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추 철학적으로, 열정적인 감성을 담아 나꼼수를 까고 싶나?
그것도 유명 철학자에 기반해서? 그렇다면 이 글을 읽어라.
짧은 칼럼 수준의 글에 불과하다. 하지만 마치 영양제와 같은 글이다. 
읽고 나꼼수 까라. 두 번 까라. 백 번 천 번 까라.




떼는 거짓이다
한 개인*에게 바치는 글
쇠렌 키에르케고르
Soren Kierkegaard
해설/번역: 박성현
출처 : www.duduri.net



해설1
1815년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까지, 유럽은 정확하게 백 년에 걸친 평화를 누렸다. 이 시기에 평화가 유지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영국의 힘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를 팍스-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라고 부른다.
그러나 필자는 이 시기를 <백년의 타락>이라고 부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시기에, 전쟁을 염두에 둔 근대 국가 시스템 사이의 경쟁이 불붙었기 때문이다. 패권적 근대 국가 시스템의 경쟁은 국가를 괴물로 만든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세상과 자아 사이의 긴장이 증발하고 그 자리를 국가 혹은 민족 혹은 계급 사이의 긴장이 차지하게 되었다. 세상과 자아 사이의 긴장이 떼와 떼 사이의 긴장으로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바뀌어 간 것이다. 그 떼의 이름이 국가이든, 민족이든, 계급이든.
<백년의 타락>과 함께 했던 평화는 권총 한 자루로 끝났다. 1914년 6월 28일, 슬라브 민족운동에 관계된 스무 살짜리 앳된 청년이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의 황태자 부부를 권총으로 쏘아 암살했다. 처음에는 누구도 이 사건이 4년에 걸쳐 유럽 국가들 사이에 벌어지게 될 끔직한 전쟁의 뇌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든 유럽 열강이 전쟁판에 뛰어 들어 치고 받는 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남아프리카 일대에서는 독일계 식민자와 영국계 식민자 사이에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다. 마침내 1917년 4월, 미국이 끼어듦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대전이 되었다. 막판에는 일본, 뉴질랜드, 호주까지 뛰어들어 중국과 태평양에 있는 독일 식민지를 강탈했다.
이 전쟁에는 약 6 천 만 명의 병사들이 동원되어 그 중에 9 백만 명이 죽었다. 전쟁에 참여한 4 개의 거대 제국이 없어졌다. 오스만-투르크와 오스트리아-합스루르크는 공중 분해 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볼셰비키 혁명으로 최초의 공산 국가가 되었으며 독일 제국은 독일 공화국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또 하나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일까? 1920년에 출간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정립한 책은 이렇게 음울하게 쓰고 있다.
“세계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점을 두고두고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번 전쟁에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2
전쟁 전,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이룬 세상을 ‘문명’이라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야만’으로 규정지었다. ‘우리 유럽인들’(We Europeans)이라는 두 단어에는 당시 유럽인들의 자부심과 교만함이 모두 들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문명을 만든 ‘우리 유럽인’들 사이에 벌어진 참혹하고 야만적인 살육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거대한
1 해설은, 필자가 지은 개인주의에 관한 책(2011년 1월 출간 예정)에서 인용.
2 Charles Repington, ‘The First World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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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전쟁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백년의 타락>이 진행되는 동안 세상과 자아 사이의 건강한 긴장은 사라지고, 오직 떼와 떼 사이의 갈등만 남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유럽인들’이란 말 속에는 유럽이 아닌 나머지 지역의 사람들을, 얼마든지 군사력으로 깨부수고 착취하고 수탈해도 좋은 대상물로 보는 교만함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1856년 청(淸)의 관리가, 아편을 밀반입시키려는 영국 상선을 단속하자 영국은 “무역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청(淸)을 박살냈다. 1860년 아편전쟁이 끝난 후 청(淸)은 매우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었고 80톤 이상의 은을 배상금으로 지불했다. “유럽 바깥 세상의 일에 관해서는 윤리나 도덕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라는 끔직한 사고 방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태도를 살펴 보면, <백년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독일 지식인들은 집단 성명을 통하여 독일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 전쟁이 ‘문명을 보위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떠들었다. 존 듀이와 같은 영미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확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찬양했다.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각자 자신이 속한 나라의 입장을 옹호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당대 유럽 최고의 지성이 있던 에밀 뒤르켕은 아무 망설임 없이 프랑스의 전쟁을 지지했다. 수많은 그의 제자들이 전사했으며 마침내 그의 외아들이자 사상적 후계자인 앙드레마저 1915년 전선에서 숨졌다. 뒤르켕은 이 때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1917년에 숨을 거둔다. 뒤르켕은, 유럽 증후군에 의해 파산한 지식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뒤르켕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또 한 명의 위대한 유럽 사상가인 막스 베버 역시 <유럽 증후군>에 의한 마비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독일 제국을 위해 육군 병원 감독관으로 일한다. 그러나 1918년 독일 제국의 패배를 전후해서는 입장이 180도 바뀌어, 급진 좌파의 노동자-군인 위원회에 관계하여 독일 볼셰비키 혁명 운동을 지지했다. 패전 후에는 다시 한 번 입장이 바뀌어 독일 공화국 건립을 위한 헌법 기초 작업에 참여한다. 이때 베버는,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 없이 긴급조치권을 발동할 수 있는 독소 조항3을 집어 넣었다. 1933년 독일 공화국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 조항을 이용하여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1914년에서 1918년에 이르는 5년 동안의 막스 베버의 행적은, 좌충우돌, 우왕좌왕의 연속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정치 세력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거의 유일한 집단은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볼셰비키였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곧 바로 “총부리를 거꾸로 돌려라! 전쟁이 아니라 혁명을 해야 한다!”라는 대담한 선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가 아니었다. 이들은 러일전쟁(1904~1905)을 겪으면서 전쟁이 혁명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혁명의 기회를
3 바이마르 헌법 48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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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들의 반전(反戰)-혁명 운동은 국가 사이의 전쟁을 계급 전쟁으로 바꾸자는 주장이었다. 국가 대 국가라는 프레임이 계급 대 계급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뀌었을 뿐, 참혹한 떼와 떼 사이의 싸움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백년의 타락>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의 개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사상가는 거의 없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 기술, 제도, 문화, 사상, 지식을 자랑하는 대륙 전체에서 백 년 동안, 키에르케고르와 니체, 단 두 명의 사상가만 유럽인의 자아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1841년부터 1850년까지, 10년 동안 글을 쓰고, 1855년에 마흔 두 살의 나이로 숨졌다. 그의 사상은 자아, 진실, 신앙?이 세 가지 화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는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독창적이고 특이한 사상가이지만 현대의 실존주의, 개인주의 사상의 문을 열어젖힌 사람이다. 그의 짧은 에쎄이 ‘떼는 거짓이다’는 그의 사상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짧지만 소중한 글이다.
“<진실을 옹호하는 증인>은 진실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 결코 떼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진실에 관하여 떼가 최종적 결정자, 최종적 판단자가 되는 상황에서는, <진실을 옹호하는 증인>은 떼를 혐오합니다. 마치 고결한 처녀가 난잡한 나이트클럽을 혐오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진실의 증인>은, “진실이냐 아니냐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떼이다”라고 말하는 인종들에 대하여 ‘거짓의 하수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 혹은 그와 비슷한 분야에 관해서 유효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지적(知的), 영적(靈的), 종교적 영역으로 옮겨 놓으면 모두, 혹은 부분적으로 거짓 주장이 되는 법입니다….
떼는 거짓입니다. 영원을 기리는 자세를 배울 수 있을 때 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시대의 비참한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저는 울고 싶어질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비참은, 고대의 가장 비참했던 상황과 비교하더라도 여전히 더 비참합니다. 매일 매일의 언론과 익명성은 이른바 “공중(公衆)”의 참여가 있을 때마다 더 정신병적인 상태가 될 뿐입니다. 추상적 개념에 불과한 공중은 이제, “우리 공중이야말로 진실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최종 결정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 “공중의 집회”조차 한번도 열린 적 없습니다…
언론을 이용하여 익명의 인간이 매일 매일 자신이 주절거리고 싶은 이야기들 (심지어 지적(知的), 윤리적, 종교적 사안에 대한 이야기까지)을, 구체적 상황에서 얼굴을 마주하고는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 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인간은, 아가리?이 경우에는 도저히 ‘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를 벌릴 때마다 수 만의 수 만 배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동시에, 한번에’ 말합니다. 수 만의 수 만 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서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참회할 줄 모르는 것에도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는 참회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괴물이 등장했습니다. 이 괴물은 바로 <익명의 인간>입니다. 이 <익명의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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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깨비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 역시 <익명의 인간>, 즉 허깨비입니다. 이른바 공중, 그리고 <익명의 독자> 역시 허깨비, 허깨비일 뿐입니다…
진실은 거짓을 혐오합니다. 진실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 자체의 강화일 뿐이며, 사람에게 발 빠르게 다가서지도 못합니다. 진실은 눈에 쏙 들어오는 환상적인 모습을 띄지 않습니다. 거짓만이 그러한 모습을 띌 수 있습니다. 진실을 전하는 주체는 항상 개인입니다. 진실이 전해질 때에는 오로지 개인 단위에서만 전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개인만이 진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개인이 될 수 있으며, 오직 개인 사이에서만 진실이 소통될 수 있습니다. 진실은 추상화 된 것, 환상적인 것, 비개인적인 것과는 반대됩니다. 떼는 비개인적입니다. 떼의 다른 이름인 “공중” 역시 비개인적일 뿐입니다. 떼의 다른 이름인 “공중” 역시 비개인적일 뿐입니다. 그 까닭에 “공중”은 하나님을 매개자로 삼지 못 합니다. 비개인적 관계가 <개인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매개자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곧 진실이며 매개자이기 때문에, “공중”은 원천적으로 진실에 다가설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키에르케고르는 자아, 진실, 신앙을 중심 화두로 삼아 유럽 문명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 글을 쓴 1846년 무렵에, 유럽 문명은 이미 떼가 지배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키에르케고르는 밝힌다. 1848년, 혁명의 광기가 유럽을 휩쓴 후에 이 글에 붙인 주석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은 1846년에 처음 쓰여졌고 그 이후에 수정과 확대를 거쳤다. 이 글의 첫 부분은 1846년 당시의 나의 정서적 상태, 즉 속악한 글이 판치고 있는 잔혹한 문필계에 내 자신을 드러냈던 때4의 무드를 나타내고 있다. 삶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삶은 그 이후, 떼가 <진실에 관한 최종 판단자>의 역할을 자임할 때, 떼는 거짓이라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5 그 동안 펼쳐졌던 사건들(1848 혁명에 의한 혼란과 광기?필자)이 나를 도와 준 셈이다. 그 사건들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1846년 당시에는 나의 주장은 미약하고 외로웠을 뿐 아니라,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소리’라고 받아들여 졌었다. 지금은 삶 자체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소리가 큰 메시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내 이야기는 그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금, 삶이 보내고 있는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내가 해 왔던 이야기와 동일하다.”
키에르케고르가 죽고 난 후 25년이 지난 1880년이 되자 니체가 자신의 완숙한 사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키에르케고르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과격하게 유럽인의 정신 상태를
4 키에르케고를는 1845년 12월부터 이듬해 봄에 이르기까지, 문필계에서 집중 포화를 당하고 조롱받았다.
5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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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했다. 덴마크 ‘촌동네’의 기이한 사상가였던 키에르케고르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버렸기 때문에 니체는 키에르케고를 알지 못 했다. 그럼에도 두 사상가는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점이 있다. 두 사상가 모두, 유럽 문화는 이미 <떼의 문화>가 되어버렸다는 점, 진실이 조롱당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점, 자아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자아와 개인을 지켜내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두 사상가는 극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키에르케고르의 경우, “개인의 참된 신앙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하여, 니체는 “진실을 옹호하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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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 누구인지 모르는 님이기에 아무 구질구질한 고려 없이, 오직 진실된 마음으로 바칩니다. 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저는 알지 못 합니다. 님이 어디에 사시는지 저는 알지 못 합니다. 님이 누구신지 저는 알지 못 합니다. 그러나 님은 저의 희망이고, 기쁨이고, 자랑이고,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명예입니다.
님이 진실된 마음으로 제 글을 볼 것이라는 점이 저를 안도케 합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내내 저는 진실된 마음을 가진 분께만 읽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마음을 썼습니다. 만에 하나,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 제가 쓴 글을 읽는 것이 패션이 되는 세태가 온다면, 나아가 제 글을 읽은 척 하며 자랑하는 세태가 된다면, 그런 세태에 휩쓸린 독자는 진실된 독자가 아닙니다. 그런 독자의 경우 제 글에 대한 오해만 얻게 될 뿐입니다. 또한 저에게는 ‘독자를 얻었다’는 착각을 줄 뿐입니다.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저는 최선을 다해 이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은 제게 가능했던 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영혼과 마음의 무드(mood)에 일어난 변화이며, 제가 원한 변화이기도 합니다. 이 변화는, 영혼과 마음의 변화 그 자체 이상의 것을 가져오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그 변화 그 자체 이하의 것을 가져오지도 않습니다. 이 변화는 “삶”, “진실”, “도(道)”에 대한 철저하고도 사려깊은 관점 그 자체라고 할 것입니다.
떼가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는 인생관이 있습니다. 진실은 떼를 확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짓이 있다는 인생관도 있습니다. 이 인생관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각 개인이 홀로 있을 때에는 진실되지만 개인이 모여서 떼를 이루면 (그리하여 “떼”가 결정, 투표, 소음, 목청에 관해 중요성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거짓이 등장하게 된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떼”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상을 받는 것은 항상 개인이다" (고린도 9:24)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영원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 기독교답게 진실됩니다. 상은 비교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모든 사람이 그 ‘상을 받는 개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을 받는 것은 여전히 그 개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할 때에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및 자기 자신과 이야기해야 합니다?상을 받는 것은 개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신성(神性)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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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사람, 분주한 사람, 오지랍이 넓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을 받는 것이 한 개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나님은, 대여섯 명이 함께 모인 그룹에 대해 상을 주실 확률이 높다. 그룹을 이룰 때 각 개인의 인생은 훨씬 더 확실해지고 편안해 지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떼로 움직이는 편이, 현실 세계에서 보다 자주 일어날 확률이 더 높고, 이 세상에 속한, 감각의 영역에 속한 상에 관해서는 진실일 것입니다. 떼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되면, 떼를 중시하는 관점은 곧 하나님과 영원과 “인간에 깃든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떼가 곧 유일한 진실이 될 것입니다. 떼는 참된 진실을 절멸시키고 우스개 소리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참된 진실이 있던 자리에 현대적인 (실은 케케묵은 비종교적 태도에 불과한) 관점을 들어 앉힐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이성을 가진 종족에 속하는 하나의 샘플에 지나지 않은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종족, 샘플이 개인보다 우월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혹은 아예 개인은 사라지고 오직 샘플만 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은 검푸른 밤하늘처럼 세속(temporal) 위 까마득한 곳에 하늘덮개를 이루고 있고, 하늘의 하나님은 이 숭고한 축복 속에서도 현기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 위대한 심판관은 “한 개인이 상을 받는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각각 한 개인으로서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각각 한 개인으로서 ‘상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상을 받는 것은 한 개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떼가 있는 곳, 혹은 떼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여부에 결정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곳에서는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해 일하고, 살고, 노력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되고, 오직 세속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만 존재하게 됩니다. 영원한 것, 진정으로 결정적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는 떼가 아니라 개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기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길을 트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떼”는 거짓입니다.
떼는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떼는 개인을, 참회할 줄 모르는 사람,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으로 하여금, 사안에 대하여 충분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도 행동하게 만듦으로써 그 행동에 관한 책임을 희석시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떼’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든 이미 죽은 사람들이든, 천한 계급이든 귀족이든, 부호든 가난뱅이든 상관없이 ‘떼’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모든 경우를 뜻합니다. 보십시오! 가이우스 마리우스6에게 감히 손을 대려고 했던 군인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나 설사 여인들이라 할지라도 스스로를 ‘떼’라고 의식하는 순간, 그리하여 무슨 짓을 하든 누가 그 짓을 했는지, 누가 그 짓을 시작했는지 콕 집어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희망이 생기는 순간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잡아 죽이려고 덤벼들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지독한 거짓이 어디 있습니까!
6 줄리어스 시저의 이모부. 카리스마 있는 명장군으로서 호민관을 일곱 번이나 역임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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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에 관한 첫 번 째 거짓은, “떼는 떼에 속하는 각 개인 한 명이 하는 행위만을 한다”, 혹은 “떼는 떼에 속하는 모든 개인이 하는 행위만을 한다’는 착각입니다. 이런 착각을 가진 사람은, 떼란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떼에는 손도, 발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죽이게 된다면 그것은 어느 한 개인이 두 손을 사용해서 마리우스를 해친다는 것을 뜻하므로, 떼에 속한 다른 사람의 손이 사용된 바 없다는 식입니다. 물론 떼에게는 손, 발이 없으므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떼’에 관한 두 번 째 거짓은 떼가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천만에! 가장 비겁한 개인이라고 할 지라도 떼만큼 비겁한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개인이라면 마리우스를 해칠 용기를 가지든가 혹은 그러한 용기가 없다는 점을 인정할 용기를 가지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떼는 다릅니다. 떼 속으로 도망쳐 들어간 개인은 개인됨으로부터 도망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비겁을 전체의 비겁에 보탭니다. 이 전체의 비겁이 바로 떼, 그 자체입니다.
가장 고귀한 존재인 예수와, 이제껏 존재한 바 있는 모든 인간, 또한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한 개인으로서 홀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단 둘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과연 그 개인이 예수에게 걸어가서 그 피와 식은 땀에 절은 얼굴에 대고 침을 뱉을 수 있을까요?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용기 혹은 무례함을 가진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죽음을 맞이했을 당시 사람들은 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같은 짓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소름 끼치는 거짓입니까!
떼는 거짓입니다. 따라서 그 직업이 떼 몰이꾼인 사람보다 더 심하게, “개인이 된다는 것, 인간이 된다는 것”을 멸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개인이 이 떼 몰이꾼에게 다가선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떼 몰이꾼은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기껏 한 명이라니! 성에 차지 않겠지요. 떼 몰이꾼은 갖은 교만을 떨어서 그 개인을 내칠 것입니다. 최소한 백 명쯤은 되어야 상대할 가치가 있겠지요. 만약 천 명쯤 되면, 떼 몰이꾼은 떼 앞에 납작 엎드려서 양손으로 땅바닥을 문지를 것입니다. 얼마나 구역질 나는 거짓입니까!
이래서는 안 됩니다. 만약 한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을 대할 때에는 마땅히 “개인이 된다는 것, 인간이 된다는 것”을 존중해 줌으로써, 진실된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만약 그 ‘개인으로 존재하는 이’가 가난한 거렁뱅이라면 그 사람을 마땅히 집 안의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사람에 따라 말투를 달리해야 한다면, 가장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로 그 이를 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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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수 천, 수 만 명의 사람이 모이는 경우라면, 그리고 그 사람들이 투표에 의해 “진실’을 결정하는 경우라면,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죄로부터 구해 주소서!”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지는 않더라도, 떼가 최종적 의사 결정자가 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거짓과 기만이라는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각 개인으로서 상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야말로 영원한 진실임을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떼는 거짓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이유7는, 비록 모든 사람을 향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떼와는 아무런 관계를 맺기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기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바로 떼에 의해 박해받은 것입니다. 예수는 정치집단을 만들기 원하지 않았고, 투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그 자신인 존재, 즉 진실이 되고자 했습니다. 진실은 한 개인에게 진실 자신을 관계시킵니다.8 따라서 진실 속에서 진실을 옹호하는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서 이미 순교자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진실 속에서 진실을 옹호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 태아 역시 한 명의 순교자입니다. 이 경우, 엄마 뱃속에서 이미 순교가 이루어지는 셈입니다.9
떼의 환심을 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약간의 재능, 그럴싸한 거짓, 사람들의 욕구와 열정에 관한 약간의 이해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님과 저는 진실을 옹호하는 증인이 되고자 합니다. 님과 저 같은 진실의 증인은 결코 떼와 거래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을 옹호하는 증인은 당연히 정치를 멀리해야 합니다. 또한 정치적인 사람으로 오해받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저희, <진실의 증인>들의 일은 모든 사람과 관계 맺고자 하지만, 항상 그 사람들 하나 하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관계 맺고자 해야 합니다. 저희는 길이나 골목에서 친구를 만나듯 사적(사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며, 떼를 해체시키기 위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떼에게 말할 때에는, 떼를 유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떼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무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서 한 명의 개인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진실을 옹호하는 증인>은 진실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 결코 떼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진실에 관하여 떼가 최종적 결정자, 최종적 판단자가 되는 상황에서는, <진실을 옹호하는 증인>은 떼를 혐오합니다. 마치 고결한 처녀가 난잡한 나이트클럽을 혐오하는
7 예수는 당시 유태인의 주류를 이루었던 바리새(Pharisee)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바리새들은 유태 근본주의자들이었며 열심당(Zealot) 운동의 배경 세력이었다.
8 키에르케고르의 핵심 사상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아(self)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관계시키는 관계’라고 표현한다. 이는, 자아와 세상 사이의 긴장(관계) 그 자체가 곧 자아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를 ‘자아의 중첩구조’라고 부른다.
9 키에르케고르는 매우 진지한 척 하면서도 천연덕스러운 유머를 이야기할 때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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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진실의 증인>은, “진실이냐 아니냐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떼이다”라고 말하는 인종들에 대하여 ‘거짓의 하수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 혹은 그와 비슷한 분야에 관해서 유효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지적(知的), 영적(靈的), 종교적 영역으로 옮겨 놓으면 모두, 혹은 부분적으로 거짓 주장이 되는 법입니다.
제 말이 좀 과장되게 들릴지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는, 제가 말하는 진실이란 “영원한 진실”을 뜻한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정치와 같은 세속의 일은 “영원한 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영원한 진실”을 현실 생활에서 구현하려는 정치 활동이 있다면, 그리고 그 “영원한 진실”이 참된 것이라면, 그러한 정치 활동은 곧바로 가장 비정치적인 활동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떼는 거짓입니다. 영원을 기리는 자세를 배울 수 있을 때 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시대의 비참한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저는 울고 싶어질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비참은, 고대의 가장 비참했던 상황과 비교하더라도 여전히 더 비참합니다. 매일 매일의 언론과 익명성은 이른바 “공중(公衆)”의 참여가 있을 때마다 더 정신병적인 상태가 될 뿐입니다. 추상적 개념에 불과한 공중은 이제, “우리 공중이야말로 진실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최종 결정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 “공중의 집회”조차 한번도 열린 적 없습니다.
언론을 이용하여 익명의 인간이 매일 매일 자신이 주절거리고 싶은 이야기들 (심지어 지적(知的), 윤리적, 종교적 사안에 대한 이야기까지)을, 구체적 상황에서 얼굴을 마주하고는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 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인간은, 아가리?이 경우에는 도저히 ‘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를 벌릴 때마다 수 만의 수 만 배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동시에, 한번에’ 말합니다. 수 만의 수 만 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서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참회할 줄 모르는 것에도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는 참회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괴물이 등장했습니다. 이 괴물은 바로 <익명의 인간>입니다. 이 <익명의 인간>은 허깨비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 역시 <익명의 인간>, 즉 허깨비입니다. 이른바 공중, 그리고 <익명의 독자> 역시 허깨비, 허깨비일 뿐입니다.
오, 하나님! 이런 비참한 상태를 스스로 ‘기독교 국가’10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과연 언론을 통해서 “진실”이 거짓과 잘못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착각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떼를 이루고 있을 때에 과연, 입에 쓸 수도 있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입니까, 아니면, 항상 입맛에 꼭 맞을 수 밖에 없는 거짓을
10 19세기 유럽은 국가교회체제(Christendom)였다. 영국의 국교회, 프랑스의 카톨릭, 프러시아의 ‘프러시아 통합교’(루터파와 캘빈파의 통합 교회), 덴마크의 루터교, 러시아의 러시아정교 등 국가와 기독교가 결합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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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입니까? 진실을 받아 들일 때에는, 이제껏 스스로 거짓과 타협해 왔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고통스런 대가를 지불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진실이 쉽게 이해됩니까, 아니면 거짓에 쉽게 넘어갑니까? 거짓에 넘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런 지식, 교육, 훈련, 절제, 자기 부정, 진지한 동기, 참을성 있는 노력이 필요 없는 법 아닙니까?”
진실은 거짓을 혐오합니다. 진실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 자체의 강화일 뿐이며, 사람에게 발 빠르게 다가서지도 못합니다. 진실은 눈에 쏙 들어오는 환상적인 모습을 띄지 않습니다. 거짓만이 그러한 모습을 띌 수 있습니다. 진실을 전하는 주체는 항상 개인입니다. 진실이 전해질 때에는 오로지 게인 단위에서만 전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개인만이 진실입니다. 진실은 하나님이 눈길 앞에서만 소통될 수 있습니다. 진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소통될 수 있습니다. 진실은, 하나님을 매개자로 삼을 때에만 소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곧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개인이 될 수 있으며, 오직 개인 사이에서만 진실이 소통될 수 있습니다. 진실은 추상화 된 것, 환상적인 것, 비개인적인 것과는 반대됩니다. 떼는 비개인적입니다. 떼의 다른 이름인 “공중” 역시 비개인적일 뿐입니다. 그 까닭에 “공중”은 하나님을 매개자로 삼지 못 합니다. (비개인적 관계가 <개인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매개자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곧 진실이며 매개자이기 때문에, “공중”은 원천적으로 진실에 다가설 수 없는 것입니다.
개인을 존중하는 것, 모든 사람 각각을 조건 없이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진실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입니다. 윤리적으로,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떼를, 진실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최종 판단자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 역시 아닙니다. ‘이웃’이야말로 평등11의 진정한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이 진실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사람 사이에는 조건 없는 평등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이야말로?물론 저 같이, 그 사랑이 참으로 미약하고 불완전하다고 하더라도?평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너의 떼를 사랑하거라”란 말은 없습니다. 또한 “진실에 관한 최종적 판단자는 바로 떼이니라”는 말도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부정이지만 떼를 사랑하는 것, 혹은 떼를 사랑하는 척하는 것, 떼를 <진실에 관한 최종 판단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권력과 힘을 얻기 위함일 뿐입니다. 세속의 갖가지 이익을 얻기 위함일 뿐입니다. 그러나 <떼 사랑>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떼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떼야 말로 진실의 최종적 판단자이다”라는 관점은 노골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사람들은 흔히 떼가 거짓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떼가 받아들인다면 아무
11 이 글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급진 혁명의 기운이 꿈틀대던 1845년에 처음 발표된 이후 계속 고쳐졌다. 키에르케고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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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떼를 <진실에 관한 최종 판단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스스로 약하고 무력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낱 개인이 힘을 가지고 있는 다수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떼는 <진실에 관한 최종 판단자>가 아니다!”라는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떼 한 가운데를 파고 드는 과업을 할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과업은 자기 자신을 비웃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실에 관한 최종 판단자>가 떼라는 관점은 자신의 약함과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별로 매력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 까닭에 노골적으로 이 관점을 밝히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이 관점은 제법 그럴 듯한 생각처럼 보입니다. 나름대로 공정한 것 같고,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 것 같고,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떼가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떼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인 존재, 즉 개인이 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스스로 ‘다중’(Viele)이 됨으로써, 자신이 개인이 되는 것을 스스로 막지 않는 한!
떼가 된다는 것, 자신의 주위로 떼를 긁어 모은 다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삶입니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더라도 떼를 모으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게 되면, 그 말을 듣는 개인은 쉽게 마음을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 영향력, 명성,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떼입니다. 그래서 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입니다. 떼는 폭군처럼, 한 개인을 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보며 개인을 무시합니다. 떼는 세속의 방법과 힘을 사용하여 ‘개인’이라 불리는 <영원한 진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참조?키에르케고르]
이 글은 1846년에 처음 쓰여졌고 그 이후에 수정과 확대를 거쳤다. (이 글의 첫 부분은 1846년 당시의 나의 정서적 상태, 즉 속악한 글이 판치고 있는 잔혹한 문필계에 내 자신을 드러냈던 때12의 무드를 나타내고 있다.) 삶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삶은 그 이후, 떼가 <진실에 관한 최종 판단자>의 역할을 자임할 때, 떼는 거짓이라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13 그 동안 펼쳐졌던 사건들(1848 혁명에 의한 혼란과 광기?역자)이 나를 도와 준 셈이다. 그 사건들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1846년 당시에는 나의 미약하고 외로운 주장을 사람들은 ‘우스꽝스러운 과장된 소리’라고 받아들여 졌었다. 지금은 삶 자체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소리가 큰 메시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내 이야기는 그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삶이 보내고 있는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내가 해 왔던 이야기와 동일하다.
12 키에르케고를는 1845년 12월부터 이듬해 봄에 이르기까지, 문필계에서 집중 포화를 당하고 조롱받았다.
13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키에르케고르가 붙인 주석
* 이 글은 수정되고 확장되었다. 이 글은 내가 지은, ‘다양한 마음의 상태에서 나오는 진지한 이야기들’(영어 ‘Edifying Discourses in Diverse Spirits’, 1847)에서 나오는 인물인 <한 개인>에게 바치는 글이다.
** 모든 세속의, ‘이 땅의’ 일에 관해서는 떼의 뜻이 유효하며, 심지어 이 유효성에 대해서는 떼가 <최종적 결정자>라는 이야기는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이를 부정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내가 집중하고 있는 문제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나는 윤리에 대하여, 윤리적-종교적인 것에 대하여,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측면에 있어서, 떼를 <최종 판단자>로 떠받들게 되면, 떼는 거짓이다.
*** 예를 들어, 십만 명이 모인 자리라 할지라도, 설교가 이루어지고 진실이 선언되는 경우, 이에 대해 반대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 반론은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 십만 명커녕 단 열 명이라도 모여서 투표를 함으로써 떼가 <진실에 관한 최종 판단자>로서의 역할을 한다면, 반드시 거짓이 있게 마련이다.
**** 내가 말하는 떼는 순수히 논리적 개념 정의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떼’라는 개념에는 흔히 계층적 의미가 부여되지만, 나는 ‘떼’를 전혀 그런 뜻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계층적 의미를 가진 떼는, 인간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종교와 전혀 상관없이, 사람을 ‘떼와 귀족’으로 양분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러한 비인간적이고 불평등한 구분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니다! 내가 말하는 떼는 머릿수의 문제일 뿐이다. 귀족이든, 백만장자든, 고위관리든 머릿수가 문제가 될 때에는, 떼일 뿐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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