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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lbe.com/2269594636 - [정보] 명나라 F4에 대해서 간단히.araboza

http://www.ilbe.com/2274160398 - [정보] 청나라 전성기 강건 성세(康乾 盛世)의 군주에 대해서 .araboza -(1) 강희제

http://www.ilbe.com/2281460213 - [정보] 청나라 전성기 강건 성세(康乾 盛世)의 군주에 대해서 .araboza -(2) 옹정제

http://www.ilbe.com/2293701033 - [정보] 청나라 전성기 강건 성세(康乾 盛世)의 군주에 대해서 .araboza -(3) 건륭제


안녕 일게이들아 주말인데 좃도 할거없어서 일베 글이나 쓰는 ㅎㅌㅊ 일게이다

아 그리고 어떤새끼들은 나보고 짱깨라고하는데 씨발 짱깨아니다.

중공 존나 증오하고 의경생활할때 경복궁에 서있다가 짱개새끼가 말걸면

존나싫었다 물론 겉으론 웃음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위해서

조선족 나라없는 기생충같은새끼들

씨발 모택동개새끼 등소평개새끼 박정희각하 만세 사랑합니다 자유대한민국만세 !!!!

 

원래 명나라 F4쓰고 강건성세 한번에 쓰려고했는데 쓰다보니 씹스압되서 3편으로 나눴더니 그것도 길다고 하는애들있는데 그게줄이고 줄인거다...

쨋든 이번 글은 청나라 인종과 선종시절에 대해서 써볼까한다... 

아편전쟁이라는 떡밥이잇는데 최대한 간추리고 간추릴게.  

건륭제 글쓸때 존나 힘들게 썻는데 구어체로 쓰다보니까 말이 횡설수설 하더라 이 점 이해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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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仁宗) 가경제(嘉慶帝) 예황제(睿皇帝) 재위(1796년~1820년) 애신각라 옹염(愛新覺羅 顒琰)

 

清 佚名 《清仁宗嘉庆皇帝朝服像》.jpg

 

가경제는 인(仁)이라는 묘호를 받았어. 인은 어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거 다 알고 있을 거야.

대부분 이 묘호를 받는 황제는 어질다는 평가를 받았어. 조선 인조(仁祖)새끼 뺴고... 

북송(北宋) 인종(仁宗)이나  명나라 인종(仁宗) 홍희제(洪熙帝), 조선의 인종(仁宗) 등 다 사람은 착했다는 평가를 받았어. 

내 생각에는 황제의 성격이 이 묘호를 받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어.

 가경제 치세에 청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가경제 자신은 근면하고 사람은 어질다는 평가를 받았어. 

능력이 달려서 몰락해가는 청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1) 가경제의 즉위

 

가경제는 건륭제의 15황자 였어 처음에 저위비건법에 따라 2황자 영련(永璉)을 봉했다가 일찍 죽고 7황자 영종(永琮)을 봉했지만 역시 일찍 죽고말았어. 

건륭제는 영염을 가친왕(嘉親王)으로 봉하고 저위비건법으로 영염을 차기 황제로 지정했어.

그리고 건륭 60년 건륭제는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치세기간을 넘지 않는다고 영염에게 황제 자리로 주고 자신은 태상황으로 물러났어. 

37세인 영염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가경제(嘉慶帝)야.


 

어린시절의 가경제

 

(2) 가경제 치세 초기

 

가경제가 즉위했지만 아버지 건륭제는 아직도 태상황으로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어. 

가경제가 일을 처리할 때 중요한 일은 모두 아버지인 건륭제에게 보고를 하고 승낙 여부를 확인해야 할 정도였지. 

그리고 가경제에게는 건륭제 말고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 사람은 건륭제때의 권신(權臣) 화신(珅)이야. 

가경제가 뭘 하려고하면 화신이 건륭제의 빽을 믿고 가경제가 새로 내놓은 정책을 무효로 만들고했어. 

가경제는 독단적으로 일을 하는 화신에게 칼을 갈고 있었지.

 

가경 4년 태상황인 건륭제가 죽자 가경제는 화신에게 능지처참을 명했지만 자신의 동생이자 화신의 며느리였던 고륜화 공주의 청을 받들어 자결을 명하지. 

그리고 화신이 그 동안 부정하게 축재해놓은 재산을 전부 몰수해서 황실 내탕금으로 충원했어

. 그 양은 청나라 20년 조세분이었다니... 자세한건 건륭제편에서 서술해놓은걸 봐라. 

여기서 가경제의 한계가 드러나는데 그 조세를 전부 황실 내탕금으로 넣어서 자기가 쓴거야. 

이를 백성들은 '화신이 죽으니 가경이 배부르게 먹었다’(和珅跌倒,嘉慶吃飽)'라고 비꼬았어. 

 

가경제 초기에는 정치에 의욕적으로 임해 건륭제 말년에 만연했던 관리의 부정부패를 뿌리뽑으려 했지만,

관리들은 보고서를 조작해서 부정부패를 일삼는 등 이런 뿌리에 손을 대지 못하고 지지부진 했어.

건륭제 말년의 부정부패를 많이 잡아냈지만 예전 강건-옹정의 기풍은 더 이상 옛날 얘기가 됬을 뿐이었지.

철권으로 부정부패를 뽑아낸 옹정제 뒤의 황제들은 옹정제 만큼의 카리스마나 근면함이 없었기 때문에

청나라가 망할때까지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하고 청나라는 몰락의 길에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었어.

 

(3)제국의 내란

 

강희-옹정-건륭의 치세와 고구마 같은 새로운 작물의 도입, 성세자정성법으로 고정된 세금 등으로 청나라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어.

1722년에 1억 5천명이던 인구가 1790년에 3억명을 돌파할 정도로 세월은 50년을 겨우 넘었지만 인구수는 2배로 폭등하기 시작했어.

새로운 농경법이 개발됬지만 수요량은 따라가지 못하니 당연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어.

거기다가 관리들의 착취로 일반 백성의 생활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져 갈 수 밖에없었어....

 

1)백련교의 난

 

백련교란 도교랑 불교랑 혼합한 민간 신앙이었는데, 석가모니 이후에 새로운 미륵불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거라는 교리를 갖고 있는 종교였어. 

백련교는 남송(南宋)시절에 나타나 원(元) 말에는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는 등 상당히 큰 밀교(密敎) 단체였어. 

건륭제 39년 왕륜이라는 자가 백련교를 규합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항하지만 재빠른 대응으로 금방 진압이 되지. 

하지만 가경제가 즉위하고 백련교의 난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어 

호북(湖北), 사천(四川), 섬서(陜西)같이 산으로 둘러쌓여 가난한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어 부패한 군대였던 청군은 반란 초기에 진압에 애를 먹었지. 

하지만 청나라 군의계속된 포위로 식량이 떨어진 백련교의 난은 실패하게 됬어. 

 

그리고 운남(雲南)성에 거주하던 묘족들도 반란을 일으키게 되.

이들은 청나라 관리들에게 인종차별을 당하며 심한 착취를 당하는데 백련교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난을 일으키지.

청나라 정부는 이 두 난을 진압하는데만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고, 백은 2억냥을 소비했어.

이는 청나라 정부의 몰락을 더욱 더 부채질하게 되지. 가경제는 자신의 죄를 쓴 죄기조(罪己詔)를 발표하지만 이는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야...

 

 

청나라 말의 관리 모습


2)계유지변


백련교의 난이 진압되고 8년이 지난 후 가경 18년 (1813년)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되. 

바로 백련교의 일파인 천리교(天理敎) 일당이 자금성(紫禁城)에 들어온 사건이야. 

천리교 두령인 임청(林淸)과 이문성(李文成)은 자금성의 환관을 매수해서 200명의 천리교도들이 자금성에 들어왔어. 

다행히 금군의 발빠른 대응으로 빠르게 진압당했지만, 반란세력이 황궁안에 들어온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어. 

가경제는 가을사냥에 나섰다가 하루만에 자금성으로 돌아왔지. 이 사건은 계유년에 일어나서 계유지변이라고 불려. 

 

 

청말의 만주 팔기 모습 

 

계유지변을 제외하고 위의 두 난을 볼 때 청나라 군의 모순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했어. 

원래 청나라는 만주족 정부로 이들의 병력 근간은 만주 팔기인데, 위의 두 난에서는 만주 팔기의 역할은 거의 없었어. 

팔기군은 강희제 시절의 삼번의 난 이후에 제대로 된 싸움을 한 적도없고 강건성세 시절 향락에 빠져 이미 군인의 기능을 잃어버린지 오래였지. 

 

어느 정도냐면 백련교도의 난을 막던 장군이 만주 팔기군은 보내지 말라고 할 정도였어.

만주 팔기군의 부패의 한 일례로 팔기군은 '추열(秋閱')이라고 가을에 매년 정기적으로 군대 사열이 있었는데, 

딱 그 때만 군복을 입는 이가 많았다고 해. 당시의 군복은 갑옷과 투구이므로 상당히 무거웠는데

그마저 종복들에게 가져오라 시키고 거기서 갈아입고 형식적으로 사열을 받는것이 일반적이었다는거지...

 

팔기군은 군대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반란의 진압에 가장 큰 공을 세운것은 한족으로 이루어진 녹영(綠營)군이었어. 

청나라 황제는 만주 팔기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를 통해 벼슬길을 오르는거 조차 금지했는데 

결국 향락에 빠진 만주족들은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이 의무가 한족들한테 지워지게 된 것이지... 

만주족의 근간이었던 팔기군대기능의 상실은 청의 몰락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수 있어.

 

(4)가경제 치세의 말기

 

가경제는 건륭 말기의 부패를 일소하고자 정력적으로 정치에 임했지만 관리들의 기풍을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어

. 10년에 걸친 내란을 막는데 엄청난 은이 소비됬고 가경제 시절부터 들어온 아편은 막대한 양의 은을 국외로 유출 시키지.

당시 청은 세금을 은으로 걷었는데 은의 숫자가 줄어들면 그 가치가 늘어나지... 국가에서는 세금을 늘리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부담은 커질 수 밖에 없지...

 

은 본위 납세 체계에 실제로는 동전으로 세금을 냈는데 아편 무역에 따른 은값 폭등으로 실질적으로는 세금이 늘어났어.

세금을 내지 못한 백성들은 관리들이 가혹하게 추궁하고 이에 야반도주하는 백성들이 늘어나며 이 

유민들은 반란군 세력에 들어가게 되므로 악순환의 연속 이었지. 관리들은 반란군을 잡는다는 명목하에 백성들의 가택을 자주 수색했는데, 

이 때의 횡포를 막으려면 관리들에게 뇌물을 써야되는등 백성들의 관리에대한 증오는 날이 갈수록 증가했지.


건륭제 시절 매카트니의 방문 이후 가경 23년에 영국에서는 애머스트라는 사절을 보냈는데 

애머스트가 매카트니 처럼 삼궤구고두를 거부했는데 북경 조정에서는 즉시 퇴거하라는 조치를 받았어. 

이를 보면 청 정부에서도 예전과 같은 여유가 없어졌다는 사실과 북경 조정에서도 아편을 유입하는 

영국에 대해서 굉장히 안 좋게 보고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해.


삼궤구고두를 하는 청나라 사람들

 

가경제는 치세 25년에 황제 별장인 피서산장에서 별세하게 되고 황위는 저위 비건법에 의해 

2황자 민녕이 즉위하게 되지(일설에는 가경제가 사냥에 나갔다가 벼락을 맞고 죽었다는 얘기도있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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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宣宗) 성황제(成皇帝) 도광제(道光帝) 재위(1820년 ~ 1850년) 애신각라 민녕(愛新覺羅 旻寧)

 

清 佚名 《清宣宗道光皇帝朝服像》.jpg

 

청나라 8대 황제로 선종(宣宗)이라는 묘호를 받았어.

선(宣)이라는 묘호를 받은 역대 군주들은 ㅆㅅㅌㅊ까진 아니더라 ㅅㅌㅊ~ㅆㅅㅌㅊ 이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업적을 남긴 군주들에게만 줬어.

예를 들어 고대 주(周)의 중흥(中興)을 이룬 선왕(宣王)이나 

전한(前漢)의 중흥을 이끈 선제(宣帝), 

당의 중흥을 이끈 선종(宣宗), 발해의 해동성국을 이룬 선왕(宣王), 

고려의 전성기 중 한 군주인 선종(宣宗)등등 꽤 잘나가던 군주들이 받은 묘호였어 (조선 선조(宣祖)는 ㅄ임). 

하지만 청나라 선종은 뭐... .아편전쟁의 패전으로 열강의 중원대륙 침략을 가속화한 안습한 황제였어. 

황제 자신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안습한 시대에 치세한 황제지... 

 

(1) 도광제의 즉위

 

도광제는 가경제의 차남으로 이름은 민녕(旻寧)이었어. 가경제가 민녕을 지목하게 된 계기가 참 재미있어 ㅋㅋ. 

가경제 시절 계유지변 기억나냐? 기억안나면 위에가서 다시 봐라 ㅋㅋㅋ 

 

천리교가 환관을 매수하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자금성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당시 자금성안에서 책을 읽고 있던 민녕은 밖에서 소란이 난걸 보고 밖으로 나갔어. 

천리교도가 들어온걸 확인한 민녕은 금군을 소집하고 자신은 총을 들고나와 그 자리에서 천리교도 2명을 쏴죽인 후 

사람을 내전에 보내 후궁들을 안심시켰어.

피서 산장에 요양가려다가 자금성에 난이일어나서 돌아온 가경제는 민녕의 일처리를 득고 차기 황제로 삼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대.

 

가경제가 25년의 치세 후에 죽고 2황자 민녕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도광제야. 

도광제는 상당히 검소했나봐 황궁예산은 20만전을 넘기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낡은옷을 입었어. 

이에 관리들은 일부러 낡은 옷을 사서 입었는데 낡은옷은 새 옷의 2배의 가격을 받는 등 웃지못할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어.

근데 검소하다는 황제가 자기 무덤비에 수많은 은을 썼다는게 함정 ㅉㅉ

 

(2) 제국을 좀먹는 마약 아편


당시 유럽에서는 청나라의 물품 도자기, 차, 견직물등은 없어서는 안될 물품이었다. 

반대로 유럽에서 생산되는 면직물과 모직물을 주로 수출했는데 청에서는 이를 수입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유럽에서는 일방적으로 은이 빠져나가게 되고 은 값의 폭등으로 경제적 문제를 일으키게 됬어.

특히 영국에서는 당시 미국 독립전쟁의 전비 유출과 산업혁명의 자본축적을 위해 은의 유출을 막는 정책을 시행했어.

청 조정은 공행(서양물품을 취급하는 상인들의 조직)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고 무역을 제한했어. 

영국의 동인도회사에서는 매년되는 무역적자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편을 청나라에 수출하기에 이르렀어. 


아편을 피고있는 중독자들의 모습

 

1800년(가경 5년)에 약 4천 570상자의 아편이 청나라 내로 들어왔고, 16년 뒤인 1816년(가경21년)에는 5천 106상자의 양의 아편이 들어왔어. 

그 무게는 약 27만톤으로 엄청난 수의 아편이 들어온거지...

도광제가 즉위하고 4년뒤에는 아편의 상자는 1만 2천 434상자가 들어오게 되고 이는 금액으로 약 973만 달러의 양이었어.

 2만 상자에 육박할 때는 1830년(도광 10년) 이었고 통계에 이르면 1만 9천 965상자로 금액으로는 1천 374만 달러에 육박했어...

아편 전쟁 당시에는 4만상자가 넘었다고 하니 정부에서 이를 무시한다는것은 말도 안됬지.

 

아편에 따른 은의 유출은 경제 문제, 사회 불안을 야기했고 이는 즉 치안 문제로까지 이어졌고 

점점 더 청나라 백성들을 마약 중독자로 만들면서 사회는 점점 정신적으로 쇠약해져가고 있었지. 

 

조정에서는 아편에 대한 은 유출에 대해 두 가지 의견으로 나누어졌는데, 

이는 노곤(盧棍)과 허내제(許乃濟)의 이금론(弛禁論)과 황작자(黃爵滋), 임칙서(林則徐)등이 주장한 엄금론(嚴禁論)이 바로 그 두 주장이야.

 

이금론은 광동에서의 아편 무역은 더 이상 금지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현실이고,

수입량은 2만상자를 넘어 섰으며 아편을 흡음 하는 사람들은 모든 계층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어.

아편을 파는 사람에 대한 처벌은 표면상에 무거웠지만 피우는 사람에 대해선 손을 놓고 있다는 사실이 당대의 현실 이었지.

  이들 주장의 중점에는 은의 유출이었지 백성들의 건강과 기풍은 아니라는 점이지. 

이들은 서양 상인과의 아편 결제는 은(銀)으로 결제 할 수 없게 만들고 국가에서 아편을 재배해 보급하자는 것이 이금론의 주장이었어. 

이 주장의 결점은 아편을 피우는 자는 한가하고 방탕한 자로 몸을 망쳐도 자업자득이므로 내버려 둬야 된다는 주장이 있다는 점이야. 

대신에 군인이나 관료의 자제등은 피우지 못하게 해야 된다고 주장했어. 

이는 자신들에 속한 계층만 아편의 악습에 젖지 않아도 되고 일반 백성들은 돌볼 필요가 없다는 거에 문제가 있었어.

이는 만백성을 돌봐야 되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취하기 힘든 정책이었지.

 

엄금론은 은의 유출보다는 백성들의 건강과 사회 기풍의 퇴폐에 주목했었어. 

특히 호광성 총독을 지낸 임칙서는 아편을 피우는것은 백성이 전멸하고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어.

임칙서는 1년안에 아편을 끊지 못하는 자들에게 사형을 내리자고 주장했는데,

이는 국가에서의 과감한 결단이 없으면 절대로 아편을 끊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도광제는 이 주장을 만족해하고 임칙서에게 자금성에게 말을 타게 해주는 '자금성 사기(賜騎)'가 허락되었어. 

도광제는 1839 년에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봉하고 광동으로 보냈어. 

그리고 아편흡입엄금장정(嚴禁阿片烟章程) 39조를 반포하여 아편의 단속을 시작했어. 


임칙서

 

 

광동성에 도착한 임칙서는 황제의 결단으로 아편을 파는 사람, 피우는 장소를 제공하는 사람, 피우는 자 역시 사형에 처하고 창고에 저장한 것을 관에 제출하여 숨기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했어. 

그에 대한 서약서를 특정 기한에 제출하라고 말했지. 

공행측에서는 임칙서의 경력이나 정보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흐지부지하게 넘기지 않을거라 알고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여타 다른 청나라 관리들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했지. 

공행측에서는 영국 상인을 상대로 흠차대신이 어떤 성과가 없으면 임칙서의 체면이 서지 않으므로 진지하게 고려해야된다고 영국측에 설득했지. 

영국 측에서는 아편 1037상자를 공출해서 임칙서에게 뇌물로 주려고 했나봐. 

하지만 임칙서는 이 뇌물에 넘어가지 않고 아편상을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할 뿐이었어.

서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임칙서는 청나라내의 가옥을 영국인들에게 빌려주는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병사들로 이들의 집을 포위하고 퇴거하라고 요구했지. 영국상인들은 이 곳에서 농성할 생각으로 버텼지만

결국 굴복하고 임칙서는 아편 20284상자를 반납했어. 그리고 임칙서는 이 아편을 전부 바다속으로 던져 버려



이에 영국상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부당하게 몰수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흠차대신의 권한으로 금수품을 몰수 한건 당연한 권리였어. 

대신에 임칙서는 아편 한 상자에 찻잎5근을 주었다고 해.

영국상인들은 광주의 이관에서 전부 퇴거하고 미국에도 같이 퇴거하자고 요청했지만 미국에서는 아편을 팔지 않았으니 이를 무시했지. 

영국을 제외한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서약서를 제출해서 청 정부에서는 아무런 제재를 취하지 않았어. 

영국은 해상에서 시위를 했지만 청 정부에서는 무시했어. 오히려 해상에서 굶주리고 있는

영국 배에 중국 어선이 식료품을 공급하는걸 눈감아 주는 등 청 정부가 합리적으로 행동했지..


아편전쟁 중의 해전

 

영국 상인 측에서는 아편을 팔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고 청 정부에 무작정 광주에 영국인 거주지를 만들어달라고했는데 

청나라측에서 받아들일리가 있나... 청 정부에서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영국의 배는 포문을 열었고 2시간 동안 포격전을 한 뒤 

영국측 배는 포탄이 떨어져 돌아갔고 청나라측의 피해는 29척중 3척만이 움직일 수 있었어...

임칙서는 북경조정에 승리를 보고했고 북경에서는 다 필요없고 영국 배를 다 쫓아내라고 강경책을 주장했지

 

(3) 아편전쟁


한편 영국 측에서는 쫓겨난 아편상인들이 파머스톤 외무부 장관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지. 

영국 정부측에서도 아편은 대중무역에서 큰 흑자를 보고있기 때문에 이를 무시할 수 없었어. 

당시 총리였던 윌리엄 멜번을 수장으로 하는 자유당 내각은 청나라 원정을 결의 했고 의회에서는 

찬성 271표 반대 262표로 결국 가결되고 말았지. 군대는 중국에 가까운 인도에서 편제 되었어.

 

인도의 동양함대 원정군은

 

기함 웨즐리 74문, 콘웨이 28문, 엘리게이터 28문, 크루저 18문, 알제린 10문

동인도회사 무장선 4척

영국 본토의 블론드 44문 필라데스 20문

케이프타운에서 멜빌 74문, 모데스트 20문 콜럼바인 18문이 파견됬고

블렌하임 74문, 엔터프라이즈 18문의 군함이 파견됫어.

 

원정군 총 사령관은 해군소장 조지 엘리엇이 임명되었고 이는 무역 감독관인 찰스 앨리엇의 사촌형이었어. 

그리고 위의 군함 외에 9척의 수송선단도 출전해 싱가포르에 집결한 후 중국으로 출발했어.

이들은 광동으로 가지않고 주산열도로 향하였어

 

1,2차 아편전쟁의 영국군 진로

 

이들이 광동이 아닌 주산열도로 간 이유는 광동 방위가 임칙서에 의해 강화되고 이들은 서전을 승리로 장식해야했는데

광동으로가면 이겨도 큰 손해를 감안해야했다는 거지. 주산열도에는 정해삼영(定海三營)이 있고 수비병 2천명이 있었지만, 

이들의 실전경험은 전무였고 훈련 역시 받은적이 거의없는 잡병이었어. 

영국측의 피해는 전무했고 청나라 측은 정해진의 총병(부대장)인 장조발이 전사하고, 

정해진현인 요회상은 성 북쪽의 보타사 연못에 몸을던져 순직했어. 수비병 주민들은 모두 대피했고.

 

이사진은 2차 아편전쟁 당시다 그냥 청나라군의 처참함을 보여주려고

 

주산을 점령한 영국군은 천진(天津)으로 향했는데 이는 북경조정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지.

왜냐면 천진은 북경과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직례 총동 기선(琦善)이 영국측과 교섭을 하러 갔어. 

이는 큰 사실인데 원래 청 조정에서의 관리는 절대로 외국인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는데, 

천진이 침공 받자 이 원칙은 단번에 무너졌지. 

영국측에서는 기선이라는  인물이 청 정부를 대표하는 자격을 갖고있는지 확인할 때까지 만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어. 

천조(天朝)의 국가라는 청나라 정부에게는 큰 굴욕이었지만 이는 나중에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청나라에게는 시작에 불과했어...

 

기선은 총사령관은 만나지 못하고 전권 부사인 엘리엇 대령만 만났을 뿐인데 이때 영국 측은 외무부장관의 서신을 기선에게 건냈어. 그 내용은

 

1. 흠차대신이 광동에서 몰수한 아편 대금을 배상할것

2. 영국의 무역 감독관이 받은 모욕을 사과할 것

3. 장래를 보장할 것

4. 연해의 한 곳, 그리고 몇개의 섬을 영국 국민의 거주 상업활동 장소로 지정할 것(홍콩을 염두에 두고있었다.)

5. 공생상인이 영국에게 진 빚을 청산 할 것.

 

하지만 청 정부는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 들지 않고 지방으로 돌리려고 애를 썼는데, 

청 정부가 기선을 보낸건 공포에 의한거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보낸 것이 아니었어. 

청 정부에서는 광동에서 교섭하자고 끈질기게 조르고 결국 영국측에서는 이를 승인했어.

청 정부 내에서는 일이 이 지경이 된게 임칙서의 잘못이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지. 

도광제 역시 군함을 보자 동요하기 시작했고 결국 임칙서를 파면하기로 결정했어...

 

하지만 영국측에서는 임칙서의 처벌을 바라는게 아니고 아편에 대한 배상과 사죄만 요구 했을 뿐이었지... 

양강 총독의 집사가 영국 함독의 제독에게 임칙서가 해임 됬다고 '경하할 일입니다'라고 하자 

제독은 '임칙서는 훌륭한 재능과 용기를 지닌 총독이었다. 애석하게도 외국사정을 모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해. 

임칙서는 영국인에게도 존경을 받는 관리 였지만 어리석은 청 정부는 아편전쟁의 책임을 임칙서에게 떠넘겼을 뿐이야...

 

영국군이 광동으로 내려가자 청 정부는 지금까지 정책을 180도 바꿨는데 임칙서가 조직한 해군 의병대를 해산시키고,

영국 함대의 진입을 방해하기 위해 띄어 놓은 뗏목 등을 제거했어. 

1만명의 병사는 8천명으로 줄이고 전부 광동성으로 병력을 후퇴 시켰기 때문에 일선에 있는 병력은 2천명 뿐이었어

 

광동에서 영국 특명 전권대사는 외무부 장관에게 받은 훈령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는데 이 요구사항은 아래와 같아.

 

1. 영국인이 받은 모욕에 대한 사죄와 장래에 대한 보장

2. 몰수된 아편 대금의 보상, 원정에 소요된 경비 보상

3. 공행의 부채 상환을 청 정부에서 보증할 것

4. 외양에서 아편 밀수를 이유로 영국 상인에게 누를 끼치지 말것

5. 수출입세를 일정하게하고 무분별하게 증감하지 않을 것

6. 무역선에 부과되는 번잡하고 과중한 경비의 경감

7. 영국인의 청원서는 지방 관헌을 거치지 않고 북경 황제에게 직접 전달될것(...)

8. 복건, 절강, 강소, 직례 등에 여섯 항구, 또는 그 이상의 무역항을 영국인에게 개방할 것

9. 북경에 사관을 개설하고 개항장에 영사를 주재시킬것

10. 개하장에 마카오 방식의 외국인 거류지를 설정할 것

11. 거류지에는 영국인 가족도 거주하게 할 것

12. 개항장에서 발생한 영국인의 범죄는 영국 관리에 의해 처리하고 청나라 관헌은 관여하지 않을것

13. 개항장에 교회를 건설할 것

14. 공행 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못하면 행상을 증감하지 않을 것

15. 영국이 특별한 사법권을 가지는 도시 또는 항구를 할양할 것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 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어. 특히 15번의 요구는 청나라 측에서 큰 굴욕이 아닐 수 없었지.

조약을 체결한 기선은 15번 제안에 대해 암묵의 양해를 구했지만 영국은 이를 거부했어. 

이를 안 도광제는 노발대발하고 교섭 중단을 명했어. 영국측에서는 요구가 거부되었다는 이유로 무력시위를 시작했는데 

기선은 주둔해 있던 2천명의 수비병을 600명으로 줄였어. 가뜩이나 화력에 쨉도 안되는데, 병력까지 줄이면 어떻게 되겠냐? 

당연히 씹쳐발렸지 청군은 292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냈지만 영국군은 사상자는 없고 38명의 부상자만 냈을 뿐이지

 

 

 

 

기선이 보기에는 영국군이 광주까지 쳐들어 올것이라고 걱정을 했어. 

영국측에서는 원래 홍콩과 주산열도를 같이 할양하기로 했는데, 

주산열도를 반환하고 점령한 사각요새에서 철수한다고 하고 요구를 재고하라고 몰아 붙였어. 

사실 주산열도는 기후가 좋지 않아 무역기지로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가 있어서지 애초에 포기할거 그냥 청 정부 명목이나 살려주자는 식이었지.

하지만 북경 정부에서는 세폐는 가능하나 할양은 불가능 하다는 입장이었어.

 

영국군이 요구한 기한이 끝나고 정원 포대에서는 광동해군 총사령관인 수사제독 관천배가 있었지만 그 휘하의 병사는 200명 밖에 없었던거야. 

기선이 영국의 환심을 사기위해 수비병을 후방으로 이동 시켰기 때문이야 결국 청나라는 10명의 전사자를 내고 수비병은 전부 도주했지.

 

영국에서는 계속 광주(7시)로 진격하고 청나라에서는 새로운 고관을 보냇어. 

참찬대신 양방은 20년 부터 제독 자리에 있어 경험을 높이사 전투에 보냈는데 이상한 미신에 빠져있엇어... 

영국군의 포가 정확한 이유는 적 진영에 주술사가 있어서라고 믿어 자기가 신뢰하는 주술사에게 힘을 약화 시키는 법이 무엇인지 물어봤대. 

그 주술사는 여자가 쓰는 요강의 뚜껑을 벗겨 적이 있는 쪽으로 오줌을 누게하면 적의 주술이 깨진다는 희대의 개소리를 내뱉지. 

뭐 전쟁의 결과는 굳이 여기서 말할 필요가 없을거야

 

임칙서는 절강으로 떠나고 제독 관천배도 죽었으니 이미 광주에는 지도할 지도자가 없었어.

동원된 다른 성의 병사들 4만명은 도처에서 약탈과 폭행을 하며 주민들이 오히려 다른 성의 병사들을 습격했지. 

당시 광주의 상황은 막장의 끝을 달리고 있던거야.

 

 

주술의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안 양방은 영국군과 새로운 조약을 맺기로 결정하지 이것이 바로 광동화약이고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아.

 

1. 대신과 장군 및 외성병(外城兵)은 깃발을 들지 않고 광주성을 나와 6일 이내에 성밖 60마일 지점으로 물러날 것

2. 청 정부는 영국군에게 600만 달러를 지불하고 100만 달러는 27일 전에 지불하고 잔액은 1주일 내에 지불할 것

3. 전액이 지불되면 영국군은 호문 밖으로 철수하고 점령한 요새들을 모두 반환하나 양국간의 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 청나라는 요새의 방비를 강화하면 안될 것

4. 청나라 측은 외국 상관의 약탈 및 스페인 선박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 할 것

5. 광주 지부에 전권을 위임 할 것

 

광동 화약이 성립될 무렵 런던에서는 주산열도의 포기하고 점령한 땅에서 물러난다는 결정이 

대영제국 정부의 수치라 여기고 전권 부사인 찰스 앨리엇 대령의 파면이 결정되고 새로운 전권대사가 임명됬어

.청나라 정부에서는 이 전쟁을 통해 청나라 군이 얼마나 약체인지 영국군에 상대가 되지않는지 파악하고 지방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랬어. 

 

 

영국이 전권대사를 해임하고 새로운 전권대사를 임명한다는 것은 청나라의 완전한 굴복을 받겠다는 영국 정부의 입장이었어. 

영국군은 주산열도를 다시 재점령하고 남경까지 진군했어.

영국군의 입장은 백날 광주를 공격해봤자 청 정부에서는 눈 깜짝하지 않을 것이니 중요한 도시를 점령하여 청 정부의 간담을 서늘게 하겠다는게 목적이었어. 

영국군을 막기 위해 이미 엄청난 전비가 소모되고 은 유출도 중대한 문제이지만 이러다가 나라가 망하겠다는걸 깨닫은 도광제는 굴복하기로 했어. 

그리고 맺은게 불평등 조약 남경 조약이지.. 

남경 조약의 내용에는 배상금 1200만 달러, 아편대금 600만 달러, 공행 채무 300만 달러 도합 2100만 달러가 청구되고 

아래는 남경조약의 13개조 내용중 일부 내용이야



1.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2. 광주, 하문, 영파, 상패, 복주 등 5개의 항구를 개항할 것

3. 개항장에 영사를 지을것

4. 전비 배상금 1200만 달러 아편 대금 600만 달러를 지불할 것

5. 행상 즉 공행과 같은 독점 상인을 폐지할 것

6. 수출입에 대한 관세를 제한할 것

7. 청나라 영국의 두 나라의 관리는 대등한 교섭을 가질 것


남경조약은 홍콩의 할양과 영국과의 무역은 최혜국 대우로 해주는 불평등 조약을 맺기 시작했어.

이를 계기로 다른 열강들과 청나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게되고


이렇게 천자의 국가인 청나라는 강제로 국제 무대로 끌려나오게 됬어

 

여기까지가 1차 아편전쟁의 과정이야

 

존내게 힘들다 씨발 내가 주말에 뭐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래도 패왕별희 보면서 써서 좋은영화 한편 봣다고 생각한다 개새끼들아

 

마지막으로 나 짱깨 좆선족아니다 ㅡㅡ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육군 병장출신이다

중국 빠도아니고 그냥 역사는 다좋아한다 중국 역사뿐아니라 서양역사 중동역사 등등


다음 이야기는 도광제 말기와 함풍제 태평천국운동까지 쓸거 같다 수고~

 

3줄요약

 

1. 인종 가경제 즉위후 청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함

2. 선종 도광제는 아편전쟁을겪음

3. 청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함



이번글 안가면 낼올려야지 ㅃ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