땅을 전부 여진족에게 줬다. 

 그의 즉위 초에 거란 반란으로 크게 곤경을 겪었다.  거란은 맹안, 모극이라는 군사조직을 갖고 있었는데,

세종은 이와 같은 조직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맹안, 모극을 폐지하였다. 

이는 금 정부가 거란족을 감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거란족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같은 세종의 정책은 훗날 세종의 사후 금나라가 무너지는데 큰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북쪽에 치우쳐있던 수도 상경 회녕부에서 연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로서 금나라가 중원 제국임을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

세종의 치세에 풍년이 들고 상공업의 발달로 인구 역시 크게 증가하였다. 

해릉왕 말에 인구는 1900만에 이르렀지만 세종 집권 10년차에 화북지방의 인구는 2천만이 넘어섰고 금나라 전부 인구는 약 3천만에 이르렀다. 

지금 화북지방의 문화재의 70%는 금 세종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치세에 소요순시대(小堯舜時代)라고 불리우며 칭송하였다. 


하지만 그의 치세 말에는 몽골과 남송의 이중전선이 펼쳐져 점점 제국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세종은 약 29년의 치세 끝에 손자인 완안경(完顔璟)이 즉위하였는데 이가 바로 금의 장종(章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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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의 영토

 

 

 

 

개봉(開封)에 수도를 두었던 북송(北宋)은 금(金) 군에 의하여 멸망하고 송의 황제 였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그리고 나머지 조(趙)씨 황족 역시 모두 금나라로 끌려갔다. 

사람들은 이제 송의 천하는 망하였고 여진(女眞)의 금(金)이 새로운 중원 왕조로 들어설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휘종의 아홉번째 아들 강왕(康王) 조구(趙構)가 금나라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임안에 다시 도읍을 세워 고종(高宗)으로 즉위한다. 

고종은 다시 송나라를 일으키고 수도가 개봉보다 남쪽에 위치하여 남송(南宋)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남송 초반에는 악비(岳飛), 종택(宗澤)등 명장이 나타나서 개봉을 다시 수복하고 북송의 판도를 회복하나 싶더니, 

조정의 주화론자와 주전론자 들의 당쟁 싸움에서 고종이 주화론자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악비는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고 종택은 죽으면서 '도하, 도하 도하'(장강을넘어서 북송의 천하를 회복해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게 된다. 

 

 

송 고종의 어진

 


 

(2) 남송(南宋) 효종(孝宗)  조신(趙昚) 소통동도관덕소공철문신무명성성효황제(紹統同道冠德昭功哲文神武明聖成孝皇帝)

 

 

송나라 계보

 

효종은 원래 조백종(趙伯琮)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로 본래 고종의 친자는 아니었다. 

송나라는 2대 황제 태종(太宗) 이후로 쭉 태종의 직계 자손들이 황제를 했었는데 (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은 형과 동생사이다.) 

효종을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다시 태조계가 황제를 하게 된다. 태조계가 다시 황제가 된 배경에는 재밌는 사실이 전해진다.

태종이 즉위하고 태조의 자손들은 천대받게 된다. 개봉 함락 당시에 있던 신하들은 금 태종의 얼굴을 봤는데 송 태조 조광윤의 얼굴과 비슷했다고 했다.

이 사실은 송 태조가 태종계한테 뺏긴 나라를 되찾으러 온다는 소문을 낳았고, 

고종의 아들이 모두 죽은 가운데 태조계에서 새로운 양자를 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은 태조의 차남 조덕방(趙德芳)의 6세손으로 고종의 양자로 즉위 후에 이름을 조신(趙昚)으로 개명한다. 

효종 즉위 당시에 금의 해릉왕(海陵王)이 남송과 금나라가 맺은 화약을 깨고 침공한 상황이었다. 

금나라는 엄청난 대군을 움직였지만, 해릉왕은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송나라에 침공한지 얼마 안되어 

훗날 금나라의 세종(世宗)으로 즉위한 완안옹(完顔雍) 반란으로 죽게 된다(이 전투에서 당시 황태자였던 효종의 공이 컸다). 

이후 완안옹이 세종으로 즉위하고 세종은 남송에서 금군을 철수한 뒤 다시 화평을 맺는다.

 

 

효종의 어진

 

효종(孝宗)은 원래 주전론자 였고 당시 주전론이 조정에 득세하게 되었다. 

효종은 진회의 측근들을 조정에서 전부 몰아내고 죽은 남송의 전쟁영웅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대표적인 주전론자 장준(張浚)을 추밀사의 관직을 주어서 북벌의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장준은 금릉(지금의 남경)을 총 기지로 삼아 북벌군을 보냈다.

남송의 북벌군은 거란족 망명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숙주까지 진출하여 회복하였다. 

하지만 금에서 세종이 즉위하고 정세가 안정되자 송은 다시 숙주를 잃었다. 하지만 금과 남송은 이 전쟁을 계속 이어갈 힘이 없었다. 

남송은 이미 금의 군대에 상대가 안된다는 것이 증명 되었고, 금에서는 남송의 세공을 받지 못하여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전쟁의 패배로 남송 조정에서는 다시 주화론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고 결국 추밀사 장준은 해임되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두 나라는 다시 화친조약을 맺었고, 국경선은 전과 같이 정해졌다. 하지만 이번에 맺은 조약은 금나라로서 불리한 조약이었다. 

송은 금에 바치던 세공을 은 25만냥, 비단 25만 필에서 은 20만냥, 비단 20만필로 줄였다. 

그리고 세공(歲貢)이라는 말을 세폐(歲幣)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세공에서 세폐로 바뀌었다는 말은 남송이 더 이상 금의 속국이 아니라는 뜻). 

그리고 남송이 금나라에 신종(臣從)(신하로서 복종한다)하는 관계가 아닌 숙질(叔姪)(작은아버지와 조카)관계로 개선 되었다. 

송에서는 개봉 주변의 북송 황제의 묘 주변 반환을 요구 하였지만, 

금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본래 남송에서 금 황제의 국서를 받았을 때 황제가 일어서서 받았지만

효종은 이를 앉아서 받는걸로 고치려 했지만 이 역시 거부당했다. 

어쨋든 이 조약은 성공적으로 맺어졌고 두 나라간은 50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다.

 

 

남송 악비군

 

고종의 집권 말기에 송 조정의 내부 기풍은 북송 말과 비슷해지기 시작하였다. 

금나라에 대한 위협이 없어지자 남송 집권층은 다시 개봉에 있었던 시절의 사치와 향락을 누리려 했는데, 이는 곧 백성들의 부담이 됬다. 

게다가 효종은 북벌의 실패는 이런 송의 체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꼇다.

그는 자리만 차지하고 녹을 축내는 불필요한 관리들의 숫자를 줄이고 매관매직의 기풍을 일소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당시 송은 가문에 따라서 관리의 승진이 정해졌었는데, 이런 낙하산 인사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또 당시 염상(소금상인)들에게 나라가 빚졌던 돈을 전부 갚았다. 그리고 이 소금의 전매제를 실시하여 국고를 늘렸다.

그리고 당시 남발하던 회자라 불리우던 어음의 수를 조정하여서 인플레이션을 막았다.

이 외에 구휼책의 개선으로 농민 등 중산층을 육성하여 나라의 번영을 구가하였다. 

정사에서는 효종시기를 '건순지치(乾淳之治)'라 부르며 칭송하였다.


 

효종의 묘호인 효(孝)에서 보듯이 효종은 양아버지였던 고종을 극진하게 모셨다. 

고종은 상황으로 24년간 있었는데 효종의 북벌론에 번번히 반대하면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지만 

효종은 24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고종을 문안하면서 자식의 예를 다하였다. 

심지어 황제의 몸이었지만 고종의 수레를 바퀴를 밀고 직접 말을 이끌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효종의 말년은 다소 불행했다. 그는 장남이던 장문태자(莊文太子)가 죽고 셋째 아들이었던 조돈(趙敦)을 제일 총애하였는데, 

셋째아들이 훗날 즉위하여 송 광종(光宗)이 된다. 

셋째 아들이 황태자가 된 걸 안 둘째아들 위혜헌왕(魏惠憲王) 개(愷)는 동생에게 제위도 뺏기고 외지에서 홧병으로 죽었는데 

효종은 이를 애석하게여겨 위혜헌왕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하다가 광종과의 사이가 틀어졌다. 

광종은 효종의 생일 때에도 찾아가지 않고 공처가였던 광종은 황후 이씨의 효종을 흉보는 말을 들으며 점점 멀어져갔다.

심지어 효종이 죽었을 때에도 효종이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아 상을 치르려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훗날 송 영종(寧宗)이 울며 간청해도 듣지 않을 정도였다. 효종은 아들인 광종을 그리워하다가 67세에 죽고만다.

 

효종은 남송의 최전성기를 구가하였고 그의 일대의 소원을 바로 북송 천하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당시 금에서는 소요순시대(小堯舜時代)라 불리우던 금 세종(世宗)의 치세 였고,

결국 남송은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황하강을 넘지 못하였다. 효종은 세종보다 1년 뒤에 죽게된다.

 


이 시대를 보면 서로 대치해있던 두 국가간에 서로 가장 명군이었던 군주들이 등장했다. 

이 두 영웅의 등장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힘의 불균형이 아닌 서로간의 힘의 균형을 이루어 오래도록 평화를 이룩하였다. 

두 명군이 죽자 두 국가는 곧 쇠퇴기를 맞이하였고 똑같은 세력에게 망하게 된다


세줄요약


1. 금과 송은 같은 시기에 두 명군이 등장

2. 두 국가간의 평화

3. 두 황제가 죽고난 뒤 나라가 쇠퇴해지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