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ilbe.com/2269594636 - [정보] 명나라 F4에 대해서 간단히.araboza

http://www.ilbe.com/2274160398 - [정보] 청나라 전성기 강건 성세(康乾 盛世)의 군주에 대해서 .araboza -(1) 강희제

 

 

하이 일게이들아 어제 강희제에 대해 쓴 글 많이 부족해도 재밌게 봐줘서 감사하다. 

그리고 어떤 게이들은 드립좀 자제하라고하는데 좀 자제해야겟당... 내가 봐도 재미가없어

근데 어떤새끼들은 노잼 ㅁㅈㅎ라고 하고 ... 어느 장단에 춰야되냐? 시발 몰라 내맘대로 쓸테니까

드립 노잼 뭐 노잼인 데로 보던가 ㅂㅂ

 

일단 글을 쓰기전에 동북아 3개 국가의 정치 체제를 비교하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 일본을 가깝지만 먼나라라고 표현하잖아?

 그 말은 지리적으로 가까운데 생활방식에서는 너무 차이 난다는것을 비유 한 거지.

동북아 역사의 정치권 구조도 세 나라가 비슷한듯 하면서 엄청난 차이점을 보였어.

일단 중국을 보면 강력한 황제권에 비해 신권은 너무 너무 약했어.

가끔 권신이 등장해서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조를 뒤엎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중국의 황제는 정말 범접할 수 없는 구름 속에 사는 그런 존재였지.

한국의 정치 체제를 보면 왕권과 신권의 조화가 이룬나라야.

가끔 조선의 태종이나 세조같이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 군주들도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역사에서는 왕은 신하의 의견에 휘둘리는 경우도 많았어.

일본의 정치 체제는 신권의 힘이 강력한 나라였어. 일본의 일왕은 6c~7c까지만 강력한 왕권으로 통치하고 8c 말 부터는 강력한 귀족집안인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약 100년 동안 일왕의 권력을 넘어 통치하고 12세기 말 부터 19세기 말까지는

무사집단의 수장 쇼군이 막부라는 새로운 정부를 건설해 나라를 통치했지. 한마디로 신권>왕권이었어.

 

이와 같이 세 국가의 정치 체제는 너무 달라서 같은 유교, 한자 문화권이어도 차이점이 노무노무 많았지....

 

이번 글은 중국의 황제권의 정점에 오른 황제 청나라 5대 황제 세종 옹정제(世宗 雍正帝)에 대하여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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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 헌황제(憲皇帝) 옹정제(雍正帝) 재위(1722년 ~ 1735년)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 胤禛)

 

Portrait of the Yongzheng Emperor in Court Dress.jpg

 

강건 성세의 중간 황제인 옹정제다. 묘호로는 세종의 묘호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세(世)라는 묘호를 받은 황제는 니들도 잘 아는 한 무제(武帝), 5대 10국 송나라 통일의 발판을 마련 했던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금나라 최고 전성기를 이끌던 세종(世宗)이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유치원생들도 다 아는 세종대왕이 있고.

세(世)라는 묘호에 담긴 뜻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영토를 넓혔다 라는 뜻의 묘호야. (나라 말아먹기 바빳던 명나라 세종은 왜 세종을 받았는지 의문)

 

시작해본다

 

(1) 옹정제의 즉위

 

강희제는 34명의 황자(皇子)를 두었는데 그중 2번째 윤잉(胤礽)만이 첫 번째 황후 효성인황후(孝成仁皇后)의 자식으로 유일한 적자였어.

원래 만주족은 장자 상속제가 아닌 능력있는 아들에게 직위를 물려주는 것이 전통이었는데,

유교사상에 심취 해있던 강희제가 다른 중국 왕조 처럼 황태자를 정해서 나라를 물려주는 것을 꿈꿔왔었어.

 2황자 윤잉은 강희제가 20세에 태어났는데 윤잉이 2살이 되자마자 황태자에 봉했어.

강희제는 윤잉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장영(張英)이나 이광지(李光地)등을 스승으로 삼아서 유교적 이상군주를 만들려고 노력했어. 황태자는 만주문과 한문 둘다 통달하고 기마 궁술도 뛰어난 장래의 촉망되는 황제의 감이 됬지.

 하지만 이대로 가면 강희제는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니들도 젊은나이에 나이많은 선생님들에게 둘러쌓여서 뭐하라, 뭐하지마라 그러면 빡치치 않겠노?

윤잉은 점점 비뚤어지기 시작했어... 윤잉은 자기랑 같이 놀 패거리를 만들어 놀러다녔는데 놀라면 뭐가 필요하겠盧?

돈이 필요 하겠지? 돈은 어디서 나오盧? 관리들의 청탁을 들어주면 나오겠지?

그러다 보니 황태자 당(皇太子 黨)이라는 거대한 정치 조직이 생겨나게 된거야.. 원래 전제 왕조 국가에서는 사사로히 당을 만드는것을 꺼려했엇어.

 왜냐? 왕에게 거역한다 이거지... 강희제는 당연히 눈엣가시 같았고 계속 황태자의 비행에 대한 고발이 강희제 귀에 들어갔어.

그걸 듣다못한 강희제는 황태자를 폐하고 강희제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

(강희제가 태묘에 황태자를 폐했다는 말을 할 때 울면서 얘기했다고함)

 

하지만 윤잉을 너무나도 사랑했었던 강희제는 황태자의 비행이 황태자의 잘못이 아니고

그 주변 환경때문에 그렇다고 판단하고 다시 태자를 복위 시키려고 생각했었어.

강희 48년 강희제는 윤잉을 다시 황태자로 세우지만 황태자 윤잉은 강희제 후궁을 건드리는등 전혀 변화하는 모습이 없었고

강희제를 몰아 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자 황태자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냉궁에 유폐시켜버린 뒤

다시는 윤잉에 대해 입을 여는자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를 내렸어.

 

 

황태자가 폐위되자 황자들은 자기들의 황태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강희제에게 뒷공작을 했지

그 중 가장 유능했던 황자 들이 4 황자 옹친왕 윤진, 8 황자 염친왕 윤사(胤禩), 14 황자 순군왕 윤제(胤禵)였어.

그 중 가장 강희제가 마음에 들어했던 황자는 14황자 윤제 였는데,

윤제는 티베트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만리장성을 세우는 중책인 무원대장군과 병부의 지휘권을 줬어.

8황자 윤사와 14황자 윤제는 손을 잡고 파벌을 만들자 4황자 윤진 역시 파벌을 만들었지.

8황자 윤사는 뒤에서 황자간의 이간질을 조정해 강희제의 눈밖에 났지만

4황자 윤진은 자기 세력을 키우긴 했지만 정치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무관심한 태도인 척 관망하고있었지.

 

1722년 강희제가 위독한 상황이 되자 황자들은 강희제가 누워있는 침소로 모여들었어.

강희제는 융과다(隆科多)를 불러 자신의 마지막 유조를 전하지. 

그 유조는 전이우사황자(傳位于四皇子) 즉 황제 자리를 4황자 윤진에게 물려 준다는 거였지.

티베트를 정벌한 군공을 세우고 무원대장군의 직위를 받은 윤제는 뒷통수를 맞은거 같았어..

황자들은 유서를 확인해보지만 반발했지만 결국 황위는 4 황제 45살의 윤진에게 돌아갔고 이가 바로 옹정제야.

 

( 일설에는 傳位十四皇子가 傳位于四皇子로 십(十)자를 융과다가 어조사 우(于)로 바꾸어서 옹정제가 즉위 했다고하지만 사실이 아니야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90501031632032002 중국 정부에서 강희제의 유서를 공개 했는데

유서에는 "제4황자 옹친왕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사려가 깊으니 짐이 생각하건대 필히 대통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다.

고로 짐이 죽은 후 짐의 뒤를 이어 즉시 황제의 자리를 잇도록 하고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다가 27일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새 황제의 즉위를 만천하에 알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알게 하라." 라고 쓰여있었지) 

 

 

 

옹친왕 시절의 옹정제

 

 

(2) 비정한 권력자 옹정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옹정제는 형제들의 돌림자 였던 윤(胤)자를 같은 발음인 윤(允)으로  고쳤어.

왜냐면 황제의 이름에 들어간 글자는 언급해서도 일반인이 써서도 안되는 당시의 법이 있었기 때문이지.

옹정제는 자신과 대립한 형제들을 한명 숙청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우대해 주는 척 했어.

자신과 대립했던 8황자 윤사에게는 염친왕을 13황자 윤상에게는 이친왕의 작위를 내렸어.

친왕(親王)이란 황제를 제외한 황족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작위야.

 

염친왕의 작위를 받은 8황자 윤사에게 측근들은 축하의 인사를 건냈지만 윤상은 우울한 표정으로

'축하는 무슨... 곧 죽을 지도 모르는데'라고 말한거야 근데 아무도 모르면 다행이지만 이 말이 옹정제의 귀에 들어갔어...

옹정제는 '이 놈 꼬투리를 잡아서 한명 숙청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겉으로는 8 황자 윤사에게 형제의 예로 대우 했지만 윤사에게 밀정을 붙여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지.

윤사는 강희제의 능을 공사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윤사 생각에 '황제는 검소하니까 최대한 검소하게 해야겠다ㅋ' 했지만

'옹정제는 선제의 능을 건설하는데 돈을 아끼다니 불효네 ㅅㅂ'라고 말했어

 

어떤날은 목장의 업무를 맡겼는데 윤사가 보기에 너무 쓸데 없는 말이 많아서 말을 좀 줄였더니

 옹정제는 '강희제가 하던방식이 사치스럽다고? 게다가 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상관없는데?'라고 윤사를 나무랐어.

윤사는 이걸 해도 욕먹고 저걸 해도 욕먹으니까 기가 팍 죽었지 그 다음 업무는 내무부의 인원 관리 였는데

 자포자기 심정으로 인원을 대폭 줄이니까 쫓겨난 인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다가 진전되는 사건이 있었지.

 

 8황자는 뭐라 해도 욕먹으니까 니가 선동했지? 물어도 네 네 하니까 옹정제는 더 약이 올름...

 결국 옹정제는 윤사의 친왕 작위를 박탈하고 옹정제는 윤사에게 강희제가 훈계를 내린 조서를 보여달라고 해.

하지만 이 조서가 공개되면 강희제나 자기가 후대에 불명예가 되므로 불타버렸다고 하지. 옹정제는 너 구라치지? 라고 하니까

윤사는 '제가 거짓을 아뢰면 일가가 천벌을 받을것입니다'라고 답을해.

여기서 옹정제는 꼬투리를 잡아 ' 아니 일가는 우리 황가인데 니가 거짓말을 하면 나까지 천벌을 받는다는거야?'라고 하며

윤사의 황족 직위를 박탈하고 독방에 감금 시켜버렸어.

이에 윤사는 ' 아 요즘 밥도 잘 안넘어갔는데 이제 먹다가 뒤져버릴란다~'라고 말을해 쿨가이 ㅍㅌㅊ?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에 열받은 옹정제는 '닌 황족이 아니니까 이름을 뭐라고 불러줄까 ㅅㅂ아?" 하니 윤사는 '아키나라고 불러주십쇼'라고 말을해 . ㅋㅋㅋㅋㅋㅋ

 여기서 아키나란 만주어로 '개'라는 뜻이야. ㅋㅋㅋ 결국 윤사는 죽을 때까지 독방생활을하지

 

옹정제와 사이가 나빳고 8황자 윤사와 베프 먹었던 9황자 윤당(胤禟)역시 박해를 받았는데 윤당은 '사스헤'라고 불렸어.

사스헤는 만주어로 '돼지'라는 뜻이야 결국 9황자 윤당역시 옥에서 죽었고 그 둘을 따랐던 수많은 관리와 추종자들 역시 비슷한 박해를 받았어

 

옹정제의 친동생이자 황위 자리 경쟁자 였던 14황자 윤제도 황제의 박해를 받게 되는데, 둘은 10살 정도 차이나고 사이가 안좋았어.

 윤제는 청해를 평정 했기 때문에 수도를 돌아올 때 개선장군의 의식을 하는데 수도에 이르자 사자를 파견해 개선행사 의식을 물어봤어.

 이에 옹정제는 ' 미쳤나... 천자에게 한마디 상의도없이 개선행사? 아직 아버지 돌아가신걸 잊었나?'라고 화를냈어.

 윤제는 옹정제를 '형제'로서 만나려고 했지만 옹정제는 '신하'로서 만나려고 했던거야.

윤제가 옹정제를 만나 배복하지 않자 황제의 시종이 억지로 윤제의 얼굴을 땅에 쳐박게 했어 .

이에 윤제는 '이게 개선장군을 대하는 태도인가?'라고 화를내니 옹정제는 '그 따위 말투가 천자에게 할 말투냐?'라고 반문 했지.

14황자 윤제도 강희제의 무덤을 수호하라는 명분하에 감금 됬고 아들인 건륭제에 의해 풀려나게되.

 

팔기 갑옷을 입은 옹정제(팔기갑옷 멋있다 하악 밀덕아니다 씹새들아 ㅗ)

 

옹정제의 즉위를 도왔던 신하였던 연갱요(年羹堯)와 융과다 역시 숙청하는데, 티베트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연갱요는 옹정제의 신임을 받자 건방지게 행동을 하게 되.

하루는 옹정제와 같이 군사들의 훈련장면을 보는데 옹정제가 ' 날이 더우니 군사들보고 갑옷을 벗으라'고 말했는데 군사들은 벗지 않고 서있었대.

 잘 못들은 줄 안 옹정제는 2번정도 말을 했지만 갑옷을 벗지 않았대.

그러다 연갱요가 '황상께서 갑옷을 벗고 쉬라고 하시니 그렇게하라' 하니까 갑옷을 벗은거야.

이에 자존심 상한 옹정제는 평소에 건방졌던 연갱요를 숙청하게 되지. 융과다는 8황자 윤사와 다시 접촉을해 군주 기만죄로 숙청하게 되지.

 

자신과 대립했던 형제와 자신을 황위에 올리는데 큰 공을 세웠던 공신들을 숙청했던 옹정제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13황자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보였어.

이친왕의 작위를 받은 13황자 윤상(胤祥)은 처음부터 옹정제를 지지하는 입장이고 옹정제의 말이라면 의심없이 따랐어.

옹정 8년 이친왕이 죽자 옹정제는 밥도 못먹고 잠도 못이룰정도로 낙담하게 되지.

그리고 유일하게 윤(允)자로 바꿧던 이름을 윤(胤)으로 다시 바로잡게 되. 이는 황제와 같은 글자를 씀으로써 엄청난 대우를 해준거야

 

 

(3) 군주로서의 옹정제

 

 

팔기군의 갑옷

 

옹정제 초기에 티베트 반란을 진압하는등 다소의 군사 활동이 있었지만 강희제나 건륭제처럼 원정을 나가지 않았어.

그리고 강희제와 건륭제 같이 강남지방을 순시하는 일도 없이 재위 내내 북경성안에서 정무보기에 바빳었다.

일단 옹정제가 한 일은 팔기군 체제를 손봤던건데, 팔기군중 일부만 황제소속이고 나머지는 다른 황족들이 기주(旗主)가 됬었어.

그런데 옹정제는 황족이 기주가 될 수 없고 자신이나 자신이 임명한 장군에 의해 팔기의 기주가 되게 만들어 권력을 집중하게 되.

그리고 군기처를 설치해 내각 제도를 개편하여 황권을 강화시키지. 

 

옹정제의 부지런함은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따라잡을 군주가 없었다.

당시 중국의 일상은 4시에 기상하고 6시쯤 관리들은 궁궐로 출근하고 7시쯤 일상이 시작되어 밤 7~8시쯤이면 전부 잠을 자는 그런 싸이클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옹정제는 하루에 4시간 정도 잠을 자면서 정무에 신경을 썼어.

그는 모든 관리들의 보고서를 황제만 쓸 수 있엇던 주필(朱筆) 붉은 글자로 하나하나 주석을 달아가면서 꼼꼼히 읽었지.

하루에 기본 30~40장의 보고서를 읽고 많으면 50~60장의 보고서를 읽으니 쓸데없는 미사여구나, 형식적인 문자를 쓴 관리에게는 호되게 꾸짖었어 ㅋㅋ

 물론 성의 없이 쓰면 바로 욕지거리가 날라왔지. 예를들어 '금수라도 니보단 낫겟다', '바보는 답이없다는게 바로 니놈이구나?', '배운것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만 존나게많네'라는 욕들ㅋㅋㅋㅋㅋ 이 답장을 주비유지(朱批諭旨)라 불리웠는데 나중에 112권의 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라는 책으로 엮었어.

하지만 이 옹정주비유지는 옹정제가 썼던 주필의 아주 극히 일부분에 불과 하다고 했어.

기록에는 황궁의 어느 방에는 종이가 산더미처럼쌓여있었다고 해. 옹정제 부지런함 ㅅㅌㅊ?

 

관리들은 감히 옹정제를 속이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관리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옹정제가 보고 받았기 떄문이야. 

한 일례로 어떤 관리가 마작을 했는데 패를 하나 잃어버려서 파토가 났거든?

그 다음날 옹정제는 그 관리를 불러 '어제 뭐했냐?'라고 물어봤대 도박을 싫어하는 황제를 알기에 잠시 머뭇 거렸지만

 관리는 '어제 마작을 하다 패가 잃어버려서 도중에 파토가났습니다'라고 하자 황제는 웃으며 '이 패가 어제 잃어버린거지?'라고 하며 패하나를 던졌대.

그걸 본 관리는 오금이저려 다시는 도박을 못했다고...

이 밀정 제도는 명나라에도 쓰였는데 옹정제 같이 유능하고 깨끗했던 군주가 쓰면 한없이 높은 능률과 부정부패 감시체계로 작용하지만 암군이 사용하게되면 여러 역효과가 나게 되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제였어.

다행히 옹정제는 잘 사용했지. 관리로서는 숨이 막혔겠지만 ㅋㅋ

 

  

책을 읽는 옹정제 

 

옹정제의 답변중에는 '나는 언제나 부지런하게 천하를 이끌고 신하들의 상주문을 하나하나 읽어 답장을 쓴다.

낮에는 정무를 지휘하고 밤이 되야 주위가 조용해 정신 집중이 잘되서 대부분의 상주문은 밤에 읽고 답장을 쓴다.',

 '내가 처음에 천자의 자리에 올랐을때 대신에 대해 몰라 재능을 파악하기에 어려웠다. 한 시도 쉴틈이 없었지만 천하를 다스리는건 중요하기 때문에 이 한 몸 아까워할 필요가 없다.', '내가 무리 하면 병이 걸린다고 걱정해주는건 고맙지만 병은 기분에서 생기는거지 일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일을 게을리 하면 기분이 나빠져 병이 더 악화되므로 더 열심히 일을 해야한다. 짐은 그런 의미에서 몸을 지키고 있으므로 걱정하지말라' ㄷㄷㄷ 부지런함 보소 ㄷㄷ;;

 나도 저렇게 살아야되는데 존내 게으름 ㄷㄷ.

 

옹정제는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송나라부터 천년동안 계속 이어져왔던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뿌리뽑으리라 마음을 먹어.

지금의 도지사와 비슷한 순무 직의 1년 봉급은 은 150냥이었지만 실제로는 수입이 20만냥 이었어 ㄷㄷ

봉급이 너무 적은것도 맞지만 그만큼 비리를 많이 저질렀다는거야. 그래서 옹정제는 모선귀공(耗羨歸公)제를 실시하게 되는데

 이 모선귀공제라는게 세금을 걷는거에서 일정량 더 걷는것은 인정하되 그 선을 넘으면 안되는 법이야.

옹정제는 각성의 지세(땅에 부과하는 세금)을 파악해서 적자가나면 그 지방의 관리가 자비로 손해를 메꿔야하는 제도야 ㄷㄷㄷ 

옹정제의 형제들도 세금을 메꾸기위해서 집안 가구등을 팔기도 했어.

만약 너무 심하다 싶으면 재산을 몰수하고 집과 같은 가구등은 경매에 넘겨 국고에 환원시키기도 했어.

그리고 억울하게 땅을 몰수당한 농민들은 확실하게 조사를해서 신분을 회복시켜주고 못된 지주는 사형에 처하는 등 확실하게 부정부패를 뿌리뽑지 

옹정제 전까지만 해도 횡령을 해도 그 비용을 메꾸면 처벌을 면했는데 옹정제는 그 횡령한 비용을 메꾸는데는

농민들을 착취하여 메꾸는것을 알아 채고 횡령 사실이 드러난 관리들은 곧바로 파직시키고 친척들의 재산까지 몰수해버렸어 ㄷㄷ.

횡령하다 걸려 자살해도 그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에 탐관오리들은 입닥치고 있어야 했지.

횡령금을 대신 배상해주는 제도도 없애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에대해 엄벌을 처했지.

 이처럼 옹정제 같이 ㅆㅅㅌㅊ 황제가 권력을 잡으면 깨끗한 사회가 가능한데 ㅄ황제가 잡으면 뭐 나라말아먹는거지 명나라 F4처럼...

 

서양 가발을 쓴 옹정제

 

옹정제가 한 업적중 가장 큰 것을 꼽자면 바로 '지정은제'의 확립이야.

 원래 쓰던 일조 편법은 과세 대상을 토지에 집중시키고 세금을 은으로 내는 제도인데, 명나라 말기를 지나고 청나라 대에 들어서자 여러 폐해가 나타났어.

지방의 유지들인 향신 계층들은 자신들이 내야 할 세금들을 일반 백성들에게 부과해서 이리저리 세금망을 피해갔지

 이에 강희제는 땅에 부과하는 세금 지세 1냥에 인두세인 정세 약간을 포함해서 지세와 정세를 합친 지정은제를 일부 성에서 실시했는데,

이를 확립시킨고 옹정제 때야 완성시킨건 건륭제야.  지정은제의 확립에는 옹정제의 역할이 정말 컸지

옹정제는 지정은제를 전국에 시행하려 했지만 향신 계층들은 촛불 좀비처럼 이래도 지정은제입니까? 옹정 OUT을 외치며 시위를 하고

주변 상인들에게 장사하지말라고해(민폐가 좌좀급 ㄷㄷ). 이에 이위(李衛)는 계엄군에 빙의해 전부 때려잡고 지정은제는 차차 전국에 퍼져나갔지.

 

청나라 당시 은괴인데 동전 1000개 정도의 가치

 

 

 

다음은 지정은제에 대한 일화인데 엔하위키에서 퍼온건데 재밌어서 ㅋㅋㅋ 읽어봐라

 


 

┌옹정 5년, 계주의 지주 서리 진순예는 지세를 납부하라고 재촉했지만 지방의 유력자들은 오히려 진순예를 탄핵했다.
하지만 옹정제는 진순예는 그대로 두고 지세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때려 잡았다.


 

향신, 즉 중국의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살고 있는 자 또는 향촌의 퇴직관리나 유력인사 등의 사회 계층들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실질적인 향촌 지배자였다.
 이들은 지세 납부에 계속해서 저항했는데 1272년 동광현의 지현 정삼재는 혀를 내두르면서 황제에게 이렇게 보고 하기도 했다.


 

"이곳의 악랄한 향신들이 온갖 구실로 관을 위협하고 지세를 내지 않아 백성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격노한 옹정제는 진상 조사를 철저하게 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향신들은 영향력이 워낙 커 관리들도 다루기가 힘든 존재들이었기에,
순진한 지방관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털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당시에 얼마나 지세 납부에 대한 향신들의 반응이 안 좋았느냐 하면,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 라는 말까지 퍼져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아예 향시의 시험에 나가는것을 거부하고, 누군가가 나가면 응시자들의 답안을 뺏어서 찢어버렸다.
호광 지역에서도 이들은 단압하여 지세 납부를 거부하며 관과 맞서면서 뻗댔다.


 

옹정제는 아주 단호하고 극렬하게 이에 대응했다.
응시생들이 단체 활동을 한번만 더 벌이면 영원히 응시자격을 박탈하겠다는 교지를 내리고,
산동 지방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천 4백여명의 공명이 모두 박탈되었다.
불이익을 주거나 벼슬길 자체를 아예 막아버렸고, 지세를 납부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체포해서 코렁탕을 먹였다.
이런 엄청난 대응끝에 향신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고, 지정은제는 확립될 수 있었다고 한다.┘

 

 

 (4) 옹정제의 단점 

 

옹정제는 형제들과 공신들을 아무렇지 않게 숙청하면서 역사학자들에게 비정한 독재자, 심하면 폭군이라는 표현을 받았어.

하지만 내 생각에는 당시에 옹정제의 즉위에는 여러 도전을 받았었는데, 이를 무마 시키려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좀 더 유한 방법을 썻던 후한의 광무제(光武帝)나 송 태조는 정말 ㅆㅅㅌㅊ로 자기를 견제할만한 세력들을 제거했지만,

옹정제의 경우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

하지만 이 위 문제보다 좀 더 사회에 크게 그림자를 드리운게 바로 문자옥(文子獄)이야.

 

문자 옥이란 책이나 글에 쓰여진 글자를 갖고 트집을 잡는 것으로 이는 이민족 정권의 한계였어.

이민족은 한족이 만(蠻)이라고 오랑캐 취급을 했는데 이민족 시기에는 이 만이라는 글자를 금지 하고 책에 쓰면 심하면 극형에 처하기도 했지

청나라도 역시 이민족이 세운 왕조로 이는 예외가 아니었지

강희제 당시에는 대명세 사건 등이 있었는데, 옹정제 시기에는 강희제시대보다 더 심한 문자 옥을 겪었어.

일례로는 옹정 6년 지방 향시에서 사사정(査嗣庭)이라는 감독관이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문구를 시험문제에 넣었는데,

이는 사서삼경 중 시경에 나오는 문구라 일반인이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

근데 옹정제는 유(維)랑 지(止)라는 글자가 자신의 연호였던 옹정(雍正)에서 윗 변을 뺀 글자라

 자신의 목을 치고 반란을 일으킨다 판단해 사사정을 감옥에 넣어 옥사시켜... 그 후 부관참시하지( 부관참시 해야할 사람은 따로있는데!) 

 

안보이니까 확대한다 維止-> 雍正

 

한림원 학사 서준(徐駿)은 폐하’(陛下)의 ‘폐’(陛) 자를 들개를 뜻하는 ‘폐’(狴) 자로 바꾸어 써서 삭탈관직

시켰는데 서준은 황제가 문자도 모르면서 도리어 트집을 잡아서 관리들의 입을 막는다고 비방하는 시를 써서 사형에 처했어

 

또 한 사건은 증정(曾靜)이라는 선비가 당시 절강 총독으로 있던 악종기에게

 '넌 악비의 자손인데 악비는 남송을 위해 이민족 국가 금을 막았는데 너는 청나라에 충성하는게 말이되냐?'라는 편지를 보냈어.

악종기는 증정을 붙잡아 옹정제 한테 보냈는데 옹정제는 청나라가 왜 중원제국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지 말로써 발라버리고 말지.

그리고 증정한테 누가 니한테 그딴 생각 갖게 만들었냐고 물어봤는데 증정은 명나라 말의 학자 여유량의 화이론에 영향을 받았다하여

 옹정제는 여유랑의 일족을 구족을 멸하고, 여유량의 시체를 파내어 부관참시해버려. 증정은 나중에 건륭제 시절에 사형을 받게되지.

 

그리고 신하들을 정치하는 부품으로 여기고 강희제와 같은 아량을 베푸는 모습을 찾기도 힘들었어.

백성들은 살기 편했지만 관리들에게는 숨막히는 시대였지 이러한 시대가 계속되다가 쌓이고 쌓여 

건륭제의 말년에는 관리의  부정부패가 한번에 터지게 되지.

 

옹정제는 강건성세의 군주 중 나머지 두명에 비해 13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통치하지만

그 기간의 정치는 공정했던 치세가 유지됬어 강희 옹정 치세에 쌓였던 국고의 은과, 사회 기풍은 건륭제 시절에 꽃피게 되고

서양에서 평하길 강희제는 플라톤 이상의 철인 정치(哲人 政治)의 이상적 군주 옹정제는 근면한 군주의 표본이라고 칭송받게된다 

옹정제를 이은 건륭제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게 되는데....

 

 

다음 황제 고종 건륭제

 

 

시발럼들아 존나 힘들다

 

3줄요약

 

1. 강희제가 죽고난뒤 황자다툼

2. 옹정제즉위

3. ㅆㅅㅌ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