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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하이!! 드디어 지겨운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바로 계절학기를 들으러간다 ^오^
씨발 어쨋든 전에 글 막썻다가 최근 시험기간이어서 안썻는데 오랜만에 써서 기쁘게 글을 쓰려고 한다. 재밋게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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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의 지도
송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운지 어언 100년이 지나고 송나라는 겉으로는 번영해 보였지만,
매년 요(遼)와 서하(西夏)에게 나가는 막대한 세폐는 송 정부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되기 시작하고,
송나라는 서하 와의 전쟁 이후에 중산층의 몰락으로 점점 빈부격차가 심해지기 시작한다.
이 빈부격차를 해소시키기 위해 신종(神宗)시절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신법(新法)을 시행함으로써
정부의 재정을 흑자로 돌리고 송나라의 위기는 해소되는가 싶더니 신법으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은 지주, 관료, 부유한 상인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구법(舊法)파와 신법(新法)파의 대립으로 여러 당쟁을 하면서 점점 송나라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내가 지금부터 할 얘기는 신종 즉위 50년 정도 뒤인 휘종(徽宗) 시절 얘기다.
송 철종(哲宗) 25살의 젊은나이에 죽고 아들을 낳지 못하여 그 후계자는 이 위태로운 송나라를 이끌어갈 주인이 누가 될지 조정의 시선은 그리로 몰려졌다
. 당시 재상이었던 장돈(章惇)은 '나이로 따지면 신왕(申王)이 위이고, 예율로 따지면 동모(同母)의 동생인 간왕(簡王)이 마땅합니다' 라고 하며
철종의 동복 동생인 간왕을 추천하기 시작하였다. 신왕이 나이가 제일 많았지만 실명했기 때문에 즉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율에 따라서 철종의 동복 동생인 간왕이 즉위해야 한다는 것이 장돈의 주장이었다.

송 철종의 어진
신종의 정비인 흠성황후(欽聖皇后) 향씨는 철종의 어머니인 흠성황후(欽成皇后) 주씨와 사이가 굉장히 나빳었다.
(향씨와 정씨 흠성황후 차이점은 한자 성(聖과 成)의 글자가 다르다)
흠성황후 향씨는 마치 철종이 죽고 다시 한번 주씨의 아들이 황제가 된다는 것이 마치 신종의 정비가 주씨인것처럼 느껴져 굉장한 불쾌했었다.
향씨는 '모두 신종의 아들인 이상 차별을 두면 안된다'라고 하며 신왕을 제외하면 가장 나이가 많은 단왕(端王)을 황제로 즉위시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단왕이 즉위하게 되니 이가 바로 송 8대 황제 휘종(徽宗) 이다.
휘종의 어진
휘종은 예술가로서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서화 실력은 굉장히 뛰어났었고, 특히 그는 회화쪽에서는 당대에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개발한 수금체는 호리호리하면서 약한느낌을 주지않고 깨끗한 느낌을 주어 훗날 금 황제 장종(章宗)이 매료될 정도로 굉장히 뛰어난 서체였다.

송 휘종의 문회도 당시 귀족상을 잘 보여주는 그림

송 휘종의 그림 2

휘종의 그림과 서체
에도시대 일본의 다이묘들은 휘종의 그림을 소장하지 못하면 수치로 여겼고 시문에도 뛰어나 시집이 100권이 있었다고 송사에 기록되었다.
그는 예술가가 되기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람이었지만 황제가 되기에는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부족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태평성대의 시기도 아닌 송나라가 망조가 들었던 때에 이런 사람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자아내기 시작하였다.
휘종은 당시에 지지되었던 신법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는 국고를 넉넉하게 하여 조정을 부유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그에게는 애민사상은 없었다.
그가 등용한 관리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배만 불릴 생각밖에 없었던 사람들 뿐이었다. 그가 등용한 대표적인 간신에는 채경(蔡京)이 있다.

채경
채경은 신종시절 신법파에 들어가서 수도권의 지사자리까지 올랐지만, 철종이 즉위하고 황태후 고씨(高氏)가 섭정을 하자
채경은 놀랄만큼 자기 지역의 신법을 폐지하였다. 이에 구법의 영수였던 사마광은 채경을 칭찬하고 채경은 승승장구 하였다.
철종이 나이가 차고 친정을 실시하자 채경은 호부상서가 되어 신법의 부활에 전력을 다하는 식이었다.
이 사실로 보았을때 채경은 일 처리면에서는 굉장히 우수한 사람이었지만,
대세에 따라서 일을 한다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인 신념이나 포부는 없다는 것이었다. 정치적인 사명감이 없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면 어떻게 되겠냐?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하는데 거기다가 일까지 잘해.... 그 능력을 백성들 착취에 쓰면 말도 못하겠지...
휘종이 즉위할 무렵에 채경은 항주로 좌천되어서 있던 상황이었다.
휘종은 예술 애호가 였기 때문에 여러 서화나 기암(이상하게 생긴 암석)등을 수집하기 시작하기 했다.
휘종은 서화에 눈썰미 있는 동관(童貫)을 오대 십국 시절의 남당(南唐)과 오월(吳越) 지방으로 파견하였다.
강남지방은 오호십국 이후로 화북지방의 경제력을 뛰어넘었고 수나라가 통일되었을때 수나라 정부의 재정은 강남지방이 대부분을 담당할 정도였다.
수 양제가 나중에 장안을 포기하고 강도로 옮겨간 이유도 강남의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남당은 남경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국가였지만 풍부한 재정으로 예술을 후원하여 송 말까지도 예술의 중심지였다.
휘종은 이를 알고 남쪽으로 환관 동관을 파견하였는데 동관은 거기서 채경을 만나게 된다.
채경 역시 서화와 시문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휘종은 동관과 채경을 총애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정치적 신념은 없고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착취하는것을 주저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휘종은 일방적으로 정치를 그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예술적 취미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채경의 추천으로 소주의 주면이라는 상인을 통하여 휘종에게 진기한 물건을 개봉으로 운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를 화석강(花石綱)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귀한 나무, 진귀한 돌등을 옮기는 일이었다.
이를 옮기는 일은 백성들에게 맡겼는데 특히 진귀한 나무나 진귀한 식물은 남의 집에서 강탈해오는 수준이었고,
돌을 옮길때는 만약 백성의 집이 방해가 되면 그 집을 철거하고 옮길정도로 백성들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요, 송, 서하의 영역 (노란부분은 청나라 전성기때의 영토)
이렇게 송나라가 이렇게 삽질을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국제 정세는 송나라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송나라의 오래된 숙적은 바로 연운 16주의 탈환이다 연운 16주란 5대 10국 중 후진(後晉)의 석경당이 요나라에 바친 영토였다.
이 부분은 현재의 북경 지방으로 중원의 완벽한 탈환을 목표로 하는 송나라의 사인(士人)들의 오랜 숙적이었다.
만약 휘종이 영명한 황제 였으면 연운 16주를 탈환하고 그 이상을 이루어 송나라의 대제국의 숙원을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휘종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요나라의 최 전성기를 이끌던 성종(聖宗)이 죽고 도종(道宗)을 거쳐 천조제(天祚帝)가 즉위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금(金)을 세우는 여진은 원래 요나라와 고려의 영향을 받고있었다.
여진은 원래 용맹하다고 알려져 '여진이 1만이 모이면 대적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부락단위로 있어서 요나라가 컨트롤 하기 쉬웠을 뿐이었다.
그러다 생여진(生女眞)의 한 부락인 완안부(完顔)에서 아골타라는 영명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여진부족을 통일하기 시작하였다.

금태조 완안 아골타
한편 동관은 휘종의 명으로 요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연경(燕京)에서 마식(馬埴)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동관은 그를 데리고와서 휘종에게 천거하였는데, 마식은 여진족과 손을 잡고 요를 치는 것을 추천하였다.
휘종은 이에 그게 찬성하여 여진족과 맹약을 맺는데 마정(馬政)이라는 자가 밀사로 금나라로 파견되었다.
마정이 맹약을 맺으러 갈 때 바닷길을 통해서 갔기 때문에 이 맹약을 해상의 맹(海上之盟)이라고 하였다.
금나라는 요나라와 송나라와의 동맹을 저울질하다가 천조제가 금 태조에게 보낸 문서를 보고 거슬린 금나라에서는 송나라와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해상의 맹에 따르면 송은 요의 남경(현재의 북경)까지 공격하고 금나라 군사는 장성을 넘지 않는 한도에서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송나라가 요에 바치던 세폐를 대신에 금에게 같은 양으로 바치기로 하였다.
송나라가 금나라로 사신으로 간 해 절강(浙江)에서는 방납(方臘)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호전의 무대가 되는 시기다.
송 정부는 요나라를 칠 군사를 곧바로 난을 진압하는데 보냈고 결국 요의 공격은 지지부진 하였다.
송이 난을 진압하는 와중에 금나라는 이미 공격을 전부 마친 상황이었고, 송이 본격적으로 공격에 나섰지만 요의 군사에 패하던 개 막장이던 상황이었다.
결국 송은 금나라에게 장성 이남으로 내려와달라는 요청을 하고 금나라는 장성을 내려와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까지 공격하였고
연운 16주의 대부분을 금나라가 점령하였다. 당시 연운 16주는 송나라 로서는 잃어버린 땅이었지만
그곳에 사는 주민은 200년이나 요나라의 통치를 받았고 이 통치는 가혹하지 않았다. 그
러다보니 이 주민들의 생각은 자신들은 요나라의 백성들이었고 연경에다가 요나라 임시정부를 세워서 야율순을 황제로 내세웠다.
그를 옹립한 인물도 한족이었다.

금나라 중장기병
연경은 연운 16주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송나라의 궁극적인 공격 목표였다.
연경에 있던 요나라 망명정부는 송나라에 150년동안 맺은 맹약을 지키고 금나라에 대항하자고 하였지만, 송은 이를 무시하고 연경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송 군은 망명정부 수준인 요나라 군에게 계속 패하였고, 당시 군 총 책임자였던 동관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당황한 동관은 금 태조에게 몰래 군사를 요쳥하였고 결국 연경은 금나라 군사의 공세로 함락되었다.
금나라 장군들은 연경은 자신들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기 때문에 송나라에 돌려주면 안된다고 했지만
금 태조는 해상의 맹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하에 성을 돌려 줘야 된다고 하였다.
연경내에서도 송나라의 악정(惡政)에 대한 소식을 들은바 있어 송의 지배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금 태조는 주민과 재물을 모조리 북쪽으로 옮기고 비어있는 성을 송에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연경을 공략하는데 드는 전비로써 전 100만꾸러미, 군량 20만석을 요구 하였다.
송은 200년간의 숙적이었던 연경의 탈환을 이루었다는 소식을듣고 온 국토가 축제 분위기였다.
그리고 휘종은 환관 출신인 동관을 왕에 봉하였다. 하지만 송으로서는 연운 16주를 전부 얻어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하에 의지하였던 천조제랑 연락하기 시작하였다. 훗날 천조제는 금나라 군사에게 잡히고 송의 밀서는 금 태종(太宗)의 귀에 들어갔다.
태종은 배신한 송나라에 대하여 분노하며 군사를 보내 연경을 뺏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휘종은 당황하여 자신을 책하는 문서를 쓴 뒤 황제의 자리를 퇴임하고 장남인 조환(趙桓)을 황제로 세운다.
이가 바로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흠종(欽宗)이다.

송나라 흠종의 어진
휘종은 박주로 도망쳤다가 강남의 진강으로 달아나고 개봉에서는 주전파와 강화파가 서로 갑론을박하며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 금의 개봉 공격이 점점 강력해지자 송에서는 강화를 요청하였고, 태종은 화친조건으로 주전파 이강의 파면, 금 500만냥, 은 5천 만냥 소와 말 1만 마리, 비단 100만 필, 그리고 금나라 황제를 백부로서 존경해야하고 중원으로 이주한 연운 땅 주민의 복귀와,
중산, 태원, 하간의 3진 20주 할양, 재상과 친왕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내세웠다.
흠종은 개봉에서 전부 끌어 모았지만 금 20만냥 은 40만냥 밖에 못모았다.
그리고 상서좌복야 장방창과 휘종의 아홉번째 아들이괴 훗날 남송의 고종(高宗)으로 즉위하는 강왕(康王) 조구(趙構)를 볼모로 보냈다.
요구한 배상을 받기전에 금은 개봉의 포위를 풀었는데 금 태종은 3진의 할양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포위를 풀었다.
포위를 풀은 개봉에서는 다시 주전파가 대두되어서 금나라에 대한 3진의 할양을 반대하고
3진에 주둔해 있던 군사들에게 금나라에 대항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금 태종을 분노하게 하였고, 금나라 군을 일으키고 황하를 건너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을 공격하게 된다.
이에 당황한 흠종은 곽경이라는 도사가 신병(神兵)을 이끌고 온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믿고
개봉의 성문을 열어 놓았다가 결국 금나라에게 개봉을 넘겨주게 된다.
금나라 휘종과, 흠종과 그들의 황후들은 전부 금나라의 포로가 되어서 끌려갔는데,
흠종의 황후 주씨는 금나라 장군의 술 시중을 거부하자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았고, 흠종이 이에 항의하자 금나라 장군은 흠종을 죽이려고 까지 했다.
후에 주씨는 이 폭행때문에 얻은 몸과 마음의 상처로 앓았고 흠종은 울면서 치료를 요구하였지만, 금나라는 이를 무시한다.
후에 황후 주씨가 죽었을때도 그냥 멍석에 말아서 묻어주는 정도였다.
그리고 금나라 군사의 행렬을 본 어떤 백성이 술과 고기를 바치자 금나라 군은 이를 땅에 버려 휘종과 흠종에게 그것을 주워먹도록 시켰다.

금나라 군사에게 끌려가는 흠종과 휘종
10여일뒤 금나라 수도인 연경에 도착하자 금 태종(太宗)은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덕이 어두운놈
흠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아주 어두운 놈 이라는 칭호를 내리며 모욕하였다.
이들은 오국성(현재의 한반도 함경북도 회령부근)에 보내져서 흙방에서 농사를 지내면서 살았다.
이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으면 흠종과 휘종을 보고 살았던 송나라의 신하들 조차 알아보기 힘들정도였다.
얼굴은 일반 농민들과 같이 햇빛에 그을려 꺼멓게 변했고 몸 역시 말라갓다.
오국성에서 흠종의 황후 주씨와 휘종의 황후 정씨가 비분에차며 죽었고 휘종 역시 3년 뒤 눈이 멀게 된다.
휘종은 자신의 고국산천을 못본다는 사실에 말을 잃어버렸고 낮에는 앉아서 멍하니 있고 밤에는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다 결국 54세에 죽게 된다.
흠종은 30년간 농사를 지으며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버텼지만 남송(南宋)을 건국한 고종(高宗)은 휘종의 유해는 받았지만
형인 흠종이 돌아오면 자신이 찬탈자가 되며 자신의 황위를 위협하므로 은밀하게 흠종의 귀환을 반대하였다.
결국 흠종은 금의 해릉왕(海陵王)이 남송을 치러갈 때 죽게 된다. 해릉왕은 흠종을 과녁삼아 활을 쏘았고 말을 이끌고가
흠종의 시체를 진흙탕으로 옮겨 말로 마구 밟았다. 이 때가 흠종의 나이 56세 였다.
이렇게 나라를 잃은 그들의 최후는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3줄요약
1. 휘종나라말아먹음
2. 금나라 침곰
3. 비참한 최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