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철로 만든 갓을 쓰고 다니다가 배고프면 벗어서 밥해먹었다. 살아생전 흙으로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양반같지 않은 양반 이지함에 얽힌 이야기이다.
토정비결이라는 요사스러운 책의 저서라고 민간에 알려진(사실 토정비결을 진짜 이지함을 지었는지는 불분명) 저자이며, 이로 인해 무속인들이 성리학자였던 그에게 기도를 드리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진다.
조선시대의 3대 기인 중 한 사람 토정 이지함에 대해 알아보자.
(나머지 2명은 북창 정렴. 매월당 김시습)
이지함(1517년~1578년)
이름있는 명문가의 아들.
그는 고려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세조때 이계전의 4대손이다. 이지함 위로는 3명의 형이 있었으며, 그는 그 중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다. 훗날 이지번의 아들이 선조대 동인과 북인의 우두머리가 되는 이산해이다. 즉 이지함의 조카가 영의정 이산해.
이처럼 이지함은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아주 번듯한 양반집안이었다. 어쩌다 이런 또라이가 됐盧!!
아버지가 14살에 죽고, 어머니가 16살에 죽었다.
그 와중에 이지함은 정종(조선제2대왕)의 증손인 이성랑의 딸과 결혼을 하게된다. 이때까지 이지함은 그냥 평범한 양반이었다. 23살에 아들낳는다.
이치함이 과거시험을 준비하지만 형 이지번이 시험에 번번히 낙방하고만다. 형보다 앞서 과거시험에 합격하는건 당시 조선에서는 꺼려졌다고 한다. 이지함 역시 형이 합격할떄까지 과거시험을 못보고 공부만 해야 했다. 이때 이지함은 하도 할게 없어 서경덕의 제자로 들어가 공부까지 한다고 한다. 이지함에 30살이 되던해 드디어 이지번이 과거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이지함도 슬슬 시험을 보러 갈 때가 됬다.
이지함이 33살이 되던때 죽마고우였던 안명세라는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관이었던 그는 을사사화때 윤형원일파의 일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걸 윤형원일파가 보게 되었고, 그를 모함해 죽였다. 이때부터 그는 관직에 나가기 망설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홍남의 고변사건이 터진다. 이홍남의 동생 이윤흥이 왕에게 불충했다고 고했는데, 이 역모사건의 우두머리가 이지함의 장인인 이정랑이라는 이름이 거론됬다. 이지함의 처가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이정랑과 후손들은 왕실족보에서도 전부 삭제됬다고 한다. 이지함도 역시 연좌법에 의해 양반에서 천민신세로 전락한다.
이때부터 이지함은 처가식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다고 한다. 흙집도 이때부터 살았다고한다.
이지함이 1570년 이홍남의 고변사건의 죄가 법적으로 사면되고 이지함은 자유인신분이 된다.
문돌이지만 숫자를 좋아했던 이지함.
이지함을 알기전에 그의 스승이었던 서경덕을 잠깐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조선시대는 성리학이념의 문돌이들이 지배하던 국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몇몇 별종들이 존재하기는 마련이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기일원론의 주기론의 대가 서경덕이었다. 서경덕 역시 정치에 연을 끊고 학문과 후학양성에 몰두했던 학자이다. 과거시험은 장원급제 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스승이 없이 서당에서 한문을 떼고, 독학으로 학문을 깨우쳤다.
서경덕이 기생 황진이의 섹도시발을 무시하고, 글을 읽었다는건 유명하다.
무시할수 있盧
서경덕은 기일원론을 주장하는데 중요내용은 이렇다.
이가 곧 기이고, 기가 곧 이이다. 라는 것이다. 생명이 살아있을때는 기가 있지만, 죽었을때 그 기가 빠져나가며, 그 기는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의 힘은 영원하며, 생명체의 죽음역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기에 환원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우주는 하나이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물리학의 에너지보존법칙과 유사하다고도 말한다.
어쨋든 서경덕의 학문적 특징은
도덕적인 철학적인 면이 아닌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대한 탐구가 모든것. 이가 기고 기가 이다. 이기이기야 그것이 기일원론이다.
이지함은 이 서경덕에게 들어가 배움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지함 역시 여느 선비들처럼 엣헴 엣헴 하면서 조선시대의 주류성리학에 녹아들지 않고 기행을 펼칠수 있는 머가리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이지함은 서경덕에게서 공부한 것중 상수학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상수학의 대가가 서경덕-이지함 이라는 썰이 있다.
상수학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물리와 같은 개념이다. 어떤 현상을 숫자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숫자로 점괘를 표현해 사람의 미래를 보는것. 그 죳사기같은 것도 상수학의 일종이다.
서학의 과학이 바로 동양에서 말하는 상수학이었으며, 단지 서양은 자연현상을 탐구하면서 발전시켰다면 동양의 상수학은 사주나 쳐보는 그런 일에 사용했다는 것이 다를뿐이다. 특히 한국은 옛날부터 천지신명께 복을 비는 구복적 민간신앙이 발달해왔다. 상수학이 이 구복적 신앙과 결합해 사주로 발전했을수도 있다. 사주보면서 복을 찾는 것이다.
이걸 조합해 미래를 점보는 것이 사주팔자이다.
그래서 조선후기 서양의 과학지식이 들어오면서 일부 깨어있는 양반들이 기존의 사주나 쳐보는 상수학을 비판하고 서양과학의 수학의 개념으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상업 어업 제조업등 돈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
이지함이 살던 마포구일대는 한강을 통해 물류가 끊임없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자연스레 이지함은 이 영향을 받아 이지함은 직접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배타고 나가 장사를 하기도 한다. 섬에 들어가 박을 심어 바가지를 수확해 팔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처가식구들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하였는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어 수천섬을 벌여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가난한 백성들의 구제에 쓰고, 정작 자신들의 식구는 여전히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키야 이게선비정신 아니盧
물론 야담이지만, 이지함이 배를 능수능란하게 다뤄 제주도까지 왔다리갔다리 세번정도 했다는 말도 있다. 구란지 진짠지 알수 없지만, 그만큼 이지함이 배를 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지함의 제주도 일화 중 하나
이지함이 제주도를 가다 풍랑을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하자 쪽배 네 귀퉁이에 바가지를 달아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했다 제주목사가 이지함을 알아보고 관사로 모신뒤 기생을 몰래 불러 이지함을 유혹해 성공하면 창고에 가득담긴 쌀을 주겠다 했다. 기생은 온갖 섹도시발을 했으나 이지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지함은 자신의 장사수완을 발휘해 어염상고(고기와 소금등으로 장사해 벌어다가)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주었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장사수완과 함께 덕이 있는 양반으로 선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여색도 없었다.
이런 얼굴의 기생이 이지함 앞에서 응딩이 흔들흔들. 나같아도 좆이 안서겟盧
이런 이지함의 기행은 조선팔도에 소문이 나게 되고,당대 최고의 학자 조식, 그리고 막 천재소리 듣던 이율곡 등등 유명인사들도 토정 이지함을 알고 이지함과 교류를 하며 지낸다.
다음은 조식이 이지함을 보고 했던 말이다.
"깨끗한 거울과 같은 마음에 청렴하고 욕심이 적고 그 행실이 바르게 서 있어서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다."
늙은나이에 자신의 꿈을 펼치다.
이지함은 56세의 늙은 나이에 그 유명세를 등에 업고 현감이라는 관직에 천거를 받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또 같은거다. 조선시대 3대 기인답게 첫 부임할때부터 남루한 옷차림으로 짚신을 신고, 대나무지팡이를 짚으면서 걸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그가 탐관오리인줄 알고 만든 진수성찬을 마다하고, 잡곡밥과 나물국 한그릇 뚝딱했다고한다. 그가 부임한 곳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가난했다던 포천이었다.
왠 거지새끼가 사또님있는곳이 앉으셨다.
이지함은 포천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조정에 상소를 하나 올리게 된다.
포천현의 상황은 이를테면 어미 없는 고아비렁뱅이가 오장이 병들어서 온 몸이 초췌하고 고혈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저녁입니다.
(중략)
전라도 만경현에 버려져 있는 양초주와 황해도 초도청을 포천에 비지로 소속시켜 주면, 고기잡는 일과 소금 굽는 일을 일으켜 수년 내 수천 석을 얻어 백성구제에 힘쓸 것입니다.
- 이포천시상소
즉 포천의 백성들이 지금 굶어뒈지기 일보 직전이니 포천에 일부 땅을 주면 이를 일궈서 백성을 먹여살리겠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의 밑바탕은 그동안 자기가 살아오면서 했던 일들을 정책적으로 실천에 옮기려는 것이었다. 조선팔도의 널부러져 있는 수많은 자원들의 개발을 통해 나라에 도움이 되고, 그것이 백성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 그것이 이지함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조선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지함은 이에 실망하고 관직을 그만둔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내용이 실록에도 쓰여있다.
선조 7년 1574년 갑술 8월 1일 포천현감 이지함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함은 원으로 있으면서 스스로의 처신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 고을이 빈약하여 곡식이 모자라자 조정에 건백하여 바닷가 마을의 통발을 자신의 녹봉대신 받아 곡식을 사서 빈약한 재정을 보충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이 따라주지 않았다. 지함은 본디 고을 원으로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곧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돌아갔다.
즉, 이지함은 원래 원님이 되는 것에 별 관심은 없었고, 백성이 안타까워 상소를 올린건 맞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지함은 다시 62세가 되던때 아산현감으로 천거를 받고 부임하게 된다.
여기서 이지함은 걸인청이라는 것을 만든다.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것을 하늘로 삼는다"
아산현감에 부임한 이지함은 아산에 있는 빈민들과 노약자들을 한데 모은다.
노약자와 병자는 짚신을 꼰다. 건장한 청년은 고기잡이를 시킨다. 손재주가 좋으면 수공업을 가르친다.
이를 토대로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빈민을 구제한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직업훈련소 걸인청이다. 가난한 백성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장소를 제공해주는 대신 그들에게 농업, 상업, 수공업등을 가르치고 일하게 만든다. 여기에 들어간 사람들은 보통 3년이면 자립해서 나갈수 있다고 한다.
보통의 그냥 먹을거 주고 살게하는 빈민구제와는 다른 이지함만의 시대를 앞서가는 방식이었다.
특히 1884년 영국이 만든 세계 최초의 사회복지기관 토인비홀보다 몇백년 앞선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아산에 있던 임금에게 진상하는 숭어를 양식하는 곳을 흙으로 덮어 농토로 만들었다고 한다.
늙어서인지 눈에 뵈는게 없었던 것이 이분이랑 비슷하다.
조선과 서양의 차이점.
뭐든지 해서 돈을 벌고 그것을 통해 빈민을 구제한다.
이것이 이지함의 주장이었으나, 이것은 역으로 서양에서 한떄 유행했던 중상주의의 기본 모토였다. 중상주의 역시 국부창출을 통해 국가의 부를 증대시켜 나라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었다.
서양의 군주는 상비군과 관료제를 운용하기 위해선 돈이 많아야 했다. 그만큼 돈을 좃나게 벌어야 했으며, 이것이 국가의 정책이며 왕이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이를 위해 적은 비용으로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코쟁이들의 노력은 효율성의 결과인 기계를 발명해 산업혁명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조선은 양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양반들은 그 땅에서 자신의 월급을 농민에게 받아가면 되는것이었다. 군대 역시 조선시대에는 군역이 곧 의무였다. 돈도 안받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의무였다.(물론 장군들은 다 받는다.)
따라서 조선의 왕들은 많은 재물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도덕적으로 성군이면 족했다.. 그것이 조선시대 유교적으로 올바른 왕의 모습이었다. 굳이 해외진출을 할 이유가 없었으며, 교류에 적극적일 필요도 없었다.
따라서 양반과 농민이 중요했으며, 상인과 공인은 그에 비해 중요하지 않았다.(그렇다고 농민이 무조건 상인과 공인 보고 막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가 폐쇄적이었던 이유다.
이런 조선시대의 사상에서 이지함의 주장이 먹힐리가 없었다. 이지함 역시 큰 틀에서는 조선시대의 생각에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도 조선시대 양반이었기에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것이 이지함과 서양의 애덤스미스의 결정적 차이점이었다.
조선시대의 3대 기인 중 한사람인 이지함. 그러나 그는 당시 기준으로 또라이였지만, 사실 그는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킨 학자였으며, 당대 유닝한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학문성도 인정받을정도로 걸출한 인물이었다.
결론 : 일게이들도 사회로부터 또라이소리를 듣지만, 사실 이지함 같은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이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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