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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넘어《철학적 자유주의》… 즉, 자유사상 테두리 속《계몽된 보수》와《합리적 진보》가 공존-경쟁-보완하는 체제

알타이21
0 2026-10-09 16:21:04

《사회민주주의》넘어《철학적 자유주의》…
즉, 자유사상 테두리 속《계몽된 보수》와《합리적 진보》가 공존-경쟁-보완하는 체제




 
  • 류근일 논설 고문
  •  전 조선일보 주필
  •  
뉴데일리 
《1993》으로 존재한 세월 속의 완전단절잘대고립에서 찾은 생명의 환희정치와 이념도 성장하고 성숙
 
  • ▲ 감옥생활 7년 4개월은 나의 철학-신념-이념 모두를 살찌우고 성숙시켰다. ⓒ 삽화 = 챗GPT
     
    ▲ 감옥생활 7년 4개월은 나의 철학-신념-이념 모두를 살찌우고 성숙시켰다.
    ⓒ 삽화 = 챗GPT


    6. 젊은 날의 성장통 - 하(下) 
     
    감옥생활은 내면의 성장-성숙을 위한 역설적 호기(好期)였다. 
     
    나의 무엇이 잘못되었던가? 
    나는 그것을《자신의 신념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라, 결론 내렸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뭘 안다고 그렇게 열불을 냈던가?  
     
    나는 이 정신적 자성(自省)의 길을 1968년 출옥 직후 월간중앙 12월호~1969년 1월호~2월호에 연재했습니다. 
    그 옥중기의 작은 일부를 소개합니다.  
     
    1967년 4월 20일. 
    아테네 시가는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轟音)으로 평화로운 잠에서 깨어났다. 
    놀라움으로 눈이 둥그레진 시민들 눈앞에는 그리스 육군 탱크부대가 삼엄하게 들이닥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동조자들의 전복 음모로부터 조국을 구출하기 위해 은인자중하던 군은 감연히 정의의 칼을 들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파파도풀로스 대령의 음성에는 오직 자신만이 그리스를 구할 수 있다는 사명감이 넘쳐흘렀다.  
     
    이 순간 나는《악!》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퍼뜩 떴다. 
    그리스 군부 쿠데타 소식을 전한 시사주간지《타임》의 기사를 읽다가 깜빡 잠에 떨어졌던 나였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가 나는 이 조그만 공간이 안양교도소 4동(棟) 상(上) 독방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발견했다.  
  • ▲ 1967년 4월 28일자《타임》기사 화면 갈무리. ⓒ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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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4월 28일자《타임》기사 화면 갈무리. ⓒ Time아, 6년! 
    내가 감옥에 갇힌 지도 어느덧 6년이 흘렀구나. 
    앞으로도 2년을 여기서 더 살아야 하는구나. 
    이 안에서 봄바람과 가을비를 겪은 지 벌써 6년! 
     
    나는 5.16 군사 정변이 났을 때 본능적으로 부산으로 날랐다. 
    도망자였다. 
     
    왜 꼭 부산엘 가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피난살이 3년을 통해 정들은 부산 앞바다의 새큼한 해풍, 멍게, 해삼의 시원한 맛이 갑자기 그리워졌던 까닭일까?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장발장의 노련한 도망 행각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잡힐 때까지 그냥 휘적휘적 다니는 것이다. 
    그 덕에 멋진(?) 여행이나 하고. 
    그다음은? 
    교도소겠지. 
    긴 기적 소리를 뽑으며 부산행 야간열차는 어둠 속을 끝없이 달린다.  
     
    부산 사돈댁에 10일간 머물렀다. 
    13살 때 가던 태종대엘 다시 찾아 해녀들에게서 멍게를 사 먹었다. 
     
    그리곤 다시 서울에 왔다. 
    젊은 교수 댁엘 찾아갔다. 
    뭣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려고. 
    그분은 군인들과 접촉이 많은 행정학 교수였다.  
     
    그길로 나는 그분을 따라 서울 을지로 입구에 있던 당시 치안국 청사로 가 자수(自首)했다. 
    더는 도망 다닐 능력이 없었다. 
    교수님은 훗날 5공 청와대 고위 공직자로 일하셨다. 
    먼 훗날 재회해, 허허 웃으며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민통학련》사건 피고인 학생 9명은 구속된 지 한 달 반 만에《혁명재판소》에 기소되었다. 
    모두가 24세 미만의 젊은이들. 
    자유당-민주당-반혁명 군인들과 한 묶음으로 서슬푸른 계엄군재(戒嚴軍裁)에 섰다.  
     
    서울구치소로 이송되던 날 우리 피고인 가족들은 우리를 태운 버스 뒤꽁무니에 매달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자식이라고 낳아서 살을 깎아 먹이듯이 키워 대학에 보냈더니 겨우 시키는 일이 옥바라지? 
    나와 동료 피고인들은 혁명재판에서 최고 15년, 최하 10년 형을 받았다. 
     
     
    ■ 민통학련 우리는 누구였나?
     
    그렇다면《민통학련》우리는 과연 누구였기에 그런 중형을 선고받았나? 
    나는, 우리는 누구인지를, 군사재판 아닌 자신의 입을 통해 변호해야겠다. 
    우리는 과연《반국가 용공(容共) 분자》일 뿐이었나?  
     
    나는 당시 학생운동이 모두 잘했다고 우길 생각은 전혀 없다. 
    419의 자유민주주의를 가능한 한 해보려 애썼을 제2 공화국 장면 정부를 우리가 궁지에 몰아넣은 셈이 되었기에, 그 부분도 미안하다.  
     
    학생운동이란 원래 정치가들이 하는 것과는 달리, ★ 급진적인 로맨티시즘 ★모험주의 ★설익은 조급성이 지배한다. 
    학생들은 이상주의자인 그만큼, 물불 가리지 않는 단점이 있다. 
    이에 대해서도 자괴한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우리는 일본의《전학련(全學連)》, 프랑스 5월 학생 봉기의 주동자들, 미국 신좌파 같은《트로츠키주의-무정부주의-블랙파워》와는 달랐다. 
    철저한 합법 노선, 온건 진보,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을 뿐이다.  
     
    공산당 전체주의 일당독재-병영 사회-폭력혁명-개인숭배-문화통제-언론 통제엔 단호히 반대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나는 서울구치소-기결감-마포교도소를 거쳐 안양교도소에서 내가 오랜 기간 머물 장소로 갔다. 
    안양교도소 징벌동(懲罰棟) 상층에 특별히 준비된 진공관 같은 독방. 
    감옥의 밀폐된 독방은 인간을 서서히 부식(腐蝕)한다. 
    영혼은 마모되고 인식은 몽롱해지고 두뇌는 둔탁해진다.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0.8 평짜리 조그만 공간이 나에게 주어진 우주 속 공간의 전부다. 
    이름도 성도 탈색한 채《1993》이란 번호만이 꿈틀거리는 생명체, 나를 표상한다.  
     
    비(非)존재가 존재를 집어삼키려 할 때, 존재가 그 존재함을 악착같이 외치는 데서 문명이 지속할 수 있다고 한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란 책에서 한 말이다. 
     
    살아있는 것을《당연하게》봐 왔던 나에게 이것은 뜻밖의 일깨움이었다. 
    존재하는 것이《자연스러운 것》아닌, 각별한《용기의 산물》이라니! 
    나는 책을 표지가 잘 보이는 곳에 놓고 오며 가며 보았다. 
    깜깜한 독방에서 나는 어떻게《존재의 용기》를 찾을 것인가?  
     
    창살을 통해 보이는 조각난 밤하늘엔 별들이 은가루를 뿌린 듯 찬란했다. 
    아! 별이여, 저것일까? 
    칸트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마음속 도덕률을 최고의 무상명법(無上命法)이라 했다. 
    그러나 그것도《지금의 내 실존》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는 벽과 벽으로 사방이 막힌 비좁은 독방에서 내 존재의《완전 단절》을 발견했다. 
    객관세계에 관한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이 아무런 설명도 해 줄 수 없는 이《절대 고립》!  
     
    객관세계에 대한 인식보다 지금의 이 상황, 이 실존을 설명할《그것》은 무엇일까? 
    나는《그것》을 찾아 관심을 외부 아닌 내부로 향했다. 
    벽은 단절의 표상이면서, 그것을 뛰어넘을 발판이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서도 자기 영혼을 구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예수님은 물으셨다. 
    벽은 나를 향해 내 존재의 근거를, 밖 아닌 안에서 구할 것을 요구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상태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회귀(回歸)였다. 
    자기 영혼으로 가는 귀향이었다. 
    생명 위에 걸친 온갖 장식품과 의상을 모조리 벗어버리는 환원(還元)!  
     
    현세적인 야심-욕망-기대 등 모든 후천적 소유물을 깡그리 포기하고 남는 것은, 할딱거리는 나의 생명뿐이다. 
    이것만이 가장 원초적이고 본원적인 나다. 
    이런 포기가 수행될 때 더 이상의 절망은 없다. 
    더 절망할 건더기가 없을 때 무슨 절망이 더 있다는 것인가?  
     
    절망이 쏟아져 버린 내 생명체의 반응을 나는 조용히 관찰했다. 
    뭘까? 
    한마디로, 까닭 없이 솟아오르는《환희》였다. 
    이것이었다! 
    이 처참한 상황에서도 내가 존재할 용기를 느낄만한 마지막 한 가닥 이유! 
     
    창살을 통해 보이는 푸른 하늘, 눈 부신 태양, 마당 구석의 잡초, 저녁노을, 참새들의 지저귐, 이 모두가 다 환희의 이유였다. 
    아, 캄캄한 함정 속에서 생명의 기쁨이 솟아나다니! 
     
    이 기쁨으로 나는 존재할 이유가 생겼다. 
    살아보자. 
    생명은 위대한 것이다. 
    이론적 개념과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오직 내 생명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자! 
    가슴이 뚫렸다. 
     
    고난은 인간을 퇴화시킬 수도 있고 성숙시킬 수도 있다. 
    비록 내 건강은 해칠 수 있었어도, 고난 속 여정(旅程)은 나의《정신의 왕국》을 풍성하게 살찌웠다. 
     
    정치와 이념에서도 나는 이 기간 성장하고 성숙했다. 
    나는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철학적 자유주의자(philosophical liberalist)》로 재탄생했다. 
    《자유사상(Esprit Forte)》의 테두리 안에서《계몽된 보수》와《합리적 진보》가 공존-경쟁-보완하는 체제, 이것이 나의 옥중 7년의《정치적 결론》이었다. 
     
    나는《자유주의자》다. 
     
     
    ■ 마침내 찾아온 석방의 그날
     
    세월이 지루하게 지나가던 어느 날, 1968년 8월 13일. 
    온 교도소 사람들이 동아방송 정오 뉴스를 들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학생 류근일 군이 7년 4개월 만에 8.15 가석방으로 옥문을 나섭니다.》
    옆에 있던 젊은 교도관이 기뻐해 주었다. 
     
    《자, 류근일 씨, 고생 많이 했소. 어서 옷 갈아입고 나오시오. 
    밖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석방. 
    그렇다, 석방이다. 
    어머니와 장래의 아내 이정민 씨와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저 바깥세상으로 나는 돌아가는 것이다. 
     
    긴 회랑을 빠져나가면서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의 수상 마누엘 아사냐 디아스가 한 연설의 한 토막을 상기했다. 
     
    《횃불이 다음 세대의 손으로 옮겨졌을 때, 만일 그들의 피가 또다시 들끓고 스페인적 기질이 다시금 불관용과 증오와 파괴로 질주하거든, 그들로 하여금 오늘 이 마당에서 쓰러져 묻힌 모든 이들의 메시지를 기억하게 하라!  
     
    그들은 지금 조국의 흙 속에 감싸인 채 아무런 증오도 회한도 없이, 별빛처럼 그윽한 광망(光芒)과 더불어 후대인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평화, 연민, 용서(Peace, Pity, and Pardon)를!》
     

     
류근일 논설 고문 / 전 조선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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