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 소아과 사태가 시끌시끌한데,
몇 번 글을 쓸 생각이 들었다가도 다시 접었습니다.
사건의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모두 알지 못하는 제가 누가 옳고 그른지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비슷한 논쟁이 생길 때마다 중환자 의사로서 마음에 걸리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위험을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가.
최선을 다했지만 나쁜 결과가 생겼을 때, 그 위험은 누가 어떻게 나누어 감당해야 하는가.
결국 제가 느끼는 현실적인 문제는 이 두 가지입니다.
1. 설명의무는 어디까지인가
위험을 자세히 설명드린다고 환자분이 위험을 온전히 이해하시는 건 아닙니다. 의사도 잡음 많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일하기 때문에, 합병증 확률을 정확한 숫자로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위험을 나열하면 꼭 필요한 시술도 거부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위험이 있지만 이런 이득 때문에 합니다”를 제대로 납득시키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듭니다. 그 시간을 보장하려면 지금보다 느리고 비싼 진료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설명해야 법적으로 충분한지는 현장의 의사도 모릅니다.
2. 최선을 다하고도 생기는 악결과의 위험은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현장에서는 최선의 처치에도 나쁜 결과가 생각보다 자주 옵니다. 그리고 그 악결과는 거의 반드시 소송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집니다.
어느 직업이든 최선을 다하는 건 같습니다. 다만 생명과 가까운 분야일수록, 최선을 다하고도 배상책임을 질 수 있다는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위험을 나누는 방법은 결국 보험이고, 그 보험료는 어디론가 전가되어야 합니다. 바이탈 분야의 보험료는 높을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을 의사 개인에게 지울지 의료비에 반영할지 정해야 합니다.
여기에 형사책임의 범위까지 모호하면, 바이탈을 맡은 의사에게 모든 악결과는 잠재적인 소장이 됩니다.
이 질문들은 법정에서만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답을 얻지 못한 채 매일의 진료 현장으로 돌아옵니다. 의사에게는 방어진료와 소송에 대한 두려움으로, 환자에게는 필요한 의료를 제때 받기 어려운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 사이 응급실은 점점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잠 못 자고 집에 못 가며 일하는 과들을 보면, 그저 존재만이라도 해 달라는 마음으로 각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수술 직후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환자분을 잃었습니다.
보호자께 돌아가실 수 있다고 몇 번이나 설명드리고 들어간 수술이었습니다. 그래도 실제로 돌아가시고 나면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항생제를 며칠 더 쓰고 수술했으면 나았을까.
그런데 지금 안 하면, 며칠 뒤 승압제가 오른 상태에서의 수술이 더 위험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고민 옆에는 다른 걱정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법정에 가면 이 판단들이 경과기록 한 줄 한 줄로 평가받게 될 거라는 걱정입니다.
패혈증 사망률 20~50%, 진균 패혈증은 40~80%.
이렇게 범위가 넓은 환자분들을 매일 만나다 보면, 제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 은퇴할 때까지 몇백 명분은 쌓일 거라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생깁니다.
중환자실 의사로서 환자분이 사시는 게 당연히 기쁩니다. 그 기쁨으로 이 일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대목동병원 사건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사명감이 높았을 분과의 의사들이 대법원까지 가서야 무죄를 확정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법은 잘 모릅니다. 다만 일선 의사로서 ‘저 상황이면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미리 알거나 막기 어려웠을 텐데’ 싶은 부분들이 법 앞에서 한 줄씩 평가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이 수사를 받지 말았어야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네 명의 아기가 숨졌으니 수사는 당연히 필요했습니다.
다만 포토라인보다 먼저, 앞서 말씀드린 설명의무의 모호함과 배상책임 분산의 부재, 즉 ‘시스템’이 그 비판과 논쟁의 맨 앞에 서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로, 별도 비용 없이 처리되던 영역이었습니다. 이제 사회가 그 부분의 비용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이탈을 ‘유지’하는 데 얼마가 더 필요한지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미용 쪽 수익을 줄여 바이탈에 주면 된다’ 같은 단순한 계산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중환자를 살리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은 생각보다 크게 체감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응급투석 한 번의 수가가 약 18만 원인데, 응급투석을 위해 간호사 한 분을 부르는 일당은 30만 원 수준입니다.
사실 지금의 상황 자체가 이미 사회가 합의해 온 결과가 아닐까 하는 무력감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3. 마무리하며
항상 열심히 설명하려고, 무엇보다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은퇴할 때까지 그래도 법정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보호자가 몇 분 안 되시기를 바라며 삽니다.
조금 더 바라기는
평균과 표준편차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제가 있어서 그래도 몇 분 더 사시기를 바라며 삽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