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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글]


1. 고려가 황제국?

http://www.ilbe.com/1190863862


2. 천자국의 축제 팔관회

http://www.ilbe.com/1131420187


3. 조공, 책봉 관계에 대한 고찰 

http://www.ilbe.com/1090250150




4-1. 여진정벌. 눈부신 태평성대 그리고 먹구름

http://www.ilbe.com/1199623348#comment_1206734910


4-2(완결). 여진정벌. 고려의 대반격 여진을 정벌하다






{평화와 갈등, 혼란의 시작}




고려와 여진 양측의 치열했던 대전쟁이 막을 내렸다



여진은 9성을 반환(1109년)받은후 그 거점을 중심으로 폭풍같은 기세로 성장하여 

1115년에 드디어 완안 아골타가 나라이름을 "금"이라하고 황제를 칭한다.





-금태조 아골타의 동상

사본 -아구.jpg


여진이 발흥하기까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앞서 설명했듯 (여진정벌1편참조) 그들은 고구려의 일부였으며 발해의 일부였다. 발해가 망하자 거란과 고려에 의탁하여 

사대 하게되는데 그 발원과 연계성에 관련하여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했을만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반면 거란에게는 형식적으로는 사대하고있지만 그 수탈이 차마 견디기가 어려울정도로 심했다. 




특히 한번은 두어연(頭魚宴) 에서 요나라의 천조제는 아골타를 강제로 사람들 앞에서 옷벗고 춤추게 한적이있었는데,

 


지도자가 겪은 수모가 이러한데 하물며 일반 백성들의 참담함은 오죽했으랴. 




드디어 아골타가 더이상은 참지못하고 칼을 뽑아들어 대항하니 

천운이 따르게 되어 요나라를 멸하고 송의 황제를 포로로 잡아 북송시대를 끝내며 동아시아의 패자로 우뚝서게된다. 

+여진이 금을 세우자 천조제가 70만대군을 동원하지만 마침 요나라에 내부반란이 일어나 병력을 돌리게 되고 금은 군사2만으로 그뒤를쳐 대승을 거둔다 . 

이후 서서히 대세는 금나라 쪽으로 기울게되니 이것이 바로 "호보답강" 전투이다








당시 국제질서는 금나라를 중심으로 개편되어갔으며 동아시아 정세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본 -금.jpg

++금은 송의 수도 개봉을 점령해 휘종,흠종을 포로로 잡아갔다. (정강의변) 이듬해 5월 흠종의 아우 고종이 강남에서 남송을 재건하지만 

남송은 금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여 배상금을 해마다 은25만냥, 비단25만 필을 바쳤다.










고려는 9성반환이후, 예종의 치세아래 평화로운 세상을맞이한다.


먼저 예종은 관학 진흥정책을 펴서 학문과 정치의 토론장인 경연을 활성화 하기위해 청연각(淸讌閣)을 설치하여 학술과 정치발전을 도모하는데

이곳에서는 유학뿐 아니라 다양한 학술과 정책이 토론되었고 아름답고 화려한 시가 낭송되었다. 

또한 유 ,불 ,도 사상의 조화를 이루었으니 고려에 진정한 이상세계가 도래하게된다. 





하지만 


윤관과 의천이 부국강병을 외치며 부각시켰던 신법(新法)은 서서히 수그러 들기 시작하였고 , 지나친 문치주의로 치닫게되니 ...   


불행의 씨가 점점 커지게 되어 마치 송나라의 전철을 밟아가는듯 하였다.






그러던차 예종 10(1115)년 여진의 아골타가 황제를 칭하며 "금"을 세웠고, 요나라가 여진을 토벌하고자 고려에 군대를 요청하지만 


고려는 이를 거절한다


이는 김부식과 척준경의 뜻이었으니 (김부식은 후에 자세히 다룸) 이둘이 상당히 현실적인 통찰력을 지녔음을 알수있다.


발흥하는 여진을 구태여 자극할 필요가없었고 저물어가는 해인 요를 도울까닭 또한 없었으며 

고려의 상황이 남들 밥그릇 싸움에 참견한 만큼 여유가 있는것도아니였다. 









그런데 이듬해인 예종11년에 대뜸 금의 아골타가 '형 대여진 금국황제고 아우인 고려국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오'  라는 서신을 보내온다 

(내용은 여진이 거란과 고려를 대국으로 섬겨오다 거란의 수탈을 못견디어 섬멸하였으니 형제관계를 맺어 화친 하자는 것이었다)



고려조정은 충격에 빠졌다

사본 -ㅊ.jpg


여진이 감히 자신을 형이라 칭하고 고려를 아우라 부르다니 , 하늘이 뒤짚인것이다  






고려의 대신들은 금과의 화친을두고 극렬하게 반대하는데, 이때 어사대의 중승 김부철(김부식의 동생)이 말하기를


<신은 가만히 살펴보건대 한(漢)나라가 흉노(凶奴)에게, 당(唐)나라가 돌궐(突厥)에게 혹은 더불어 신하로 일컫기도 하고, 혹은 공주(公主)를 시집보내기도 하여 무릇 화친할 수 있는 방법을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중국이 오랑캐를 섬긴일을 들어 고려도 금과 형제 관계를 맺어 화친해야한다는 것이였다.  




이에 재추(宰臣)들이 비웃으며 손가락질 하였다.

+재추는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의 재상들을 말함 




고려의 입장은 금과의 형제 관계는 말도안되며  화친또한 불가하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고려는 훗날 형제관계를 넘어 금과 군신관계를 맺게되니 고려 내부의 커다란 갈등의 뿌리가 서서히 곪아가기 시작하고있었다.









{무소불위의 권세가 이자겸}




고려의 이상세계를 건설했던 예종이 등에 종기가 생겨 1122년 4월에 붕어하고, 이어 태자가 즉위하니 17대 인종이다. 


당시 태자의 나이는 14살에 불과했지만 황위를 노리는 여러 세력들을 물리치고 인종을 즉위시키는데 


이자겸이 그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이자겸. 그는 이자연의 손자이자 이자의의 4촌으로 


경원군개국공(慶源郡開國公)이자연은 그의 세딸이 각각 인예태후·인경현비·인절현비로 모두 문종의 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이자연이 최충과 더불어 문종의 양팔로 고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반면



이자의는 반역모의를 하다 발각되어 계림공(숙종)에 의해 제거된다. 

이자겸은 여기에 직접 연루되지 않아 화를 면하였는데 훗날 그딸을 예종의 배우자가 되자 다시 출세길이 열린것이다.




이렇게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황실의 외척으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문종은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외척의 독주를 저지했지만 지금의 인종은 경우가 달랐다.

더군다나 인종이 나이가어려 이자겸이 황제를 대신해 사실상 섭정을 하게된다. 


-천추태후의 섭정 

섭.jpg

+이자겸은 예종의 장인이자 인종의 외조부였다. 고려는 16세 이상이 성인이었으므로 인종은 미성년이였다 .







예종때에 이미 이자겸의 지위는 수직상승하여 사실상 나라의 권력을 한안인과 양분하게 되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예종의 측근 이였던 한안인과 인종을 옹립한 이자겸 세력간의 대립구도가 더욱 깊어진다.

+한안인은 외척인 이자겸 세력은 견제하기위해 예종이 등용한 내시였는데, 고려시대의 내시는 조선과는 격이 다른 엘리트이자 실세였다)

이러한 대립속에 이자겸과 한배를 타게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여진정벌의 대영웅인 척준경이였다. (여진정벌편 참조)

이자겸은 아들을 척준경의 딸과 혼인시켜 사돈관계를 맺는다.





그러던중 한안인 세력이 오늘날 검찰에 해당하는 어사대(御史臺) 에 이자겸의 뇌물수수 의혹을 제기하자 이자겸이 진위 여부를 가려달라 요구했고,

이때 한안인에게 원한을 품었던 최사전이 저들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한다고 귀띔하여 이자겸이 역모를 빙자해 이들을 체포하여 처단한다.


인종 즉위년 12월 이렇게 한안인 세력이 숙청 되자 천하 권세가 드디어 이자겸의 손에 쥐어진다







사실 그 위세는 전부터 이미 하늘을 찌르고있었다. 




인종 원년. 인종이 외조인 이자겸의 예우를 백관과 같이 할수 없다 논의 하여 고하라 하니 회의가 열렸고 어사대 잡단 최유가 주장했다.


' 천자에게 신하가 아닌 자가 셋이 있는데 황후의 부모가 그하나입니다 … 이자겸은 표문을 올릴 때 신하를 칭하지 말며 

연회에서 백관과 더불어 뜰에서 하례 하지 아니하여 바로 임금에게 나아가 절하고 성상의 답례를 받은다음 자리에 앉아야 할것입니다'




이에 김부식 한 고조(유방) 의 사례를들어


'천자의 부친도 존호가 없다면 신하의 예를 취했습니다 하물며 외조부는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반대했다.



고려는 여성의 지위가 높아 친가와 외가의 위상이 비슷하였으나 

남계를 우위에 두고 여계를 하위에 두는 중국 의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김부식은 이를 탐탁치 여기지 않았다.


이에 다행스럽게 이자겸은 물의를 빚지 않고 김부식의 의견을 따랐지만 이미 이자겸의 지위에 대한 인식이 

만조백관의 그것과 같지 않았음을 알수있다.










인종원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1개월간 개경에 머물다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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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과 김부식에 대한 외국인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고려도경은 잘못된 정보와 시각으로 오류도 꽤 보이지만 고려전기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에 매우 소중한 자료라 할수있다.


고려도경에는 중화주의의 시각으로 고려를 송의 제후국으로 보는 시각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고려의 황성을 "왕부"로

고려의 태자를 세자로 고쳐 표현한것등이 그런것이다. 

또한 서긍은 개경의 나성이 낮고 허술해 외적을 막아낼지 모르겠다며 깔보았지만 

그가 고려를 다녀간 지 몇 년후에 조국 송(북송)은 금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그는 

'이자겸은 조용하고 온화하며 현명하고 선함을 좋아해 비록 정권을 잡았지만 왕씨를 높일줄알았으니 현명한 신하이다. 

그러면서도 이익을 좋아하고 , 토지와 저택을 대규모로 경영하며, 사방에서 뇌물을 받아 썩은 고기가 수만 근이니 

나라사람들이 그를 비천하게 여겨 애석한 일이로다' 라고 하였다


이자겸의 인물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 사치스러움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예부시랑 김부식은 글을 잘짓고 고금을 알아 학사들로부터 인정받아 그보다 뛰어난 자가 없었다

부식과 그동생 부철의 이름은 송의 문장가 소식과 소철 형제를 흠모하여 지었다 


하였다. 



서긍은 기록에서 힌트를 얻을수있는 힌트로  


이자겸을 조용하고 현명하며 사치가 심하다고 한것으로보아 겉을잘 내보이지 않는 음흉함권력욕을 지녔음을  


김부식은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중국의 문화를 흠모하였음을 


마지막으로 비록 이자겸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있을지라도 역시나 승자의 역사는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것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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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2년(1124


이자겸은 "중서령 영문하사 영상서도성사 판이부사 판병부사 판서경유수사 조선국공" 에임명된다. 


또한 그를 위해서 숭덕부 를 설치해 관원을 배치하고 그의 거처를 의친궁이라 하였다.



조선국공(朝鮮國公).. 이는 단순한 제후왕(친왕)으로 봉해졌다고 볼것이아니였다


이자연,이호(이자겸 부)가 친왕의 작위를 받은데 이어 이자겸은 조선국공이 되었다 


역사상 이런 예가 여럿 있지만 , 

삼국지에서 조조가 위국공으로 봉해져 종국에는 그아들에와서 나라를 뒤엎는 경우와 비슷하다 할수있다.








이자겸이 조선국공을 칭한것은 당시 구월산 지역에서 단군이 숭배되었고 이 지역이 단군의 땅이라고 인식되었는데 

이자겸 조상의 고향이 바로 신주, 즉 구월산을 지닌 지역에 거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이자겸은 자신을 단군 내지 조선의 후예로서의 칭함에 따라 더욱 권위를 높아지게 되었다. 



단군의 후예를 칭한 이자겸의 권세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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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산은 황해도 신천군 용진면과 은율군 남부면·일도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인종은 이자겸을 다른 신하와 같이 대우할수 없다며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경" 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또한 이자겸의 생일은 인수절(仁壽節)이라 불려졌는데, 생일에 "절"을 붙일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천자 또는 태후,태자뿐이였다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가 추밀재상에 오르고, 다른아들 이공의 , 이지언, 이지보, 이지윤,이지원도 관직에 진출했으며 , 

친인척들도 관직에 대거 진출하여 요직을 차지했다. 

 


여기에 이미 척준경이 고위재상인 평장사로, 그동생 척준신이 국방부 제2장관인 병부상서로 군권을 장악하였으니 



사실상 이자겸은 이미 고려의 지존인것이였다. 






이제 그가 바라는것은 오직 황제의 자리였음이라


크기변환_옥좌.jpg






하지만 장성해 가는 인종은 더이상 이를 두고만 볼수 없었다. 


인종의 측근인 내시 김찬(김안), 안보린 등은 지채문의 증손자인 지록연, 상장군 최탁,오탁등을 끌어들여 

급기야 쿠데타를 모의하게되는데.


과연 인종은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을 제거하고 국운을 바로세울수 있을까 아니면,,

+지채문은 거란전쟁때 현종을 끝까지 보호했던 충신이다





다음편은 ..


(2){불타는 황궁. 이자겸의난}


“불타는 황궁..그리고 고려의 자주성을 둘러싼 척준경과 윤언이(윤관의 아들)의 대립”











3줄요약:


1.여진전쟁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상황  

2.예종과 고려의 발전, 그리고 후퇴 

3.이자겸의 득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