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어떻게 하면 잘될 수 있었을까? 라는 시나리오를 소개하는 글.
별 의미는 없지만 짧고 재미있다. 북한이 왜 경제적 병신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음.
요약 : 더 외부 지향적인 전략을 지니고, 핵대결을 피하고, 기근 대비를 제대로 하고,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고, 사설시장이 작동하게 하고, 임시방편을 피하는 방법으로 정말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북한이 부유해질 수도 있었을까? by Stephan Haggard
- 김정일은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외쳤었다. 그게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지 제안해 보겠다.
마이다스 손의 반대가 무엇이건, 북한 지도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주위의 모든 국가들이 주목할만한 경제성장을 거둔 곳에서, 북한의 경제성장은 20년 이상 지체되어 있었다. 최근의 마지막 몇 년간, 북한의 리더쉽은 김일성의 생일을 맞이하는 2012년 4월 15일을 기점으로 새로운 번영의 신새벽을 맞이할 것이라 약속했다. 대신, 북한은 90년대의 피할 수 있던 90년대 중반의 기근과 09년의 화폐교환, 비싼 -- 그리고 실패한 -- 미사일 발사를 이번 주 초반에 실시했다. 북한은 이제 1000 달러 가량의 인당 연간 총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것은 대략 파키스탄의 그것과 같다. 과연 이 방법밖에 없었을까?
북한 사람들이 개발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98년, 기근이 60만명에서 100만명 사이를 죽였을 때에,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는 지금까지 사용되는 국가의 두 이데올로기적 선동의 기둥을 세웠다: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이다. 후자의 것은 경제적 힘과 함께 이데올로기적, 군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북한 정권은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적 복원력을 사회주의를 천착하면서도 소비에트와 동구의 몰락을 견뎌냄으로서 증명했다. 06, 09년의 핵무기 실험, 그리고 이번의 장사정 미사일은 군사적 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제 경제적 성장이 남았다. 북한은 이 부분에서 비참하게 실패했지만,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지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다. 지역의 다른 국가들, 예를들어 일본과 중국은, 수 십년간 8퍼센트 이상의 견고한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많은 국가들이 비슷하게 불행한 환경에서 시작했다: 1950년대에 남한과 북한은 비슷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남한의 소득은 오늘날 북한의 20배 이상 높다.
북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마음가짐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국제사회에 대한 더 높은 개방성, 실수를 인정하고 도움을 찾으려는 솔선수범, 중국과 거래하는 것에서 오는 이득에 대한 깨달음 등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리더쉽은 유기적, 자생적 시장경제에 더 많은 개발의 여지를 줘야 했다. 만약, 90년대 냉전의 종말 이후 북한이 분별있는 경제적 결정을 내렸다면, 북한의 개인당 총소득은 90년으로부터 지금까지 총 3배 이상 늘어남으로서 우크라이나나 모로코와 비슷한 수준의 국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소련의 기름과 다른 투입에 고도로 의존하던 북한의 공업, 농업 섹터는 91년 소련의 몰락 이후 가파른 몰락을 이어나갔다. 그로부터 3년 후 국가가 알아온 유일한 지도자가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과 베트남에서, 중대한 국면에선 항상 변화의 박차가 가해졌다; 북한은 보다 민활하게 움직여야 했다.
중국 리더쉽 등 일부는 북한이 더 큰 이웃이 갔던 길을 농부들에게 더 많은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더 낫긴 했겠지만, 북한의 제한된 경작가능지역과 형편없는 기후는 중국의 변화를 이끌었던 농업 개혁이 북한에서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북한은 더 빨리 글로벌화해야 했으며, 공격적으로 외부 투자자를 찾고 풍부한 자원과 제조된 제품들을 판매했어야 했다.
이러한 과도한 변화는 억지이다: 북한은 대부분의 정당성을 남한의 사회주의적 대안이 됨으로써 획득한다. 서울과 화해하고 남한의 LG나 현대 같은 복합기업들을 불러오는 것은 굴복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두 국가들은 잘 만들어진 남북 사이의 91년 정치적 동의로 감질나는 데탕트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작고 점진적인 남쪽에 대한 개방조차 명백한 이익을 90년대에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아팠던 때에 말이다.
북한의 외부 기업에 대한 불안함을 고려하면, 중국이 80년대에 그리했듯 북한은 스스로의 목적을 다른 경제로부터 분리된 수출가공지역으로 지정함으로써 수행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덜 위협적인 파트너, 중국과 합작할 수도 있었다. 90년대 초반, 북한은 국가의 동북쪽, 러시아 국경에 그런 지역을 배치하는 실험을 행했지만 그 중요도는 높지 않았다. 더 나아가, 리더쉽은 중국과의 근접성이 주는 이익을 보는 것에 놀랍도록 느렸다. 베이징의 천안문 학살 후의 변화를 우익 수정주의로 보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은 북한의 생명줄이었는데, 더 빠른 중국과의 계약은 더 빠른 성장을 보장했을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 위기정책이 경제에 좋지 않다는 점도 간과했다. 소비에트 친구가 몰락한 이후, 북한은 핵옵션을 안보를 위한 도구로 생각했다. 그러나 안그래도 적은 자원과 인력을 대규모 재래식 군대와 핵옵션에 투입하지 않았다면, 북한은 같은 기본적 안보를 더 작은 재래식 힘을로도 안보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들어 서울에 포탄질을 해버리겠다는 협박 같은 것 말이다. 92년 - 94년의 첫번째 핵위기를 피하는 것도 북한을 더 매력적인 투자 및 거래 파트너로 만듦으로서 경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대로 행해졌더라도, 90년대 초반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동유럽처럼, 북한은 변화에 따른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그러나 북한의 기근은 피할 수 있었다. 세계식량계획은 기근에 대항해 국제적인 사회안보망을 제공하며, 북한은 반복해서 놀랍도롱 큰 양의 식량 지원을 수취했다. 국가들은 한편, 인도주의적 지원을 위해 어필을 해야한다; 북한은 재앙과 같은 홍수가 나게 되는 95년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자립을 유지하고 싶었다면, 수출산업을 개발해 식량을 수입할 수도 있었다.
98년 초반,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기근의 물결 속에서, 북한 경제는 노동 단위나 가정과 같은 아래로부터 시장화되기 시작했다. 모두 식량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은 일부 시장이 움직이도록 방치해둠으로써 묵인했다. 북한은 시장에 약간의 여지를 두기 위해 02년 큰 변혁을 행했다. 이러한 변화는 실험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고, 국제적으로도 그러하였다: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과 일본, 중국과의 화해가 최소한 내부의 변화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잠재적인 무역 파트너들과의 사전 준비를 보여준다.
이러한 돌파는 순식간에 벽에 부딫혔는데, 그것은 02년 10월, 미국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 계획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또다시, 핵위기는 관심과 자원을 경제 개발에서 빼내갔고, 북한을 사업하기 위험한 곳으로 만들었다.
05년에서 현재까지, 북한의 경제정책은 "변화를 거꾸로" 정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시장은 열렸다가 닫혔고, 다시 열렸다가 닫혔다. 09년의 재난과 같은 화폐교환은 무역상들과 가정의 저축을 몰수한 셈이 되었고, 그것은 시장에 최악의 신호를 보낸 것과 다름없었다. 09년 미사일 시험과 핵실험, 10년의 남한과의 대립은 모두 사업에 나빴다. 중국을 제외하고. 08년의 식량 사정은 이전의 대기근 때와 거의 유사했다.
이 시기는 또다른 북한 경제의 괴로운 특징을 보여주었다: 정권의 기술에 대한 집착. 북한 정권은 자국민을 먹이지도 못하면서 미사일과 핵기술, 정보기술에 투자했다. 문제는 가난한 국가들이 부자들의 기술을 획득함으로써 부유해졌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하이테크에 대한 미성숙한 투자는 식량, 소비재, 기본적인 보건 및 교육에 대한 투자를 저해한다. 북한이 "강성대국"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시도되었던 실패한 미사일 발사는, 북한이 기본에 집중하기보단 엉뚱한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을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90년대에 무간섭주의 홍콩이 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대안적 북한은 더 외부 지향적인 전략을 지니고, 핵대결을 피하고, 기근 대비를 제대로 하고,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고, 사설시장이 작동하게 하고, 임시방편을 피하는 방법으로 정말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남한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과 같은 영양실조는 끝내고 지속적 개발의 토양은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북한은 오늘날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