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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 공녀, 그녀들을 아는가?
나라에 힘이없어 고려 이어 조선시대까지 계속된 치욕!
공녀(貢女)는 약소국이 강대국에 조공의 하나로 여자를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한족은 수천년간 이민족왕조에게 자국 미인을 바쳐야 했으며 왕소군 설화가 대표적이다

한국
몽골이 제1차 침입 직후인 1232년(고종 19)에 왕족과 대관(大官)의 동남·동녀 각 500명 및 공장(工匠)·
자수부인(刺繡婦人)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이 그 시초이다.원에서 공녀 문제로 사신이 다녀간 것은
1355년(공민왕 4)까지 50여 차례에 달하고, 공납한 처녀는 150명이 넘는다.
자 그럼 여기서 왜 각국의 미녀들을 조공이란 이름의 공녀로 바쳤는지 보자
궁녀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있었다.
중국의 궁년는 그 규모에서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명나라의 경우 궁녀가 1만명에 달했다
조선시대 궁녀의 규모가 500-600명임을 감안할때 넘사벽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한번 출궁할때 3.000명이나 내보낸 황제도 있었다한다
중국에서는 수많은 궁녀들을 충당하기 위해 중국자체에서 궁녀를 뽑을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나라에서도 궁녀를 공급받았다
중국이 다른나라에서 받아들이는 궁녀가 이른바 공녀 였다!

* 잊혀진 여성 공녀(환향녀)
일명 '환향녀' 로 불린 공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한풀이 춤이 펼쳐졌다.
그녀들의 정조문제를 거론하는 자는 엄단하라는 인조의 영이 있었으나
고향에서 조차 버림받았다.
시대적인 아픔이 서려있는 '화냥년' 에 대해 알아보자
제 남편이 아닌 남자와 동침하는 짓인 이른바 서방질을 하는 계집을 사람들은 '화냥년' 이라고 한다.
이 '화냥년' 이 생긴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자호란은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왕이 청나라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더욱 치욕스런 일이 그 다음에 일어났다.
청나라 군사가 철수하면서 50여만 명의 조선 여자를 포로로 끌고 간것이다.
이 때 청나라 군대인 되놈들에게 전리품으로 끌려갔던 여인들 중 속전(贖錢)을 물거나
도망쳐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을 일컬어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고려 시대 이곡 이 먼 원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는 절절했다.
그가 애통해 한것은 때마다 중국에 바쳐야 했던 "인간 진상품" 공녀
치욕의 역사는 5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신라에서 중국 북위에도 여자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고려 후기부턴 조선 시대가 가장 극성이었다.
고려 원종 15년 (1274년)에 원나라가 140명의 부녀자를 데려간 것을 시작으로
충렬 ~공민왕 때 원에 바친 여자는 44회에 걸쳐 170명이 넘었다.
조선 시대에도 태종~효종 때 명.청에 걸쳐 146명이 진상됐다.
중국 고관들이 사적으로 데려간 경우까지 합치면 수천 명이 넘는다고 학계에서는 본다
중국의 채홍사가 오면
조정에서는 공녀 선발 기구를 임시로 설치하고 각 도를 순찰사가 물색하고 다녔다
백성들의 저항은 거셌다 딸의 얼굴에 약을 발라 상처입게 만들기도 하고
딸을 비구니로 만들기도 했을 정도다 세종은 12세 이하 여자에 대해 혼취를 금하라고
법령을 공포해야 할 정도였다
조선 태종 8년 4월 각도에서 처녀 30명이 뽑혀 서울로 이송됐다.
하지만 중국 사신은 "미색"이 없다며 관리를 곤장 치려 했다
"처녀"들도 낙점을 피하려고 중풍이 든 듯 행동했다
결국 여자들 부친 전원이 파직되거나 귀양에 처해졌다.
태종은 처녀를 숨기거나 침을 뜨고 약을 붙이는
등 흉하게 보이도록 꾀를 쓰는자 엄벌에 처하겠다고 불호령을 내렸다 한다.
이러한 조공관계는 삼국시대 초부터 조선시대 말기인 갑오개혁때까지 약 2.000년 동안 지속됨
세종때도 어린 처녀들이 중국으로 끌려갔으며
70~80일을 걸어서 또는 뱃길로 끌고가는 자들에게 추행 당했다
끌려간 처녀들은 궁녀로, 재상의 딸들은 관리의 처첩 이에 들지 못하면 기녀나 창부로 팔렸다
약소국은 이런것이다
처녀 한명을 잡으려고 수백 집을 뒤지고, 여인들은 울어서 실명이 되거나 우물에 빠지고
딸의 머리를 깎은 공신이 곤장을 맞았다.
공녀중에 황제의 눈에들어 비빈에 봉해지면 권세 가도를 걷기도 했다.
고려 출신 "기황후"는 모국의 왕위 승계에 관여했을 정도다.
정절을 잃은 수치심에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해 지자 인조대왕이
무악재 고개에 있는 홍제천에서 몸을 씻고 돌아오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명해 홍제천을 통해 공녀를 구제하려고 했다』
그래도 가정에서 받아주지 않은 공녀들은 지금 모래내시장과 유진상가 부근에
집장촌을 형성해 무리를 지어 살았었다』
"공녀"문제는 특정 시기의 차원을 넘어
그 후에도 "위안부" 문제등과 같이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반복되어온 역사적 사안이다
출처:only.위키백과.공녀. 전략과전술.기타신문
지금과는 다르지 않은가!
정절을 소중히 여겼던 그 시절 여인들이 단지 나라가 힘이 없어서
얼굴도 모르는 짐승같은 놈들에게 유린되고 목숨을 끊어야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와도 철저하게 버려져 남은 생을 연명해야했다
내 조국이 강했다면 없었을 일이었다!!!
3줄요약
1. 나라가 힘이 없어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걸쳐 오랜시간 중국에 미인들을 바치던 공녀 제도가 있었다
2. 주로 어린 처녀들이었으며 중국에 첩이나 궁녀로 들어가 살다 죽었다.
3. 혹 돌아온다 하여도 화냥녀 (지금의화냥년)로 불리며 평생 을 가족을 못보고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