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군이 다시 옥천(沃川)을 장악했어도 신라의 최전선은 관산성(管山城)에서 용봉-마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넘지 못하였을거야. 따라서 백제는 성티산성에서 백제 태자 여창(餘昌)이 주둔하고 있는 고리산성과 식장산성으로 이어지는 보급루트를 관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이러한 백제군의 연결고리를 끊어야만 신라군의 작전이 용이해짐을 신라 지휘부는 판단했을거야.
그 근거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은 우리 역사서가 아닌 일본서기에 전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아.
新羅聞明王親來。悉發國中兵斷道擊破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日本書紀 卷19 欽明天皇 15年 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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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지휘부는 태자 여창(餘昌)의 주력군과 성왕이 지휘하는 연합군의 연결로를 끊고자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일종의 차단을 통한 각개격파를 위한 작전이 진행되는데 여기에 삼년산군(三年山郡)의 비장인 고간(高干)도도(都刀)가 참여하게 되는 것이지. 앞서 언급했지만 말먹이꾼이라고 일본서기에서 비하하는 고간 도도는 삼년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의 정예 기병이라 봄이 적당한거 같盧.
당시 한반도 남부에서 전국구 깡패였던 대가야의 중장기병
왜냐하면 대가야(大伽倻)의 중장기병이 주축이 된 성왕의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선 역시 기병이 대적해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고간(高干)이란 단어는 신라가 지방민들에게 주던 관직인 외위제의 3번째 관직이야. 이 외위제는 총 11관등으로 나뉘는데 한번 살펴보자면 악간(嶽干),술간(述干),고간(高干),귀간(貴干),찬간(撰干),상간(上干),간(干),일벌(一伐),일척(一尺),피일(彼日),아척(阿尺)으로 나뉘어. 특히 간(干) 이상인 간위 관등은 원래 대,소부족장들이 칭하던 간(干)을 세분화 시킨건데, 고간(高干)이였던 도도(都刀)는 외위제의 3번째 관등이므로 나름 ㅅㅌㅊ 치던 중,대형 부족의 간(干)이였지.
다른 말로 쉽게 표현 하자면, 고간(高干) 도도(都刀)는 지방의 유력 호족이였단 소리야. 이러한 유력 호족이 보병 일 리가 없잖盧?
당시 신라 중장기병을 고증한 그림 / Kia 고증 지대로구만~!
그리고 중장기병이나 기병을 담당할 정도라면 고대에서는 어느정도 재력이 있어야 해. 국가가 다 지급해줬을거란 생각은 사실 나폴레옹의 국민군이 창설 되기 전까지는 역사상 어느나라에서도 통용되지 않던 생각이야. 어느정도는 국가가 지원해줬을테지만 거의 대부분은 자비로 사야 되었지. 또한 국가가 지원을 했다고 쳐도 유지,보수비용은 순전히 자비로 충당했어. 이러한 기록과 추측을 통해 고간(高干)도도(都刀)는 삼년산성군의 중장기병이나 이러한 기병대를 이끄는 중,하급 무장이였을거란 추론이 가능해.
무튼 신라군은 일종의 GOP격인 관산성과 이어지는 돌출부 바깥쪽에 삼년산성(三年山城) 소속의 중장기병대를 주둔시키고 관산성까지 연결되는 방어 차단막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것을 일본서기엔 "길을 끊었다"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게 적절 할 것 같盧.
관산성과 구천의 지역도
관산성에서 구천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신라가 차단막을 설치한 모습이 보일거야
현재는 이곳을 말머리 고개라고 불러. 이 지역이름의 유래는 밑에서 서술할께.
이곳 구천(狗川)에서 신라복병에 사로잡힌 백제 성왕의 죽음에 대해선 앞서 다룬바 있듯이, 우리 역사서보다 일본서기가 더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
이는 일본서기 편찬자 중 상당수가 백제 지식인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와 더불어서 백제 멸망후 왜로 건너간 백제 지배층이 백제 역사서를 함께 가져갔을 것으로 보기도 해. 일본서기를 편찬할 당시 이미 백제는 멸망하였기에, 백제 지배층은 왜(倭)의 새로운 상위 계층을 형성하면서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백제의 역사를 함께 기술했다고 보는 거지.
왜(倭) 제 38대 덴노 텐지(天知)
일부 학계에서는 이 텐지천황을 백제 제 25대 왕인 무령왕의 고조카손자(이게 맞는말인가?)로 보는 주장도 있어.
이 주장에서는 곤지왕의 차남(이름불명)이 일본으로 넘어가 오우진 덴노가 되었다는 주장인데...
억측이 난무하는 주장이지만 한번 씹고뜯고 해보면 '그럴싸한데?'란 반응이 나와.
또한 성왕이 무령왕의 차남이며, 장남이였던 순타태자가 일본으로 건너갔단 주장도 있는데
이 주장들은 관산성 전투시리즈가 끝나면 가야-왜,백제-왜의 관계에 대한 글에서 밝혀볼께.
물론 그 과정에서 이미 멸망한 백제보다는 새롭게 몸담게 된 왜(倭)의 텐지(天知)덴노의 명으로 서술하다 보니 천황중심으로 기술했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지?
그렇기 때문에 일본서기는 백제의 신라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녹아 있기에 신라에 대한 서술은 항상 부정적이야. 그런 연유로 해서 백제 성왕을 참수하게 되는 신라의 비장(飛將)이라 불려진 고간(高干)도도(都刀)를 말먹이 노비인 사마노(飼馬奴)로 표현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고 생각 할 수 있지.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 기록화
한국에서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기록으로 인해 일본서기의 내용이 전혀 믿을 수 없다거나 근거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데 이런 배타적인 성향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데 악영향을 미쳐.
왜냐하면 우리 역사서가 전해주지 못하는 일정부분을 일본서기를 통해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상반되는 기록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비교 대조를 하고 숨겨진 뜻을 살펴 봐야 되는거지.
그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전하는 백제 성왕의 최후에 대한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ㅋ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기록에 백제 성왕의 최후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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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성왕32년(554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라고 한다.
三國史記 百濟本記 卷26 聖王 3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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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보기 50으로는 신라를 습격하기 어려워. 어느 미친놈이 50기만을 대동하고 신라군 3만에 뛰어들겠盧??
이에 반하여 일본서기엔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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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父明王憂慮。餘昌長苦行陣久廢眠食。父慈多闕。子孝希成。乃自■迎慰勞。
명왕(明王)은 여창이 오랫동안 행군하느라 고통을 겪고 한참 동안 잠자지도 먹지도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日本書紀 卷19 欽明天皇 15年 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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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에 몰리고 있는 형국에서 사사로운 부자간의 정리를 논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좀 부자연스러워.
물론 태자의 건강을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있는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 성왕이 보기 50으로 이동하였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어.
이 내용의 감춰진 이면을 다시 곱씹어보면, 전쟁 초기 백제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에 대한 승리를 장담한 태자였는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으니 그 정신적 스트레스는 정말 대단 했을거야.
게다가 태자 여창(餘昌)이 이끄는 백제군은 중앙군 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귀족 소속의 부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방군에 왜(倭)군과 대가야(大伽倻)까지 함께 구성되어 있었으니, 젊은 태자 입장에선 불리한 전황속에 빠진 상태에서 정치적 조율이 쉽지 않았을 것이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백제 성왕은 더 우려하고 있었다고 보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겠盧?
이는 비단 태자 여창(餘昌)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어.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이 다시 규합하는 사태로까지도 비화될 소지가 있는 상황임을 성왕은 직감했을지도 몰라.
백제 주력군 본진의 불온한 움직임을 보고 받은 성왕은 사태의 심각성에 해가 지고 있는 저녁 무렵임에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을거야. 그래서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급히 태자 여창의 군영으로 말을 몰았다고 추정해 볼 수 있어.
실제로 거리는 성티산성에서 태자 여창(餘昌)의 본진인 고리산성(古利山城)까지는 20km가 안되는 거리야. 빠른 말로 달리면 2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지.
그렇기에 성왕은 해가 서쪽으로 져가고 있음에도 출발을 강행한 것으로 보여. 아마도 성왕의 머리속엔 급히 태자 여창(餘昌)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 군영의 상황을 점검하고 왜(倭)군과 대가야(大伽倻)군 그리고 귀족들이 이끄는 지방군에 대한 여러 조율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꽉 차 있지나 않았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신라가 성왕이 직접 온다는 말을 듣고 길을 끊기위해 집결하였다는 기록으로 볼때, 성왕의 이동루트가 신라군에 간파 되었다고 판단해 볼 수 있어.
영화 연함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中 부건빌 요격 장면
마치 2차대전때 솔로몬제도를 시찰하러 가던 일본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제독의 정보를 미군이 미리 파악하고 지나가는 길목인 부건빌섬(Bougainville I.) 상공에서 요격한 것과 똑같은 것이지.
즉, 성왕은 성티산성에서 태자 여창(餘昌)의 군영인 고리산성(古利山城)까지는 작전회의차 늘상 다니던 이통 통로였기에 신라의 매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볼 수 있어. 그래서 측근의 소규모 호위 병력만을 대동하고 태자 여창의 고리산성(古利山城)으로 이동하다가 신라 기병에 요격당한 것이 진짜 성왕의 죽음에 대한 이유라고 볼 수 있어.
위키백과에서처럼 태자의 안위를 생각해서 달려가다가 어이없이 참수당했단 소리가 아니며, 또한 "오히려 태자 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에 의해 관산성이 함락된 직후 후방에서 호위병을 이끌고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하여, 내지는 전후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산성으로 오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란 추측은 아주 잘못된 해석이지.
하지만 이러한 추론과 다르게 반대로 보면, 신라는 백제진영의 이동을 한눈에 파악하고 있었던 반면에 백제는 신라군의 이동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성립하는데, 이는 정보력의 부재는 결국 전쟁의 필패를 가져온다는 군사 이론에 부합하는 결과야.
그럼 백제의 영웅왕이였던 성왕의 비극적인 최후를 재구성 해보자ㅇㅇ

관산성에서 내려다 본 구천(狗川)
구천이라 함은 흔히 말하는 실개천의 개천을 한자로 적을때 개구(狗)자로 표현한 것인데 현재는 서화천으로 불리고 있어.
성왕은 굽은벼랑의 현지방언인 (구즌벼루, 구진베루) 밑에서 신라복병에 걸려서 참수된 것으로 전하고 있지.
구진베루의 끝자락 돌아가는 부분이 전사자를 염(殮)했다는 염장터야.
앞서 설명했지만 관산성 서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에 구천이 있으며 구천 옆으로 서화천이 흐르는걸 기억할거야.
성왕의 움직임을 포착한 거칠부는 아마 이 구진베루에 삼년산성 소속의 중장기병대와 기병대를 배치했을텐데, 이 기병대를 이끄는 장수는 고간(高干)도도(都刀)였어. 성왕이 서화천을 따라 올라올 것을 알고 고간(高干)도도(都刀)는 매복했을거야. 위에서 구천지역을 설명했을때의 짤을 기억하는 게이들이면 아마 '구천에서 매복했다면 신라 기병이 급습하면 뒤로 후퇴했으면 되지 않았나?'란 생각을 할거야. 내 추론으로는 구천에 신라 중장기병대가 매복하고 있었고 삼성산(관산성이 있는산)의 남쪽 산등성이 밑으로 신라의 기병대가 매복해서 후방을 급습했을거야. 그래야 퇴로를 막고 성왕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테니까ㅇㅇ
그래서 그 상황을 밑의 짤에 한번 표현해봤어.
서화천을 경계로 북쪽과 서쪽에 각각 중장기병과 기병대를 배치하여 진로와 퇴로를 막았을거야.
성왕은 아무것도 모른체 범의 아귀로 달려가는 상황이였지.
성왕의 마지막 이동 경로와 신라군의 배치
구비구비 흐르는 서화천을 따라 급히 거슬러 올라오는 성왕과 그 휘하의 대가야 기병 50기를 보고 고간 도도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을거야.
맹수는 먹잇감을 노릴때에 작은 기척도 내지 않는 법이잖아?
구천(구진베루)의 끝 서화천(西華川)이 휘돌아 나가는 곳에 현지주민들이 염장(殮場)터라고 부르고 있어. 그 옛날 관산성 전투 당시 전사자를 염을 하던곳이라서 염장터라 불리우는 곳이라고 그 이름의 유래를 전하고 있지.
이 말은 즉, 염장터가 백제 성왕 일행이 신라 매복군에 걸려 들었던 바로 그 장소 였을 것으로 추론 할 수 있을거 같아.
서화천(西華川)이 휘돌아 빠져나가는 이곳을 백제 성왕과 50기의 호위대가 지나는 순간, 그 앞뒤에 매복해 있던 신라의 중장기병대가 습격했을거라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盧? 바로 아래 짤처럼 말야ㅋ
고간도도 휘하의 삼년산성 기병대의 성왕과 대가야 기병 습격
성왕과 그 휘하의 대가야 기병 50기가 염장터를 도는 순간 고간(高干)도도(都刀)가 공격신호를 올리자 구진베루 위에 매복해있던 중장기병대가 산기슭을 타고 내려오며 대가야 기병을 습격하여 앞을 막고, 신호를 듣고 빠른 속도로 성왕의 후미로 달려와 퇴로를 막았을거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우왕좌왕 했을거야.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길은 작전회의차 자주 들락날락 했던 길이였으니 말이야ㅇㅇ
아마 성왕이 이끌고 있던 50기를 효과적으로 포위해서 생포했을려면 고간 도도가 이끄는 기병은 적어도 2배인 100기에 달했을거야.
대가야 기병들이 필사적으로 활로를 뚫을라고 했겠지만, 결국 대다수가 죽고 성왕과 소수의 기병만이 사로 잡혔을거야.
그 이후에는 뭐... 다들 알다싶이 영웅왕의 최후가 기다리고 있었겠지...
성왕의 최후는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에 아주 잘 나타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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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聞明王親來。悉發國中兵斷道擊破。是時新羅謂佐知村飼馬奴苦都〈更名谷智。〉曰。
苦都賤奴也。明王名主也。今使賤奴殺名主。冀傅後世莫忘於口。
已而苦都乃獲明王。再拜曰。請斬王首。
明王對曰。王頭不合受奴手。
苦都曰。我國法違背所盟。雖曰國王當受奴手。
〈一本云。明王乘踞胡床。解授佩刀於谷知令斬。〉
明王仰天大憩涕泣。許諾曰。寡人每念。常痛入骨髓。願計不可苟活。乃延首受斬。
苦都斬首而殺。堀坎而埋。
〈一本云。新羅留理明王頭骨。而以禮送餘骨於百濟。今新羅王埋明王骨於北廳階下。名此廳曰都堂。〉
日本書紀 卷19 欽明天皇 15年 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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