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l8zH4
http://www.ilbe.com/2269594636 - [정보] 명나라 F4에 대해서 간단히.araboza
http://www.ilbe.com/2274160398 - [정보] 청나라 전성기 강건 성세(康乾 盛世)의 군주에 대해서 .araboza -(1) 강희제
http://www.ilbe.com/2281460213 - [정보] 청나라 전성기 강건 성세(康乾 盛世)의 군주에 대해서 .araboza -(2) 옹정제
씨발 아까 수용소 폭도새끼들떔에 묻히고 일베 잘못눌러서 밴당해서 지금 다시재업한다 수용소 씨발 ㅡㅡ
안녕 씹쌔들아 원래 강건성세에 대하여 한번에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너무 길이 길어져 이렇게 3편에 걸쳐서 쓰게되네.
그래도 재밌게 봐주는 애들도 있고, 지적해주는 능력게이도 있어서 글 쓰는 나로서는 뿌듯하기도 하네.
평소에 살면서 역사에 대한 토론도 하기 힘들고 관심 가져주는 친구도 없어서 외로웠는데 역시 난 일베밖에 없는거 같다
헤헤 일간베스트 저장소 사랑해요!
댓글에 대부분 일게이들은 건륭제에 굉장히 부정적으로 바라보는데 나 역시 또한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다.
할아버지인 강희제 옹정제인 아버지가 허리띠 졸라메고 궁정의 비용을 깎아가면서 모은 국고의 은들을 거의 다 까먹은게 건륭제거든.
말년에는 민간신앙과 도교를 합한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고,
영국에서 보낸 사절 매카트니에 의하면 청(淸)은 겉으로는 화려해보이지만 속은 썩어간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
결국 아들 인종 가경제(仁宗 嘉慶帝)의 치세 15년은 백련교의 난을 막다 끝난 가장 인기 없는 황제가 되었고,
손자 선종 도광제(宣宗 道光帝) 때에는 아편 전쟁에
의해 탈탈 털리면서 청나라가 종이 호랑이라는걸 세상 천하에 알리기도 했지.(
당시 조선은................... 양이(羊夷)들의 단순한 소요에 불과하다고 청나라는 멀쩡하다고 판단하고,
청나라 역시 서양에게 털린것보다 국내의 반란을 더 중요시 여겼다....
일본은 청나라가 털리는걸 보자 동양은 안된다 하여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을 내세워 메이지 유신으로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게되고.)
쨋든 치세 초기와 말기에 극과 극의 정치를 보여준 파란만장한 건륭제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자.
니들도 잘아는 황제의 딸도 건륭제시기를 배경으로 했다 ㅋ 이때 조미 이뻤는데 ....
================================================================================================
고종(高宗) 순황제(純皇帝) 건륭제(乾隆帝) 재위(1735년~1796년) 애신각라 홍력(愛新覺羅 弘曆)
일단 건륭제는 고(高)라는 묘호를 받았는데, 우리가 알기에는 이 고(高)가 그닥 좋은 묘호가 아닌걸 알고있지....
조선 말의 고종(高宗)이나, 당나라 시절 측천무후에게 이끌린 고종(高宗), 최씨 정권에 휘둘린 고려 고종(高宗)등등....
청나라에서는 건륭제가 성조(聖祖)와 세종(世宗)의 기풍을 오래 오래 제위해서 이어갔다고 고(高)라는 묘호를 줬대... 그닥 호감가는 묘호는 아님
(1) 건륭제의 즉위
홍력은 옹정제의 5황자로 저위 밀건법에의해 즉위하게 됬어.
저위밀건법이란 황태자를 정하지 않고 황제가 평소에 똘똘하다 싶은 황자를 후계자로 지정해서 유서를 남기는 법이야.
황제가 죽고난 뒤 신하들은 유서를 공개해서 지목된 황자를 황제에 올리는 법이었어.
능력위주로 황제가 됬기 때문에 청나라는 여타 왕조에 비해 무능력하고 폭군인 황제는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됬지.
홍력은 어렸을 때부터 강희제의 사랑을 받았어. 어느정도나면 강희제에게는 약 70명의 자식과 100명이 넘는 손자들이 있었는데,
손자중에서는 자기 손자인지 구분못하는 애도 있었대.
근데 홍력의 재주를 사랑하여 황자들만 교육할 수 있는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를 시키지.
홍력은 나이를 먹을수록 학문이 일치월장으로 늘어나고 활로 곰을 잡는 등 엄친아가 되기 시작해.
이를 본 강희제는 자기의 어릴때 모습과 닮았다 하여 제왕학을 가르쳐. 이만하면 할아버지 사랑 ㅍㅌㅊ냐?
100명이 넘는 손자들 중에서 특별하게 제왕학을 가르친거다. 옹정제의 즉위에는 홍력의 영향도 있다고 보면되지.
강희제가 홍력의 능력을 기대해서 옹정제를 후계자로 삼았다는 얘기도 있다.
고대국가였던 주(周)나라 태왕(太王)이 후에 문왕(文王)이 되는 희창(姬昌)의 능력을 사랑해
3번째 아들이자 문왕의 아버지인 계력(季曆)에게 주 왕위를 물려주는 상황과 비슷했지.
옹정제가 즉위하자 홍력의 이복형이었던 홍시(弘時)는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갖고 8황자 윤사와 손을 잡아 홍력을 모함하고 암살하려하자
옹정제는 홍시를 윤사의 아들로 만들고 윤사 일당을 숙청해버려.
홍시는 감옥에서 죽고 아들 중 가장 연장자는 홍력이 되지.
홍력은 보친왕(寶親王)의 지위에 오르면서 옹정제의 업무를 도와줘서 황제 즉위를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
보친왕 시절 건륭제
옹정제가 연로해서 일을 처리하지 못할 때 홍력은 군기처에 들어가 옹정제 대신에 섭정을하여서 제왕학을 몸소 익혀 차츰 황제 즉위에 가까워 지게 되.
1735년 옹정제의 병세가 깊어지고 결국 원명원에서 승하하게 된다. 그리고 유조에는 홍력을 황제로 세우라는 글이 써 있었어.
"제4황자 보친왕 홍력은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과 우애가 깊어 아바마마이신 성조인황제(강희제) 폐하께서 특별히 총애하여 궁중에서 기르셨다.
홍력은 친왕이 된 후에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정사에 능숙하며 식견이 깊으니 가히 대사를 맡겨
짐의 뒤를 이어 황위를 이을 자격을 갖추었도다."
그리하여 홍력이 즉위 하게 되니 이가 바로 청나라 6대 황제 고종 건륭제야.
(2) 건륭제 초반의 개혁과 업적
즉위 초기의 건륭제
건륭제는 자기 형제들을 군기처와 육부 군에서 정치적 발언을 제재해서 강력한 황족들이 나오지 않게 견제 했어.
그리고 아버지 옹정제가 감금한 14황자 윤제를 감금에서 풀려나게 하는 등 아버지 옹정제 시절보다 다소 부드럽게 정치를 시작했어.
건륭제는 당시 꼼수가 만연하던 보갑제(保甲制)와 이갑제(里甲制)를 뜯어 고쳤어.
보갑제란 100가구를 모아 갑, 10개의 갑을 모아 보로 나누어 공동체 생활을 이루면서 서로의 질서 치안을 유제하게 만드는 제도 였고
이갑제는 이 보갑제에서 세금을 걷는 제도였어.
이 보갑제는 원래 북송(北宋) 신종(神宗) 시절 신법(新法)을 주장하던 왕안석(王安石)이 제안했던 제도였고,
순치제 시절에 보급이되고 강희제, 옹정제 시절때 확산되어진 제도였어.
보와 갑의 장(長)이 그 수를 조사해서 당시의 도지사였던 순무나 총독에게 보고해서 왕조의 통치를 좀 더 원활하게 만드는 제도였는데
, 지방 관리들이 일부러 이 수를 속여서 뒤로 자신의 이익을 사사로히 챙기는 그런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됬어.
이에 건륭제는 문앞에 패를 걸어 일하는 장정뿐 아니라 여자의 나이와 숫자를 정확히 적어놔 인구수를 확실히 파악하게 만들었어.
보와 갑의 장들은 이를 정확히 기록해 순무처나 총독부에 보고하고 이는 북경의 군기처까지 보고됬어.
만약 이를 속여서 부정부패 하는 관리들은 엄격하게 처벌해서 부정부패를 막으려고 노력했어.
이와같이 건륭제 치세 초기에는 옹정제의 부정부패 척결의 기풍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대.
건륭 시절에는 강희 옹정의 빈틈없는 내치가 빛을 발하는 그런 시기였어.
농업 수확량의 증가와 새로운 농작법이 개발됨에 따라 수익이 증가하고 그로 인해 화폐경제가 발달하던 시기였어.
유럽에서는 신대륙의 발견으로 고구마 같은 새로운 작물이 들어와 기근등이 해결 되고 수확량이 증가하게됬어.
대외적으로는 무역량을 증가시켜 백성들의 삶의 질이 향상됬지.
1760년(건륭 25년)에 85,000 kg의 은이 국고에 있었으나 20년 후인 1780(건륭 45년)에는 450,000 kg의 은이 저장됬어.
인구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백성들은 문화와 예술을 영위하면서, 삶의 질이 향상하게 됬지.
건륭제 시절 유통되던 건륭통보
시를 짓는 건륭제의 모습
건륭제 자신이 《낙선당전집》, 《청고종어제시집》등을 편찬할 정도로 시 쓰는걸 좋아하고
서예에 꽤 특별한 재능을 보일정도로 문화, 예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
건륭제는 자신의 글을 대신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주는 걸 큰 기쁨이었다고해. 그리고 건축도 큰 관심을 쏟아 여러 아름다운 조형물들이 지어졌어.
그 중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은 원명원과, 청의원(淸漪園)이야.
청의원은 후에 그 유명한 이화원으로 개명하고 나중에 서태후가 더욱더 증축해서 더욱 커져.
그리고 원명원은 지붕은 중국의 기와 양식을 사용하고 건물의 몸체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의 분수를 짓는 등
유럽의 로코코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혼합하여 건축하고 서양의 진귀한 물품을 갖다 놓는 등 동, 서양의 조화를 이룬 정원이었어.
그리고 강희제때 지어진 피서산장을 개조하는 등 여러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기도 했어
원명원의 cg복원도
원명원의 복원된 모습
이화원의 풍경
2차 아편전쟁 이 후 타버리고 터만남은 현재 원명원
그리고 건륭제는 기독교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서양 기술에는 관심이 많아 옹정제때 추방한 서양 선교사들을 북경으로 불러 그들의 도움을 받았어.
특히 그들의 전수한 천문학과 지리학으로 건륭황여전람도는 서양식으로 청나라 강역을 상세히 그려 남기기도 했어.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중 조제프마리 아미오는 여러개의 황실 정원을 프랑스 식으로 바꾸기도 했고,
건륭제가 지은 시나 손자병법같이 중국의 유명한 고전을 프랑스 언어로 번역하는 등 동, 서양의 문화교류가 활발한 시기였어.
건륭 황여전람도
건륭제의 문화 사업중 가장 큰 업적은 중국 역대의 고문서를 수집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드는 작업인데, 이 책이 그 유명한 '사고전서(四庫全書)'야.
사서오경(四書五經)같은 책은 경(經), 역사서는 사(史), 제자백가 같은 책은 자(子), 문집을 집(集)으로 네 분류로 나누었어.
사고전서를 지을 때 한림원과 황실 도서관 문연각에 비치해 조사하는데만 2년이 걸렸고 모인 책이 3,503 부에 79,337 권 33,054책이었어 ㄷㄷㄷ
3800여 명의 학자들이 필사를 하여 분류해 놓은 목차를 '사고전서총목제요'라고 해.
사고전서는 지어질 때 9년의 시간이 걸렸고 건륭제가 이의 요약본을 요구했는데 이게 사고전서회요야 요약본만 12000권에 달했어.
사고전서는 자금성의 문연각, 심양의 문소각(文溯閣), 열하의 문진각(文津閣), 원명원의 문원각(文源閣) 등 4곳에서 보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주, 진강, 항주 등으로 보내 한림원의 원로 학사가 책임을 지고 관리하도록 했대.
이 사고전서는 영락제(永樂帝)때 만든 영락대전의 3배에 달하는 양이었고 강남에 보존된 3부는 남방의 학자들이 언제든 열람할 수 있도록 했어.
이 밖에도 건륭제는 대청일통지, 황조문헌통고, 대청회전 등 여러 도서를 짓게하고 그에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
건륭제는 강남을 순시하는 것을 좋아해 개인적인 여가나 중대한 결정후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 여러번 방문하곤 했어.
건륭제는 순행할 때 공주, 대신, 환관, 요리사 등 3천명의 인원을 데리고 순행하였고 화가, 시인등을 동원해 강남의 아름다움과 절경을 노래하도록 시켰지.
그리고 자신이 데려온 시인이나 화가를 강남 지방의 시인과 화가와의 대결을 통해서 강남 지방의 예술인들의 지지를 받는 등 여러 문화 생활을 했어.
국사는 건륭제가 순행하는 동안에 북경에서는 황자나 군기처에서 국사를 처리하곤 했어.
그는 여러번의 강남 순시와 사천성같은 서순, 산동성, 호북성 같이 동순을 하면서 황제의 위엄을 천하에 퍼뜨렸지만,
할아버지였던 강희제가 비용을 최소화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안지려고 노력하는 대신
호화스럽게 순시하면서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등 부정적인 면도 컸어.
그리고 골동품은 어떤 값을 주더라도 사오게 하여 황궁에 여러 문화재를 보관했지만 이에 비용도 만만치 않아 국고를 낭비하는다는 비난은 피해갈 수 없었지.
남순을 떠나는 건륭제
(3)건륭제 시절의 정복활동
팔기 갑옷을 입은 건륭제
건륭제는 할아버지였던 강희제를 존경하여 그의 치세 발자국을 따라가려고 노력했어.
강희제의 외정(外征)을 본따 10번의 정벌 활동을 벌였는데,
스스로 십전노인(十戰老人)이라 칭하며 이전부터 사용하던 고희천자(高稀天子)를 대신해 자신의 호로 삼았어.
그리고 마년에는 십전노인지보라는 옥새를 제작해 사용하기도 할 정도로 자신의 정복 업적을 자랑했지.
건륭제의 정복 업적에는 건국 초기에 활약한 팔기가 아닌 한족으로 이루어진 녹영군(綠營軍)과 악비의 자손인 악종기,
만주족 출신 장군 아계가 그 주축이 되어 여러 전공을 세웠어.
그 정복 업적에는
1. 건륭12년(1747년) 사천성 서북 변경의 대금천으로 출병(~1749),
2. 건륭 20년(1755년) 제 1차 준가르 출병,
3. 건륭 22년(1758년) 제2차 준가르 출병(~1758),
4. 건륭 23년 (1758년) 회부(回部) 출병(후에 신강(新疆)으로 개명)(~1759),
5. 건륭 32년(1767년) 미얀마 대원정(~1769),
6. 건륭 36년 (1767년) 대, 소금천 출병(~1775년)
7. 건륭 52년(1787년) 대만의 임상문의 난 평정,
8. 건륭 53년(1788년) 베트남 출병(~1789년),
9. 건륭 55년(1790년) 네팔 구르카 1차 출병,
10. 건륭56년(1791년) 구르카 2차출병
건륭제가 입던 황금갑옷
이 원정으로 청의 지배영역은 몽골고원, 동투르키스탄, 티벳을 포함하고 중원 역사(한족 역사 x 중원대륙에서 일어난 왕조의 역사)중에서
원(元)을 제외한 가장 넓은 영역을 지배하는 성거(盛擧)를 이루게 되.
그 영토는 현재 캐나다보다 더 크다고 하니 얼마나 넓을지 상상이 되냐? ㄷㄷ
이 당시에는 직접 통치하였던 '만'과 '한' 간접 통치하는 '번'으로 나뉘어 만,한,번의 지배 구조가 형성되기도 하지.
이 정벌로 중국의 영역 개념에는 원래 화북지방과 강남지방만 포함됬는데
내몽골지역, 신강 위구르지역, 티베트지역이 포함되는 등 큰 변화가 생겨 현재까지도 중공이 여러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하지.
하지만 이 정벌들이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임상문이 일으킨 난에서 청나라 군의 여러 한계점이 드러났다.
임상문의 난은 비밀 결사인 천지회가 일으킨 반정부 운동인데, 아직까지 반청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정성공의 반청조직이
강희제 시절부터 남아있다는 소리이다. (이 천지회는 나중에 중국 범죄단체인 삼합회의 전신 ㄷㄷ)
그리고 절민총독 상청이 이끄는 주방만주병 8천명은 전혀 도움이 안되고 한족의 군대인 녹림군에의해 겨우 평정됬다는 사실이야.
만주족의 팔기가 혜택만 받아오니 점점 군대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한족군대의 힘에 의지한다는것은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통제하기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지.
그리고 임상문의 난을 진압한 1등 공신인 한족 총병 채대기는 만주족 관료의 참언으로 사형에 청해지는데
이는 만주족-한족간의 민족적인 모순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기도 해
청나라 시대의 최대영역 붉은 선이다 (조선은 씨1발 제후국이라고 포함시켰나본데 개새끼들 짱개씹새끼들)
(4) 건륭제 시절의 부정부패
건륭제 즉위 초기 시절에는 할아버지였던 강희제와, 아버지였던 옹정제의 조정 기풍에 따라서 건륭제 역시 옹정제 처럼
관리 문서 하나하나에 주필을 하는 등 정치에 열성을 보였지만,
나이가 먹어갈 수록 북경과 그 주변지역만 일을 처리하는 등 여러 해이해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
그리고 건륭제가 자뻑이 좀 심해서 자기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좋아서 어쩔줄 몰랐지.
옹정제 시절에는 거짓으로 문서가 보고되면 옹정제가 의심해서 만약 그 보고가 거짓으로 드러나면 심하게 처벌을 할 정도로 치밀한데 비해
건륭제는 아니었나봐...
예전 옹정제 시절 글에서 말했듯이 중국의 황제는 권력이 집중 되기 때문에 그 권력을 능력있는 황제가 잘 쓰면 엄청난 효율을 보이지만
대신에 황제가 해이해지고 정치에 소홀하게되면 엄청난 빈틈이 생긴다고 얘기했어.
백마를 진상받는 건륭제
건륭제가 지방에 신경 쓰지 않게 되자 지방관리들은 그 허점을 이용해 부정부패를해 재산을 축재하기 시작했어.
그 중 가장 큰 사건은 감숙모진안(甘肅冒賑案)이라는 사건이야.
당시 감숙성은 가난한 지역이어서 북경의 군기처나 호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재정을 꾸렸는데,
감숙성 순무가 이 지원금을 도중에 횡령하여 자신의 재산을 불린 일이야.
7년간 착복한 금액이 약 1500만냥이었는데 건륭제는 이를 알자 대노하여 2만냥 이상 착복한 관리들을 사형시키면서,
군기처에 각 성의 순무와 제독이 보고한 세금의 양과 일일히 대조하면서 확인하라고 지시하지만 결국 이도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지
건륭제는 말년에 재물에 큰 욕심을 가지게 되는데, 황제가 재물을 탐하면 그 신하들은 어떻게될까?
강희-옹정 시절에 간신히 잡은 부정부패를 건륭제는 다시 키웠다는 책임을 피하지 못할거야.
부정부패를 하는 관리중에서 가장 거물은 화신(和珅)이라는 자야.
화신과 건륭제의 첫 만남은 약간 묘한데, 이런 일화가 있어. 아버지였던 옹정제 집권시절 옹정제가 사랑했던 후궁이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고 있엇대.
그 옆을 지나던 홍력은 장난기가 생겨 후궁의 눈을 가렸는데 그 후궁은 눈을 가린 사람이 홍력이라는걸 생각 못했다는거지.
후궁은 크게 놀라 빗으로 등뒤를 때렷는데 그게 홍력의 이마에 맞아버린거야.
나중에 홍력이 모후를 알현하러 갔을 때 모후는 이마를 누가 상처냈냐고 물어도 홍력이 대답하지 않자 크게 화를 냈는데 결국 홍력은 사실을 털어 놓게 되.
그 사실을 들은 황태후는 화가나 비를 죽음으로 몰아 넣고 이에 죄책감에 쌓인 홍력은 미안한 마음에 목에 붉은 선을 그어서 나중에 다시만나자는 징표를 그렸데.
후에 건륭제가 제위에 오르고 가마를 타고 출발하는데 황제의 가마의 덮개인 황개가 보이지 않자 크게 화를 내는데 화신이 소릴 높여 대답하기를
'황개를 관리하는 관리에게 책임을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어.
건륭제는 그 모습을 보며 낯이 익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대.
갑자기 그는 젊은 시절을 생각이 미쳤는데 화신의 용모가 그 비의 모습이랑 너무 닮았다는걸 생각해 냈지.
그러다 가까이 가서 목을 보니 붉은 자국이 있어 화신이 후궁이 다시 태어났다고 믿으며 화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는 얘기야.
근데 화신 남자임 ㅋㅋ 건륭제 똥꼬충 ㅍㅌㅊ?
어쨋든 화신은 교위라는 지금의 소대장 지위의 직급에서 건륭제의 눈에 띄어 호부의 관리로 들어가게 되는데, 화신이 똑똑하긴 했나봐.
자기의 재산을 불리면서 호부의 돈이 빵꾸가 안나게 일을 잘한거에 대해 건륭제는 화신에 대한 총애를 더욱더 하기 시작하고
화신의 벼슬은 일사 천리로 승진하게 됬지.
화신의 초상화
화신은 라마교를 믿었는데, 건륭제 역시 라마교를 믿어 교유(敎友)로써 더더욱 총애하게 되고
화신은 6부의 판서를 지낸 후 국자감 교장(국립대 총장)을 거쳐 내무부 총관직을 하고 30대에 재상의 지위였던 문화전대학사(文和殿大學士) 겸
군기대신에까지 이르게 되. 그리고 자신의 첫째아들을 건륭제의 딸과 결혼 시키면서 화신의 권력은 절정에 다다르게 되.
화신의 수입원에는 여러 군데에 금융업을 하면서 얻은 수입과 공사비의 착복,
건륭제의 진상품에 손을 대는 등 여러 수단으로 개인의 재산을 불리기 시작했어.
한 예로 건륭제에게 바쳐진 옥 쟁반이 있는데 화신은 자기가 1등급의 쟁반을 갖고 2등급의 쟁반을 건륭제에게 바쳤대.
하루는 건륭제가 옥 쟁반을 깨뜨려 상심하고 있던 와중에 화신이 자기가 착복한 1등급 쟁반을 바쳤는데
건륭제는 화내기는 커녕 화신이 비싼 쟁반을 줬다는거에 고마움을 느꼇다는거야 ㅋㅋ.
나중에 아들인 가경제가 즉위하자 화신의 재산을 몰수했는데 그 재산은 청나라 예산의 10년치에 달하는 재산이었대....
그게 화무십일홍이라는 닉을 쓰는 사람의 네이버 블로그에서 비유를 했는데
화신의 재산 규모가 1670년 조선 정1품이 250만년을 일해야하고(영의정이 250만년일해야 버는 돈),
1789년 대구지역의 1년 조세의 12850배이고 홍경래의 난 진압할 때 병사들의 식비를 3천년 동안 댈 수 있고,
수원화성 1000채와 1790년대 한양에 기와집을 6억개나 지을 수 있는 재산이었대.
- 화무십일홍님의 '세계 제일의 부자는?' 글의 일부-
화신은 후에 건륭제가 죽고 그 아들 가경제대 이르러서야 자신의 독주를 끝내게 되.
가경제는 화신에게 여러 죄목을 들먹여 자결을 명하고 그 재산은 전부 몰수 당하지...
화신의 아들은 나중에 백련교도의 난에 공일 세워서 살아남긴하지만
이런 부패한 권신이 등장하는데 그 아래 하급관리들은 깨끗했겠어?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
옹정제때 강압적으로 잡은 관리들의 기강은 해이해지기 시작했고,
청나라 관리들은 부정부패에 찌든 그런 관리들이 되기 시작했지 관리들의 부패는 백성들에게는 생활고로 돌아오고
결국 건륭제 말기에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 아들 인종이 즉위하고 10년간 막아야할 정도로 악영향을 미쳤어
(5) 건륭제 시절의 문자옥
문자 옥은 건륭제의 할아버지인 강희제시절부터 시작되서 아버지 옹정제 시절 점점 문자옥의 정도가 심해지다가 건륭제 시절에 절정에 다다랐어.
소수의 통치세력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다보면 다수 쪽에서 불만이 나오기 마련인데 소수의 통치세력은
이 다수의 한족들의 여론에 신경을 크게 쓸 수 밖에없었어.
그러다보니 사상의 통제는 필연적인데 그 정도는 건륭제 시절이 가장 심했지.
일단 한 예로 호중조(胡中藻)의 예가 있어. 호중조의 시집중에 '일세(一世)에 일월(日月)이 없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일과 월을 합치면 명(明)이 되고 일월이 없다는건 명이 없어서 슬프다 라는 내용으로 해석된거야
그리고 다른 내용에 '일파(一把)의 심장, 탁청(濁淸)을 논하다.' 라는 구절에는
탁청 즉 탁한 청나라라고 해석되어 받아드려져 호중조는 사형에 처하게 되.
또 다른 예에는 포정사(지방자치부 행정장관)의 지위에 오른 팽가병이라는 사람은 명나라 말기 책을 소유하고있다고 자결을 명 받았고
옹정제 시절에 악종기에게 악비처럼 되라고 권유했던 증정 역시 사형에 처했지.
그리고 아버지 옹정제가 증정에게 청나라의 정통성으로 반박한 글인 대의각미록 역시 금서로 지정되.
물론 지식인이 글을 집필할 때 만주족을 뜻하는 호(胡), 이(夷), 만(蠻)등의 글자를 써서도 안되고....
그리고 건륭제가 사고전서를 집필하게 만든게 문화를 발전시키는 외에 또다른 의견이 있는데
이는 바로 사고전서를 집필하면서 청나라 정부를 부정하거나 만주족을 부정적으로 보는 책들을 전부 검열하여여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는거야.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백과사전을 집필하게 만들어 불만의 소리를 잠재우기 위하였다는 얘기도 있지.
결국 건륭제는 훗날 시황제와 마찬가지로 여러 서적을 파괴한 주범이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어
(6) 건륭제와 유럽과의 관계
청나라와 유럽과의 관계는 이미 순치제 시절부터 계속 되왔어.
순치제의 밑에는 아담 샬이라는 예수회 선교사가 일하고 여러 예수회 선교사들이 북경에 있었지.
서양에서는 강희제를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정치(哲人政治)의 이상정 군주와 같다고 했고, 옹정제는 근면한 명군이라는 평을 받았어.
어느 정도냐면 강희 옹정 황제를 로마시대 5현제에 비교할정도였지.
당시 서양 철학자들은 중국이야말로 토마스 무어가 꿈꿔오던 유토피아 세계라고 할 정도였어.
더 골때리는건 서양애들이 청나라가 크리스트교를 안 믿는걸 아쉬워해서 어떻게든 크리스트교와 유교와의 관계를 맞춰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지 ㅋㅋㅋ
유교에서 전설적인 성군으로 불리우던 요(堯)임금을 노아와 같은 인물로 보려고 짜맞추고,
절대왕정의 군주들은 자신들의 신하를 중국 문관들에 비견해 중국 애호가임을 자처했지.
그 당시 이런 풍을 시누아즈리(chinoiseries)라 했어.
중국풍을 즐기는 유럽의 귀족
중국풍을 즐기는 유럽의 귀족
런던에 있는 Sir William Chamber' Pagoda
하지만 건륭제의 치세에 그 화려함은 더욱 극을 달렸지만 내부적으로 썩어가고있다는 평을 받기 시작했지.
영국에서는 조지 매카트니(George Mcartney)를 파견해서 정식으로 교역을 하자고 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청나라 조정에서는 영국왕의 사절이 제후국의 사절이라 생각하여 삼궤구고두(세 번 무릎꿇고 아홉 번 머리르 조아린다)를 요구 했는데
매카트니는 대등한 국가라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고, 결국엔 건륭제 뒤에 영국 왕의 초상화를 걸고 한 쪽 무릎을 꿇는 예법으로 타협하는 일이있었어.
(여기서 굽실거리다라는 영단어인 kowtow가 유래했어).
이때 매카트니는 건륭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러 선물을 준비했는데 주던 선물 중 마차의 마부가 건륭제 앞에 있게 설계가 되 건륭제의 심기를 건드렸지.
영국에서는 무역을 늘리고 공사를 설치하고 영토의 할양을 요구 했는데
건륭제는 '우리 나라는 천조(天朝)의 국가다 모든 물품이 나므로 다른 나라와 무역은 필요 없는데
짐이 특별히 윤허하여 너희들과 무역하는데 감히 이런 요구를 하다니'라는 반응이었어.
이런 반응은 50년 뒤 손자 도광제 시절 아편전쟁으로 호되게 치르게 된다.
대신 네덜란드는 삼궤구고두 의식을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아 영국보다 더욱 우대 받아.
조지 맥카트니 1세
매카트니는 북경에 가던 도중 굶어죽는 백성들을 봄으로써 청나라는 겉으론 화려하지만 속으론 썩어가고있다는 느낌을 받고
본국에 이를 보고하고 유럽의 군주들은 중국 환상에 점점 깨어나기 시작했어.
그리고 나중에 열강들은 청나라를 먹으려고 서로 경쟁하게 되지
(7) 건륭제의 말년
말년의 건륭제
건륭제는 재위 60년이 넘어가자 스스로 황제를 퇴임하고 태상황의 직위로 가.
그 이유는 강희제가 61년 통치하고 자기가 그 기록을 깰 수 없다는 거였어.
'짐의 할바마마(강희제)께서는 61년간 재위하셨으나 짐은 감히 그 기록을 깰 수 없도다. 짐이 그 정도로 오래 살아있으면 건륭 60년 째 되는 해, 즉 짐의 나이 85세 되는 해에 황자에게 황위를 넘기고 물러나겠다.'
그래서 즉위한게 15남 옹염 인종 가경제(仁宗 嘉慶帝)야.
건륭제는 황제 자리에 물러나서도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인종은 중요한 일은 전부 태상황에게 보고해야만 했지.
인종이 즉위하자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는데 20년전 건륭제는 이를 신속히 제압하여 빠르게 반란을 진압했지만,
인종 시절 청나라는 이미 그 활력을 많이 잃어 10년간이나 반란 진압을 끌게 되지. 이 결과는?
청나라 재정의 고갈과 쇠퇴의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었어.
이로써 청나라 전성기였던 강건성세 3군주를 만나봣는데 다 쓰고 난 뒤 소감은 존내 힘들어 시발....
하지만 재밌게 봐주는 새끼들도 있고 이 글을 처음 쓰면서 내가 알고 있던것도 다시 정리하고 새로운사실도 알아가는 좋은 시간이었던거같아 씹새들아. 재밌게 읽어줘서 고맙고 재미없게 읽은새끼는 뭐 어쩔 수 없고 일단 이걸로 마치고 다음 글은 인종가경제-선종 도광제 아편전쟁까지 묶어서 쓸 예정인데 너무 길면 2부로 나눠서 쓰고 2부로 나눠서 쓴다고 ㅁㅈㅎ주지마라 어쩔수없어 이 글도 씹스압인데 아편전쟁은 쓸얘기 존나많다 개새끼들아
3줄요악
1. 건륭제즉위
2. 잘이끌어가다
3. 운지의 냄새 솔솔









_by_Fran%C3%A7ois_Boucher.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